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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일등석 (눅 14:1, 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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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일등석 (눅 14:1, 7-14) 

1. 설국열차의 객실 등급

요즈음 가장 큰 화제를 불러일으키고 있는 영화가 있습니다. 봉준호 감독이 직접 대본을 쓰고 감독한 “설국열차”라는 영화이지요. 정말 할리우드의 최고가는 거장들이 만들어낸 작품에 비해 조금도 손색이 없는 좋은 영화입니다. 본래 이 영화는 불란서에 나온 만화가 원작인데, 봉준호 감독이 2004년 홍대앞 만홧가게에서 우연히 이 만화를 읽다가 영감을 얻어서 영화로 만들었습니다. 

기상이변으로 지구가 온통 꽁꽁 얼어붙었습니다. 마치 노아의 방주가 그랬던 것처럼, 열차 안에 들어가는 사람들만이 살아남게 됩니다. 이 설국열차는 영원히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달려 나가는데, 17년째 달려가는 도중에 열차 안에서 발생한 사건들을 다루는 SF, 공상과학 영화입니다. 

그런데 이 열차는 객실마다 등급이 있습니다. 맨 앞쪽에 열차의 엔진을 장악한 채 절대 권력을 누리는 윌포드가 있고, 맨 뒤쪽 꼬리칸에 간신히 무임승차해서 목숨을 부지한, 마치 빈민굴의 거지들과 같이 춥고 배고픈 사람들이 바글댑니다. 꼬리칸은 말 그대로 생지옥입니다. 전깃불도 들어오지 않고 유리창도 없습니다. 꼬리칸에 탄 승객들은 바퀴벌레로 만든 단백질 덩어리를 식량으로 공급받기 전까지, 먹을 것이 없어서 어린아이들을 잡아먹어야 할 정도로 극한 상황에 몰리게 됩니다. 

설국열차는 꼬리칸에서 앞쪽으로 나아갈수록 점점 더 좋아집니다. 마치 3등석에서 2등석, 1등석, 특등석으로 환경이나 대우가 좋아지듯이, 앞쪽 칸으로 갈수록 사람들의 환경이나 생활수준은 점점 더 좋아집니다. 신선한 과일이 넘쳐나고 갓 잡아 올린 생선으로 초밥을 만들어 먹는 등, 그야말로 최고 수준의 사치와 호사를 누립니다. 영화는 바로 이 꼬리칸에 탄 억눌린 사람들이 객실을 차례로 점령하여 맨 앞쪽에 있는 엔진실을 점거해나가는 쿠데타, 혹은 혁명의 과정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설국열차야말로 제가 본 영화들 중에서 가장 철학적이며, 또 신학적인 영화입니다. 열차를 하나의 우주로 설정해서 열차 안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통하여 인류의 계급투쟁의 역사와 진보과정, 등등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실제로 이 영화 안에는 수없이 많은 상징 장치들이 숨어 있어서 영화를 보는 관객들마다 다양한 해석을 쏟아 놓습니다. “꿈보다 해몽이 더 좋다”고, 정작 영화보다 SNS에 쏟아놓는 관객들의 영화평이나 해석이 훨씬 더 흥미로울 정도입니다. 

중요한 것은 설국열차에서 설정한 객실의 등급이 인간의 계급질서를 그대로 보여준다는 사실입니다. 꼬리칸에서부터 맨 앞쪽칸까지 사람들의 신분질서는 물론이고, 신분과 지위에 따라서 환경과 대우까지 달라지는 인류의 역사와 현실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2. 잔치자리에서 예수님이 주신 교훈

오늘 봉독한 누가복음 14장에 있는 말씀도 이와 같은 신분질서나 위계질서와 관계가 있는 말씀입니다. 먼저 14장 1절은 이 말씀이 어떤 맥락에서 나온 말씀인지 그 배경을 밝히고 있습니다. 어느 안식일에 예수께서 한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에 음식을 잡수시러 들어가셨습니다. 바리새인의 잔치자리에 식사초대를 받으셨던 것이지요. 

바리새인은 예수님 시대의 저명인사입니다. 종교적 열심이 워낙 유별나서 “바리새”라는 말 자체가 “보통 사람과 구별된다.”는 뜻입니다. 그야말로 바리새인은 예수님 시대의 유대 사회의 지배층 중에서도 맨 꼭대기에 있었고, 사람을 사귈 때에도 가난한 사람들, 죄인들, 장애인들과 상종하지 않는, 유난히 사람을 가려서 사귀는 사회종교적인 특권층이었지요. 그렇게 높은 신분질서를 자랑하고, 유난히 사람들을 가려 사귀는 바리새인의 집에 예수께서 식사초대를 받아 가셨습니다. 

그 식사현장에서 예수님은 그 당시 유대 사회에서 흔히 벌어지는 풍경을 보셨습니다. 초청을 받은 사람들이 높은 자리를 골라잡는 것을 보셨던 것이지요. 예수님 시대에 큰 잔치를 열고 손님을 초대할 때에는 자기 집안의 체면이 걸려 있기 때문에, 대개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존경받는 사람들을 주로 초대했습니다. 초청 리스트에 어떤 사람들이 있는가에 따라서 자기 신분도 덩달아 올라가고 내려갈 수 있기 때문에 주로 VIP들을 우선해서 초대했던 것이지요. 그러므로 바리새인 집에 초대받은 사람들은 다 내로라하는 특권층 인사들이기에 상석부터 골라잡았다는 말입니다. 전혀 이상할 것이 없이 흔히 일어나는 풍경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이 광경을 보시고 주인인 바리새인은 물론이고 잔치에 초대된 모든 사람들이 듣도록 두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첫째로, 7-11절에서 초대받은 손님들이 어떤 처신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말씀하시고, 둘째로, 12-14절에서 손님을 초대하는 주인이 어떤 자세로 손님을 초대할 것인가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① 손님들에게 주는 교훈 

먼저 예수께서 잔치자리의 손님들에게 주신 교훈은 이렇습니다. 8-10절 말씀을 다함께 읽겠습니다. “네가 누구에게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에 높은 자리에 앉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청함을 받은 경우에 너와 그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주라 하리니 그 때에 네가 부끄러워 끝자리로 가게 되리라 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끝자리에 앉으라 그러면 너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앉으라 하리니 그 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이 있으리라.” 

잔치에 손님으로 초청을 받아 갈 때에 먼저 높은 자리에 앉을 생각을 하지 말라는 충고이지요. 왜 그렇습니까? 내가 제일 높은 줄 알고 상석에 가서 앉아 있는데, 조금 있으니 나보다 더 높은 사람이 들어옵니다. 그 때 잔치에 초대한 주인이 와서 “아무개 선생님, 자리 좀 비워주십시오, 그 자리에서 내려와 저 쪽 밑에 가서 앉으십시오.” 그럴 때 얼마나 창피하겠습니까? 여러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얼굴을 붉히며, 가장 낮은 자리에 내려가 앉게 된다면 큰 망신이 된다는 말이지요. 

이렇게 하는 대신에 잔치 자리에 들어올 때부터 아예 맨 끝자리에 가서 앉으라고 했습니다. 그 때 주인이 “아무개 선생님, 왜 이렇게 뒷자리에 앉으십니까? 앞쪽에 가서 앉으십시오!” 하면, 그날 초대받은 모든 사람들에게 영광을 얻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은 지혜의 보고라고 일컬어지는, 오늘 봉독한 잠언서 25장 6절로 7절에 이미 기록된 지혜의 말씀입니다. 비록 자기가 얼마든지 높은 자리에 앉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할지라도, 겸손하게 낮은 자리를 먼저 차지했다가 주인이 이리로 높은 데로 올라가라고 하는 말을 듣는 것이, 처음부터 높은 자리에 앉았다가 주인이 저리로 낮은 자리로 내려가라고 하는 말을 듣는 것보다 더 낫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삶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지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역시 그 지혜의 말씀을 인용하셨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높임을 받는 문제인데, 누구에게 높임을 받느냐가 중요합니다. 사실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높임을 받아야 할 때가 많습니다. 어떤 모임에나 식사자리에 당연히 상석에 앉아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 때에는 어쩔 수 없이 상석에 앉아 모임을 주관하고, 또 사람들로부터 높임을 받아야 마땅하지요! 하지만 높임을 받되 사람들이나 하나님으로부터가 아니라 스스로 높임을 받으려고 할 때가 문제이지요. 무슨 모임이 있을 때마다 항상 상석부터 먼저 앉아 대접받으려고 하는 것은 사람들이나 하나님이 높여주시기 전에, 먼저 스스로 자신을 높이려고 하는 교만이 숨어있기 때문에 문제입니다. 

앞으로 여러분은 스스로 높임을 받으려고 하지 마시고, 사람들과 하나님이 높여주시는 그런 분들이 다 되시길 바랍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예수님도 누가복음 14장 11절에서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하지만 진정한 겸손은 마음 깊은 곳, 진심에서부터 우러나와야지, 더 높은 자리에 가서 앉고자 불순한 동기를 품고 낮은 자리에 가서 전략적으로 앉아 있다면, 이 또한 잘못일 것입니다. 진정한 덕이라는 것은 과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는 꼭 알맞은 상태입니다. 용기가 덕이라고 할 때, 용기가 지나쳐 만용이 되지 않고, 그렇다고 해서 용기가 모자라 소심한 겁쟁이도 되지 않는, 만용과 소심함 사이의 꼭 알맞은 중간 상태가 진정한 용기입니다. 

마찬가지로 겸손 역시 자기보다 훨씬 더 높이려는 교만도 아니고, 자기보다 훨씬 더 낮추는 비굴도 아니고, 꼭 자기 자신만큼 되는 것, 교만과 비굴의 중간쯤 되는 상태가 겸손인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우리가 품게 되는 고민은 어떻게 하면 자기를 높이는 교만에 빠지지 않고서도 자기를 존중할 수 있고, 어떻게 하면 자기를 비하하지 않고서도 겸손해질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듣는 여러분 모두는 교만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해서 비굴하지도 않은 꼭 여러분 자신만큼 되는 겸손한 분들이 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② 손님들 초대하는 주인에게 주신 교훈 

이와 같이 손님들에게 주는 교훈보다, 이제 손님을 초대하는 주인들에게 주는 예수님의 교훈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사실 고대 근동지방에서 손님 초대는 아주 신경을 써야 할 까다로운 문제였습니다. 어떤 부류의 사람들을 초대하는가에 따라서 자기 신분이 결정된다고 믿는 사회였기 때문에, 대개 지체 높은 사람은 자기보다 신분이 높거나 비슷한 사람들을 초대하려고 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습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결혼식이나 팔순 잔치에 대통령이나 장관들, 혹은 우리 사회에서 꽤 유명한 분들이 하객으로 몰려오면 주인의 위치도 그만큼 덩달아 올라가기 마련입니다. 반대로 자신의 신분과 지위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이 잔치자리에 초대받아 온 다면 자신이 모욕을 받는다는 생각이 그때나 지금이나 팽배해 있습니다. 

식사자리야말로 쌍방교류 혹은 상호 보상을 전제로 한 자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내가 초대한 사람들은 또 나를 초대해서 대접할 것이라는 기대 속에서 모든 식사초대와 대접이 일어난다는 말이지요. 하지만 예수님은 이와 같은 식사초대의 풍습과는 전혀 다른 손님 초대를 주문하십니다. 12-13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또 자기를 청한 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노라 잔치를 베풀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 

예수님은 이 말씀을 다름 아닌 당신을 초대한 바리새인에게 주셨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예수님 시대의 식사초대는 항상 “GIVE & TAKE”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누구를 초대할 때에는 반드시 그 손님이 답례의 표시로 자기를 초대해줄 것이라는 기대와 계산을 하고 초대합니다. 그러기에 부유하고 신분이 높은 사람을 초대해서 상다리가 휘어질 정도로 대접을 잘 해주면 반드시 그만한 대접을 다시 받을 것이라는 기대를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은 만일 이와 같이 대접받을 생각을 갖고 누구를 초대할 생각이라면, 초대하지 말아야 할 사람 네 부류와 초대해야 할 사람 네 부류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먼저 초대하지 말아야 손님들 넷이 있습니다. 벗, 즉 친구와 형제, 친척, 부한 이웃입니다. 아마도 이들은 서로 친한 사이이므로 대접 받았으면 또 대접할 소지가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언급하신 것 같습니다. 대접이라는 것이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고 값없이 은혜로 베푸는 선물이 되어야만 하는데, 이런 사람들은 내가 이만큼 대접받았으니 나도 이만큼 대접해서 갚아야 하겠다는 생각을 할 수 있으므로, 진정한 의미의 대접, 즉 전적인 은혜로 아무 값없이 베푼 선물이 되기가 어렵다는 것이지요. 그리하여 초대해서 잘 대접해놓고도, 다시 그만큼 대접을 받으면 대접한 은공이 사라지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은혜로 베푸는 선물이 아니라 상거래 행위에 불과하게 되는 것이지요!

이제 참으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잔치자리에 꼭 초대하라고 권하는 네 부류의 사람들입니다. 가난한 자들, 몸 불편한 자들, 저는 자들, 그리고 맹인들을 초대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들이야말로 예수님 시대의 최하층민으로서 종교적으로 사회적으로 변방으로 밀려난 OUTCASTS, 버림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온전하고 흠 없는 것을 존중하는 사회에서 이와 같이 흠 있는 사람들은 초대받기가 참으로 어려운 사람들이었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굳이 잔치를 배설해서 손님을 초대하려면 이런 부류의 사람들을 먼저 초대하라고 권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들은 갚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고 해서 자기도 그만큼 대접할 여력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이들이 받은 것은 말 그대로 은혜의 선물로서의 대접이지, 상거래 행위로서의 대접이 아닙니다! 
  

3. 거꾸로 매겨지는 구원열차의 등급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우리 교회가 항상 조심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유명한 사람, 잘난 사람, 깨끗한 사람, 건강한 사람, 그런 이들만 찾아오는 교회가 아닌, 무명한 사람, 못난 사람, 더러운 사람, 마음과 몸에 장애가 있고 상처가 있는 사람을 불문하고 누구나 다 올 수 있는 교회, 그런 천국 잔치자리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옛날 미국 서부시대에 자동차가 나오기 전에 역마차를 타고 다녔습니다. 대개 한 여섯 명 정도 탈수 있는 역마차였지만, 1등석에서 3등석까지 얼마의 요금을 내는가에 따라서 차이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등급은 좌석의 크기나 제공하는 음식의 종류가 다른 것에 있지 않았고, 역마차가 어려운 환경에 빠질 때 승객들이 어떻게 처신하는가에 달려 있었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비가 오는 날 바퀴가 진창인 웅덩이에 빠진다든지, 언덕배기가 너무 높아서 올라가기 힘들 때가 있습니다. 이때 1등석에 탄 승객들은 좌석 밑으로 내려올 필요가 없습니다. 그야말로 역마차가 어떤 위기를 만나더라도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하면 됩니다. 

2등석 승객은 문제가 생길 때 역마차 밖으로 나와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역마차 옆에서 그냥 걸어가면 됩니다. 하지만 3등석 손님들은 바퀴가 웅덩이에 빠져 꼼짝달싹 하지 않는다든지, 언덕배기에 올라가기 힘들 때라든지 하면, 일단 역마차에서 내려와 운전사와 함께 역마차를 힘을 다해 밀어서 문제를 해결해야만 했습니다. 그야말로 육체적인 노동을 감수해야만 하는 승객들이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읽을 때 우리 예수님이 지정해주시는 좌석은 다르다는 확신이 생겼습니다. 하나님 나라에서의 1등석은 손가락 하나 까딱 안하고 대접만 받는 좌석이 아니라 섬기고 희생하고, 아무 보상도 기대하지 않고 기꺼운 마음으로 대접하는 그런 나라인 것을 깨달았습니다. 

오늘 여러분이 하나님 나라의 1등석에 타시기를 원하십니까? 먼저 겸손히 섬기십시오! 아무 보상도 칭찬도 기대도 하지 말고 초대받기가 어려운 소외된 이웃을 대접하십시오! 그리하면 여러분이야말로 설국열차가 아닌 구원열차의 1등석 승객들이 다 되실 줄로 믿습니다! 

오늘 여러분이, 아니 우리 교회가 잔치를 열고 손님들을 초대한다면 어떤 사람들을 초대해야만 할까요? 이런 질문에 대해서 한번쯤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되갚을 능력이 없는 사람들을 대접할 때, 하나님이 우리의 선행을 대신 갚아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그리하면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 하시더라”(14절).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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