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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버지께서 주신 잔 (요 18: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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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께서 주신 잔 (요 18:1-11)


공산당이 기독교를 대단히 핍박하는 루마니아 감옥에서 이야기입니다. 그 감옥에는 있는 사람들은 기독교의 신앙을 지키다가 들어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새로 들어온 '죄수'를 보고 그들은 너무나 놀랐습니다. 그 사람은 기독교인들을 잔인하게 핍박하였던 비밀경찰의 우두머리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기독교인이 되어 신앙을 지키다가 감옥에 들어온 것입니다. 알고 보았더니 이런 사연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이 사람이 근무하는 곳에 한 소년이 꽃을 들고 와서 면회를 신청하였는데 그 소년은 수줍어하면서 그 비밀경찰 대령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대령님’ 대령님은 저의 어머니와 아버지를 체포했어요. 오늘은 어머니의 생신이에요. 생신 때마다 저는 어머니께 꽃을 드리곤 했지요. 그러나 오늘은 대령님 때문에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릴 수 없게 되었어요. 어머니는 그리스도인이세요. 항상 저에게 원수를 사랑해야 한다고, 그리고 악을 선으로 갚으라고 가르쳐주셨어요. 어머니를 만날 수가 없으니 이 꽃을 대령님의 아이들의 어머니에게 드려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을 사모님에게 전해줄 수 있으세요?” 

대령은 꽃을 받고는 눈물을 흘리며 그 소년을 껴안았습니다. 그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되었고 더 이상 무죄한 사람들을 체포하고 고통을 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결국 그는 그리스도를 믿고 전하는 자가 되어서 감옥에 까지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오늘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원수를 주님으로 말미암아 친구로 만들라고 하십니다. 주님은 그 사람을 위하여서도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고 하십니다. 

먼저 생각할 것은 배반하는 제자까지도 끌어안으시는 주님이십니다.
파슨 씨는 나치 독일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경험담 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라아비라는 네델란드 목사가 수용소에 있었는데 너무 착하고 독일 군인에게 욕 한번 하는 일도 없었기 때문에 한 번은 화를 냈다는 것입니다. 
“목사님, 우리는 어쨌든 죽을 몸인데 저주받은 가룟 유다보다도 못한 나치 놈들에게 돌아서서 주먹질이라도 한 번 안하십니까?”
이때 목사님은 깜짝 놀라며 파슨 씨를 붙잡는 것이었습니다. 

“저주받은 가룟 유다라니. 그런 소리하지 마시오. 유다는 자살하기 전 뉘우쳤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의 마지막 한숨을 하나님이 못 들으셨다고 누가 감히 장담합니까? 하나님은 유다의 한숨도 들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가룟 유다를 위해서도 피를 흘리셨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과거 때문에, 혹은 나의 공로에 좌우되지 않습니다. 
물론 우리의 잘못된 행실로 인해서 하나님이 마음 아파하시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러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고 지금도 변함없이 우리들을 사랑하십니다. 처음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실 때 주님이 우리 가운데 어떤 예쁜 구석이 있어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주님이 기뻐하실만한 무언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신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를 사랑하사 십자가를 지셨던 주님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도 변함없이 우리를 위해 죄 사함의 은총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이 사랑이요 주님의 긍휼하심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우리의 행실로 인해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지니고 있는 무엇으로 인해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냥 저와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 그 영혼을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보세요. 우리를 본질적으로 죄 가운데 태어났습니다. 무슨 죄를 지어서 우리가 죄인 된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우리는 죄인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겉으로 보기에는 아주 착해 보여도 우리 속마음은 시꺼멓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내 하고픈 대로 하면서 살아갑니다. 물론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볼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우리는 자기가 하고픈 대로 하고 싶은 욕망이 있습니다. 때로는 그것이 내게 해가 된다고 하는 것을 알면서도 고집스럽게 주장하기도 합니다. 

도대체 왜 그러는 걸까요?
그냥 다 같이 잘 지내면 뭐가 큰 일라도 나는 걸까요? 아니면 사촌이 땅을 사는데 내가 배가 아파야할 이유가 또 어디에 있습니까? 다른 사람이 잘 돼서 내가 잘못 되기라도 하는 것이라면 조금 속상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내가 생각하고 바라는 대로 되지 않을 때 속상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잔뜩 기대하고 있다가 기대한 대로 되지 않을 때 실망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마음에 안 든다고요? 기분이 나쁘다고요? 그게 누구 때문이고 무엇 때문인지 생각은 해 보셨는가요? 
우리는 다 자기 나름대로의 가치 기준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가치를 이루고 지켜나가는 방법이 사람마다 다 다릅니다. 왜냐하면 나름대로의 성격은 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한 자리에서 같은 것을 보고 있어도 생각하는 것은 다 다를 수 있단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흔히 눈빛만 봐도 그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까지 다 알 수 있다고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어느 정도는 맞출 수 있기도 하겠죠? 그러나 정말로 다 알 수 있을까요? 물론 눈에 보이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속속들이 다 알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찌 보면 유다처럼 불쌍한 사람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제자들처럼 유다 역시 예수님의 부름을 받았을 때 큰 기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원래 정치 지향적인 인물입니다. 독립투사입니다. 로마의 압제 아래 있는 나라를 생각할 때마다 피가 끓어서 견딜 수가 없던 사람입니다. 그랬던 그가 예수님을 알게 되고 예수님이 메시야라고 하는 확신을 가지게 될 때 그는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나라는 곧 해방될 수 있을 거다. 예수님이야말로 우리나라를 로마로부터 해방시켜 줄 메시야다. 그런데 그런 메시야가 자기를 제자로 불러 주었다고 하는 것은 그야말로 저에게 날개를 달아주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제자들도 그랬겠지만 유다 역시 그런 생각을 합니다. 예수님이 나라를 해방시키시면 그래서 왕으로 등극하시면 그 제자된 나에게도 큰 자리 하나가 돌아올 거야. 어찌 그런 생각을 안 하겠습니까? 

오늘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도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고 해서 복 그러면 제일 먼저 생각하는 것이 물질적인 복 세상의 지위를 얻는 복부터 생각을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예수님 믿으면 범사에 잘 되고 형통한 삶 그 어떤 어려움도 없이 날마다 희희낙락하는 삶을 살게 될 것이라는 기대들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몸도 아프죠 하는 일 잘 안 되죠 사업도 시원찮아 자식들 속 썩여 그러면 무슨 생각을 합니까? 이건 뭔가 잘못된 거 아냐? 이럴 수는 없는데.. 혹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지 않는 것은 아닌가? 아니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이럴 수는 없는 것 아냐? 그래서 믿음에서 떠나는 사람도 있고 무슨 풍수지리 학설처럼 이 교회에서는 내가 복을 받을 수 없는가 봐. 그래서 이런 저런 이유로 마음이 흔들리는 그런 사람도 봅니다. 

가룟 유다 역시 그랬습니다. 오병이어의 큰 역사를 보면서 그는 기대가 부풀었습니다. 사람들이 저를 억지로 왕으로 삼으려고 하는 일까지 생겨났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럴 마음이 전혀 없으십니다. 그래 실망입니다. 예루살렘으로 나귀 새끼를 타고 들어오실 때의 그 광경은 다시 한번 유다의 마음에 불을 질렀습니다. 물과 며칠 전 나사로를 죽은 지 나흘 만에 다시 살이시는 놀라운 일도 있었습니다. 그래 이제 정말로 때가 된 거야. 그런데 예수님은 오히려 내가 고난을 당하고 죽게 될 거라고 하십니다. 

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아니 어째서 메시야이신 예수님이 왕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죽어야 한단 말입니까? 더군다나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시고 맹인의 눈을 뜨게 하심으로 당국자들과 큰 대립과 갈등을 빚는 데까지 이르러서는 그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결국 유다는 결심을 하게 됩니다. 이런 예수님이라면 그에게 더 이상 기대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렇다면 진짜 메시야가 오시기를 위해서라도 이런 가짜는 빨리 사라져야 된다. 그래 그는 극단적인 생각을 하게 됩니다. 차라리 그런 예수 자기가 고난을 당하고 죽게 될 것이라고 하는 그 말대로 내가라도 빨리 만들어 주어야 되겠다. 

그래서 그는 당국자들에게 가서 예수를 은 삼십에 넘겨주기로 계약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당연히 예수가 밤에 다락방을 나서면 갈 곳은 겟세마네 정원뿐이라고 짐작을 하고 군대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아랫사람들을 데리고 등과 횃불과 무기를 가지고 겟세마네 동산으로 예수를 찾아온 것입니다. 물론 그는 예수를 잡기 위해 미리 군사들과 암호를 정했는데 그 암호는 바로 자기가 입 맞추는 자가 바로 예수니 잡으라는 것입니다. 그래 자기가 정해 놓은 암호대로 예수님께 다가와 예수님께 입 맞추며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라고 인사를 하는 것입니다. 

그걸 주님이 아십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그런 유다를 향해서 친구여 네가 하고자 하는 일을 하라고까지 하십니다. 구리고 군사들을 향해서는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십니다. 나사렛 예수라 대답하니까 내가 그니라 하시니라. 그런데 보세요. 그러면 당장 손을 내밀어 예수님을 잡아야 할 텐데 예수께서 그들에게 내가 그니라 하니까 그들이 주춤주춤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지더라는 것입니다. 너무도 놀랐겠죠. 자기들이 잡으려고 하는 사람이 자기들에게 오히려 태연하게 너희가 잡으려고 하는 사람이 바로 나라고 하니까 거꾸로 그들이 기겁을 했다는 것입니다. 

네가 그 사람이지 하고 엄포를 놓아도 난 아니라고 오리발을 내밀어야 마땅한데 잡으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태연하게 내가 그 사람인데 하니까 그들이 기겁을 했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위엄 앞에 무리들이 감히 손을 대어 잡을 생각도 못합니다. 오히려 기가 질려서 주춤대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유다 자기에게는 네가 하고자 하는 일을 하라고까지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런데도 유다는 그 자리에 엎드리지 못했습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회개의 기회를 그는 놓치고 있습니다. 아니 그에게는 이미 두 번의 기회가 더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자기의 발을 씻어주실 때 그리고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고 하실 때 유다가 물었습니다. 저인가요? 그래 바로 말했다 그러니 네 일을 하도록 하려무나 하며 빵을 건네주실 때가 그때입니다. 한데 그는 태연하게 그 자리를 벗어나 당국자들에게 갔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이 유다를 포기하신 것이 아닙니다. 끝까지 그를 위해서까지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십자가에는 예외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가리켜 아가페의 사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조건 없는 사랑입니다. 예외 없는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그 어떤 경우라도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주님의 은혜를 떠나는 일은 그 어떤 이유에서건 있어서는 안 됩니다. 기억하십시오. 내가 주님을 포기하는 것이지 주님은 한 번도 나를 포기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이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이 주님이 변함없이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 가운데 함께 계십니다. 그러므로 항상 주님의 은혜 아래 살아가며 주님께로 가까이 나아가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약속하신 대로 제자들을 지키시는 주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아버지께서 주신 자들을 하나도 잃지 않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시는 주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는 이야기를 읽을 때 우리는 왜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는지 이해한다고 생각 할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요한은 가까운 친구였고, 매우 충실히 주님을 따랐던 베드로와 안드레가 있었습니다. 

각 제자들에게는 예수님께 사랑을 받을 만한 그 무엇이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유다의 발은 왜 씻어주셨을까요? 예수님께서는 곧 인류 역사상 최악의 배반을 행할 사람의 시중을 들기 위해 당신이 허리를 구부리고 계시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주의 창조자를 은 삼십 조각의 가치에 지나지 않는 존재로 취급한 사람을 위해 그 미천한 일을 하신 것입니다. 다 아시면서도, 생명을 주시는 것과 연관된 이름을 가지신 분이 대대로 배반과 죽음을 상징하게 될 이름을 가진 자의 시중을 들고자 손을 더럽히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이신 본은 우리에게 섬김에 대해 무언가 특별한 것을 말해주지 않습니까? 그것은 우리와 비슷한 사람, 또는 우리를 좋아하는 사람만을 섬기라고 우리가 부름 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나게 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사랑스러운 사람이나 사랑스럽지 않은 사람, 친절한 사람이나 별로 친절하지 않은 사람, 그 모든 사람들을 섬기라고 부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마지막으로 유다 같은 사람의 “발을 씻어준 것”이 언제입니까?
예수님께서 명예도 제쳐놓고 종의 수건을 집으셨을 때 주님은 우리에게 어떻게 섬기며 어떻게 자존심을 극복하는지를 겸손히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우리 말 속담에 “댓돌 위에 서서 밑에 있는 사람들의 발을 씻기기는 어렵다.”는 말이 있습니다. 겸손으로 허리를 숙이는 자만이 진정 다른 사람의 발을 씻어줄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정말 원수의 발까지도 씻어줄 정도로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아니 원수는 원수니까 주님의 말씀처럼 그렇게 할 수 있다고 해도 속이 뻔히 들여다보이는 사람은 또 어떻게 합니까?

유다는 그렇다고 치고 다른 제자들은 어떻습니까? 이미 예수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가 다 오늘밤 나를 버릴 거다. 그때 베드로가 큰 소리 쳤습니다. 죽으면 죽었지 그럴 일은 없습니다. 그건 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였고요.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베드로를 딱하게 바라보시며 말씀하셨죠. 베드로야 네가 나를 위해서 죽어준다니 정말 고맙다 하지만 말이야 너 이게 아니? 오늘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거야.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죽으면 죽었지 결코 주님을 떠나지도 버리지도 않겠습니다. 그랬던 베드로와 제자들입니다. 그랬기에 용기를 내어 자기 딴에는 선생님을 지켜 드리겠다고 지니고 있던 칼을 휘둘러 말고의 귀를 떨어뜨렸지만 예수님의 그의 귀를 만져주어 낫게 하십니다. 그리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칼을 칼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이게 내가 감당해야 될 일이야 이게 내가 세상에 온 목적이야. 이것 없이는 구원의 역사는 없어. 그러니 칼을 집어넣어.
그리고는 오히려 군병들에게 말하기를 나를 잡고 이 사람들은 직접 상관이 없으니 가게 놓아두시오. 그래 제자들은 무사히 그 자리를 벗어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주님이 오늘 우리들 가운데 보혜사를 보내 주신 이유 중의 하나도 바로 이것입니다. 
“이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예수님이 고난을 당하고 십자가에 죽으신다고 해서 예수님이 약하고 보잘 것 없는 분으로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예수님은 약해서 그렇게 고난당하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가장 강하신 분이기에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 없이는 죄의 형벌과 사망의 심판에서 사람들을 대속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들 가운데 죄의 심판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한 번 죽은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고 그 후에는 심판이 있습니다. 여기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단 말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그렇게 죽어가는 것을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어서 주님이 우리를 위한 대속물로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닙니까? 그렇기 때문에 우리를 위한 구원의 길은 오직 하나 주님이 대속 제물이 되시는 길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약해서 죽으신 것이 아니라 대속의 제물로서 가장 합당하신 가장 강하신 분이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늘의 왕이십니다. 그런데 그런 하늘의 왕이 약해서 죽어요? 그 누구도 예수를 죽게 할 사람이 없습니다. 그건 예수님 스스로가 죽으신 것입니다. 왜요? 그래야만 저와 우리들이 살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야만 우리들에게 천국의 문이 열리기 때문입니다. 천국의 문은 오직 십자가의 보혈로만 열립니다. 그 보혈을 덧입은 사람만이 열린 천국 문으로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을 뿐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흔들림이 없는 믿음 안에서 날마다 살아가기를 위해서 친히 우리를 위해서 간구하실 뿐 아니라 보혜사 성령님을 우리 가운에 보내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갈 수 있도록 깨우쳐 주시고 능력을 더하여 주시고 은혜 아래 살아갈 수 있도록 붙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주님의 손 꼭 잡고 오늘을 살아가심으로 말미암아 하늘 아버지께 영광이 되고 하나님의 보배롭고 존귀한 자로서의 삶을 날마다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생각할 것은 예수님이 마신 아버지께서 주신 잔입니다.
사람이 무슨 일이든지 성공적인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그 마음에 무엇이 찰랑찰랑 차 있어야 됩니다. 차 있는 것이 있어야 됩니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다윗이 고백한 것 내 마음에 찰랑찰랑 차 있는 것이 있어야 내가 무엇을 하던 거기에 자신감이 생기고, 여유가 생기고, 그리고 뭔가 남들에게 매력이 되고, 사람들이 나를 따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 자신이 확신이 생기고, 용기가 있고, 거기에서 담대함이 비롯되는 것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토크쇼 호스트인 오프라 윈프리에 대한 프로를 보니까 한번은 그가 토크쇼를 진행하다가 ‘광우병 때문에 햄버거를 먹으면 안 되겠군요.’ 이 한마디를 했는데 그것이 주식 시장의 소고기 유통업의 주가를 하락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그래서 소고기 업자들이 오프라 윈프리에게 손해배상 소송을 청구했습니다. 그 발언 때문에 소고기 업자들이 손해를 입었다. 어처구니없는 일이지만 이 여성이 몇 개월 동안 매일 재판에 참석하면서 토크쇼를 녹화하는 피곤한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오프라가 곰곰이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왜 하나님이 이 일을 나에게 허락하셨을까? 이 일을 통해서 내가 배워야 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런데 이런 깨달음이 오더라고 합니다. 
‘내가 무슨 일을 하든지 세상에서는 늘 나를 오해하고, 나를 욕하고, 나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럴수록 내 자신이 흔들리면 안 되고 오히려 내가 누구며 내가 어떤 목적으로 살아야 하는지를 더 분명히 알아야 되겠구나.’ 
이것을 깨닫는 순간에 오프라는 이번 재판에서 자기가 이길 것을 확신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대로 됐습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고 그 외적인 시련이 그의 마음마저도 무너뜨리도록 허용했다면 아마 그는 재판에서 졌을 뿐만이 아니고 그의 인생에 많은 손해를 겪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내가 지금 왜 이 자리에 있는가를 바로 깨닫는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무엇을 위해서 내가 이 자리에 있는가? 누구를 위해서 내가 이 자리에 있는가를 우리는 항상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을 한 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소명입니다. 내가 왜 이 일을 해야 하는가 하면 바로 주님이 그 자리로 나를 불러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먼저 있었습니다. 내가 감당해야 할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나를 이 자리에 불러주셨다고 하는 소명의식으로부터 우리는 출발을 합니다. 그리고 주님이 불러주셨으니 주님이 맡겨주셨으니 내가 기쁨으로 감당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이 사명감입니다. 이건 내가 할 일이야 주님이 내게 맡겨 주신 일이야 그러니까 주님이 기뻐하시도록 내가 이 일을 해야만 해 이것이 바로 우리들이 지녀야 할 바른 자세입니다.

그런데 그런 우리들에게 본이 되는 분이 누구냐 하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을 잡으러온 군병들을 가로 막고 칼을 휘둘렀던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칼을 칼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이건 내가 마셔야 할 잔이야. 그러니까 누구도 이 길을 방해할 수 없어. 나는 이 길을 가야만 해 그런 말씀이십니다. 
우리의 존재의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건 바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온 세상과 더불어 사삼을 지으시고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을 뒤집어서 생각하면 우리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 43:3은 “네가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며 내가 너를 사랑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당연히 주님의 보배롭고 존귀한 자로서 살아야 하고 날마다 주님의 사랑을 누리면서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주신 잔입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고난의 길을 겪게도 하십니다. 왜 그렇게 하느냐 하면 그게 바로 진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나약한 자로 그냥 버려두시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강한 자 주님의 사랑 받기에 합당한 자로 우리를 세워 가십니다.

왜 그렇게 하느냐 하면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 주님 지금 저와 여러분을 위해서 기도하시지 않습니까?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면서 우리를 위해서 중보하신다고 로마서 8장은 말씀합니다. 
하나님 제가 아무개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아무개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세요. 아무개는 주님이 보시기에도 보배롭고 존귀하지 않습니까? 그에게 사랑을 베풀어 주세요. 
이것이 아버지 하나님께서 주님에게 주신 잔입니다. 주님은 자기를 부르신 ㅊ아버지 하나님의 뜻대로 세상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승리자가 되셨고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그 주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영광을 우리 모두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믿음 안에서 흔들림 없이 주님을 믿고 섬기는 하나님의 사람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애주가들은 “한잔 하지”라는 말을 자주 사용합니다. 함께 잔을 마시자는 의미입니다. 사실 이때의 뉘앙스는 환대 축하 친근함 우정 평화 등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한잔 하지’라고 할 때 그것은 서로 가까운 사이(intimacy)임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만일 그 제안이 거부된다면 그것은 친근함 혹은 우정을 피한다는 의미로 함께 어울리지 못하는 좀팽이로 취급받게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함께 잔을 마시는 순간은 서로가 하나로 어우러지는 나눔의 공동체를 형성하는 순간이요 대화가 이루어지는 자리입니다. 그러므로 잔을 마신다는 것은 우리의 삶에 있어서 희망과 용기, 그리고 자기 확신을 뜻합니다.

예수도 ‘잔’에 관한 말씀을 하셨습니다(마 20:20∼28,막 10:35∼40).
“너희는 내가 마시려는 이 잔을 마실 수 있겠느냐?” 
여기서 잔을 마신다는 것은 어떤 영웅적 행위를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기를 내세우지 않는 사랑의 행위이며 깊은 신뢰의 행위입니다. 또한 필요한 것을 채워주시는 하나님께 자신을 헌신하는 행위입니다. 

따라서 예수가 잔을 마신다는 것은 무조건적인 사랑의 영 안에서 생명을 나눈다는 의미입니다. “내가 마시려는 이 한 잔을 너희도 마시겠느냐?”고 묻는 그 잔은 바로 그러한 신비적 의미를 포함한다. 
예수님이 마신 자은 고난의 잔이었지만 결코 독배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 잔이야 말로 온 세계에 두루 펼쳐지는 구원의 축배가 되었음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오늘 우리들 앞에 놓여 있는 잔은 어떤 잔입니까?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기쁨으로 그 잔을 마심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보배롭고 존귀한 자로서 주님의 사랑 안에서 살아가시는 하나님의 사람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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