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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불신앙을 이기는 길은? (행 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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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신앙을 이기는 길은? (행 8:4-8)

: 4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 : 5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 6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한마음으로 그가 하는 말을 따르더라. : 7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가고 또 많은 중풍병자와 못 걷는 사람이 나으니, : 8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굳게 지키어 가는 여러분 모두에게 하나님의 도우시는 능력이 더욱 함께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행복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요즘은 보기 힘든 물건이 되었지만 예전에 성냥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성냥하면 떠오르는 것은 ‘유엔 성냥’입니다. 유엔군이 주고 간 선물이었는지 그 이름이 ‘유엔’이었습니다. 복사기하면 제록스인 것처럼 성냥하면 ‘유엔성냥’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유엔성냥이 나오기 전인지 ‘됫박 성냥’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성냥갑에 담아서 파는 것이 아니라 성냥개비를 되로 담아서 파는 것이라서 됫박 성냥이라고 하였습니다. 됫박 성냥은 시장에서 싸게 파는 것으로 두 세 개가 같이 붙어있는 불량 성냥개비도 상당히 있었습니다. 됫박 성냥을 시장에서 사오면 그 가운데서 불량품을 골라내고, 그것으로 장난치는 것이 초등학교 어린 시절의 추억 중에 하나입니다.

그런데 한 번은 동생과 함께 문제의 그 성냥을 가지고 집 뒤에 있는 동산으로 갔습니다. 때는 봄 방학 때쯤이었고, 거기에는 옆집의 문중 묘가 몇 개 있었습니다. 겨우내 바짝 마른 묘지의 잔디에 성냥을 그어대었습니다. 처음에는 잔디에 손바닥만 하게 붙었는데 확 퍼지는 것이었습니다. 깜짝 놀라서 입고 있던 윗옷을 벗어서 불을 끄려고 내리쳤는데…, 불똥이 사방으로 퍼졌습니다. 불을 끄려고 내리쳤는데 내리치면 칠수록 불은 번졌습니다. 내리치는 힘에 오히려 불똥이 이리저리 튀어서 불이 더 퍼졌습니다. 

지금도 기억이 생생합니다. 다행히 바람이 불지 않아서 온 산을 태우지는 않았지만 남의 산소를 태워먹었습니다. 그래서 집에 와서 아버님께 심하게 꾸중을 들었습니다. 다음 날, 아버님이 소 여물 썰 듯이 짚을 썰어서 묘지 위에 뿌려주시는 것으로 사건은 마무리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지금도 몹시 신기하고도 당황스러웠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것은 불을 내리치니 사방으로 불길이 퍼져갔던 것입니다. 그 생생한 기억은 오늘 본문 말씀을 읽을 때면 언제나 떠오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성령의 불이 임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불을 끄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사울이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 교회의 일곱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인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이는데 앞장섰습니다. 그는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사울은 교회를 잔멸하려고 하였습니다. 집집마다 찾아들어가서, 남자나 여자나 가리지 않고 끌어내서, 감옥에 넘겼습니다. 사냥꾼이 사냥감을 추적하듯이 박해자들은 그리스도인들을 뒤쫓았습니다. 성도들은 예루살렘에 더 이상 머물러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유다와 사마리아 여러 지방으로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결국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자취를 감추게 된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사실은 그 정반대였습니다. 아주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흩어진 그들이 그곳에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복음을 증거 하였습니다.

  
I. 증거

오늘 말씀은 신앙의 위협을 받아 흩어진 사람들이 오히려 어떻게 복음을 증거 하였는지를 보여줍니다. 4절 말씀입니다.

: 4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

예루살렘에서 흩어진 사람들은 두루 돌아다니면서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주목하여야 할 것은 그들은 흩어진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흩어지다[diaspeivrw/디아스페이로]’는 말은 널리 흩뿌리었다는 말입니다. 상징적으로 외국 땅에 분배하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나라 없는 백성, 즉 디아스포라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나라 없는 백성으로 이 나라 저 나라로 흩어져 사는 나그네의 삶을 살았습니다. 핍박을 받은 그들 역시 이곳저곳으로 두루 다니게 되었습니다. 어느 한 곳에 몸을 붙여 살 형편이 못 되었습니다. 한 마디로 처량한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흩어져서 숨어 지낸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가는 곳마다 복음의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여기에서 ‘복음을 전하다[eujaggelivzw/유앙겔리조]’는 말은 ‘기쁜 소식을 알리다’는 말입니다. 자기 집에서 쫓겨난 그리스도인들이 평안히 잘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찾아가서 ‘기쁜 소식’이라는 것을 전했다는 것입니다.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면 복음의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1. 복음의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여기에 우리가 오늘 말씀에서 만나는 첫 번째 역설이 있습니다. 인간적으로 보기에 불행한 사람들이 오히려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사실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이해하기 위하여, 진정한 행복이란 과연 무엇인가 하는 것을 생각하여야 합니다. 과연 자기 집에 사는 사람이 행복한가 아니면 자기 집에서 쫓겨난 사람이 행복한가 하는 것입니다. 생명의 위협을 당하지 않는 사람이 행복한가 아니면 생명의 위협을 당하는 사람이 행복한가 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쫓기어 도망칠 일이 없는 사람이 행복한가 아니면 이리저리 도망치는 사람이 행복한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하여는 사실 대답할 필요가 없습니다. 보나마나 자기 집에서 살고, 생명의 위협을 당하지 않고, 도망칠 일이 없는 사람이 행복합니다. 반대로 자기 집에서 쫓겨나 생명의 위협을 당하며 도망치는 사람은 불행합니다. 

하지만 그렇게만 말하자면 오늘 말씀은 무엇인가 잘못되었습니다. 세상 말로 불행한 사람들이 행복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였기 때문입니다. 집이 없는 사람이 집이 있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였고, 도망치는 사람이 평안히 살고 있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성경이 말하는 복음, 기쁜 소식은 세상에서 말하는 기쁜 소식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야곱, 이삭의 아들이자 열 두 아들을 두었던 야곱이 있습니다. 야곱의 열 두 아들 중에서 열한 번째 아들이 요셉입니다. 그 요셉이 위의 형들에게 미움을 받아 애굽으로 팔려갔습니다. 아버지 야곱은 사랑하는 아들 요셉이 짐승들에게 물려 죽은 줄로만 알고 슬퍼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들 요셉이 살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것도 애굽의 총리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야곱은 총리가 된 아들을 만나려고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리고 아들의 인도로 애굽의 왕 바로의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이 때 야곱이 바로를 축복하였습니다(창 47:7). 이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총리의 아버지라고 해도 하늘과 같은 존재인 바로를 축복한다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일반적으로 복을 빌어주는 것은 높은 사람이 낮은 사람에게 해 주는 것입니다. 귀한 사람이 천한 사람에게, 부한 사람이 가난한 사람에게 복을 빌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이 바로를 축복하였습니다. 더욱이 야곱은 바로에게 자신의 일생을 ‘나그네 길의 세월’이라고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다’(창 47:9)고 하였습니다. 기근을 피하여 살려고 온 나그네가 큰 집에 사는 바로를 축복한 것입니다. 험악한 세월을 보낸 야곱이 궁전에서 사는 바로를 축복한 것입니다(창 47:10). 

인간적으로 복 받은 사람이 복 받지 못하는 사람에게 복음의 말씀을 전하는 것은 아닙니다. 가난한 사람이 부자에게 복음의 말씀을 전할 수 있습니다. 건강한 사람이 건강하지 않은 사람을 축복하는 것만도 아닙니다. 건강하지 않은 사람이 건강한 사람을 축복할 수도 있습니다. 

오늘 말씀이 분명하게 이야기하는 것은 환난과 핍박으로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면서 복음의 말씀을 전하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어려움을 당한 사람들이 편안한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집 없이 떠돌아 다시는 사람이 집에서 평안하게 지내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이것이 신앙의 역설입니다. 그것은 복음의 말씀이 아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비록 가난할 지라도 복음의 말씀을 듣지 못한 사람에게 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복음의 말씀을 깨달은 사람이라면 그가 건강하지 못해도 이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라도 전할 수 있습니다. 
  
복음의 말씀이 무엇이기에 이것을 가진 사람은 이것을 가지지 못한 사람에게 신분이나, 형편이나, 상태를 떠나서 전할 수 있는 것입니까? 인간적으로 부족한 사람이 오히려 넉넉한 사람에게 복음의 말씀을 전할 수 있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들은 왜 어떻게 복음의 말씀을 전할 수 있었던 것입니까? 5절 말씀입니다.

: 5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예루살렘 교회에 핍박이 일자 흩어진 사람 중에 빌립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빌립은 스데반과 함께 예루살렘 교회의 일곱 지도자 중에 한 사람이었습니다. 스데반이 순교하고, 예루살렘에 엄청난 핍박이 있자 그는 사마리아로 내려갔습니다. 그러나 역시 그도 안전한 곳에 숨어 지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전파하다[khruvssw/케륏소]’는 말은 말씀을 전하는 사자로써의 직무를 수행하였다는 말입니다. 빌립은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믿었고,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라는 것을 전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엄숙한 사명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이것은 빌립만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핍박 때문에 예루살렘에서 흩어진 사람들이 전하였던 말씀의 내용 역시 그리스도였습니다.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면서 전하였던 복음의 내용이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시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전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2. 그리스도를 전하였습니다.

처음 교회가 전하였던 기쁜 소식의 내용은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을 시작하는 1:1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는 것입니다. 

마가복음을 시작하는 1:1 역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입니다. 

누가복음 역시 앞부분에서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눅 2:11)고 하였습니다. 

요한복음은 아예 복음서를 기록한 목적에 대하여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요 20:31a)고 하였습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이 기록한 복음서들은 예수님이 그리스도라고 하는 것을 각각 전하였습니다.

왜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이 복음일까요?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라는 말입니다. 로마 황제나, 헤롯왕이 그리스도가 아니라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로마 황제나 헤롯이 해결할 수 없는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신 분이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돈이나 권력이나 명예나 건강이 그리스도가 아니라 예수님이 그리스도라고 믿는 것입니다. 

돈이나 권력이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있지만 이것으로 전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예수님이 해결하십니다. 명예나 건강이 소중한 것이기는 하지만 역시 이것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것을 예수님이 해결하십니다.

‘그리스도’라는 말은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분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인 죄와 방황 그리고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하신 제사장이십니다. 

예수님은 길과 진리와 생명으로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을 알려주신 선지자이십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심으로 죽음의 세력을 정복하신 만왕의 왕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은 인생의 죄 짐을 벗어던지고, 인생의 방황을 끝내고, 인생의 죽음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이것이 영생입니다. 

성경은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롬 5:21)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어서 구원을 얻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어서 영생을 얻습니다.

그런데 인생의 참 빛을 발견한 사람이 핍박이 있다고 그것을 포기하겠습니까? 그럴 수가 없어서 흩어져서도 그리스도를 전하였습니다. 인생의 방황을 끝낸 사람들이 이것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럴 수가 없어서 쫓겨난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전하였습니다. 

인생의 문제를 푸는 열쇠를 발견한 사람이 이것을 감추어두고 혼자만 좋아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럴 수가 없어서 이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생명은 예수님이 그리스도라고 믿는 믿음입니다. 교회의 생명은 예수님이 그리스도라고 전하는 복음입니다. 이 믿음을 가지고 이 복음을 전하는 살아있는 성도, 살아있는 교회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핍박을 받아 쫓겨난 사람들이 복음을 전하였다고 하는 것이 첫 번째 역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나가서 복음을 전하자 더 놀라운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을 통하여 열매가 맺혀졌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두 번째 역설입니다.

  
II. 열매
  
누가 도망 다니는 사람의 말을 믿겠습니까? 누가 나그네의 말을 신뢰하겠습니까? 누가 어려움 당하는 사람의 말을 따르겠습니까? 그런데 열매가 있었습니다. 그것도 많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능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먼저 6절 말씀입니다.

: 6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한마음으로 그가 하는 말을 따르더라.

빌립이 사마리아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전하자 무리가 듣고, 보고 그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여기에서 ‘무리[o[clo"/오클로스]’는 다수의 많은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한 두 사람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빌립을 따랐습니다. 그리고 ‘따르다[prosevcw/프로세코]’는 말은 ‘몰두하다’, ‘주목하다’는 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빌립이 하는 말에 모두 하나같이 귀를 기울였습니다. 

1. 따르는 무리가 있었습니다.

인간적으로 아무도 귀를 기울이지 않을 것 같으나 전하면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람을 움직이는 것은 논리가 아니라 열정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논리적으로 따져서 움직이기 보다는 열정에 감복되어 따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차원에서 사람을 움직이는 것은 믿음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말을 선포할 때, 하나님께서 사람의 마음을 열어주십니다. 사람이 사람을 움직이는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이 사람을 통하여 사람을 움직이는가 하는 것은 매우 예민한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복음을 전할 때, 성령님께서 들어야 할 사람의 귀를 열어 주십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나아갈 때 예비 된 영혼을 하나님께서 만나게 하십니다. 

우리의 주변에는 거짓의 영에 미혹되는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영이 감동시켜주셔서 마음을 여는 사람이 어찌 없겠습니까? 믿음으로 예수님이 내 인생의 그리스도라고 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통하여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있게 하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빌립이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믿음으로 전할 때 또 어떤 놀라운 열매가 맺혔습니까? 7절 말씀입니다.

: 7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가고, 또 많은 중풍병자와 못 걷는 사람이 나으니,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복음을 전할 때, 귀신 들린 많은 사람에게서 악한 귀신들이 큰 소리를 지르면서 나갔습니다. 또 많은 중풍병 환자와 지체장애인이 고침을 받아 나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낫다[qerapeuvw/데라퓨오]’는 말이 ‘시중들다’, ‘봉사하다’는 말입니다. 육체적으로 장애를 가지고 있어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오던 사람이 다른 사람을 섬기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회복입니다. 

신체가 멀쩡한 사람이라도 다른 사람을 섬길 줄 모르는 사람이라면 건강한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빌립이 전하는 말을 듣고 사람이 변하였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본 사람들이 빌립을 따랐습니다. 이것이 건강이자 회복입니다.


2. 놀라운 회복이 있었습니다.

가장 무서운 말은 ‘사람 변했다’는 말입니다. 역시 가장 놀라운 말은 ‘사람이 변했다’는 말일 것입니다. 순진하고 착한 사람이 변했다면 무서운 일입니다. 그런데 자기만 알던 사람이 다른 사람을 알고 섬기게 되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귀신의 놀림을 받던 사람이 성령의 이끄심을 받게 되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영과 혼에 놀라운 회복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이들의 삶에 이런 놀라운 회복이 계속 되기를 소원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을 통하여 우리 주변 사람들에게 놀라운 회복이 있기를 소원합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라는 선포가 있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말을 듣고 따르는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놀라운 회복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나타나는 또 다른 열매가 있습니다. 8절 말씀입니다.

: 8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 

우리는 그 성이 사마리아 지방의 어느 마을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여기에서 ‘성[povli"/폴리스]’은 크든지 작은지 성벽으로 둘러싸인 읍이나 도시를 말하기 때문입니다. 정말로 놀라운 열매는 그 도시의 사람들을 모두 기뻐하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 날아온 불씨가 그 도시 전체에 활활 타오르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복음이 전파되는 과정에서 매우 상징적인 일입니다. 예루살렘에서 교회가 시작되었으나 예루살렘 전체가 복음의 기쁨을 누리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흩어진 사람들이 복음을 전할 때 한 성에 큰 기쁨이 있었습니다. 그 성의 모든 사람이 기뻐하는 큰 기쁨입니다.


3. 커다란 기쁨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 한 도시 전체가 예수님을 믿었던 경우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현재 터키의 이스탄불은 한 때 콘스탄티노플이라고 불린 거룩한 도시였습니다. 이탈리아의 로마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우리가 매우 조심하여야 할 문제들이 있었습니다. 정치적인 목적이나 권력의 힘으로 개종을 강요한 신앙은 오래가지 못하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이 도시 전체에 파급되는 것을 두려워하여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자유와 기쁨과 해방이 개인의 차원에 머물지 말아야 합니다. 개인을 영적으로 회복시킬 뿐만 아니라 도시 전체를 거룩하게 변화시킬 비전과 사명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복음이 한 지역 전체로 퍼져나가기를 바라고 기도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주장하는 신념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랑이 이 지역에 가득 차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결코 정치적이거나 폭력적인 힘에 의하여 추구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오로지 예수님의 사랑을 믿고 실천하는 것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 지역을 품고 기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 지역 사회 속에서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핍박을 받아 흩어진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전할 때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었고, 사람들에게 회복이 있었고, 한 지역이 변화되었습니다. 그러니 자신이 가진 인간적인 약점 때문에 복음전하는 것을 망설이지 마시기 바랍니다. 인간적으로 부족한 것이 복음을 전하는데 장애라고 여기고 주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자신의 모습 그대로 복음을 전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어떤 형편 가운데 있던지 자신이 만난 그리스도를 전하시기 바랍니다. 

이 시대는 안일이 우리를 죽이고 있습니다. 불가지론이 우리를 무능하게 합니다. 염려가 마음을 둔하게 합니다. 여가가 신앙을 대체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믿는 믿음을 분명히 하고 담대히 전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분명히 일하실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 6:9)고 하였습니다. 요즘은 전도가 힘들고 안 된다는 생각을 성도들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전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일하십니다. 고난이 있어도, 박해가 있어도 전해야 합니다. 전하면 전하여지고, 전하지 않으면 전하여지지 않습니다.

신앙을 위협하는 불신앙을 이기기 위하여 오히려 전도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어 열매를 거두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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