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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욥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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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욥 1:6-19)


언젠가 무슨 SNS에서 자기는 '연봉 5억 이상 되는 남자'를 찾고 있다고 공개 구혼을 한 어떤 여자가 화제가 된 적이 있었습니다. 
본인의 설명인즉슨 연봉 2억을 받는 남자와도 사귀어 봤는데 전혀 만족스럽지 않아서 그렇게 상향조정했다고 하면서, 그런 조건을 당당하게 내거는 자신이 그냥 속으로만 상대방을 재어 보는 여자들보다 오히려 훨씬 더 솔직하지 않느냐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녀에 대한 대부분 네티즌의 반응은 완전히 타도일색이었습니다. 
그녀의 행동이 '솔직한' 것인지는 몰라도 평생을 동반자로 살게 될 배우자를 물색하는 첫 조건으로 연봉의 액수를 내건다는 것은 정말 누가 보아도 유치하고 저질스러운 일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와 비슷한 일이 신앙생활에서도 일어납니다. 
신앙생활이란 다른 말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고 사는' 것인데, 그 사이에 '돈'을 조건으로 내거는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사건은 사람으로 하여금 그런 저질스러운 자세로 하나님을 대하게 만드는 장본인이 바로 사단인 것을 보여 줍니다.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이 말씀을 통하여 '사람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는가?'라는 도전을 물리치기 위하여 참된 신앙인이 꼭 깨달아야 할 사실이 무엇인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복을 받아야 하나님을 믿을 수 있다'는 조건부적 신앙은 결국 사단의 미혹에 빠지고 맙니다. 

먼저 6절부터 8절에 보면 "6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섰고 사단도 그들 가운데 왔는지라 7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서 왔느냐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땅에 두루 돌아 여기저기 다녀왔나이다 8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들"이란 '천사들'을 가리키며, 반면에 "사단"은 바로 '타락한 천사들의 우두머리'입니다. 
이사야 14장 12절 이하에 나타나 있듯이 사단은 원래 천사로 지음을 받았다가 범죄함으로써 "하늘에서 떨어진" 즉 '하나님 존전에서 쫓겨난' 존재이므로 하나님 앞에 마음대로 출입할 수 있는 존재가 결코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본문에서 사단이 마치 하나님의 보좌 앞에 들어온 것처럼 묘사되고 있는 것은, 비록 하늘에서 쫓겨나기는 했지만 사단은 여전히 성도를 시험하고 참소하기 위하여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부지런히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기 위한 일종의 풍유법적인 표현입니다. 
7절에 하나님께서 사단에게 "네가 어디서 왔느냐"라고 물으셨을 때에 사단이 "땅에 두루 돌아 여기저기 다녀왔나이다"라고 대답한 것 역시 바로 '우는 사자와 같이 분주하게 돌아다니면서 삼킬 자를 찾는' 사단의 본성적인 활동을 그대로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 사단에게 하나님께서는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나를 충성스럽게 섬기는 나의 순전하고 정직한 종 욥을 너도 잘 보았지?'라는 뜻으로서,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욥을 얼마나 지극히 자랑스럽게 여기고 계셨는지를 충분히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단은 그 하나님의 말씀에 조금도 찬동하지 않으면서 오히려 아주 의미심장한 도전장을 던졌습니다. 
바로 9절 이하 12절에 기록하기를 "9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10주께서 그와 그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산울로 두르심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 소유물로 땅에 널리게 하셨음이니이다 11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 12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붙이노라 오직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 사단이 곧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니라"고 했습니다. 

지금 이 사단의 도전이 얼마나 신랄합니까?
그는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욥이 그처럼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하는 것도 다 이유가 있어서 그런 것이지 절대로 아무 조건 없이 그냥 믿는 것은 아니다. '라는 반발이었던 것입니다. 

사단이 주장한 그 '이유'와 '조건'이란 바로 하나님께서 욥에게 "복"을 주시고 그의 "소유물"이 넘치게 해 주신 사실이었습니다. 
'산울로 두르다'라는 말은 '철저하게 보호해 주다'라는 뜻이며, '땅에 널리게 하다'라는 말은 '땅에 차고 넘치도록 번성케 해 주다'라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단은 '하나님이 욥의 가정에 아무 문제없이 만사형통하게만 해 주시고 게다가 그의 기업을 통하여서는 동방에서 최고 부자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철철 부어 주셨으니 그만하면 욥 아니라 그 누구라도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겠습니까?'라고 비꼬듯이 말했던 것이었습니다. 
이런 사단의 말은 오늘날 역시 우리 주변에 왕왕거리지 않습니까?
"순전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나? 뭔가 당장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것을 좀 내려 주셔야 하나님이라는 존재를 인정해 줄 수 있지." - 신앙생활을 이처럼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give and take' 관계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정말 많은 것입니다. 

그래서 사단은 욥을 두고서도 자신만만하게 도전했습니다. 
즉 욥의 그 많은 재산을 하루아침에 사라지게만 해 버리면 욥이 순전하고 정직하게 살기는 고사하고 당장 '가정예배도 드리지 않고 주일성수도 하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하나님 면전에서 대놓고 욕을 퍼부을 것이 틀림없다고 아주 장담을 했던 것이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 그런 사단의 도전을 아주 자신만만하게 받아들이셨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욥이 그 시험을 넉넉히 이겨낼 것이라고 확신하셨기 때문에 12절 상반절에 나오는 대로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붙이노라"고, 사단의 도전을 '오케이, 콜!'하시면서 그야말로 흔쾌히 받아들이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욥은 '돈 한 푼 없게 되고, 자기가 아끼고 소중히 여기는 모든 것들을 다 잃고, 그야말로 알몸만 남게 된' 후에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에 있어서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사단이 보기에는 '하나님을 경외할 만한 조건'들이라는 것은 모조리 다 없어져 버렸고 오직 '하나님을 욕할 이유'만 남게 된 상황에서도, 욥의 입에서는 물론 온갖 탄식과 신음 소리는 나오지 않을 수 없었지만 적어도 '하나님을 욕하는 말'은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섬기겠습니까? 다 돈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거지요.'라고 했던 사단의 자신만만했던 도전은 실로 무색하게 완패당하고 말았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유가 있어서 하나님을 믿는다. 조건이 맞아야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다.'라는 사단의 말은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 아니 많은 교인들의 마음까지 여전히 미혹하고 있습니다. 
즉 '뭔가 내 손에 쥐어 주는 복이 있어야 하나님을 믿을 수 있다.'는 사고방식이 절대다수인 것입니다. 
물질의 축복의 받기 위해서 예수 믿는다는 사람, 기적적인 병고침을 받아야 기독생활의 은혜를 제대로 체험한 신자라고 주장하는 사람, 자식이 공부를 제대로 안 해도 하나님께서 철썩 대학에 붙여 주시는 것이 기도 응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 정말 이런 교인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지만 이것은 '신앙'이 아니라 '종교적 이기심'에 불과합니다. 
이것은 '은혜에 대하여 감사하고 기뻐하는 신앙생활'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도 철두철미하게 '보상심리'만을 가지고 종교생활하겠다는 사고방식인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미 당신의 독생자까지 대속제물로 거저 주신 하나님 앞에서 이 얼마나 철면피한 소리이며 뻔뻔스럽기 짝이 없는 생각입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단은 하나님을 믿기 위해서는 반드시 '조건'이 필요하다고 끝까지 도전해 오고 있습니다. 
"주께서 '평화시대에 순교자의 정신으로 섬긴다고 하는' 저 장로에게 시한부 삶을 한 번 선고해 보십시오. 죽을 때 즈음에 가서는 틀림없이 하나님을 원망하고 유가족들도 다 교회에 발을 끊을 것입니다. 
 " - 사단은 절대로 자기가 지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 있게 배팅을 합니다. 
"주께서 저 충성스럽게 교회를 섬긴다는 신자의 재산을 한 번 건드려 보십시오. 자신의 '생애 최고의 것'뿐 아니라 이제 '생애 전부의 것'까지 다 바치겠다고 서원한 저 집사의 기업이 하루아침에 왕창 망하게 해 보십시오. 그리하면 정녕 주를 대면하여 욕을 할 것입니다. " - 사단은 정말이지 제 딴에는 아주 자신만만하게 도전장을 던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놀랍게도, '욥의 승리'는 바로 우리 경향교회 안에서도 그대로 재현되고 있지 않습니까?
사단이 '그 집'을 쳐서 그 남편과 아버지를 잃게 하면서 그래도 '하나님을 경외하는지' 시험을 걸어 와도, 그 유가족들은 조금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오로지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앙의 명문 가문을 부단히 이어가고 있는 것을 우리 모두가 목도하고 있습니다. 
  
사단이 경향의 기둥 같은 일꾼들의 '그 모든 소유물'을 쳐서 거의 파산 상태에 이르게 하면서 그래도 '하나님 앞에서 순전하고 정직하게만 사는지' 도전을 해 올 때, 비록 인간적으로는 절로 탄식과 비명을 지르지 않을 수 없을 것이 분명한데도 끝까지 교회 중심의 신앙생활을 지키고 있는 성도들이 지금 바로 이 자리에도 앉아 계시는 것입니다. 

'이 정도의 환난을 당하고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을 사람은 없다.' - 이것은 어디까지나 사단이 미혹하는 소리일 뿐입니다. 
'그 정도의 고통을 당하고 있으면 하나님을 욕해도 된다.' - 그런 경우란 단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 편에서는 우리를 사랑해 주실 아무 이유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먼저 무조건적으로 사랑해 주신 은혜를 늘 기억하면서, 그 어떤 시험이나 환난을 당해도 결코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자신의 순전하고 정직한 신앙을 끝까지 지키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어떤 환난 중에도 하나님의 주권에만 의지하는' 절대적 신앙이 연단 중에도 끝내 승리하게 해 줍니다. 

13절 이하 19절에 기록하기를 "13하루는 욥의 자녀들이 그 맏형의 집에서 식물을 먹으며 포도주를 마실 때에 14사자가 욥에게 와서 고하되 소는 밭을 갈고 나귀는 그 곁에서 풀을 먹는데 15스바 사람이 갑자기 이르러 그것들을 빼앗고 칼로 종을 죽였나이다 나만 홀로 피한 고로 주인께 고하러 왔나이다 16그가 아직 말할 때에 또 한 사람이 와서 고하되 하나님의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양과 종을 살라 버렸나이다 나만 홀로 피한 고로 주인께 고하러 왔나이다 

17그가 아직 말할 때에 또 한 사람이 와서 고하되 갈대아 사람이 세 떼를 지어 갑자기 약대에게 달려들어 그것을 빼앗으며 칼로 종을 죽였나이다 나만 홀로 피한 고로 주인께 고하러 왔나이다 18그가 아직 말할 때에 또 한 사람이 와서 고하되 주인의 자녀들이 그 맏형의 집에서 식물을 먹으며 포도주를 마시더니 19거친 들에서 대풍이 와서 집 네 모퉁이를 치매 그 소년들 위에 무너지므로 그들이 죽었나이다 나만 홀로 피한 고로 주인께 고하러 왔나이다 한지라"라고 했습니다. 

"스바 사람"은 북부 아라비아 지방의 유목민으로서 잔인한 성품과 약탈 습관으로 악명 높은 베두인 족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갈대아 사람"은 앗수르와 메소포타미아 북쪽 산악 지대에 살던 유목민으로서 역시 매우 호전적이며 약탈을 일삼던 민족이었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하나님의 불"이란 사단이 일으킨 어떤 자연적인 화염인데 하나님의 묵인 하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하나님의 불'이라고 한 것입니다. 
바로 다음 19절에 나오는 "대풍"은 '거친 바람, 돌풍, 회오리바람' 등을 가리키는 것인데, 특히 사막이나 광야 지형에서는 더욱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자연 재앙이었습니다. 

이처럼 욥의 시련은 '인간의 폭력'과 '자연 재해'라는 두 가지 형태로 닥쳐왔습니다. 
그는 약탈 민족에 의하여 '소'와 '나귀'와 '약대' 등 수천 마리의 가축을 일순간에 다 빼앗겼으며, 마른하늘의 날벼락처럼 떨어진 불 때문에 '칠천 마리'의 양들 역시 몽땅 다 잃게 되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욥에게 소식을 전해 주러 온 종들마다 "나만 홀로 피한 고로"라고 말하고 있듯이 그의 많은 종들까지 한꺼번에 죽임을 당했습니다. 
실로 옆에서 날아오는 인재(人災)와 위에서 떨어지는 천재(天災)로 인하여 그는 하루아침에 알거지가 되고 말았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정도는 아직 약과에 불과했습니다. 
욥의 모든 자녀들이 그 "맏형의 집"에 다 모여 있었을 때에 갑작스러운 대풍이 불어와서 그 집의 "네 모퉁이를 치매 그 소년들 위에 무너졌다"고 했습니다. 
삼풍백화점은 처음에 기둥 하나만 붕괴되었는데도 전체가 순식간에 다 무너졌으니, 집의 '네 모퉁이 기둥'들이 파괴되었다면 그 결과야 두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집이 한순간에 폭삭 내려앉았던 것입니다. 
그 결과 욥은 세상의 천은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가장 소중한 재산, 자기 목숨보다도 오히려 더 사랑하는 자식들까지 바로 그 한 날에 다 잃게 되었습니다. 

자식이 죽는 것을 제 눈으로 보아야 하는 것보다 부모에게 더 아프고 괴로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통상 자식의 장례식에 부모는 오지 않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일 것입니다. 
자식의 시체가 땅에 묻히는 모습, 자식의 관이 화장터의 불꽃 속으로 들어가는 장면을 그 부모가 어떻게 눈 뜨고 볼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저는 욥이 그 열 명 자녀들의 '합동 장례식'을 도대체 어떻게 치렀을지 상상조차 되지 않습니다. 

이처럼 전 재산과 동시에 모든 자녀들을 딱 하루 만에 다 잃어버린 최악의 재난이 욥에게 닥쳤는데, 그 과정에서 본문 16절과 17절 그리고 18절에 보면 "그가 아직 말할 때에"라는 기록이 세 번 반복되고 있습니다. 
매 재앙마다 딱 한 명씩의 생존자만 남아서 욥에게 그 끔찍한 소식을 전해 주었지만, 그 보고가 미처 다 끝나기도 전에 연이은 재앙의 소식이 날아왔던 것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설상가상', '눈이 채 녹기도 전에 그 위에 서리가 내리는' 형국이 아니었겠습니까?

자기가 당한 재난 그 자체로도 욥에게는 말할 수 없이 엄청난 충격이었겠지만, 더욱 기가 막힐 일은 그로서는 자기가 왜 그런 지독한 재앙을 당하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도저히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1장 첫 절에서부터 밝히고 있는 대로 그는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 그야말로 당대 최고의 모범신자였습니다. 
그처럼 대풍을 만나 집이 무너지는 바람에 한 자리에서 한꺼번에 몰사한 욥의 자녀들 역시, 본문 4절과 5절에서 보았던 대로 아버지 욥을 통하여 평소에 철저한 경건생활을 하던 자녀들이었습니다. 
정말 눈 씻고 찾아보아도, 아무리 무엇을 반성하고 회개하려 해도 도대체 하나님께서 왜 자기에게 그런 재앙을 내리시는지 무슨 짐작조차 할 수 없는 형편이었던 것입니다. 

오늘날의 기독신자가 이런 욥과 같은 상황에 닥치게 되면 과연 그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습니까?
그처럼 '엎친 데 덮치는' 인생의 모진 풍파로 인하여 정신을 잃을 정도의 '그로기' 지경에 빠지게 될 때에, 저와 여러분은 도대체 어떻게 정신을 차리고 다시 일어날 수가 있겠습니까?
그 대답은 바로 앞의 12절에 나왔던 말씀 "12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붙이노라 오직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 사단이 곧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니라"는 말씀에 있습니다. 

여기에서 알 수 있듯이 사단의 활동이라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완전통제 아래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의 '소유물'에 대해서는 사단의 손에 일시적으로 붙여 주셨지만 '그의 몸'에는 '손도 대지 못하도록' 금지시키셨습니다. 
  
물론 나중에는 사단이 욥의 '소유물'을 치고 난 후에도 자기 뜻대로 안 되니까 다시 욥의 '몸'도 치게 해 달라고 했고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셨지만, 이 모든 것은 사단이 욥에게 줄 수 있는 시련의 범위까지도 하나님께서 정확하게 제한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명백히 보여 주는 것입니다. 
11절에서 사단이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라고 했던 것도, 아무리 사단이 욥을 시험하고 싶어도 자기 마음대로는 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의 손'이 직접 움직여야 가능하다는 것을 그 누구보다도 사단 자신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환난 당하는 성도가 꼭 상기해 내어야 할 사실이며, 그 환난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끝까지 한순간도 잊지 말고 붙잡아야 할 사실이기도 합니다. 
즉 자기에게 벌어지고 있는 온갖 시련의 바람과 재난의 폭풍조차 바로 '하나님께서 허락하시고 주장하시는 가운데' 벌어지고 있는 사건이라는 믿음입니다. 
사람이 보기에는 전적으로 마귀가 주장하고 나쁜 운수가 판을 치고 있는 상황처럼 보일 때에도 그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뒤에서 당신의 오른손으로 꽉 잡고 주장하고 계신다는 사실만 똑똑히 깨달으면 반드시 살아남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요즘 보니까 자기 어린 자녀들을 여름방학 기간 중에 '병영 체험' 같은 프로그램에 일부러 보내는 부모들이 꽤 있습니다. 
왜 자기의 사랑하는 소중한 자녀를, 그처럼 고이 키우던 귀여운 자식들을 그런 '고생길이 훤한 곳'으로 일부러 돈까지 내면서 보냅니까?
그 아이들이 훈련 기간 동안 '죽을 지경'이 될 것은 틀림없지만 그 과정은 실제로 그들을 '죽게' 만들만큼 위험한 것이 결코 아니며, 또한 그 훈련이 그들의 평생에 있어서 실로 돈 주고 살 수 없는 '좋은 약'이 될 것을 그 부모들은 너무나 잘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단이 성도를 시험하도록 허락해 주시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이 결국은 성도에게 큰 유익을 주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에게 연단을 통하여 '더 큰 믿음'을 얻게 해 주시기 위하여 때로는 '시련의 훈련소'에 입소시키십니다. 
  
하늘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사랑하시는 자녀들로 하여금 더 큰 복을 받게 해 주시기 위하여 잠시 동안만 '환난의 유격 코스'를 통과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도가 그 훈련 과정을 통과하는 동안 내내 우리를 완전히 넘어뜨리려 하는 사단의 온갖 간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택자로 하여금 끝까지 '견인'케 하십니다. 
그 과정이 어떤 때는 피눈물이 절로 나올 만큼 힘들고 괴로울 때도 있지만, 사실은 하나님께서 그 모든 것을 다 정확하게 계산하시고 안전대책을 완벽하게 세워 놓으신 가운데 지나가게 하시는 연단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혹 사업이 망해도, 다니던 직장에서 쫓겨나도 그것조차 'God is in control of everything.' 즉 '모두 다 하나님께서 주장하고 계시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붙이노라"는 말씀대로 그 모든 일이 사실은 사단이 하는 일이 결코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컨트롤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남편이 불치병에 걸려도, 어린 자녀가 조사(早死)를 해도 그것 역시 '하나님께서 친히 당신의 오른손으로 행하고 계시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오직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는 말씀대로 그 모든 일이 실제로는 사단이 제 마음대로 우리를 괴롭히는 것이 절대로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꽉 잡고 선하게 역사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호랑이에게 물려 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신자는 그 어떤 시련과 환난 중에서도 이처럼 하나님께서 'in control'하고 계심을 '정신 똑바로 차리고' 믿으면 절대로 망하거나 죽지 않습니다. 
'내가 다 네 손에 붙이노라', '모든 일은 궁극적으로 다 내가 하는 일이다.'라는 이 절대주권자의 든든한 보장을 심령 깊이 새기는 가운데, 자신의 인생이 다하는 날까지 매일매사에 '주의 영원하신 팔이 항상 나를 붙들어 주시는' 놀라운 승리를 꼭 체험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사단은 '사람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느냐?'라고 우리를 미혹하며 도전해 옵니다. 
일견 그럴듯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가족이나 연인 사이에서도 유산이나 연봉이 사랑의 이유가 된다면 그것은 저질스러운 관계가 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더더구나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하면서 재물 따위를 조건으로 내건다는 것은 당연히 저질적인 기복종교가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참된 신자는 그와 정반대로 '그 어떤 괴롭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무조건 하나님만 의지하는' 진짜 순수한 신앙을 지킬 수 있어야만 합니다. 
'네 마음과 정성과 뜻과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첫째 계명에는 그 어떤 '조건'도 포함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처럼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경외의 신앙'을 지키는 성도의 생명을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전지와 전능의 주권을 다 동원하여 보호하시고 구원해 주고야 마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을 어떤 이유가 있어서 사랑해 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당연히 저주를 받아 죽을 이유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독생성자까지 보내 주셔서 당신께서 우리를 그 얼마나 '무조건적으로' 사랑해 주고 계시는지를 명백히 보여 주셨습니다. 
그런 하늘 아버지를 어찌 우리가 '조건부로' 경외한다는 말이겠습니까?
  
'하나님이 나를 가난하게 만들고 병들게 만들면 나도 하나님을 경외할 이유가 없다.'라는 생각은 오로지 사단이 꾀는 미혹인 줄을 깨닫고, 오히려 지금 당하고 있는 시련과 환난조차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그 오른손으로 꽉 잡고 주장하시는 연단의 과정'임을 믿음으로써, 당신의 자녀를 위하여 결국에는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시는' 오묘한 섭리의 은혜를 꼭 체험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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