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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고전 15: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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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고전 15:12-19)


우리의 믿음은 고백되어야 합니다. 믿음은 고백될 때 ‘믿음의 역사’가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마 9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맹인들의 눈을 뜨게 해 주시는 이야기가 기록되어있습니다. 맹인들이 예수님께 나와서 눈을 뜨게 해 달라고 청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저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눈을 뜨게 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자세히 보면 예수님께서 그냥 고쳐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저들에게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저들이 “주여 그러하오이다” ‘아멘’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니까 저들에게 믿음을 고백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저들을 고쳐주셨는데, 또 그냥 고쳐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저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믿음대로 되라” 그러자 저들의 믿음대로 눈을 떴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의 역사는 고백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마음속에 믿음을 가졌다고 해서 믿음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믿음이 고백될 때 믿음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바울은 롬 10:10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믿음이란 마음에 생겨나고 그리고 입으로 고백되어야 구체적으로 믿음의 결과가 나타난다는 말씀입니다.
실제로 성경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우리 믿음의 선진들은 자신의 믿음을 구체적으로 고백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창 22:8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번제할 어린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여호와 이레의 믿음을 고백한 것입니다. 그 믿음대로 하나님께서 번제할 어린양을 준비하셔서 이삭 대신 제사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마 16:16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고백한 것입니다. 그 믿음대로 주님께서 이 믿음 위에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우리가 우리의 믿음을 구체적으로 고백할 때 믿음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마음속에 놀라운 믿음을 가지고 있더라도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때로는 사람들 앞에서 고백해야 합니다. 그래야 믿음의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주목하게 되는 믿음의 고백은 이것입니다. “나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믿고 그 믿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고백의 성격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고백은 분명히 죽으셨던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고백입니다.
성경 여러 곳에서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죽으셨다고 확인해 주고 있습니다. 마 27:50을 보면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가셨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막 15:39을 보면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되어있습니다. 예수님의 사형을 집행했던 백부장이 예수님의 장엄한 죽음을 보고 고백한 말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죽으셨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죽으셨던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이성적 판단으로 볼 때 불가능한 일입니다. 또한 인간의 경험적 판단으로 볼 때도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본문 12절에서 보듯이 사람들은 죽은 사람이 부활할 수 없다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한번 죽은 사람은 다시 살아날 수 없습니다. 이것이 과학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상식입니다. 그래서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부활을 믿는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는 믿음의 고백은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쉽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이렇게 비상식적이고 비과학적이고 비이성적인 사실을 믿고 또 이것을 믿는다고 고백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그 답을 고전 12장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1절을 보면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그러니까 상식적이고, 과학적이고, 이성적인 것에 대해 말하려 하는 것이 아니고 신령한 것 즉 영적인 것에 대해 말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3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예수를 주라고 영접하고 고백할 수 있는 것은 전적으로 성령의 역사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8-9절에서는 이렇게도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믿음을 주시나니...” 성령을 통해서 믿음을 주시기 때문에 그 믿음으로 믿을 수 없는 것을 믿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믿고 고백할 수 있는 것은 전적으로 성령의 도우심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성령이 주시는 믿음의 은사 때문입니다. 

우리말의 ‘믿음’이라는 말 속에는 크게 두 가지 다른 형태의 믿음이 있습니다. 하나는 ‘신념’이고, 다른 하나는 신앙입니다.
우선 신념이란 영어로는 ‘Belief ’라는 말입니다. 이 신념은 자기 마음속에서 우러나는 믿음을 말합니다. 

저는 요즘 통합진보당 사태를 보면서 정말 신념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석기 의원을 비롯한 소위 RO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은 대학시절 운동권에 참여해서 편향되고 왜곡된 사상 훈련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 잘못된 사상 훈련을 통해서 저들의 마음속에는 잘못된 신념이 자리 잡게 된 것입니다.

예를 들어 북한은 선이고 남한은 악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역사는 첫 단추부터 잘못 끼어진 것이고, 북한은 올바른 역사의 길을 걸어왔다는 것입니다. 남한 사회의 발전된 모습과 북한 사회의 처참한 모습을 보면서도 이런 신념을 바꾸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많은 탈북자들이 북한을 탈출해서 남한으로 오는 것을 보면서도, 북한에 수십만이 정치범 수용소에서 저토록 처참한 삶을 사는 것을 보면서도 이런 신념을 바꾸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신념입니다.
그러나 신앙은 다릅니다. 영어로는 ‘Faith’라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믿음을 말합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성령께서 우리 심령 속에 은사로 주신 것입니다. 

이 믿음은 우리가 믿을 수 없는 것을 믿게 해 줍니다.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것을 믿게 해 줍니다.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도 믿을 수 있게 해 줍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것을 믿게 해 줍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을 믿게 해 줍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을 믿게 해 줍니다.
그래서 이 신앙으로 우리가 믿을 수 없는 것을 믿게 된 것을 바로 신령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바로 신앙은 영적인 사건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령께서 여러분에게 이런 믿음의 은사를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셨고 분명히 무덤에 장사되셨지만 사흘  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나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라고 고백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고백의 결과

말씀드린 대로 믿음은 고백할 때 믿음의 역사를 나타냅니다. 부활신앙의 고백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라고 고백할 때 믿음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두 가지입니다.

첫째, 부활의 능력을 덧입게 됩니다.

초대교회 시절 기록을 살펴보면 쉽게 이해하기 힘든 부분들이 많습니다. 대표적으로 주님의 제자들의 태도변화를 들 수 있습니다. 저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 도망쳤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뒤에 달라졌습니다.

행 4장을 보면 1-3에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이르러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백성을 가르치고 전함을 싫어하여 그들을 잡으매 날이 이미 저물었으므로 이튿날까지 가두었으나” 제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전하다 체포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후 기록을 보면 대제사장과 당시 최고지도자들 앞에 끌려가 심문을 받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의 태도가 정말 담대합니다. 19절을 보면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자칫 저들에게 밉보이면 죽을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당당하게 말합니다. 자기들은 저들의 말을 들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죽일테면 죽여보라는 것입니다.

원래 베드로는 대제사장의 집 뜰에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너무 두려워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 도망쳤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완전히 달라진 것입니다.
어떻게 달라졌을까요? 분명합니다. 저가 부활신앙을 가지게 됐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셨다는 것을 믿을 뿐 아니라 공개적으로 고백했고, 나아가 세상에 선포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저의 심령 속에는 부활의 능력이 충만하게 됐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고백하는 사람들에게는 부활의 능력이 임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 어떤 염려나 걱정이나 근심도 이길 수 있습니다. 그 어떤 난관도 장애물도 도전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죽음의 공포도 이길 수 있습니다.

미국의 링컨 대통령의 젊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변호사 시절 주 의회 의원에 출마했으나 낙방했습니다. 다시 하원의원에 출마했으나 역시 낙방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몇 번 낙방을 거듭하자 링컨은 좌절과 절망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이 링컨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심지어 가까운 친구들은 링컨이 자살하는 것은 아닌지를 우려하며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았습니다.

그런데 낙선하던 날 링컨은 머리를 말끔히 깎고 목욕도 했습니다. 마치 무슨 좋은 일이나 있는 것처럼 좋은 식당에 가서 밝은 모습으로 식사도 했습니다. 

링컨의 자서전을 보면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적어놓았습니다. “나는 지금 이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인생을 살고 있다. 나는 재기할 수 없을 것 만 같은 심정이다. 나는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 있다'고 절망하던 중 성경을 읽다가 부활의 주님을 만났다.”

이 일후 링컨은 재기에 성공하게 됩니다. 그의 자서전을 보면 그 뒤의 일을 이렇게 적어놓았습니다. “나는 성경을 읽고 그 속에서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함께 계신 것을 믿고 용기를 가졌다. 그래서 공화당에 입당하고 열심히 뛰어 공화당에서 대통령 후보 지명을 받았고 결국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셨음을 굳게 믿는 사람들 그래서 그 사실을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사람들에게 고백하는 사람들 그들은 부활의 능력을 덧입게 됩니다. 그래서 절망을 딛고 일어설 수 있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믿으십시오. 그리고 이 사실을 담대하게 고백하십시오.

둘째, 부활의 소망을 가지게 됩니다.

실존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을 부드럽고 편편한 돌로 비유한 일이 있습니다. 누구라도 한 번쯤은 수면 위에 돌을 던져본 일이 있을 것입니다. 부드럽고 편편한 돌을 잘 던지면 여러 차례 수면 위를 튀기며 춤을 추듯 미끄러져 나아갑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갑자기 멈추고는 물속으로 가라앉아 버리고 맙니다. 그리고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 수면이 잔잔해 집니다.

키에르케고르는 인생이 이렇듯 허무하다고 보았습니다. 한 때 화려하고 멋진 모습으로 돌이 수면 위를 미끄러졌을 지라도 그래서 모두가 박수를 보내고 모두가 찬사를 보내도 잠시 후에는 물속으로 사라지고 수면 위에는 아무 일 없는 듯 잠잠해 지는 것과 같이 허무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자칫 인생의 무의미함 때문에 절망하기 쉽다는 것입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이 세상으로 제한해 보면 우리 인생을 무의미합니다. 그래서 허무하고 그런 허무함을 느끼며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다르게 말씀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벧전 1:3)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후에 우리에게 산 소망이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산 소망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산 소망이 모든 절망을 이길 수 있게 해 주는 것입니다.

현대 복음주의 신학의 거장 존 스트트 목사님이 쓴 [비교할 수 없는 그리스도]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1967년 6월 30일 열일곱 살의 운동선수 조니 에릭슨은 체사피크 만에서 다이빙을 하다 사고를 당했다. 그로 인해 목 아래부터 전신이 마비된 그녀는 쓰라림, 좌절, 원망, 분노, 심지어 자살하고 싶은 침체까지 인간이 겪을 수 있는 모든 감정에 휩싸였다. 하지만 재활 훈련 및 치료 기간을 통해, 그리고 부모님, 자매들과 친구들의 열렬한 후원을 통해 점차 깊은 블랙홀에서 빠져나왔다. 그녀는 입으로 그림을 그리는 법을 배웠다. 그리고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후원하는 모임도 만들었다. 그녀의 변화의 중심에는 성경을 재발견한 일이 있었다. 그녀는 자기처럼 ‘움직이지 못하고 무력하며 마비된 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에 대한 환상을 보면서 도움을 받았다. 하지만 그녀에게 가장 큰 도움을 준 것은 부활이었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제 미래에 대한 소망이 있다. 성경은 우리의 몸이 하늘에서 ‘영화롭게'된다고 말한다. 그때는 내가 여기에서 죽은 후 내 발로 춤을 출 때다. 손가락은 오그라들어 구부러지고, 근육은 쇠약해지고, 무릎은 비틀리고, 어깨 아래로는 아무런 감각이 없는 내가, 언젠가는 가볍고 밝으며 강력하고 눈부신 의로 옷 입은 새로운 몸을 가지게 될 것이다. 이것이 나처럼 척추를 다친 사람에게, 뇌 손상을 입은 환자 혹은 조울증 환자에게 어떤 소망을 주는지 상상할 수 있는가? 다른 어떤 종교나 철학도 새로운 몸과 정신을 약속하지 않는다. 오직 그리스도의 부활의 복음 안에서만, 상처 입은 사람이 이처럼 놀라운 소망을 발견할 수 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고 이것을 고백하는 사람들은 이 땅에서 산 소망을 가지게 됩니다. 그 산 소망이 그 어떤 절망적 상황에서도 그를 다시 일으켜 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의 고백은 이처럼 놀랍습니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믿고 이것을 고백하는 것은 정말 놀랍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상상도하기 힘든 부활의 능력을 덧입게 됩니다. 그리고 도무지 이 세상에서 꿈도 꾸지 못할 부활의 소망을 가지게 됩니다. 믿고 이렇게 고백해 보십시오. “나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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