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회복의 은혜를 입는 길 (겔 20:33-49)

첨부 1


회복의 은혜를 입는 길 (겔 20:33-49)  
 
사람이 복된 삶을 살려면 자기 삶의 가치와 목적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 이해가 부족하면 인생의 장벽을 만날 때마다 삶을 비관하고 두려워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려는 마음만 잃지 않으면 힘든 상황에서도 삶이 그렇게 두렵게 느껴지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다락방 유언 설교를 마치며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세상을 이기신 예수님을 믿는 성도는 힘들어도 삶을 비관하거나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어릴 때는 어둠을 무서워하고 귀신 얘기 듣는 것이나 죽은 사람 보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커가면서 그런 것들이 점차 두렵지 않게 됩니다. 인생경험이 늘면서 그런 것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음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두려워해야 할 필요가 없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은 미성숙의 표시입니다.

어느 날, 한 아빠가 어린 아들을 교회 여름 캠프에 보냈습니다. 세상 캠프에서는 재미로 대개 유령놀이를 하는데 그렇게 유령놀이를 하고 돌아오면 자기 아들은 꼭 악몽을 꿨습니다. 그런데 교회 캠프에서는 유령놀이를 안 하니까 안심하고 아이를 보냈는데 유령놀이는 안 했지만 대신에 주일학교 선생님으로부터 사탄 얘기를 듣고 왔습니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사탄 얘기보다는 선하신 하나님 얘기를 많이 해주는 것이 좋습니다. 아이들에게 사탄 얘기를 하면 오히려 두려움의 영에 사로잡힐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탄 얘기를 들은 후부터 아들은 불을 끄면 질겁했고 잠자러 갈 때는 공포에 젖어 항상 말했습니다. “아빠! 사탄이 무서워요. 선생님이 사탄이 주위에 많다면서 ‘사탄아 물러가라!’는 말을 자주 했어요.” 그런 일이 계속되자 아빠는 아들의 두려움을 없애주려고 지혜롭게 말했습니다. “아론! 아빠는 네가 예수님을 붙잡고 강하고 무섭게 되도록 기도할게. 그러면 사탄이 무서워서 도망칠 거야.” 그 말을 듣고 아이가 밝은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아빠! 예수님을 붙잡으면 사탄이 저를 무서워해요? 그렇게 되게 기도해주세요.”

예수님을 꼭 붙잡고 사탄도 두려워하지 말고, 사람도 두려워하지 말고, 사건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또한 어떤 상황에서도 삶을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하게 사십시오. 그러면 오히려 사탄이 무서워서 도망칠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참 사랑이 없습니다. 사랑을 미끼로 사람을 이용하고 심지어는 괴롭힐 때도 있어서 그런 경험을 몇 번 하면 사랑을 잘 믿지 않게 됩니다. 그처럼 사람에게는 참 사랑이 없어도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러므로 어떤 어려움을 당해도 하나님이 자신을 사랑한다는 확신은 흔들리지 마십시오.

물론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녀라도 죄를 지으면 훈련용 징계를 받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징계는 끝장내려는 징계가 아니라 더 낫게 되도록 허락한 징계이기에 징계 후에는 반드시 회복의 길과 여지를 열어주십니다. 그러므로 진실한 믿음을 가졌다면 더 이상 죄책감에 사로잡혀 살지 말고 미래를 비관하지 마십시오.

어느 날, 한 여성이 목사님에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저는 과거가 있어서 양심상 도저히 결혼을 못하겠고 평생 죄 짐을 지고 혼자 살려고 해요.” 그때 목사님이 말했습니다. “자매님! 누구나 과거는 있어요. 회개하고 하나님도 잊어버리신 과거를 잊고 결혼해서 잘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누구에게나 잊고 싶은 과거는 있습니다. 그 과거에 너무 매이지 마십시오. 공의의 하나님을 생각하며 죄를 두려워하면서도 동시에 사랑의 하나님을 생각하며 과거의 죄와 상처에 얽매이지 말고 새로운 축복의 길을 열어 가십시오.

본문은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잘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스스로의 존재를 걸고 맹세하시며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바벨론을 반드시 심판하고 이스라엘을 포로생활로 흩어진 곳에서 다시 회복시키겠다고 말씀합니다(33-34절). 그러나 바벨론 땅에서 나오게 하셔도 죄를 지으면 그들을 이스라엘 땅으로 들이지 않겠다고 하십니다(38절). 어떻게 하나님의 공의를 충족시키며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회복의 은혜를 입을 수 있을까요?

1.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십시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완전히 배척하지는 않았지만 하나님을 섬길 때 우상 숭배하는 방식으로 섬겨서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혔는데 그런 행위를 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39절). 사람도 이름이 더럽혀지는 것을 싫어합니다. 하나님은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이름을 중시하는 하나님의 성품을 따라 성도도 명예욕은 없어야 하지만 명예심을 가지고 자기 이름이 더렵혀지는 것은 무엇보다 싫어해야 합니다. 

어떤 성도는 자신이 받은 상처를 애꿎은 자동차에게 풀면서 과속으로 차를 몹니다. 어떤 성도는 식당에 가서 식당 종업원들을 함부로 대하면서 자신이 받은 상처를 토해냅니다. “이게 뭐에요? 이것 치우세요. 이것밖에 못해요?” 그렇게 종업원을 종처럼 대하니까 옆 사람들이 미안한 마음이 들 정도입니다. 그런 사람이 식사기도를 하면 오히려 부끄럽습니다. 그런 태도들이 성도란 이름을 소중히 여길 줄 모르는 태도들입니다.

성도는 같은 잘못을 해도 곱빼기로 욕먹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일을 하겠다고 약속했다가 상황이 힘들다고 약속을 깨는 식으로 살아도 안 됩니다. 성도는 성도란 이름을 소중히 여기고 직분자는 집사나 권사나 장로나 목사란 이름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약속을 지키기 어려워도 힘써 지키려고 해야 자기 존재의 값어치도 올라가고 하나님의 이름도 더렵혀지지 않습니다. 그처럼 하나님의 이름을 힘써 높이려고 할 때 회복의 은혜도 빨리 나타날 것입니다.


2.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십시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다로 돌아와 높은 시온산에서 하나님을 섬길 때 그 예배를 기쁘게 받으시면서 정성이 담긴 소중한 예물을 요구하시겠다고 말씀합니다(40절). 왜 하나님이 헌신을 요구합니까? 그 마음과 정성을 보고 더 주시려는 목적 때문입니다. 자녀들에게 “아빠 좀 줄래?”라고 하는 것은 자세히 보면 “아빠가 너를 사랑한다. 네게 많은 것을 주겠다.”는 말의 다른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성도의 헌신을 받으시고 나서 더 주시고 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나타내어 불신자들이 보는 상황에서 하나님이 이름이 높임 받으시려고 헌신을 요구하십니다(41절). 그처럼 자신과 자신의 것을 힘써 바치면 어떤 모양으로든지 반드시 하나님의 축복을 받습니다. 그러나 무엇인가 받겠다는 목적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거나 교회를 섬기지는 마십시오. 하나님은 그런 마음을 별로 기뻐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주변을 떠돌아다니는 기복적인 간증들에 속아 넘어가지 마십시오.

물질에 집착하면 물질 축복을 더 못 받고 치유에 집착하면 치유를 더 못 받습니다. 혹시 그렇게 집착해서 받아도 결국 그를 통해 꼭 눈살 찌푸려지는 일이 생깁니다. 그처럼 기복주의는 항상 결말이 좋지 않게 끝납니다. 반면에 받으려는 생각이 없이 이미 받은 은혜에 감사해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려고 하고 드림의 철학으로 살면 오히려 더 받게 되고 회복의 역사도 속히 나타날 것입니다. 또한 그런 성도들을 통해 하나님은 큰 영광을 받으시고 결국 그런 성도들이 불신자들에게까지 칭찬 받게 될 것입니다.


3. 하나님을 알려고 하십시오 

본문에는 “내가 여호와인 줄 알라!”는 말씀이 많이 나옵니다(38절, 42절, 44절). 성도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알면 자신도 더 알게 됩니다. 그러면 죄 가운데 있는 자신이 싫어지면서 다시는 죄에 빠지지 않도록 다짐하게 되고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도록 힘쓰게 됩니다(43-44절).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성도들 중에는 덮어놓고 믿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신앙생활에서 때로는 의문도 필요합니다. 불신상태에 머물려는 이유와 변명을 찾으려고 의문을 품는 것을 잘못이지만 신뢰하려는 이유를 찾으려고 ‘정직한 의문’을 품는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정직한 의문‘은 진리를 새로운 차원에서 더 깊이 알기를 원하기에 참된 믿음을 얻게 하는 한 방편이 될 수 있습니다. 

성경을 덮어놓고 믿지 말고 성경을 펴놓고 믿으십시오. 덮어놓고 믿으면 하나님이 어떤 분이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이 무엇인지 무관심하게 됩니다. 그처럼 하나님에 대해 무관심하기보다는 차라리 하나님과 씨름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창세기 32장을 보면 야곱은 인생의 큰 장벽 앞에서 하나님과 씨름한 후 비로소 ‘하나님과 씨름해서 이긴 자’란 뜻을 가진 '이스라엘'이란 이름을 새로 받았습니다.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하고 의문을 품고 하나님과 씨름하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불평하고 원망하려고 의문을 품은 것이 아니라 정말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싶어서 의문을 품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문을 가지고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과 씨름하면 하나님이 어느 순간에 어떤 문제에 대한 의문을 풀어주시고 또한 지혜와 믿음을 넘치게 주셔서 마침내 회복의 자리로 올려주실 것입니다.


4.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십시오

본문 46절 말씀을 보십시오. “인자야 너는 얼굴을 남으로 향하라 남으로 향하여 소리 내어 남쪽의 숲을 쳐서 예언하라.” 이 구절에서 “얼굴을 남으로 향하라!”는 말은 “얼굴을 유다로 향하라!”는 말이고 “남쪽의 숲을 쳐서 예언하라!”는 말도 결국 “유다에게 두려운 예언의 말씀을 전하라!”는 말씀입니다. 어떤 말씀입니까? 유다를 불로 심판하실 텐데 그 남쪽 유다를 심판한 불이 북쪽 이스라엘까지 이르러 남북이 다 불 심판으로 인해 모든 사람들의 얼굴이 그슬릴 것이란 말씀입니다(47절).

남북이 서로 연계되어 심판 받는다는 말씀은 남북 분단국가인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처럼 느껴집니다. 우리나라 남북도 사실상 공동운명체로서 남쪽의 심판이 북쪽에 미치고 북쪽의 심판이 남쪽에 미칩니다. 그런 불 심판을 너무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 심판의 불을 일으킨 분이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48절). 하나님 안에서는 무서운 심판조차 감사와 소망의 원천이 됩니다. 그 심판에 대한 경고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께 돌아서면 회복의 은혜가 주어집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그 심판의 메시지를 비웃는 것입니다(49절).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임박한 심판을 하나님이 미리 알려주신 예는 성경에 많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소돔의 멸망 사실을 미리 롯에게 알려주었고 노아의 홍수도 미리 경고하셨습니다. 그런 경고의 말씀들이 왜 무시되고 있습니까? 그 동안의 잘못된 재림 예언들 때문입니다. 동화책 얘기처럼 “늑대가 나타났다”는 말을 수없이 듣고 속았던 사람들이 이제는 심판에 대한 경고의 말씀을 아예 외면하는 것입니다. 그 모습을 사탄이 얼마나 좋아하겠습니까?

종말 날짜를 정해 마음과 물질을 훔치려는 시한부 종말론자들의 말은 아예 듣지 마십시오. 그러나 심판 때가 가까워진 것만은 잊지 마십시오. 그 동안의 수없이 빗나간 잘못된 종말예언으로 인해 종말의식까지 약해지면 안 됩니다. 신문을 조금만 주의 깊게 읽어봐도 조만간 지구촌에 큰일이 생길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너무 종말을 걱정하지는 마십시오. 하나님은 심판 중에도 늘 피할 길을 열어주시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을 “잘 준비하면 소망이 넘친다!”는 말씀으로 승화시키며 미래를 준비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때가 되면 누구나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됩니다. 그때 성공과 실패, 행복과 불행, 영광과 수치가 최종적으로 결정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잠깐 실패하고 사업이 힘들어졌다고 해서 마치 인생 전체에서 실패한 것처럼 좌절하지 마십시오. 인생의 성패는 세상의 결과물로 좌우되지 않습니다. 살면서 잠깐 좌절감이 생길 때도 있지만 좌절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때까지 보류하십시오. 그때까지 좌절할 것도 없고 속단할 것도 없습니다. 그저 넉넉한 믿음으로 최선을 다하면서 심판 때를 준비하십시오.

4종류의 심판이 있습니다. 첫째, 법의 심판입니다. 법을 어기면 심판받습니다. 둘째, 여론의 심판입니다. 남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 도 중요합니다. 셋째, 양심의 심판입니다. 내가 나를 어떻게 보느냐는 더욱 중요합니다. 넷째,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법과 여론의 심판을 중시하고 진실한 사람은 양심의 심판을 중시합니다. 그러나 양심도 거짓될 수 있기에 너무 양심을 신뢰하지 마십시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최종적인 심판입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위대한 생각이 있습니다. 그것은 “나는 조만간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또한 이 세상에서 가장 복된 비전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기쁘게 서겠다는 비전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만 성도는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하면 오히려 기쁨과 소망이 넘쳐야 합니다. 어려워도 충성하고 헌신하며 많은 선한 열매를 맺고 선한 영향력을 미치며 살다가 하나님 앞에 선다면 하나님이 얼마나 기쁘게 맞아주시겠습니까?

이제 고향을 그리워하듯이 천국을 그리워하며 열심히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고 하십시오. 부자들은 고향을 그리워하지 않습니다. 현재 있는 곳이 좋기 때문입니다. 대개 가난하고 외로운 자들이 고향을 그리워합니다. 명절 때 보면 대개 낙후된 지역으로 가는 터미널이 훨씬 복잡합니다. 부자들은 강남이 좋으니까 고향 생각이 별로 나지 않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인생이 고달프니까 그토록 고향을 사모하는 것입니다. 

천국은 가난한 사람들의 것입니다. 많은 돈과 좋은 집이 있으면 천국에 가고 싶은 마음이 없게 됩니다. 그래서 더 못 갑니다. 그것이 바로 물질적인 풍요가 주는 비극입니다. 그러므로 돈을 많이 벌어도 돈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빚진 자 의식을 가지고 자신의 거룩한 사명을 따라 살려고 하십시오. 하나님의 은혜는 선물로 주어졌어도 받는 입장에서는 빚으로 받을 때 가치 있는 삶과 위대한 인격이 펼쳐집니다.

남의 도움을 받는 것을 자존심 상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어려울 때 도움 받은 것을 자존심 상하게 생각하는 헛된 자존심은 종종 하나님의 도움도 못 받게 하는 속 좁은 인생을 만듭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 주제는 ‘은혜’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최대 과제 중의 하나도 ‘은혜를 많이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도움도 잘 받을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대개 사람을 통해 오기 때문입니다.

물론 돕기 싫어하는 사람에게 억지로 도움을 요청해서 부담주지는 마십시오. 그러나 자발적으로 돕겠다는 사람의 호의를 억지로 거절하지는 마십시오. 그처럼 잘 받을 줄도 알아야 하는데 의외로 도움을 잘 받을 줄 아는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다. 도움 받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감사를 모르는 것, 도움 받는 것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땀을 외면하는 것, 도움 받은 것을 자존심 상하게 생각하고 지나치게 감추려고 하는 것 등이 도움을 잘 받지 못하는 모습들입니다.

사람은 서로 돕고 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도움을 잘 받을 줄도 알아야 합니다. 도움을 잘 받을 줄 안다는 것은 도움을 감사함으로 잘 받고 그 도움을 바탕으로 더 노력해서 남을 돕는 위치까지 올라서는 것을 말합니다. 남의 도움만 받고 놀고먹으려는 모습은 도움을 잘 받는 것이 아니라 도움을 악용하고 남용하는 것입니다. 결국 도움 받는 사람에게 있어야 하는 아주 중요한 의식은 바로 ‘빚진 자 의식’입니다. 

왜 성도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열심히 뜁니까? 하나님의 은혜의 빚을 졌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은혜는 주는 입장에서는 선물이지만 받는 입장에서는 빚으로 받아야 합니다. 은혜를 받을 때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받으면 은혜의 가치가 떨어지지만 빚진 자 의식을 가지고 받으면 은혜의 가치가 올라갑니다. 

또한 빚진 자 의식을 가지고 은혜를 받으면 그때부터 삶의 자세가 달라지면서 받은 은혜가 헛되지 않도록 열심히 노력함으로 성공 가능성도 커집니다. 그렇게 해서 성공하면 어려웠을 때 자기를 도왔던 사람들의 사랑과 은혜에 보답하고 더 나아가 하나님의 뜻대로 자기의 성공과 물질을 잘 활용하는 것이 도움을 잘 받을 줄 아는 모습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으로부터 큰 은혜의 빚을 졌습니다. 그 빚을 다 갚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오직 감사 찬양만 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처럼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늘 받기만 할 뿐입니다. 그 은혜의 빚을 하나님께는 갚을 수 없지만 하나님은 그 빚을 갚을 대상으로 선교와 구제 대상을 주셨습니다. 결국 선교하고 구제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빚을 갚는 구체적인 행동입니다. 그처럼 “은혜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았지만 빚은 사람에게 졌다!”는 빚진 자 의식을 가지고 헌신하고 선교하십시오.

헌신적인 성도들은 아무 보상을 바라지 않고 헌신합니다. 그 성도의 헌신이 당연한 것이라도 목회자는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고 빚처럼 여깁니다. 그 빚을 갚지 못하니까 그저 감사하다는 말밖에 할 것이 없습니다. “권사님! 집사님! 감사해요.” 그러면 헌신적이고 충성스런 성도는 늘 대답합니다. “목사님! 저는 무익한 종입니다. 그저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처럼 서로 빚진 자 의식으로 살면 하나님이 그런 관계를 어떻게 축복하지 않겠습니까? 때가 되면 그 관계를 통해 기적적인 역사가 나타날 것입니다.

이제 신앙생활을 하면서 쓰다 남는 것만 드리려고 하거나 여유가 있어야만 드리려고 하지 마십시오. 또한 어떤 일이든지 영혼에 유익이 없는 일은 힘써 버리고 하나님의 뜻과 영혼을 위한 일이라면 때로는 고집스럽게 그 일을 하십시오. 자세히 보면 하나님도 야곱처럼 고집이 센 사람을 쓸 때가 많습니다. 심지가 굳어야 한다는 말은 고집도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고집이 센 사람은 새벽기도를 시작하면 고집스럽게 그 자리를 지킵니다. 또한 헌신과 봉사 자리도 고집스럽게 지킵니다. 고집도 잘 쓰면 정말 쓸 만합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어떤 교회에서 한 어르신은 젊은이가 걸레질을 하면 “왜 내 상급을 뺐느냐?”고 유머를 하면서 젊은이보다 더 봉사합니다. 거룩한 고집이 센 분들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수고대로 넘치는 은혜와 보상을 내려주실 것입니다. 구원받은 자녀의 영광이 다 똑같지 않습니다. 해의 영광이 다르고 달의 영광이 다르고 별의 영광이 다른 것처럼 죽도록 충성하고 헌신한 사람과 필요할 때만 하나님을 찾는 사람의 영광이 똑같을 수 없습니다. 이제 더욱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따라 헌신함으로 인물을 만들고 내일의 축복을 예비하는 복된 심령들이 되십시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