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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회복(7) : 신앙 안에서 한 가족, 교회의 회복 (행 4:3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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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7) : 신앙 안에서 한 가족, 교회의 회복 (행 4:32-37)

우리 교회가 해외에 100개의 교회를 건축하기 위한 목표를 가지고 꾸준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지난 14일에 단기 선교팀이 가서 저녁 9시 30분에 입당예배를 드렸습니다. 교회에서 9시 30분에 출발하였는데 현지에 도착하여 저녁 식사를 하고 교회에 도착하니까 9시가 넘었습니다. 예배당에 많은 성도들이 모여 그 때까지 찬양하며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14일 입당 예배를 드리고 15일 아침 일찍 일어나 아침밥을 옥수수로 대체하고 우리가 중국 땅에 처음 건축했던 교회를 방문하였습니다. 사역자를 만나 약간의 사역비를 전달해주고 위로해 주었습니다. 이번 건축한 교회의 사역자는 복음에 대한 열정과 생명에 대한 사람이 뜨거운 부부였습니다. 

신학을 공부하느라 자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도 보지 못했는데 마침 그날이 아버지가 돌아가신지 3년이 되는 날이라고 아내가 울먹이며 간증을 하였습니다. 자기 땅을 내 놓아 교회를 건축하였습니다. 교회를 지을 수 없는 상황에서 기도를 하였는데 우리교회가 도와주어 교회를 건축할 수 있게 되어 감사하다고 하였습니다. 

저녁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였습니다. 점심을 먹고 오후 2시부터 다시 부흥회를 시작하였는데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 교회에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말씀을 전하고 우리 집사님들이 간증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기도회를 하며 안수 기도를 하였습니다. 같이 갔던 선교팀이 그들을 위해 기도해 주었습니다. 

기도가 끝난 후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을 초청하여 결신기도를 하게 하였습니다. 7명의 사람들이 예수를 믿겠다고 작정하고 앞으로 나와 결신기도를 하게하고 성경을 선물로 주었습니다. 생명 하나가 온 천하보다 귀하다고 했는데 교회를 건축해 주고 헌당한 것도 감사한 일이지만 이번 단기 선교를 통해 7명의 사람이 예수 믿고 교회 나오기로 작정한 것은 참으로 감사하고 기쁜 일입니다. 

우리 성도님들이 열심히 기도해주시고 협력해 주어서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신 줄 믿습니다. 같이 갔던 선교팀들이 아직 완공하지 못한 부분들을 완공할 수 있도록 헌금을 해 주었습니다. 제가 그 헌금을 전달하면서 성도님들에게 부탁하였습니다. 그 헌금에 여러 성도들이 헌금을 하여 교회의 부족한 부분을 완전하게 완공하라고 부탁을 하였습니다. 그럴 때 그들은 아멘으로 큰 소리로 화답을 하였습니다. 

말씀을 전할 때마다 에스라의 부흥 운동 때 일어난 것처럼 아멘 아멘하며 큰 소리로 화답하는 그들의 열심은 대단합니다. 우리 교회에서 해외 100교회 건축운동을 하면서 이번에 12번째 교회를 건축하여 하나님께 드렸는데 이 교회는 한 가정이 헌금을 하여 건축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처음으로 예수님을 영접하여 믿게 된 가정입니다. 학습 세례를 받고 할아버지부터 손자까지 온 가족이 함께 우리 교회에 나오며 섬기는 가정입니다. 집사님 가정에서 3개의 해외 교회를 건축하기로 결심하고 직장을 30년 넘게 다니면서 적금을 들었던 것을 하나님의 교회를 건축하는데 드렸습니다. 아들이 첫 월급을 드렸고 남편이 승진하여 건축헌금으로 드렸습니다. 그 헌금들을 모아 두 개의 교회를 건축하였습니다. 

얼굴도 모르고 피 하나 석이지 않은 나라 사람들에게 거금을 들여 교회를 건축해 준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게 돈이 많은 재벌 형제들도 서로 돈을 더 많이 가지려고 싸우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구제주로 믿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삶이란 이 땅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천국이 있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음으로 그 영원한 천국에 가게 되고 우리 인생의 진정한 평가는 그 영원한 천국에서 있다는 사실을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천국이 있다는 사실을 믿고 있습니까? 만약 오늘 죽어도 천국에서 눈을 뜰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천국을 믿는 신앙 공동체입니다. 영원한 나라를 사모하는 공동체이며 이 땅에서 그 천국의 삶을 맛보고 그 천국의 삶을 실현시키려고 애쓰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히 9:27)” 믿는 자는 영생에 믿지 않는 자는 영벌에 들어갑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5:10)” 

인생은 이 땅에서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 죽음으로 끝이 납니다. 어린이나 늙은이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권력있는 자나 무시당하는 자나, 미남이나 추남이나, 학식 있는 자나 무식한 자나 다 죽음 앞에는 평등합니다. 그리고 그 후에 또 다른 삶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부자와 나사로 비유를 통해 정확하게 말씀해 주었습니다. 우리는 영원한 천국을 사모하며 이 땅에서 천국적인 삶을 맛보고 이 땅에 천국적 삶이 이루어지기를 꿈꾸는 사람들입니다. 

1. 우리가 꿈꾸는 교회, 우리가 회복되어야 할 교회의 모습은 어떤 모습이겠습니까?

32절 말씀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교인들이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필요에 따라 나누어 썼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한 마음이 된 것입니다. 단순해 진 것입니다. 천국을 소망하는 지향점이 같아지고 부활을 믿음으로 가치관이 같아진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재물인데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고 하나님 것이라고 인정했다는 것입니다. 재물관이 하나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 한 사람도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하며 욕심을 부리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힘에 의해 통치되는 공동체가 아니라 은혜에 의해 통치되는 공동체의 모습니다. 세상의 공동체는 크게 나누면 힘에 의해 통치되는 공동체와 은혜에 의해 통치되는 공동체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은 세속사와 구속사로 구분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로 구분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정부 권력을 중심으로 흐르는 세속적인 나라가 있고 교회 공동체를 중심으로 흐르는 구속사가 있습니다. 

힘 가운데 대표적이며 최종적인 힘은 돈입니다. 세속적인 나라의 맨 밑바닥에 놓여 있는 것은 돈입니다. 돈이 최고의 권력을 가지는 것입니다. 세상은 모두 돈에 의해 지배되고 돈에 의해 굴러가는 것입니다. 날마다 보도되는 사건의 밑바닥에는 늘 돈이 있습니다. 

신문에 보니까 전북 전주시에서 22세 남자와 22세 여자가 데이트를 하다가 재미로 복권을 샀다고 합니다. 여대생의 돈으로 산 즉석복권 1000원짜리 5장 중 한 장이 5000원, 두 장이 1000원에 당첨되었답니다. 다시 산 복권 7장 가운데 남자가 긁은 복권 1장이 5억원에 당첨되었답니다. 이 커플은 갑자기 생긴 돈으로 아주 기뻐했답니다. 

그런데 남자는 세금을 뗀 수령액 3억6800만원 대부분을 자신의 어머니 통장에 입금하고 1500만원을 여자에게 주었답니다. 그래서 자신의 몫을 달라고 하니까 남자가 주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자가 남자를 고소했다고 합니다. 

재벌 형제도 돈 앞에 싸우고 있지 않습니까? 돈을 최고의 가치로 두고 사는 사람들은 거침 없이 

“돈은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안락한 침실에 눕게 하시고 달콤한 술집으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호주머니에 돈이 있음이라 
 돈의 권세와 보호가 나를 안전케 하는도다 
 돈이 원수를 만들고 나를 괴롭게 하니 내 머리에는 항상 돈 생각으로 근심의 잔이 넘치는도다 
 나의 평생에 욕심과 정욕이 나를 따르리니 내가 돈을 믿고 살다가 죽으리로다.”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교회 공동체는 돈이 지배하는 곳이 아닙니다. 예수님 말씀합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6:24)” 

하나님이 모든 것의 주인이라고 한 마음으로 인정하는 공동체가 교회 공동체입니다.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는 하나님 나라의 맨 밑바닥에 놓여 있는 것은 은혜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은혜에 의해 통치되고 은혜로 살아가고 은혜로 구원받고 은혜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어느 날 역사 속에서 과감하게 돈이 우리의 주인이 아니고 돈이 내 인생의 행복을 보장하지 않고 돈이 푸른 초장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지 않는다고 믿고 고백하고 살아가는 공동체가 생긴 것입니다. 이들은 단호하게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돈이 자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초대 교회 공동체입니다. 우리 교회가 이런 공동체로 회복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공산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산술적 평등, 강제적 분배 정의를 추구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 충만을 받고 은혜 받은 대로 자발적으로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는 성령 공동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 번 주일학교와 학생부 청년들 수련회를 하는데 어느 집사님께서 그들을 섬길 수 있도록 헌금한 것을 보며 기도했습니다. 누가 시킨 일이 아닙니다. 내 아들 딸도 아닙니다. 주보에 이름 내는 일도 아닙니다. 그러나 은혜 받은 대로 자발적으로 나누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미얀마에 교회를 건축하였습니다. 한 권사님이 집을 팔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기념하여 헌금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교인들이 헌금하고 그 권사님이 헌금한 것을 합하여 미얌마에 건축을 하였습니다. 돈에 의해 지배되는 일반 사람 같으면 집 값이 떨어져 속상한데 그 집 팔아 해외에 건축하라고 헌금하겠습니까? 모든 것을 은혜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돈으로 통하는 사회에서 이렇게 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심리학자들은 돈이 인간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실험해 보았습니다. 돈에 대하여 늘 생각하고 집착하고 사는 사람들의 심리를 실험한 것입니다. 피실험자들로 하여금 돈이라는 이미지를 강하게 주입시켰습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렇게 무언가를 은연 중 주입시키거나 무언가에 대한 관념을 가지도록 유도하는 것을 프라이밍(priming)이라고 부른답니다. 

캐슬린 보(Kathleen Vohs)등의 심리학자들은 사람들에게 돈이라는 이미지를 주입시키면 그들의 행동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실험하기로 했답니다. 연구자들은 모두 4가지 실험 조건을 설정했답니다. 

첫 번째 실험 조건에서 연구자들은 피실험자들에게 모노폴리 게임을 하도록 했는데, 게임 머니를 많이 주는(4000달러) 경우, 적게 주는 경우(200달러), 주지 않는 경우로 조건을 세분했답니다. 

두 번째 실험 조건에서는 피실험자들에게 돈이 풍족한 삶이나 돈이 부족한 삶에 대해 생각해 보라고 했고, 

세 번째 실험 조건에서는 돈과 관련된 문장이나 돈과 별 상관없는 문장을 각각 구성하도록 했답니다. 

마지막 네 번째 실험 조건에서는 돈을 연상시키는 그림이나 중립적인 그림을 피실험자들에게 보여주었답니다. 돈에 대하여 많이 생각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다른 사람을 어떻게 도와주는가를 관찰한 것입니다. 

먼저 실험 공모자가 실수를 가장하여 27개의 연필을 떨어뜨렸는데 돈에 대하여 강한 프라이밍된 피실험자들이 적은 수의 연필을 주었답니다. 

다음에 낱말 퍼즐 방법을 이해 못한 척하는 공모자가 설명을 부탁할 때 돈의 이미지를 주입받지 않은 자들이 120% 정도 오랜 시간을 들여 설명해 주었답니다. 

다시 피실험자들에게 수고료로 2달러를 지불하면서 대학의 장학금에 기부할 것을 제안하였는데 돈에 대하여 프라이밍된 피실험자들은 그 돈의 39%를 기부하겠다고 했고, 돈으로 프라이밍되지 않은 피실험자들은 67%를 기부하겠다고 했답니다. 

돈에 대하여 집착을 하면 기부를 잘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돈이 많은 사람일수록, 시간당 수당을 받는 사람일수록, 경제학자일수록 돈도 재능도 잘 기부를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나의 도움이 필요로 하는 사람보다 은연중에 돈의 가치를 귀중하게 “내가 이 돈이면, 내가 이 시간이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다시 이들은 세 그룹으로 나누고 컴퓨터 앞에 앉아 3가지 종류의 스크린 세이버(화면보호기)를 보여 주었답니다. 각각 물고기들이 노니는 스크린 세이버, 아무것도 없이 까맣게만 보이는 스크린 세이버, 지폐가 흘러 다니는 스크린 세이버였답니다. 그리고 피실험자들에게 다른 참가자가 들어와 대화할 텐데 그 사람이 앉을 의자를 가져다 놓으라고 요구하였답니다. 

그 때 지폐가 떠다니는 스크린 세이버를 본 피실험자들은 다른 스크린 세이버를 본 사람들에 비해 의자를 15인치 정도 멀리 위치시키는 것으로 나타났답니다. 다시 피실험자들에게 다음에 수행하게 될 과제를 혼자 수행할지 아니면 다른 사람과 같이 수행할지를 물었답니다. 

지폐가 떠다니는 스크린 세이버를 본 피실험자들의 16~17%, 다른 종류의 스크린 세이버를 본 피실험자들은 70~80%가 같이 과제를 수행하겠다고 했답니다. 돈에 대한 강한 프라이밍된 사람들은 타인에게 도움을 덜 청하고 혼자 일하려고 하는 모습이 관찰되었답니다. 

연구 결과는 돈에 대한 이미지가 주입되면 개인주의적이고 `자기 충족적 (self-sufficient)`인 마인드가 강화된다는 것입니다. 돈이 사람들을 덜 사회적으로 만들고, 돈이 사람들을 덜 협조적으로 만든다는 것입니다. 돈은 사람과 사람을 연합시키기보다는 분리시키는 강력한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딤전6:10)”라고 말씀하면서 교회 직분자의 자격을 “돈을 사랑하지 아니하며(딤전3:3)”라는 조항을 넣고 있습니다. 

성경은 말세를 말씀하시면서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딤후3:2)”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히13:5)”

부자가 되면 삶의 만족도는 확실히 높아질 것입니다. 그렇다고 기분도 계속 좋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비교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돈으로 지속적인 즐거움을 누리려면 오히려 나를 위해 쓰는 것보다 타인을 위해 쓸 때, 물건보다 경험을 살 때 더 높아진다고 합니다. 100만원으로 물건을 사는 것보다 여행을 하는 것이 더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5달러 또는 20달러를 넣은 봉투를 주고 1그룹은 평소대로 돈을 쓰게 하고 2그룹은 타인을 위해 사용하라고 했을 때 타인을 위해 돈을 쓴 사람이 더 행복했답니다. 돈을 얼마 썼느냐보다는 누구에게 썼느냐가 중요하였답니다. 비교적 풍부한 캐나다 대학생들이나 우간다 학생들이나 실험 결과는 같았다고 합니다. 

성경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5:3)”라고 말씀합니다. 부요한 마음보다 가난한 마음에 감사도 행복도 있습니다. 우리 신앙 공동체는 돈의 힘에 의해 지배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은혜에 의해 살아가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은혜로 시작하여 은혜로 살고 은혜로 마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2. 무리들이 어떻게 이렇게 은혜 중심의 공동체로 변화가 되었습니까?

33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였습니다. 바로 이런 일이 있기 전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님을 따르다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니까 다시 고기 잡으러 갔습니다. 은혜 중심의 삶을 누리다가 다시 돈 중심의 삶으로 돌아가 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을 모시고 은혜의 삶을 누릴 때는 먹을 걱정 잠잘 걱정 입을 걱정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 예수님만 쫓아다니면 먹고 자고 입고 다 해결되었습니다. 

그런데 돈 벌기 위해 밤새도록 그물을 던졌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합니다. 물질을 추구하며 그것으로 행복을 꿈꾸지만 해도 해도 안 되는 것입니다. 그 때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들을 방문하여 은혜의 삶으로 회복을 시켜 주었습니다. 성령 충만을 받았습니다. 무식한 베드로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나라 말로 알아듣습니다. 통역이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말씀을 전합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주님이라는 사실을 전하자 하루에 삼천 명이 회개하고 돌아 온 것입니다. 하루에 3천명 교인 교회가 태어난 것입니다. 어마어마한 부흥의 역사입니다. 성령의 역사가 현장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 때 베드로가 성전에 올라가는데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이 때 하나님의 큰 권능으로 말씀합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으로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돈이 아니라 은혜 공동체의 삶을 살아가는 대표적인 사람 베드로의 신앙 고백이며 능력 있는 삶의 모습입니다. 무엇으로 베드로가 이렇게 변하였습니까?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죽음에서 일어난 부활의 신앙을 가진 것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 믿는 자가 남자만 오천이 되는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5천 명 교회가 하루아침에 생긴 것입니다. 대단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러자 부활을 믿지 않던 사두개인들이 산헤드린 공회를 소집합니다. 그리고 베드로와 요한을 옥에 가두어 버립니다. 그러나 죽일 수는 없었습니다. 앉은뱅이가 일어난 확실한 표적을 부인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지 말라고 회유합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은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를 판단하라”고 말하며 기도하며 계속 부활을 증거합니다. 

앞에 있는 31절을 읽어 보십시오.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 부활을 증언할 때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세상의 이론이 아닙니다. 경제학이나 공산주의 사상을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논리적으로 설득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의 복음을 믿으면 은혜의 삶으로 회복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하셔서 그들의 마음을 움직여서 믿음을 갖게 만든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입니다. 우리 교회는 부활을 믿는 은혜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큰 은혜를 받으면 은혜가 통치하는 공동체로 변해 버리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은혜로 받아들이고 은혜로 해석하고 은혜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계산으로 살아가는 공동체가 아닙니다. 

중국 단기 선교를 갔는데 마지막 날 중국에서 사업을 잘 하고 계시는 신 장로님이 청도를 들렸다가 가라고 했습니다. 고민이 되었습니다. “짧은 기간이기 때문에 그곳에서 세미나를 하루라도 더할 것인가? 아니면 장로님의 부탁을 받아들여 청도에 들렸다가 올 것인가?” 고민이 되었습니다. 

신 장로님의 가정은 그 때나 지금이나 은혜로 살아가는 교회를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가정입니다. 우리 교회가 분당에 120평의 상가를 살 때 부탁도 하지 않았는데 자발적으로 장로님 집 아파트를 2억 5천을 담보 잡아 교회를 구입하게 하였습니다. 

11년 전에 청도로 가서 사업을 할 때 제가 가서 개업예배를 드리고 그 때 주신 기도제목을 가지고 꾸준히 기도하였습니다. 아이들 대학 들어갈 때, 군대 갈 때, 결혼할 때 심방하여 예배를 드리고 이제 아들 둘 다 결혼을 시켜 분가해 주었습니다. 

중국에 계시면서도 우리교회 교인인 것을 잊지 않고 한국에 오실 때마다 우리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고 교회를 위해 열심히 섬겨 주십니다. 이번 엡프 공사를 하는데도 많은 헌금을 해 주셔서 여러 교인들이 헌금한 것을 합하여 부족하지만 잘 공사를 하였습니다. 

그래서 버스를 타고 가면 하루 종일 걸리는 먼 거리이지만 청도로 가서 장로님을 만났습니다. 장로님이 차를 대절하시고 식사와 숙소까지 모든 것을 마련하여 선교하느나 수고했다고 일체 경비를 대어 섬겨 주었습니다. 시골이기 때문에 그동안 음식을 먹지 못해 고생들을 했는데 장로님이 너무나 맛있는 것을 넘치도록 대접해 주어서 먹는 것으로 고역을 치루며 선교를 하고 왔습니다. 이런 것이 진정한 교회 공동체의 모습입니다. 

무엇이 장로님에게 그런 마음을 가지게 만들어 주었겠습니까? 큰 은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받아들이고 그 은혜를 갚은 삶을 사시려고 하시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교회는 돈 많은 사람이 대접받고, 권력 있는 사람이 존경받고, 명예 있는 사람이 인기를 누리는 세속적 가치관이 지배하는 공동체가 아닙니다. 은혜를 받으면 돈 많은 사람이 더 많이 헌신하고, 권력 있는 사람이 더 낮게 낮아지고, 인기 있는 사람이 더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의 발을 씻겨 주었습니다. 우리를 위해 물과 피를 다 쏟으시면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을 믿는 은혜 공동체의 모습입니다. 은혜로 말하고 은혜로 행동하고, 은혜로 섬기고, 은혜로 예배드리고, 은혜로 가정생활하고, 은혜로 교제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요즈음 한국 교회는 너무나 이 은혜를 잃어 버렸습니다. 교회에서도 고소 고발이 난무합니다. 신문에 보니까 서울에 있는 어느 교회 K모 장로 외 4 명은 주일예배에 참석하지 않고 7년여 동안 29건의 각종 고소·고발을 일삼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2007년 9월 교회 당회 및 사무총회에서 제적을 시켰답니다. 

그러자 교회에서 부당하게 제명을 시켰다고 2008년 소송을 제기했다고 합니다. 대법원까지 갔는데 대법원에서 "원고들에 대한 제적 결의는 종교단체로서 교리를 확립하고 신앙상의 질서를 유지하는 한편, 피고에 대한 해교행위를 하는 교인들을 구성원에서 배제하는 방법으로 조직의 안정과 화합을 도모하려 하였던 것임이 인정된다."고 밝혀 교회에서 제적시키는 것은 합법이라고 판결했다고 합니다. 

교회가 이렇게까지 세상 법정으로 모든 문제를 끌고 가야 하겠습니까? 요즈음 교회들을 보면 얼마나 고소 고발이 남발되고 있습니까? 장로님이 목사님을 목사님이 장로님을, 집사님이 집사님을 서로 고소 고발합니다. 지난 2006년 대법원에서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당시 1년간 진행된 총 민사소송 건수는 총 379만 건이었으며, 그 중 교회와 관련된 건수가 69만여 건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는 전체 소송건수의 약 18%에 이르는 수치로, 교회갈등으로 인한 법정소송의 비율이 상당히 높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이후의 정확한 통계자료는 아직 나오고 있지 않지만, 현재 교회의 내부갈등으로 인한 소송건수는 아마 그보다 훨씬 만을 것입니다. 사도는 큰 권능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전해야 하고 성도는 큰 은혜를 받고 은혜의 삶을 누려야 하는 곳이 교회 공동체입니다. 우리가 회복해야 할 것이 교회에서의 은혜 의식입니다. 많이 모이는 교회, 돈 많은 교회, 이름 있는 교회, 능력 있는 교회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부활의 복음을 듣고 은혜가 넘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3. 큰 은혜 받은 교회 공동체는 어떤 삶을 살게 되었습니까?

34절을 보십시오. 빈곤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경제적 핍절이 살아진 사회가 되었습니다. 사도의 설교를 듣고 큰 은혜를 입은 교인들이 자발적으로 필요한 만큼의 재산을 공유했기 때문입니다. 신15:5에서 여호와의 말씀을 준행하는 선민에게는 가난한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하나님은 약속해 주었는데 성령 충만으로 약속의 삶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성령 충만한 교인들이 자신의 소유가 자신의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여겼기 때문에 기꺼이 재산을 나눌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밭과 집 있는 사람이 팔아 그 매매한 돈을 가져갔습니다. 여기서 가져갔다는 말은 “에페론”으로 “페론”의 3인칭 복수 미완료 능동태 직설법으로 자신들의 소유를 이웃과 나누는 행위가 계속 이어졌다는 말입니다. 한 번 하고 끝낸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살아간 것입니다. 은혜를 받아 그 은혜를 계속 이웃에게 전해 준 것입니다. 더 확대 해석하면 교회는 핍절한 사람이 없도록 끊임없이 노력하여야 합니다. 

영적으로 핍절한 사람이 없고, 정신적으로 핍절한 사람이 없고, 경제적으로 핍절한 사람이 없고, 인간관계에서 핍절한 사람이 없고, 신체적으로 핍절한 사람이 없는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큰 은혜를 받고 큰 권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공부하고 싶지만 돈이 없어 공부하지 못하는 아이들이 없게 만들기 위해 장학헌금을 비축하고 있습니다. 1구좌에 천원으로 계속하고 있는데 많은 사람이 참여하지 않아 큰 기금이 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우리 교회 다니면서 돈 없어 공부 못하는 아이들은 없는 날이 올 줄 믿습니다. 

우리 교회가 최빈국 아이들을 돕기 위해 열심히 달려 왔습니다. 학교를 세우고, 학사를 세우고, 아이들을 자매결연하여 후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외부만 돌보는 것으로 멈추지 말고 내부 우리 교인에게도 시선을 돌려야 합니다. 사업하다가 직장 생활하다가 어려움을 당한 우리 교회 성도들을 위해 “열린 바나바 기금”을 마련할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은혜를 나누는 삶을 살았던 초대 교회 대표적인 사람 바나바의 이름을 따서 만든 기금입니다. 36절 37절을 보십시오. 은혜의 공동체를 만들어간 대표적인 사람이 바나바입니다. 위로의 아들입니다. 그가 밭을 팔아 그 값을 사도들 앞에 가져다 놓았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처럼 공명심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이웃에게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님 중에 사업을 잘하여 부자가 되면 이런데 기부하는 바나바가 많이 나오시길 바랍니다. 내가 바나바가 되어 보아야 하겠다고 결단을 하고 도전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하나님이 꿈을 가진 자에게 그 꿈을 이룰 만한 은혜로 부어 주실 줄 믿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그를 전적으로 신임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사도들을 대신하는 자로 안디옥교회의 파송을 받았습니다. 안디옥교회도 그를 신임하고 존경했습니다. 그래서 생면부지의 사람인 바나바를 자기들 교회 목회자로 청빙했고, 나중에는 선교사로 파송했던 것입니다. 

사도행전 11장 24절에서는 바나바의 인물됨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 

그는 모으는 자가 아니라 주는 자였습니다. 바나바는 출신 성분이 레위지파인데, 지중해의 무역 요충지 사이프러스에서 사업을 했을 것입니다. 아마 부동산 투자로 재산을 많이 모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바나바는 예수님을 믿고 성령 충만함을 받아 인생의 목적이 변한 것입니다. 열심히 벌어, 성실히 모으는 것으로 끝낸 것이 아니라 은혜로 베푸는 삶을 산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합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눅6:38)” 

은혜를 받은 바나바는 사람을 꺾는 자가 아니라 사람을 세워주는 자입니다. 위로자, 격려의 사람입니다. 돕기 위하여 부름 받은 자가 된 것입니다. 사울을 세워주고 마가를 세워줍니다. 어떤 신학자(Leslie Flynn)는 말하기를 “만약 바나바가 위로의 은사를 사용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신약성경의 절반가량을 볼 수 없었을 것이다. 

바나바가 마가를 격려함으로 훌륭한 복음서 저자가 되게 하여 마가복음을 쓰게 했고, 바울을 세워줌으로 13권의 신약성경을 쓰게 했고, 세계 선교의 거장을 배출한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바나바는 은혜를 나눔으로 교회를 크게 흥왕 시키는 헌신자였습니다. 그는 교회 부흥을 위하여 재물도 버렸고(4장), 명예도 버렸고(11장-14장), 그리고 생명까지도 버렸습니다.(15장) 성경은 바나바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도 아끼지 않은 자다.(사도행전15:25-26)”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종환 삼영그룹 명예회장은 8000억을 기부하여 관정교육재단을 만들었고 돌아가시기 전까지 자산을 1조원 재단을 만들겠다는 꿈을 가지고 산다고 기사에서 보았습니다. 아직 기업인을 위한 재단, 직장인을 위한 재단을 만들었다는 기사는 보지 못했습니다. 믿는 우리 교회 식구를 만이라고 위한 재단을 만들면 얼마나 사람들이 우리를 볼 때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겠습니까?

사업하면서 열심히 헌금하였는데 때로는 실패할 경우도 있습니다. 직장생활하면서 열심히 헌금하였는데 직장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이 때 교회에서 일정한 금액을 주어 제기할 수 있도록 하는 자금입니다. 함께 웃고 함께 우는 영적 가족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소모품으로 마케팅 대상이 되는 교인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극장 구경꾼으로 전락하는 교인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종교 소비자로 안주하는 교인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은혜를 함께 나누는 가족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35절을 보십시오. 사도들의 발 앞에 가져다 놓았습니다. 이것 역시 일회적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사도들에게 갔다 맡겼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사고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그것 가지고 좋은 아파트 사고 좋은 승용차 사고 자신의 배만 배부르게 하지 않았습니다.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주었다는 것입니다. 세계에는 수많은 교회들이 있습니다. 

전 세계 인구 중 기독교는 22억이나 된다고 합니다. 교파 3만 3820개이고 기독교전임사역 자들(목사, 선교사, 전도사)은 5백 15만1천명이라고 합니다. 한국 교회는 미국 교회 다음으로 세계 선교를 감당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 전체는 169개국 23,331명을 선교사로 보내고 있습니다. 

기독교윤리실천운동(기윤실)의 '한국교회의 사회적 섬김 보고서'에 따르면 사회복지, 교육, 대북지원·해외원조, 의료, 자원봉사 등 열심히 섬기고 있습니다. 종교별 사회복지 사업 관련 법인 현황을 보면 전체 372개 법인 가운데 기독교가 194개로 절반 이상인 52.2%를 차지했습니다. 불교 104개(28.0%), 가톨릭 58개(15.6%), 원불교 14개(3.8%) 등 순이었습니다. 

전국 종합사회복지관도 전체 414개 중 기독교가 188개(45.4%)로 가장 많았습니다. 전국 지역아동센터 실태 조사에 따르면 전체 3013개 중 1601개(53.1%)를 기독교가 운영하는 것으로 파악되었습니다. 

종교단체별 사립학교 현황을 보면 기독교 운영 사학이 초등, 중등, 고등학교 각각 24개, 97개, 138개로 모두 259개로 집계되었습니다. 종교법인이 운영하는 사립학교 361개의 71.7%에 해당합니다. 

통일부가 파악하고 있는 대북지원 민간단체는 79개로 그 가운데 22개가 기독교 계열입니다. 이들 단체는 2007∼2009년 모두 9131만 1000달러를 지원해 전체 민간단체 대북 지원 실적(2억2662만5000달러)의 40.3%를 감당했습니다. 

해외원조단체협의회 소속 단체 역시 기독교계가 가장 많습니다. 47개 회원 단체 중 기독교가 17개(36.2%)이고 무교 16개(34.0%), 원불교 3개(6.4%), 불교 2개(4.2%), 가톨릭 1개(2.1%)였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가 비난 받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기 것 챙기는 일부 목회자로 인한 비난이 큽니다. 정당한 챙김마저 비난하는 데 부당하게 챙기는 것은 더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목회자는 다르게 살기를 사람들이 기대합니다. 우리와 똑같지 않기를 사람들이 바랍니다. 그런데 그 기대치에 미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식에게 교회를 상속해 주는 목회자들이 있습니다. 1973년 도림교회(예장통합)을 필두로 시작된 교회세습은 2000년 이전만 해도 8개 교회에 불과했지만, 2000년에서 2010년까지 31개 교회가 교회세습을 진행했고, 2011년부터 2013년 6월까지 무려 22개 교회가 교회세습을 마무리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문제는 교회를 사유화하는 교회세습이 점차 확산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규모와 관계없이 교회세습이 광범위하게 추진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교회세습을 단행한 61개 교회 중 절반에 가까운 28개 교회의 선임목사가 교단 총회장(14명)이나 감리교 감독(10명), 한기총 회장(4명) 출신이다는 사실입니다. 한국 교회 리더십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세계 최대 교회를 이룬 가정은 배임·탈세·사기 혐의로 법정에 서게 되었습니다. 친자 소송까지 제기한 사람이 생겼습니다. 

오늘 성경에 나온 사도들의 모습으로 회복되어야 합니다. 내 것이 아닙니다. 다 하나님의 것이고 우리는 관리자에 불과합니다. 제로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저의 큰 딸이 미국 유학을 갔습니다. 제가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자신의 자녀를 유학 보내는 것은 괜찮지만 목사의 자녀를 유학 보내는 것에 대하여서는 부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시험을 볼 때 장학금을 받으면 보내 준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전액 장학금을 주는 학교는 떨어졌고 일부 장학금을 주는 학교에 합격을 하였습니다. 제가 아이들에게 약속을 했습니다. “아빠는 가난한 목사이니까 돈이 없으니 유산을 물려 줄 것이 없다. 그러나 공부하면 최대한 공부는 시켜 주겠다.”라고 약속을 했습니다. 어떻게든 그 약속을 지키고 싶었습니다. 기도를 했습니다. 마음속에 응답이 왔습니다. “어차피 제로 인생을 살려고 마음먹은 것이 아니냐? 나중에 은퇴할 때 퇴직금은 교회에서 주겠지. 미리 빚은 얻어서라도 자녀와의 약속을 지키며 가르치고 그 때 빚은 청산하고 제로 인생으로 마치면 될 것이 아닌가?” 그래서 내 아이 잘 되게 하겠는다는 욕심도 아니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쓰임 받겠다고 하는 것인데 그렇게라도 하자 결심하고 빚을 얻어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 목회자들이 좀 더 투명하고 깨끗한 관리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하나님 나라가 비난받지 않고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 구성원 모두가 은혜를 받았으면 은혜로 사는 사람답게 제 역할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이번 단기 선교 때 통역하는 조선족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이 분을 오래 전부터 알고 지냈습니다. 가난한 조선족으로 살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을 믿게 되었고 신학을 하여 전도사님이 되었습니다. 자매와 결혼을 하는데 간질병 환자를 배우자로 선택하였습니다. 

우리가 중국에 처음 지은 화장촌 교회에서 결혼식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도 그 결혼식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간질병 환자와 결혼하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전도사님은 결혼을 결심하고 가족의 반대를 물리치고 결혼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올해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이번에 만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아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속이 상하고 하나님을 원망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은혜에 감사하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더 기도하게 하고 더 하나님께 매달리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오늘 읽은 예루살렘 교회 같은 교회가 될 수 있도록 비전을 가지고 꿈을 꾸며 그런 교회가 될 수 있도록 서로 은혜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모두가 하나 되는 공동체를 이루어야 하겠습니다. 서로 지체로서 형제애를 가지고 서로를 돌보는 한 가족 의식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서로 기쁘게 나누고 베풀어 주는 은혜 공동체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매일매일 만나 예배를 드리며 성공 공부를 하고 애찬식을 하였던 그들처럼 만남의 기쁨이 넘치는 교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김필곤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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