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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마 5: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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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마 5:14-16)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5:14-16)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하나님 자녀는 세상에서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소금에 대해서는 앞서 말씀드렸고, 오늘은 빛에 대해서 말씀드립니다.  성도들은 세상 사람들 가운데 빛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14)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첫 번째 존재가 바로 빛입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물질 중에 빛처럼 신기한 것이 없습니다.  물리학자들은 빛의 속성에 대해서 끝없는 연구를 해 왔습니다.  
  
빛이란 어떤 물질일까요?  두산 백과에 보면 이렇게 요약합니다.  “빛이란 비교적 파장이 짧은 전자기파다.”  빛에 대한 개념이 변했습니다.  과거에는 가시광선만 빛이라고 생각하였으나 현대에는 빨간색 가시광선보다 파장이 긴 적외선(750nm~1mm)과 보라색 가시광선보다 파장이 짧은 자외선(10~390nm), 자외선보다 파장이 더 짧은 X선 등의 전자기파를 포함합니다.  
  
빛은 이중성을 갖고 있습니다.  파동성과 입자성입니다.  파동성이 있기 때문에, 반사, 굴절, 간섭, 회절 및 도플러효과(Doppler effect) 등이 나타납니다.  직진하며, 다른 매질의 경계면을 만나면 일부는 반사되고 일부는 굴절됩니다.  동시에 빛은 입자성이 있습니다.  부딪치면 물리적 변화가 나타납니다.  
  
빛은 매우 빠른 속도를 갖고 있습니다.  진공 속에서 빛의 속도를 광속이라 하는데, 물리학, 특히 전자기학과 천체물리학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현재 쓰이는 광속은 진공 속에서의 값인 c=299,792,458m/s, 대략 초속 30만 km입니다.  
  
지구상에서 주된 빛의 광원은 태양입니다.  태양에서 내뿜는 빛 때문에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가 존재할 수 있습니다.  빛은 식물의 광합성의 주요소이며, 식물을 먹이로 삼는 모든 동물과 인간까지 빛이 없으면 살 수 없습니다.  인류는 태양 에너지에 의지하여 생존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성도들을 세상의 빛이라 하셨습니다.  성경에서 빛은 아주 상징성이 강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빛이라 했습니다.(시36:9, 마6:22-23)  구원에 대한 지식, 즉 복음을 빛이라 했습니다.(시27:1, 눅1:77-79)  선, 의, 진실과 같은 도덕적 선행을 빛이라 했습니다.(엡5:8-9)  기쁨과 행복을 빛이라 했습니다.(시97:11, 사9:1-7)  예수님 자신, 혹은 예수님을 통해 얻는 생명을 빛이라 했습니다.(요8:12)  
  
본문은 특히 빛의 역할 중에서도 도덕적인 빛을 강조합니다.  16절에 보면 “너희 착한 행실”이라고 했습니다.  이미 구원 받은 성도에게 필요한 것은 그들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도덕성을 나타내는 빛입니다.  
  
우리가 빛을 비출 때에 알고 있어야 될 중요한 사실이 한 가지 있습니다.  우리는 광원(光源)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다만 받은 빛을 반사할 뿐입니다.  태양과 달의 차이가 뭡니까?  태양은 핵융합의 과정을 통해서 엄청난 빛과 에너지를 발산합니다.  그러나 밤에 비취는 달은 스스로 빛을 내지 못합니다.  다만 태양 빛을 받아 반사할 뿐입니다.  우리 성도들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빛을 내는 발광체가 아닙니다.  거울처럼 빛을 반사하는 반사체일 뿐입니다.  성경은 세례 요한에 대해서 이렇게 소개합니다.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라.” (요 1:8)    

오늘 우리도 마찬가집니다.  우리는 스스로 빛을 생성해 낼 수 없습니다.  다만 그리스도의 빛을 반사할 뿐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됩니까?  잘난 척 하고 빛인 척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에게 철저히 의지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내 맘속에 모시고, 그리스도가 드러나게 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면 내 마음에서 그리스도의 마음이 나옵니다.  그리스도의 생각이 나옵니다.  그리스도의 행실이 나옵니다.  
  
죄를 짓는 사람은 그 마음에 마귀가 있습니다.  그래서 마귀의 행실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유대인들에게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요 8:44)  

마음에 마귀가 있으면 마귀의 행실이 나옵니다.  마음에 예수님이 계시면 예수님의 생각, 예수님의 행실이 나옵니다.  오늘 나는 마귀의 행실이 나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행실이 나옵니까?  우리는 빛의 반사체들입니다.  예수님의 성품이 드러나야 합니다.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자비, 선량함, 신실함, 온유함, 절제, 정의 등등.  주님을 마음에 모셔야만 빛이 제대로 나옵니다.  중심에 주님을 모시고 빛을 내시기 바랍니다.  


빛은 차단시키지 말고 비취라

빛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사물을 정체를 드러내는 일입니다.  빛은 사물을 드러냅니다.  그러므로 대상물을 정확히 보려면 빛을 비춰야 됩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14) 

유대 땅의 마을들은 주로 산 위에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마을들은 대개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위치에 있습니다.  뒤에는 산이 있고, 앞에는 내가 흐르는 형태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주로 마을이 산 위에 있습니다.  그래서 아침에 해가 떠오르면 먼저 어둠 속에 있던 마을의 모습이 드러납니다.  본문에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한다는 것이 그런 뜻입니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빛으로 사물을 드러나게 하는 일입니다.  
  
이 말씀을 성도에게 적용하면 어떤 의미가 될까요?  성도들의 착한 행실로 세상의 무엇을 드러내라는 말씀인가요?  사람들의 마음의 실체, 바른 것과 그른 것을 드러내라는 말입니다.  즉, 죄악의 정체를 드러내고, 의로움의 정체를 드러내야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로 하여금 바른 길을 가게 만들어야 합니다.  어두우면 사물이 안 보입니다.  구덩이, 함정, 올무, 낭떠러지, 걸림돌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바른 길을 찾지 못하고 함정에 빠지고, 낭떠러지에 떨어지고, 발에 걸려 넘어집니다.  빛은 인간이 가야 할 길이 무엇이며, 가지 말아야 될 길이 무엇인지 드러냅니다.  그래서 사람들로 하여금 망하지 않고, 복 된 길을 가게 만듭니다.  
  
우리가 빛을 비춰야 될 구체적인 대상과 장소는 어디일까요?  그곳은 곧 사람들의 양심, 즉 마음입니다.  어두운 양심, 죄에 물든 마음, 더러운 줄 모르는 영혼, 선과 악을 분별하지 못하는 심령, 그 영혼에 빛을 비춰야 됩니다.  현 세대 사람들의 병이 무엇인지 아세요?  바로 죄를 느끼지 못하는 불량한 마음입니다.  죄에 아주 무감각합니다.  식자나 무식자나, 남녀노소, 신분이나 지위를 막론하고 모두가 죄에 무감각 합니다.  

정치인들의 구호가 뭡니까?  잘 먹고 잘 살자!  오직 경제가 관심사입니다.  그렇게 외치는 이유는 국민들이 그것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온 국민의 첫 번째 관심사는 먹고 사는 일입니다.  정의나 불의에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연예인들은 그저 옷을 벗고 속살을 드러내는 데 열심입니다.  인기만 있다면 뭔들 못하겠는가?  어리고 감수성이 예민한 청소년들은 잘못 된 연예인들 흉내만 냅니다.  죄에 대해서는 아무 감각이 없습니다.  이것이 세상 사람들의 어두운 마음입니다.  바로 이런 곳에 빛을 비춰야 합니다.  
  
빛은 사람들의 양심에서 죄가 죄로 느껴지게 만듭니다.  그 빛의 역할을 할 사람들이 바로 성도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입니다.  세상 법정의 처벌보다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더 무서워합니다.  그러므로 누가 보든지 말든지 죄 짓는 것을 조심합니다.  바로 그것이 우리가 보여줄 빛입니다.  
  
본문에 보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않고, 등경 위에 두어,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빛을 감추지 말라!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15)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둔다는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말이 뭔지 아세요?  요즘 사람들은 말이나 되를 본 적이 없을 겁니다.  모든 곡식을 무게로 달아 팔기 때문입니다.  예전에는 주로 말이나 되로 양을 측정했습니다.  작은 분량은 되로, 큰 분량은 말로 되어서 측정을 했습니다.  말은 보통 10리터 정도를 담을 수 있는 나무로 만든 통입니다.  등불을 켠 다음에 말로 덮어두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불은 꺼지고 빛은 차단됩니다.  있으나마다 한 빛입니다.  

그러면 이 비유가 뜻하는 것은 무엇일가요?  마음에만 있고 실제로 나타나지 않는 선행,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는 착함을 의미합니다.  야고보 사도의 말처럼 착함은 행동으로 나타나야만 효력이 있습니다.  
  
착한 행실은 반드시 드러나야 합니다.  그렇다고 억지로 나의 선행을 나팔 불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너무 어두워서 작은 빛도 크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대낮에 가로등을 켜 놓으면 켰는지 꺼졌는지 모릅니다.  태양빛이 너무 밝아서 전등 빛이 안 보입니다.  그러나 밤중에 가로등은 너무나 밝습니다.  

예전에 민방위 훈련 때 등화관제 훈련을 한 적이 있습니다.  모든 불을 꺼야 합니다.  부득이 불을 켤 경우에는 방안에 빛이 새나가지 않도록 문을 닫고 창문을 가려야 합니다.  그런데 집집마다 빛이 가려지지 않습니다.  천으로 가려도 보이고, 문틈으로 새는 빛이 보입니다.  민방위 대원들이 소리소리 지르면서 불을 끄라고 야단을 했습니다.  캄캄한 밤에는 작은 불빛도 감추기 힘듭니다.  

사람들의 착한 행실의 빛도 그렇습니다.  감추기 힙듭니다.  길에서 주운 돈을 주인에게 찾아주면 신문에 납니다.  당연한 일인데, 세상이 너무 어둡다 보니 당연한 일도 선행이 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자신의 선행을 굳이 광고하지 않아도 됩니다.  저절로 빛이 드러납니다.  굳이 말 아래 두지만 않는다면 빛은 드러납니다.  그것이 선한 사마리아인입니다.  

고넬료도, 사도 요한도, 스데반도 자신의 삶이 드러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별다른 자선 사업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모습 그대로 사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우리가 비췰 빛입니다.  


빛 된 행실은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

우리가 빛을 비췰 때에 나타나는 가장 중요한 결과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선행으로 말미암는 가장 큰 영광은 하나님에게 돌아갑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빛이 되어야 하는 가장 큰 이유입니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16)
  
선행의 목표는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결코 인간의 자랑이나 잘난 척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명예를 높이는 일입니다.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 제목 1호가 뭡니까?  

“주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소서!”(마6:9)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빛 된 삶입니다.  우리는 오직 빛 된 삶으로써 하나님의 모든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하나님이 어떤 성품을 지니셨는지?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하시는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시는지?  하나님을 어떻게 섬기고 경배해야 하는지?  이 모든 것을 보여주는 길은 오직 한 가지, 우리의 삶입니다.  빛 된 삶은 성도로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모든 것입니다.  

첫째로, 빛 된 삶은 최선의 신앙 고백입니다.  

사도 요한은 빛 된 삶으로써 주님과 사귈 수 있다고 합니다.  천천만만의 제물이 아닙니다.  격식을 갖춘 예배 의식이 아닙니다.  바른 삶으로써 주님과 사귈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그런 사람을 만나주십니다.  그런 사람에게 능력을 주십니다.  그런 사람에게 복을 주십니다.  그런 사람이 세상을 이기게 하십니다.  빛 된 삶이 곧 성도의 영적 능력이요, 영성입니다.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함이거니와,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요일 1:5-7) 


둘째로, 빛 된 삶은 최선의 전도 방법입니다.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거리에서 외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른 삶을 사는 일입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오순절에 모인 성도들은 바른 삶을 보여줌으로써 칭찬을 받고 믿는 사람이 더해졌습니다.  오늘 우리가 전도 안 해서 교인 수가 줄어드는 게 아닙니다.  바른 삶을 보여주지 못함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외면당하는 겁니다.  애써 전도해온 사람, 바르지 못한 삶을 보여줌으로써 단번에 쫓아낼 수 있습니다.  바른 삶은 최선의 전도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순절에 모인 초대교회의 모습입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행 2:44-47) 

  
셋째로, 빛 된 삶은 최선의 예배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참 예배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롬 12:1-2)   

정말 신령한 예배는 몸을 제물로 드리는 것입니다.  몸을 제물로 드리는 게 뭡니까?  제물은 흠이 없어야 합니다.  몸이 흠 없는 제물이 된다는 것은 곧 흠 없는 삶으로 바쳐지라는 뜻입니다.  구약시대 제물은 죽어서 바쳐졌습니다.  그런데 신약시대 성도들은 자신의 몸을 바른 삶으로, 산 채로 바쳐져야 합니다.  그것이 정말 신령한 예배입니다.  성악을 전공한 사람으로 가득 채워진 성가대나, 휘황찬란한 예배당이나, 잘 차려 입은 회중들이 신령한 예배가 아닙니다.  예배당 밖에서 바르게 살아가는 모습이 하나님께는 최선의 예배이고, 살아 있는 예배입니다.  

이렇게 보면 빛 된 삶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보여줄 수 있는 신앙의 모든 것입니다.  빛 된 삶은 최선의 신앙고백입니다.  빛 된 삶은 최선의 전도입니다.  빛 된 삶은 최선의 예배입니다.  그러므로 빛 된 삶의 결과는 하나님께 최대의 영광이 됩니다.  하나님을 가장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께서 가장 기꺼이 복을 주시는 통로입니다.  바로 이런 빛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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