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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옥중에서 낳은 아들을 위하여 (빌 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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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중에서 낳은 아들을 위하여 (빌 1:8-22)
    
오늘 읽은 빌레몬서는 바울 서신 중에 아주 독특한 편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편지는 바울의 서신들 중에 유일하게 남은 사신(私信), 개인의 사사로운 편지입니다. 

바울은 로마 감옥에서 만났고 전도하여 예수 믿게 된 종, 오네시모라는 사람을 위하여 오네시모의 주인, 빌레몬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오네시모는 주인 빌레몬의 집을 도망하여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는 로마에 온 사람이고, 로마에서 어떤 일로 붙잡히게 되었는지 바울이 갇힌 감옥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오네시모는 주인 빌레몬의 돈을 훔쳐가지고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는 대도시 로마에 와서 몸을 숨기려고 하였습니다. 오네시모는 로마에 와서 관리에게 잡혀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고, 바울을 만나서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오네시모가 먼저 바울을 알아보았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가 골로새에서 빌레몬이란 사람의 노예로 살고 있었는데, 주인과 주인의 부인과 아들이 다 바울을 만나서 예수를 믿은 것을 알고, 자기 집에 와서 머무는 것도 목격하였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오네시모를 만났을 때부터 고민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당시에 도망친 노예를 숨겨주거나, 밀고하지 않거나, 그를 도와 도망치게 하면 범법 행위로 감옥에 가야하고, 엄청난 벌금에 징계를 받아야 했습니다. 심지어는 자기도 노예로 전락할 수도 있었습니다. 

지금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 있었고, 감옥에서 오네시모를 만났습니다. 빌레몬의 집이 소아시아의 골로새에 있고, 로마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기에 오네시모가 바울의 전도 받아 예수를 믿게 되었는지 그가 로마에서 어떻게 감옥에 들어갔는지 알 수도 없고, 알려지지도 않을 일입니다. 오늘과 같이 통신 수단이 좋은 시대가 아니고, 반드시 인편으로만 소식을 전할 수 있고, 편지를 써도 사람 편으로 보내야 알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골로새 교회의 목회자 에바브라가 로마에 왔습니다. 에바브라는 골로새교회의 목회자요, 그 교회의 가장 핵심적인 교인인 빌레몬의 노예가 로마에 와서 바울의 감동을 받아 예수 믿게 된 것을 보았습니다. 

오네시모를 숨기지도 못합니다. 전혀 모르는 일로 덮어두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오네시모를 주인에게 보내든지, 에바브라에게 함구하라고 해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도인 바울이 옳은 것은 옳다고 하고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해야 합니다. 이런 일에 인정에 끌리고 사정을 보다가는 복음이 무너질 수도 있습니다. 

바울은 감옥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곁에 두고 어려운 때에 자기를 돌보게 하고, 자신의 소식이나 지시할 일이 있으면 여러 교회와 제자들에게 알려주는 사람으로 곁에 두었으면 좋을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오네시모를 곁에 머물게 하고 싶었습니다. 바울은 노예 출신인 오네시모를 놓고 많은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였습니다. 오네시모를 옆에 두고 함께 복음을 전하고 간증도 하고, 바울을 돕게 하면 좋을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오네시모를 자기의 심복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오네시모의 주인인 빌레몬의 어떤 허락이 없으면 아무 것도 하지 않기로 하였습니다. 

오네시모는 도망친 노예인데, 그를 주인에게 돌려보내는 것은 주인에게 맞아 죽으라는 말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노예가 주인이 싫다고 주인집을 떠났습니다. 그것도 물질적으로 큰 손해를 끼치고 돈을 훔쳐 가지고 달아났습니다. 그동안 주인 빌레몬이 받은 고통이란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돌려보내는 것도 무모한 일 같고, 자신이 데리고 있는 것도 정답이 아니고, 더욱 무모한 일이 될 수 있었습니다. 돌려보내려고 해도, 오네시모가 정말 잘못을 뉘우치고 돌아갈 것인지, 주인이 빌레몬의 도망친 노예를 기쁜 마음으로 받아줄 것인지, 사실 정답이 없는 상태에서 그래도 주인에게 돌려보내고 있습니다. 바울은 정말 믿음이 큰 사람이요, 사람들을 신뢰하고 믿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을 얻은 사람으로 살았습니다. 

당시 로마제국의 사회제도 아래에서 주인과 노예는 절대 소유관계에 놓이게 됩니다. 노예란 말하는 짐승이요, 알아듣는 기계였습니다. 도망친 노예를 다시 잡아오면 다리에 쇠사슬을 매어 일을 시킬 수도 있었고, 멀리 다른 나라에 팔아버릴 수도 있었고, 도망친 노예라는 낙인을 찍는데 이마에다 도망친 노예라고 표시할 수도 있었습니다. 

반항하는 노예는 단호하게 제거되고 도망치는 노예는 도망자(Fugitivus)라는 첫 글자인 F자를 인두로 이마에 낙인을 찍었습니다. 그래도 도망치면 최악의 경우는 십자가에 달아 죽였습니다. 그래도 한 노예가 처형되었다는 말을 듣거나 보면, 오기가 나고 기회만 되면 주인을 살해하고 도망치려는 시도가 빈번하게 발생하였습니다. 이런 노예제도가 사라진 시대에 사는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로마제국 안에는 약 6000만 명의 노예가 있었습니다. 자유민 보다 더 큰 세력을 형성할 수도 있습니다. 노예들이 결집해서 반란이 일어나면 자유 시민들에게 엄청난 위협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노예 폭동이 일어나면 자유 시민 사회는 그 날로 붕괴될 수도 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로마제국의 노예제도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오네시모를 주인에게 돌려보낸다고 하는 것도 무모한 모험이 될 수도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바울은 오네시모의 손에 그의 편지를 들려서 주인 빌레몬에게로 보내고 있습니다. 오네시모란 이름의 뜻은 ‘유익하다’는 뜻이지만, 이름의 뜻과는 다르게 주인에게 무익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바울은 이름의 뜻 그대로 유익한 사람이 되었다고 오네시모를 극구 칭찬합니다. 

11절입니다. “그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라고 하셨습니다. 바울은 오네시모가 참으로 회개하고 예수 믿어 구원받은 사람이요, 그의 이름과 같이 유익한 사람이 되었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잠시 동안 이름값도 못하는 사람으로 살았지만, 복음을 만나고 주님을 영접하고 보니 유익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빌레몬이 잠시 그를 잃어버렸지만, 영원히 그를 얻게 되었습니다. 

12절입니다. “네게 그를 돌려 보내노니 그는 내 심복이라”고 했습니다. ‘심복’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스플랑크나’라고 하는데, 이 말은 ‘마음’으로 번역하기도 하고, ‘내장’이나, ‘핵심’을 말합니다. 이 말을 확대하면 바울 자신이라는 말과 같습니다. 내 마음이라고 하여 마치 자기 자신이 빌레몬에게로 가는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13절에서 “그를 내게 머물러 있게 하여 내 복음을 위하여 갇힌 중에서 네 대신 나를 섬기게 하고자 하나” 

바울이 주인인 빌레몬에게 베푼 사랑과 복음전파는 얼마나 값진 것입니까? 바울이 베푼 헌신과 사랑으로 빌레몬의 가정이 예수 믿어 구원받았습니다. 지금 오네시모를 바울 곁에 머물게 하고 바울을 섬기게 할 수도 있습니다. 빌레몬이 로마에 와서 바울을 돕고 섬길 수 있어야 하는데, 빌레몬을 대신해서 그의 노예를 바울 곁에 두고 섬기게 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런 일을 억지로 할 수도 없고, 선한 일이 억지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빌레몬의 승낙도 없는데, 바울이 혼자만의 결정이어서는 안 됩니다. 이렇게 주의 사역자를 돕는 선한 일이 억지같이 되지 아니하고 자원함이 되어야 합니다. 

15절입니다. “아마 그가 잠시 떠나게 된 것은 너로 하여금 그를 영원히 두게 함이리니”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빌레몬은 오네시모를 괘씸한 노예가 아니라, 같은 그리스도인으로, 그리고 나아가 형제로 맞아주어야 하며, 사랑하는 형제로 맞아주어야 합니다. 빌레몬은 자기에 복음을 전해주고 자기 집안 전체가 구원받게 인도하신 그 사도바울이 로마에 가서, 그것도 감옥에서 오네시모에게도 복음을 전하여 예수 믿게 한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자기 집에 있을 때에 예수 믿게 해야 했는데, 바울이 그 일을 하신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16절입니다. “이 후로는 종과 같이 대하지 아니하고 종 이상으로 곧 사랑 받는 형제로 둘 자라 내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과 주 안에서 상관된 네게랴”고 하셨습니다. 

종과 같이 대하지 말고, 종 이상의 형제로, 사랑받는 형제로 대해달라고 부탁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종과 형제를 대조하고 있습니다. 종이라고 하면 노예입니다. 노예는 자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종을 사랑받는 형제로 바꿀 수 있어야 합니다. 로마의 법에 따르면 오네시모는 여전히 노예의 신분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빌레몬과 우리 성도들에게는 종이란 관계를 뛰어넘어야 하고, 사랑하는 형제로 받아야 합니다. 상전과 종의 관계도 주종의 관계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형제로 받아야 합니다. 

바울은 오네시모를 형제로 받아들인 것처럼, 빌레몬이란 사람도 그를 당연히 형제로 받아야 합니다. 바울이 오네시모를 사랑하는 것보다 빌레몬이 더 큰 사랑으로 받아주라고 요구합니다. 

17절입니다. “그러므로 네가 나를 동역자로 알진대 그를 영접하기를 내게 하듯 하고” 빌레몬이 바울을 동역자로 알고 동역자로 믿고 함께 주의 일을 하였다고 하면 함께 친구요 동무로 알았습니다. 그렇다고 하면 이제 빌레몬은 오네시모를 형제로 동역자로 받아주라고 합니다. 마치 사도바울을 영접한 것처럼 오네시모를 그렇게 사랑하는 형제로 받아주라고 합니다. 

오네시모가 주인의 집을 떠날 때에 물질적인 손해를 끼쳤습니다. 그렇다고 얼마의 손해를 명시하지 않지만, 불의하였거나, 빚진 것이 있으면 바울에게 달아놓고 후에 바울이 계산하게 하라고 합니다. 바울이 오네시모가 손해를 끼친 것을 대신 갚아주겠다고 합니다. 오네시모가 일해야 하는 것을 일하지 않았으니, 손해가 되었고, 집을 떠날 때에 로마에까지 갈 필요한 비용을 예상하고 도둑질하여 떠난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오네시모의 영적인 아버지로서 그 책임을 다하려고 합니다.

여기서 바울의 노예제도에 대한 견해를 알아야겠습니다. 사도바울은 생전의 가르침 속에 노예제도를 비난하거나 없애버리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당시의 뿌리 깊은 관습인 노예제도를 전복시키려고 명령하거나 부추기지도 않았습니다. 바울은 로마제국의 노예제도에 대하여 우선 인정하고 노예들에게 주인에게 복종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엡6:5-7에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기쁜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골3:22-24에서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아나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노예들에게만 고분고분에게 복종하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주인들에게도 권면합니다.

베드로 사도도 바울과 같은 생각이었습니다. 

벧전2:18-20에서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종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고 했습니다. 

노예로서 착한 노예가 되고, 일 잘하고 까다로운 주인에게도 잘 참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당시의 노예제도를 건드릴 수 없었습니다. 너무나 중대한 문제이기 때문에 노예제도를 무너뜨려라, 노예제도를 폐지하라고 하다가는 기독교는 로마제국에 발을 들여놓지도 못하는 사교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울의 노예관을 정리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바울의 노예관을 비판하고 있지만, 라이트후트(Lightfoot)라는 학자는 바울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가 이런 말을 합니다. “해방이란 말이 그의 입술에서 떨고는 있었으나 그래도 바울은 결코 그것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노예제도는 고대 사회에서 없어서는 아니 될 제도였습니다. 로마사회 전체가 노예제도를 바탕으로 건설되었습니다. 옛날에는 전쟁하다보면 한 민족이 패망하여 전체가 노예로 전락할 때가 있습니다. 

노예제도가 없는 고대 사회는 상상할 수 없도 없었습니다. 기독교회가 들어가서 노예제도를 폐지하라고 선동하였다고 하면 그 날로 기독교는 발을 들여놓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참다운 해방이란 깊은 신앙, 성숙한 신앙에서 나올 수 있습니다. 성숙한 때가 되어야 노예제도는 없앨 수 있게 됩니다. 사랑의 운동이 어떤 제도보다도 힘이 있고, 위대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그때까지 노예제도는 존속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도 상전들, 주인들에게 노예를 잘 대하라고 권면합니다. 

골4:1에 “상전들아 의와 공평을 종들에게 베풀지니 너희에게도 하늘에 상전이 계심을 알지어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어 구원받고, 그리스도의 피를 나눈 형제요 자매들이 되었습니다. 새로운 관계가 형성되었으니, 이것이 천국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여행 중에 어떤 교회에 들어가서 예배드릴 때가 있습니다. 그래도 조금도 어색하지 않고, 내 아버지의 집, 주님의 성전에 와서 함께 예배드리는 것은 한 형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 차별이 없습니다. 교회 안에 차별이 있다고 생각하시는 그 사람이 남을 차별하기 때문으로 알아야 합니다. 종이나 자유인이나 차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목사라고 해서 높임을 받는 것이 아니라, 더 섬겨야 하는 자리입니다. 장로라고 하면 존경받는 위치에 있습니까? 그 분이 모든 성도들 섬기는 일을 잘 하시기에 존경하고 있습니다. 

골3:11 “거기에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파나 무할례파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차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고 하셨습니다. 

갈3:28에서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가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라고 하셨습니다. 

고전7:22에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인이요 또 그와 같이 자유인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 주님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라면 그가 비록 노예라고 하여도 주님께 속한 자유인입니다. 같은 원리로 자유인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라고 하여도 그리스도의 종들입니다. 

여기 빌레몬서에는 도망친 노예 오네시모로 하여금 주인에게 돌아가라고 하면서 주인에게는 사랑받은 형제로 받아달라고 간곡하게 권하고 있습니다. 

21절에 “나는 네가 순종할 것을 확신하므로 네게 썼노니 네가 내가 말한 것보다 더 행할 줄을 아노라”고 합니다. 바울은 사람을 얻는 탁월한 영력이 있었습니다. 빌레몬이라는 사람이 바울의 말을 귀하게 여기고 순종할 것을 확신하면서 부탁하였고, 이런 편지 한 장을 써서 노예의 손에 들려주고 주인에게 보내고, 주인은 마치 바울을 맞이하는 것처럼 그렇게 환대하고 사랑받는 형제로 받아 줄 것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요 자매요, 서로 사랑하고 섬겨야 하는 새로운 관계가 수립되었습니다. 우리 사회도 양반이 있었고, 평민도 상민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숙한 사회, 그리스도의 사랑이 충만한 사회가 되면 사회적인 계급이나 신분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주인이란 말이나 노예, 종이란 말이 사용하기에 부적합한 말이 됩니다. 어떤 한 사람을 주인이라고 부르고, 다른 한 사람에게는 노예라는 말을 사용하기가 부끄러워집니다. 우리는 다 사랑할 사람이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가 되었습니다.

초기의 기독교회는 노예제도를 두둔하지도 않았지만, 공격하지도 않았습니다. 노예 해방을 부르짖지도 않았습니다. 종 이상의 사랑받는 노예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부끄럽게 여기고 노예문서를 불사르고 독립을 시키고 서로 평등한 사회를 만들 때까지 유보해야 하는 일들을 인정하였습니다. 

오늘 사도바울의 뜨거운 사랑과 믿음을 본받아야 합니다. 그가 감옥에 있으면서도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제시하고 예수 믿어 구원받는 진리의 말씀을 전파하였습니다. 

우리 주님의 최대의 관심사는 무엇이었습니까? 죽어 가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를 죄악 세상에서 건져내어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하여 일꾼으로 삼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사람을 살리는 일, 예수님께서 그렇게 사랑하셨던 사람을 구원하는 사역을 오늘 우리에게 맡기셨습니다. 

사람이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지 못하고 죽으면 지옥에 들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미 그들은 심판을 받고 있으며, 정죄함을 받아 멸망의 지옥에 들어갑니다. 지옥이란 곳이 얼마나 무서운 곳이며, 정말 그곳에만은 들어가지 말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가나안 농군학교를 이룩한 김용기 장로님이 쓰신 책을 본 적이 있는데, 오래된 이야기입니다. 당신이 이룩하신 가나안 농군학교에서 양계장을 하고 있었는데, 겨울이 되면 양계장에 연탄난로를 피워 놓았다고 합니다. 

삭풍이 휘몰아치는 12월 한 밤중에 양계장에 불이 났는데 갑자기 불이 일어나니 불길에 감당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교육을 받던 생도들이 몇 십 명이 있었지만 속수무책이었습니다. 그들의 눈앞에서 아비규환이 일어나는데 50여 마리의 앙고라토끼와 200마리 닭에 불이 붙으니 닭은 불붙은 폭탄이 되어 하늘로 치솟아 오르고 토끼들은 길길이 날뛰는데 생도들의 앞에 생지옥이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불을 끄려고 해도 불길을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때에 김용기 장로님이 소리쳤습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 이 자리에 조용히 앉아 저 광경을 바라보면서 살아있는 교육을 받읍시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 날을 회상하면서 김장로님은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인간이 자신의 죄를 회개하지 않고 육신의 욕심만 추구하며 살다가 갑자기 죽음에 직면하는 그 날, 그 영혼은 유황불이 이글거리는 지옥에 떨어져 울부짖을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양계장의 불길이 다 사그라진 후에 장로님은 생도들을 이끌고 예배당으로 들어갔습니다. 거기서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모두다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고 가슴을 치면서 기도하였습니다. 그 날 생도 중에는 법무부에서 위탁한 사람으로 1000명의 깡패를 거느린 두목이 있었는데, 회개하여 후에 목사가 되었습니다. 법대를 나와 사법고시를 준비하던 청년이 가나안 농군학교의 선생이 되고 장로님의 사위가 되었다고 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지금 살아있는 것으로 감사하면서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면하고 구원받은 것을 감사하면서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오늘 우리는 사도바울을 본받아야 합니다. 노구의 몸으로 감옥에 수감되어 불편하게 살고 있지만, 함께 들어온 한 사람에게 복음을 전파하였는데, 그가 오네시모였습니다. 오네시모를 주인에게 돌려보내면서 모든 것을 자기가 책임지겠다고 약속하면서 주인 빌레몬에서 사랑받은 형제로 받아주라고 간곡하게 권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을 불쌍히 보고 영혼을 구원하고, 그의 앞날을 위하여 돌보아고, 끝까지 인정하고 사랑하는 것을 우리도 본받아야 합니다. 주인을 떠나온 불의한 노예라고 한번도 책망하지 않았습니다. 감옥에서 낳은 나의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바울도 같은 심정과 애정을 가지고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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