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영적 황무지 (삼상 3:1-14)

첨부 1


영적 황무지 (삼상 3:1-14)

우리가 믿음이란 단어를 사용하는 빈도만큼 믿음이 뭔지를 제대로 알고 사용하는 것 같지 않습니다. "아무개는 믿음이 좋다"라든가 "믿음으로 살라"와 같이 믿음이란 단어를 많이 쓰지만, 정작 믿음이 무엇이고, 믿음이 어떻게 오고, 믿음을 어떻게 사용해야 되는지를 물어보면 대답을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믿음을 마치 초능력 같은 것으로 생각하는 듯 합니다. 수퍼맨이 초능력을 갖고 있듯, 사람이 믿음이 있으면 임의로 그것을 쓸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 같은데, 실제 믿음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다시 기본적인 차원에서 믿음은 무엇이고 믿음이 어떻게 오고, 그리고 어떻게 사용해야 되는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믿음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먼저 일반적인 믿음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할 때, 이것은 일반적인 믿음에 해당합니다. 일반적인 신뢰, 의지를 표현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것을 믿고, 하나님의 성품을 믿고,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내가 믿고 또 의지함은 내 모든 형편 잘 아는 주님, 늘 도와주실 것을 나는 확실히 아네", "이제껏 내가 산 것도 주님의 은혜라, 또 나를 장차 본향에 인도해 주시리"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성품과 속성에 의거하여 과거에 나를 도와주셨던 것처럼 미래에도 나를 도와주실 것을 의지하고 신뢰하는 의미로서의 믿음입니다. 이와 같은 믿음도 중요하고 대체로 우리가 믿음으로 산다고 할 때 대체로 이러한 믿음을 가리킵니다. 우리의 영혼을 구원하는 믿음도 이러한 믿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 특별한 믿음이 있습니다. 이러한 믿음은 일회적이고 특별한 상황에 해당하고, 은사적인 믿음입니다. 특별한 상황에서 하나님이 나에게 특별한 구체적인 약속을 주셨을 때 그 약속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믿음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는 말이 이 믿음에 더 가깝습니다. 

이러한 믿음은 일반적인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과는 다른, 하나님이 무엇을 특별히 약속하심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할 수 있다(God can do it)” 이것은 일반적인 믿음이라면, "하나님은 무엇을 하실 것이다(God will do it)", 여기에 한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이 그것을 지금 하실 것이다”, 이렇게 믿는 데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두 번째가 특별하고 구체적이며 기적을 가능하게 하는 믿음이에요.

문둥병자가 예수님께 찾아와서 "주님 원하시면 저를 깨끗게 하실 수 있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여기 두 가지를 말했는데, “주님이 원하신다면(if you are willing)”, 주님의 의사에 대해서 물어봤습니다. 그러면 “나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You can)”, 그러니까 주님이 깨끗케 할 수 있는 것은 알지만 과연 지금 나를 깨끗케 하실지에 여쭤본 것인데, 예수님이 “내가 원한다(I am willing)”고 답하실 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이러한 특별한 믿음은 사람의 의지로 얻을 수가 없고 오직 하나님의 구체적인 약속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믿음이 들음에서 난다는 말은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들을 때 믿음이 발생하는 뜻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믿음의 사람들은 그냥 일반적인 믿음을 갖고 있었던 것이 아니고, 모두가 구체적인 상황에서 하나님이 그들에 주신 구체적인 약속으로 말미암아 믿음을 갖게 된 인물들입니다.

아브라함의 경우에, 그의 몸이 죽은 자와 방불하였지만, 하나님이 “하늘의 별처럼 많은 후손을 너에게 주리라”고 약속하신 것을 믿고,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었습니다. 야곱의 경우에, 하나님이 그에게 약속으로 주신 "내가 너 누운 이 땅을 너와 네 후손에게 영영히 주리니 너는 동서남북으로 편만할지며 내가 너에게 약속한 이 모든 것을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이 말씀을 믿고 그것이 야곱의 믿음이 된 것입니다. 모세 또한 자신의 의협심만을 가지고 이스라엘 백성을 구하겠다고 덤빈 게 아니고 하나님이 구체적으로 그에게 명하셨습니다. “너는 애굽에서 내 백성을 건져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할지라." 이 약속을 믿고 모세가 믿음으로 그 어려운 일을 이룰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경엔 위와 같은 사례가 수도 없이 많습니다. 이 모든 사람들은 보편적인 믿음을 가졌던 것뿐 만 아니고 구체적인 상황에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듣고, 그 들은 것이 그들을 믿음의 사람으로 만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을 갖는 것은 그냥 진공상태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우리 삶의 구체적인 상황에서 믿음을 갖고 간수하는 것이기 때문에, 믿음이란 우리의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성립되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중 어떤 분들은 "왜 나에겐 이런 일이 없습니까?", "왜 하나님은 나에게 구체적인 약속을 주시지 않습니까?” 라고 묻는 분들이 계실 수도 있습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가능한 이유가 있습니다.

첫 번째로 하나님이 가장 최근에 주신 말씀을 믿지 않고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더 이상 말씀하시지 않고 침묵하시는 경우입니다. 군대에서 이러한 지시 체계를 따릅니다. 군대에서 새로운 지시 사항이 없을 때는 가장 최근의 지시가 유효합니다. 새로운 지시가 올 때까지 가장 최근의 지시를 순종하면 됩니다. 마찬가지로 신앙 생활에서도 하나님이 새로운 지시를 주실 때까지 가장 최근에 주신 말씀을 믿고 따라야 되는데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새로운 말씀이 오지 않습니다.

제가 설교를 준비할 때 이것을 자주 경험합니다. 하나님이 이미 설교 아이디어를 주셨는데 제가 그걸 선뜻 받아들이지 않고 주저할 때 그리고 새로운 설교거리를 찾으려고 할 때 하나님이 아무런 영감도 주시지 않습니다. 그럴 때 가장 최근에 주신 감동으로 되돌아가서 그것을 받아들이고 묵상하노라면 처음에는 깨닫지 못했던 많은 지혜가 담겨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합니다. 이처럼 이미 주님이 말씀을 하셨는데 내가 귀담아 듣지 않은 게 아닌지 되돌아 봐야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이 나에게 아무런 특별한 약속도 주시지 않는 것은, 내가 오랫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여쭤보지도 않았고, 하나님을 가까이 하지 않고, 하나님과 교제하지 않고, 하나님의 관심사가 내 관심사가 되지 않고, 마음으로부터 하나님을 멀리했을 때입니다. 그런 경우에는 아무런 교제도 없고, 대화도 없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적 황무지와 같은 것입니다. 먹을 양식이 없어서 황무지가 되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해서 황무지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절에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영적인 황무지 현상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했습니다. 듣는 사람이 없었어요.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영적인 상태가 이러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왜 영적인 황무지가 발생하느냐.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도 없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려고 하지도 않고 설령 알려주시더라도 순종할 의지가 없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영광 받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시험하듯이 내게 한번 말씀해 보시오, 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뜻을 말씀하셨는데, 우리가 순종할 의사가 없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이 당신의 뜻에 대해 관심도 없고 순종할 의사도 없을 때에는 하나님도 섣불리 당신의 뜻을 말씀해주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회개해야 됩니다. 마음을 돌이켜야 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떠나간 것을 회개하고 오랜 기간 동안 성령을 섭섭하게 한 것을 회개해야 됩니다. 성령을 슬프게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사람이 성령을 슬프게 할 경우, 성령이 우리 안에 침묵하십니다. 성령이 안 계시는 것은 아니지만 성령이 위축이 되어 당신의 능력을 나타내지 않습니다. 우리가 성령을 무시하고, 영적으로 무지하고, 무관심한 것을 회개해야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무엘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할 때 엘리 제사장이 그에게 뭐라고 이르냐면 “주님이 너의 이름을 부르시면 이렇게 대답하라, 주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우리가 약속의 말씀을 들으려면 사무엘처럼 대답해야 되는 것입니다. “주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듣겠다는 말은 그냥 귀를 기울이겠다는 뜻 뿐만 아니라 순종하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사무엘이 자기를 일컬어 ‘주의 종’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나’라는 말보다는 우리 자신을 ‘주의 종’, ‘주의 여종’이라고 불러야 됩니다. 그건 목회자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주의 종입니다. 우리가 스스로를 주의 종으로 여기지 않기 때문에 늘 우리의 주장만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에 주님이 주님이고 우리는 주의 종이에요. 그래서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라고 해야 합니다.

이런 식으로 영적인 부흥이 일어날 수 있는 조건은 깊은 회개와 헌신입니다. 듣겠다는 말은 헌신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매일 시간을 정해서 하나님 앞에 기도를 하되 무엇을 주장하려고 하기 전에 먼저 깊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헌신을 해야 됩니다. 하나님이 무슨 요구를 하시든지 순종하겠다고 다짐을 해야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둑이 터져서 물이 쏟아져 흘러나오는 것처럼 지금까지 하나님이 침묵하신 것이 이상할 정도로 하나님의 말씀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니엘서를 보면 천사가 다니엘의 기도에 응답으로 와서 "네가 하나님 앞에 겸비하기로 결심하던 첫 날부터 네 말이 들으신 바 되었다"고 했습니다. 네가 하나님 앞에 겸비하기로 결심하던 둘째 날도 아니고 첫째 주도 아니고 첫날부터 네 말이 들으신 바 되었다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우리 기도를 들으시지 않습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 겸비하면, 겸비하기로 결심하면 첫 날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그래서 그 결과가 무엇이냐?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을 주시기 시작하면 그 말씀을 들을 때에 믿음이 생깁니다. 들음으로 믿음이 생긴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제가 말씀 드린 두 번째 종류의 믿음, 은사로서의 믿음, 특별한 능력을 가능하게 하는 믿음인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에는 여러 가지 속성이 있습니다. 첫째로 믿음은 응답을 요구합니다. 그냥 들어놓고 그걸 벽장에 보관하는 것이 아니고 테니스 게임처럼 하나님이 공을 쳐서 우리 코트 쪽으로 공이 보내시면 내가 그 공을 맞받아 쳐야 됩니다. 순종과 응답으로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받았으면 “아멘, 주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고 받아쳐야 됩니다. 그래야 주님이 계속해서 그 말씀을 우리 코트 쪽으로 보내주십니다. 응답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그 믿음을 도전하는 일들이 생겨납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을 떠난 후에 아말렉이 그들을 대적한 것처럼, 사람이 믿음을 갖게 되면 그 믿음을 반대하고 그 믿음을 싫어하고 그 믿음에 대적하려는 도전이 오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믿음을 시험하여 의심 하게 만드는 것인데, 이럴 때 뒤로 물러나면 안됩니다. 뒤로 물러나면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습니다. 그럴 때일 수록 더 주님을 가까이 하고 믿음을 간수하고 그 믿음을 일깨울 수 있도록 기도하고 예배 드리고 찬양하고 말씀을 묵상해야 합니다. 이렇게 할 때에 도전 앞에서 믿음이 더 강건해지고 믿음이 더 힘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세 번째로는 우리가 미약한 자로 남지 말고, 강하고 담대해야 됩니다. 그게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믿음을 얻는 것과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은 별개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믿음을 얻었지만 여전히 미약한 사람으로 남기 때문에 믿음의 사람으로 활동하지를 못합니다. 아기와 같습니다. 아기들은 엄마가 안 보이면 불안하지요. 엄마가 곁에 있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확인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유모차를 보면 옛날에는 아기가 앞을 바라보게 했는데, 요즘에는 오로지 엄마만을 바라보게 뒤를 보고 앉게 만들었어요. 아기를 데리고 밖에 나가면 아기도 좀 밖을 보게 해야지, 엄마만을 보게 만들었어요. 여러분, 이것은 아동으로 하여금 엄마만을 의존하도록 부추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동이 소년이 되면 엄마가 같이 가지 않아도 스스로 학교도 갈 수 있고, 물건을 사 가지고 올 수도 있고 심지어 외국에 비행기를 타고 다녀올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엄마가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고 어른이 돼 가는 것입니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어른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늘 우리 손을 잡아주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보이지 않아도 함께 계심을 믿고 골짜기로 내려갈 수 있어야 됩니다. 다윗이 그랬고, 에스더가 그랬고, 모든 믿음의 인물들은 주님이 함께 계시는 것을 믿고 위험의 골짜기로 내려가서 하나님이 계시는 것을 증명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고, 하나님의 속성을 느낄 수가 있고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믿는 게 어려운 게 아니고 안 믿는 게 더 어려워요. 믿으면 손해 보는 게 아니고 안 믿을 때 대가가 더 많아요. 인생의 모든 황무지는 영적 황무지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회복은 영적인 회복에서 비롯됩니다. 영적인 황무지를 우리는 극복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회개하고 기도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고 순종해야 됩니다. 

"의지하고 순종하는 길은 예수 안에 즐겁고 복된 길이로다." 할렐루야.
 (김영준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추천인 1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