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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 그리스도의 깊이와 넓이 (마 5: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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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의 깊이와 넓이 (마 5:17-20)

제가 고등학생이었을 때 학생부 전도사님이 성경을 가르치시면서 ‘역사적인 예수’라는 단어를 사용하셨습니다. 저는 그 때 그 단어를 처음 들었습니다. 그런데 저의 첫 느낌이 좀 불편했습니다. 

마치 성경의 기록을 불신하는 사람이 사용하는 단어처럼 들리고 얼마나 성경의 기록이 비역사적이라고 생각하면 굳이 역사적 예수라는 말을 쓸까라고 생각했습니다. 이거야 말로 자유주의 신학을 표방하지 않는다면 쓸 수 없는 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수많은 세월이 흘러서 제가 목사가 되고 성경을 연구하고 연구할수록 ‘역사적 예수님’에 대해서 생각하는 제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신학자들이 왜 역사적 예수에 대해서 말하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이 어떠한 책이냐 하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성경은 신문기자가 기사를 쓰듯이 어떤 사건을 보고하기 위하여 쓴 문서는 아닙니다. 신약성경은 그냥 fact를 나열한 책이 아니고 사도들의 믿음의 고백이고 나아가 읽는 사람들로 하여금 믿을 수 있도록 돕기 위하여 쓴 책입니다. 

요한복음 20장 31절 말씀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라’ 그러다 보니까 신약성경의 기록이 원래 예수님과 얼마만큼 정확하게 일치했을까를 묻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오늘 본문과 같은 말씀을 읽는 사람이라면 그런 질문을 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의 가르침에 익숙한 사람이 이 본문을 읽을 때 약간 고개를 갸우뚱 하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종교개혁 이후에 복음주의 개신교는 바울신학에 의거하여 사람이 의롭다함을 얻는 것이 율법의 행함으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다고 배웠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이 그것을 반박하시는 것 같은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이 구절은 신약성경에서 제일 어려운 구절중의 하나입니다.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사람, 이것은 누구를 염두에 둔 것이냐? 특정인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니냐? 어떤 신학자들은 마태가 사도 바울을 염두에 두고 이 구절을 썼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마태가 당시 기독교에 영향력을 많이 행사하던 사도 바울을 견제하기 위하여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여기에 포함시켰다는 주장입니다.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신약성경을 기록한 저자들 간에도 얼마간의 견해차가 존재했다는 얘기가 되는 것입니다. 

얼마간의 견해차. 많은 견해차는 아니에요. 다만 얼마간의 견해차가 존재했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이들이 성령의 영감으로 성경을 기록했다고 해서 견해차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신학이 필요하고 공부가 필요합니다. 역사적인 예수님에 대한 관심은 일부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관심뿐만이 아니고 우리 모두의 관심사가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먼저 여러분의 호기심부터 덜어드리면 왜 마태가 오늘 본문에서 이런 말을 했느냐? 그것도 마태복음 초반부에? 마태가 이 말을 한 이유는 마태복음이 유태인들을 겨냥한 책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유태인들의 전통과 율법을 떠난 새로운 종교를 시작하러 오신 분이 아니고 율법과 선지자의 전통을 이어받아 그것을 완전하게 하시기 위하여 오신 분이라는 말을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마치 국군 장병이 경례할 때 ‘충성’이라고 말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대한민국에 대한 충성을 다짐하는 것처럼 마태도 유태인들에게 이 복음서를 쓰면서 ‘나도 여러분과 같은 편이요, 예수님이 여러분과 같은 편입니다.’라는 말을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 같은 사실을 알면 왜 마태가 이 말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제가 설교 초반부에 성경은 신문과는 성격이 다르다고 말씀드렸지만 사실 신문도 fact만을 나열하는 게 아니고 신문사의 논조에 따라서 기사를 씁니다. 신문마다 논조가 있습니다. 더 진보적인 신문이 있고 보수적인 신문이 있고, 지식인을 겨냥한 신문이 있고 대중적인 신문이 있습니다. 똑같은 사건을 보도하더라도 신문의 논조에 따라 쓰는 관점이 다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좀 더 균형 잡힌 시각을 갖기 위해서는 여러 신문을 같이 읽는 것이 유익합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에요. 그렇다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객관적인 진리를 아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회의론을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는 학생은 회의론에 빠져서 객관적 진리를 아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을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이 눈이 두 개이기 때문에 입체적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귀가 두 개이기 때문에 스테레오로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처럼, 만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하나님이 일률적인 기록만을 원하셨다면 하나만의 복음서를 허용하셨을 텐데 그렇지 않고 네 개의 복음서를 허락하셨습니다. 

마태 · 마가 · 누가 · 요한. 이 네 사람이 다 예수 그리스도를 기록했지만 저마다 입장이 조금씩 다릅니다. 그것은 단점이 아니고 장점이에요. 이들의 관점이 조금씩 다르기 때문에 우리는 좀 더 입체적으로 균형 잡힌 시각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눈이 두 개 이고 귀가 두 개인 것과 비슷한 것입니다. 

그리고 신약성경에는 복음서만 있는 것이 아니고 서신들이 있습니다. 사도바울 · 베드로 · 야고보 · 요한 · 유다, 그리고 이름을 알 수 없는 히브리서 저자가 쓴 많은 서신들이 있어서 이 모든 책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더 풍성하고 균형 잡힌 시각을 갖도록 우리를 도와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이 여러 성경 저자들이 한 번도 한 자리에 모여서 입을 맞춘 적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건 놀라운 일이에요. 재판을 할 때 변호인과 피고가 모여서 무슨 말을 할지 입을 맞추지 않습니까? 신문이 어떤 취재를 할 때 기자들이 무슨 말을 할지 모여서 의논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신약성경을 쓴 저자들은 한 자리에 모여서 그런 합의를 하지 않았고 그것이 불가능했습니다. 왜냐하면 서로 다른 사람이 서로 다른 곳에서 서로 다른 시대에 이 모든 기록을 쓴 것이기 때문에 그들은 모이는 것도 불가능했고 그러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쓴 기록을 읽을 때 대부분에 있어서 일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실 놀라운 것입니다. 이들이 견해 차이가 있다는 게 놀라운 게 아니고 여러 저자가 여러 시대에 서로 다른 곳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책을 썼는데 그 내용이 대부분 일치한다는 사실이 놀라운 것입니다. 

어떤 부분이 일치한다는 말이냐? 예수께서 오셔서 천국복음을 가르치시고 이적을 행하셨다는 사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는 사실, 예수께서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는 사실,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 우리가 죄 사함을 얻는다는 사실, 구약의 율법으로도 이루지 못한 것을 예수께서 이루셨다는 사실. 그 이외에도 일치하는 많은 부분들이 있지만 지금 열거한 것만 가지고도 우리의 신앙을 성립하기에 충분한 일관된 지침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 내에 존재하는 차이점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이냐? 예컨대 오늘 본문말씀과 사도 바울의 가르침이 서로 상충되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럼 이것은 모순이 아니라는 말이냐? 저도 그런 의문을 가졌을 때가 있었는데 그건 모순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깊이와 넓이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바이올린의 예술>이라는 다큐멘터리 영화가 있습니다. 20세기의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들을 추억하는 영화입니다. 크라이슬러 · 메뉴인 · 시게티 · 프란체스카티 · 엘만 · 하이페츠, 이런 기라성과 같은 바이올리니스트들의 음악을 들어보면 그 영화가 지목하는 것은 이 많은 연주가들의 음악이 저마다 다르다는 점을 주목했습니다. 같은 작곡가의 같은 음악을 연주하더라도 누가 연주하느냐에 따라 해석하는 방법이 다르다! 

그런데 제 귀에는 뭐가 다른지 잘 모르겠습니다. 커피 전문점 어디가 커피 맛이 맛있다, 뭐 이런 말을 하는데 제 입에는 그 커피가 그 커피 같아요. 음악도 그 음악이 다 그 음악 같은데 아마 여기에서 프로와 아마추어가 갈리는 것 같습니다. 

이 점에 있어서 Ivry Gitlis라는 바이올린 연주가가 이런 설명을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만일 어떤 곡을 연주하는 방법이 하나 밖에 없다면 그것은 그 음악에 대한 모욕이다. 그 음악의 품질이 하도 저질이라서 (기틀리스가 프랑스어로 tres pauvre - very poor – 아주 저질이라는 말을 합니다.) 한 가지 연주방법 밖에 없다는 말이다.’이런 말을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사람이 작곡한 음악도 해석하는 방법이 이처럼 다를 수가 있는데, 그것이 오히려 그 음악의 훌륭함을 보여주는 것인데 만왕의 왕 예수 그리스도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방법이 다르다는 것은 좋은 것이고 당연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보는 관점이 얼마만큼 달랐다는 사실은 오히려 성경을 신뢰할 수 있는 이유가 되는 것이고, 예수님을 신뢰할만한 이유가 되는 것이고, 여러분이나 저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든 기독교의 신앙의 성격을 이해하는 방법이 다른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고 그건 권장할 만한 일이에요. 왜 기독교계에 많은 교파가 존재하느냐? 

기독교인들이 서로 하나 되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다고 말하면 안 됩니다. 그건 신앙의 성격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왜 많은 교파가 존재하느냐?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도 크고 예수님의 진리가 하도 깊고 넓다보니까 어느 한 사람, 어느 한 신학자, 어느 한 교파도 그것을 다 섭렵하지 못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것을 알아야 됩니다. 장로교든, 감리교든, 침례교든, 성결교든, 성공회든, 순복음이든, 어느 한 교파도, 어느 한 뛰어난 신학자도 예수 그리스도를 다 섭렵하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이아몬드에 여러 각도가 있어서 빛을 발하는 것처럼 이 모든 신학적인 해석이 예수님의 풍성한 진리를 함께 증거하는 것입니다. 

저희 교회를 시작할 때 함께 기도하던 미국인 선교사가 계셨습니다. 그분은 미국 하나님의 성회 목사님이셨습니다. 그래서 병자를 고치는 은사가 있고 예언하는 은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즐겨 듣는 설교가 장로교 목사님의 설교였습니다. 저는 처음에 그것을 의아하게 생각했습니다. 성령 운동하는 하나님의 성회 목사가 왜 하필이면 장로교 설교에 은혜를 받을까? 그러나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어느 한 교회나 어느 한 교파가 예수님의 진리를 다 독점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다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한다고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미처 보지 못하는 것을 남이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만큼 넓고 깊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뿐만이 아니에요. 왜 ‘예수 천당, 불신 지옥’ 같은 문구가 마음에 안 드는지 아십니까?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아주 신중하고 아주 심각한 일인데 그것을 너무 경박하게 표현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심각하고 중대한 것을 너무 쉽게 표현하는 것은 이상한 것입니다. 오히려 수상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본문과 같은 말씀이 더 신뢰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예수님이기 때문에 이런 말씀을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아니면 이런 말씀을 하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역시 우리 예수님이에요. 예수님이 이보다 더 어려운 말씀을 하셨더라도 우리는 들을 것입니다. 예수님이기 때문에. 

구원에 대하여 사도바울도 신중한 발언을 했습니다. ‘두려움과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구원이 그렇게 쉽고 당연한 것이라면 왜 두려움과 떨림이 필요하겠습니까?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 심판대 앞에 섰을 때 ‘하나님, 저는 믿음을 가졌으니 천국에 들어갈 권리가 있습니다.’라고 말할 사람이 몇 명이나 있겠습니까? 하나님 심판대 앞에서 ‘주여, 나는 주의 이름으로 이적을 행하고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했습니다.’라고 말할 사람이 몇 명이나 있겠습니까? 오히려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말하지 않겠습니까?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라고 말하지 않겠습니까. 

‘주님 나라 임하실 때 저를 기억하소서.’라고 말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보다 더 나은 의가 되는 것입니다.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러한 청을 들어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 점에 있어서는 모든 성경 저자들이 일치하는 것입니다. (김영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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