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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귀신에게 하는 제사 (고전 10: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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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에게 하는 제사 (고전 10:20-21) 
 
  
20 대저 이방인의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 되기를 원치 아니하노라 
21 너희가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하고 주의 상과 귀신의 상에 겸하여 참예치 못하리라 
 
지난 월요일 동생과 함께 보성에 있는 조부모님, 부모님, 그 밖의 가족들 묘소를 찾아 벌초를 하고 돌아왔습니다. 60여 평이 되는 꽤 넓은 묘소여서 오전 7시부터 11시까지 꼬박 4시간 동안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저는 무성한 칡넝쿨을 걷어 내고 갈퀴질을 한 것뿐인데, 온 몸이 얼마나 아픈지 움직일 때마다 나도 모르게 아이고 소리가 나오고, 약을 사먹고도 며칠 동안 상당한 고생을 했습니다. 연단되지 아니한 육체가 얼마나 약한가를 다시 한 번 절실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나저나 우리들이 살아 있을 때는 어떻게 해보겠는데, 죽은 다음에는 멀리 있는 자식들이 어떻게 벌초를 할 수 있을까? 이게 보통일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며칠 후이면 우리 민족 고유의 큰 명절인 추석입니다. 그래서 매주일 계속하던 고린도전서 강해 설교를 중단하고, 이미 두 차례나 전한 말씀이지만, 이 절기에 적합하다고 생각되는 본문을 택하여 “귀신에게 하는 제사” 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는 중에, 함께 은혜를 사모하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을 잘 경청하여 아직도 제사문제로 고민하는 성도들은, 커다란 믿음의 결단이 있어지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팔월 한가윗날의 유래를 다시 한 번 살펴보면, 신라 유리왕 때 6部를 2部로 나누어, 각기 편을 짜고 공주들로 대표하게 했다고 합니다. 두 편으로 나누어진 여자들은 7월 16일부터 길쌈을 시작하여, 8월 보름에 그 공이 많고 적음을 심사했는데, 여기에서 지는 편은 술과 밥을 이긴 편에 사례하고, 진편의 한 여자가 ‘회소 회소’(會蘇 會蘇) 하면서 탄식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가위’ 라는 말의 뜻이 무엇인지는 확실치 않다고 합니다. 이것은 훨씬 후대의 일로서, 한자 사용이 성행하였을 때, 중국인들의 중추(中秋) 추중(秋中) 칠석(七夕) 월석(月夕)이라는 말을 본받아, 중추의 ‘秋’자와 월석의 ‘夕’자를 따서 ‘秋夕’ 이라 한 듯 하다고 합니다. 이러한 추석이 후대에 와서는 햇곡식과 햇과일을 차려 놓고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며, 조상의 산소에 성묘를 가는 절기로 바꾸어졌다고 보는 것이 추석의 유래에 대한 일반적인 학설입니다.

또한 본래의 가윗날이 유교의 조상 숭배의 날로 바꾸어진 것은, 유교가 나라의 종교로 정해진 이조시대 부터라고 합니다. 그래서 ‘추석’ 하면 조상 숭배와, 또는 제사와 따로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밀접한 관계에 있는 명절이 되었는데, 그렇다면 제사는 무엇이고, 제사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태도는 어떤 것이어야 하는 가에 대해서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제사를 가장 성대하게 지내는 민족은, 원시적인 아프리카라고 합니다. 이 아프리카는 대개 사람이 죽으면 시신을 집 가까이 묻거나, 인도네시아의 경우는 시신을 방안에 두었다가 그 시체가 다 썩은 뒤에 장례를 지낸다고 합니다. 그러나 제사 하면 아무래도 중국을 먼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데, 고대 중국에서는 공자 이전의‘하’ 나라 때에 제사를 지낸 기록이 있다고 합니다. 

그 때의 제사는 부모에게 드리는 것이 아니라, 특별히 위대한 황제나 왕에게만 제사를 드렸다고 합니다. 왕위 계승이 중요시되어 세습제가 되자, 자기 아버지가 훌륭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또 자기의 위치와 권위를 강조하기 위해, 선왕들에게 제사를 지내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주후 1200년경 중국 ‘송’ 나라의 유명한 유교 학자 주희(주자)가 유교, 불교, 도교와 같은 종교들의 영향을 받아 성리학(주자학)을 주창하면서, 처음으로 조상의 제사를 강조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말기 정몽주, 이색 등이 주자학을 도입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그러다가 이 태조가 새 왕국을 건립하면서, 나라의 종교를 불교에서 유교로 바꾸었고, 처음은 왕가에서 장려하던 제사가 서서히 평민들에 퍼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영정(影幀)을 그려 놓고 제사하였고, 다음에는 신주(神主)를 만들어 제사하였고, 그 후 신주란 말이 위패(位牌)로 바꾸어지고, 시대가 발달함에 따라 종이로 지방(紙榜)이라는 것을 만들어 사용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처음에는 왕가에서 억지로 강조해 온 제사 풍속이 점점 일반 서민들에게도 성행하여, 제사를 어떻게 지내야 하는 문제로 사화(士禍)가 심할 때는 서원(書院)을 중심으로 큰 싸움이 일어나, 제사 문제에 많은 폐단이 따르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이조 말기에는 외국에 가서 유학을 한 많은 선각자들이 기독교로 개종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이조의 유교와 제사에 관계된 폐습이 우리나라를 약화시켰으며, 이 유교의 풍습을 벗어나지 아니하면, 식민지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깨닫고, 도산 안창호 선생 같은 분은 이 민족이 하루빨리 유교적 사고방식을 버려야 할 것을 역설했습니다.

본래 공자는 영혼 불멸이나 사후 세계에 대해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토속 신앙의 영향을 받으면서, 사람이 죽으면 혼백(魂魄)이 갈라져서 혼은 하늘로 올라가고, 백은 땅으로 내려가는데, 혼이 하늘로 올라가서 거처를 얻지 못하고 떠돌아다니게 될 때, 후손이 정성 드려 제사를 지내면, 죽은 조상의 혼백이 연합하여 사후에도 안정된 삶을 지속한다고 믿었습니다. 때로는 신주(神主)를 만들어 놓고, 나무로 기둥을 만들어 제사를 지내면, 조상들의 혼이 신주를 거처로 삼아 사후의 생을 편안하게 유지할 수도 있다고 믿었습니다.

제사 제도 가운데 더욱 크게 문제가 되는 것은, 제사를 통해서 복을 받는다는 사상입니다. 제사는 하늘의 뜻에 맞는 일이기 때문에, 정성껏 제사를 지낼 때 하늘의 복을 받게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한 생각들이 시간이 흐름에 따라 하늘이 복을 주는 대신, 죽은 조상이 직접 복을 준다고 여기게 되어, 신의 자리를 조상이 대신 차지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기독교는 이 제사 문제를 어떻게 이해하고 대처해 왔습니까? 천주교가 이 땅에 처음 들어왔을 때, 가장 심각한 문제 중 하나가, 바로 이 제사 문제였습니다. 복음 전파에 있어서 조상의 제사 문제로 고민하다가, 북경의 신부에게 질문을 했는데, “조상 숭배는 카톨릭 교회와 모슨 되는 것” 이라는 회답을 보내 왔습니다. 로마의 교황청에서도 조상 숭배는 성경의 교훈과 어긋난다고 베네딕투스 14세 교황은 선언을 했습니다. 그때부터 조선의 천주교도들은 신주를 불태워버리면서, 조상 숭배를 금하기 시작했으며, 이로 인해 100여 년 동안 무서운 박해를 받게 되고, 1791년 전라도의 윤지충과 권상연이라는 신도가 순교를 당하게 됩니다. 28세에 개종한 윤지충은 “나는 천주의 명을 어길 수가 없소. 나는 내 돌아가신 어머니께 잘못할지언정, 천주님에게 잘못할 수는 없습니다.” 라는 말을 남기고 순교를 했습니다. 

그러나 조상 숭배가 성경의 교훈과 어긋난다고 했던 천주교는, 1939년 일본의 압력에 굴복하여 마침내 신사 참배와 조상 숭배는 하나의 시민 의식이라고 선언을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80여 년 동안 신앙의 정절을 지키기 위해 순교한 일만 명 순교자의 죽음을 그들 스스로 헛되게 하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천주교는 죽은 지 삼일 되는 날 위친회를 지내고, 7일 위친회, 30일 위친회를 지내고, 매년 11월 2일은 죽은 자를 위로하는 위령의 날로 정하고 미사를 지냅니다. 그래서 제사 문제로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들이, 천주교로 발걸음을 돌리는 일이 왕왕 있게 된 것입니다.

기독교가 한국에 전파되었을 때, 가장 강하게 부딪힌 문제가 역시 조상의 제사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한국에 들어온 선교사들은 복음적인 선교사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모아 놓고 “조상 숭배는 성경의 교훈과 어긋납니다. 그리고 돌아가신 조상에게 음식을 바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하고 가르쳤습니다. 개신교 선교사님들은 세례 받을 때에 서약하는 종목 9 가지를 정했는데, 그 중 첫째가 “조상의 靈을 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고 순종하겠습니다.” 하는 고백을 하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조선 사람들은 예수 믿을 때, 매우 어려운 결단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기독교가 처음부터 취한 태도는 이렇게 철저하고 단호했습니다. 이 같은 태도는 일제 36년 치하에서도 계속되었습니다. 일제가 강요한 신사 참배는 단순한 시민 의식이 아니라, 우상 숭배와 같은 종교적 의미를 지닌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면 사후 사람의 영혼은 어떻게 됩니까? 인간이 죽었다가 그 죽은 영과 육이 분리되었을 때에, 영혼은 어떠한 상태가 됩니까? 이에 대해서 전통적인 장로교회가 400년 동안 믿고 따라왔던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 32장 1절에서는 이렇게 답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육체는 죽은 후에 티끌로 돌아가서 썩어버린다. 그러나 그들의 영혼은 죽거나 자는 것이 아니라, 죽지 않는 생을 가지며, 죽은 후에 영혼은 즉시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 돌아간다. 영혼은 죽는 것과 동시에, 즉시로 구천(九天)에 떠돌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그 영혼을 주신 하나님께 돌아간다. 의로운 자의 영혼은 완전히 거룩하게 되어 가장 높은 하늘로 올라간다. 거기서 그들은 빛과 영광 가운데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오며, 그들의 육신이 완전히 구속되기를 기다린다. 

그러나 사악한 자의 영혼은 지옥에 던져진다. 거기서 그들은 고통과 어둠 가운데서 대 심판의 날을 기다린다. 성경은 육신이 죽은 후에 가는 장소로서, 이 두 가지 이외에는 아무것도 가르쳐 주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물론 성경에 많은 증거가 있습니다. 눅 16장의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서도 두 장소 곧 낙원과 음부를 말합니다. 사후 영혼은 이 두 장소 중 어느 한 곳에 고정이 됩니다. 절대로 왕래가 불가능합니다. 부자의 애원에 대한 답변이 무엇입니까?

그러므로 1)천국과 지옥 외에 연옥이 있다는 천주교의 주장은 잘못인 것입니다. 2)사후 사람의 혼이 구천에 떠돌아다닌다거나, 조상의 혼이 신주나 위패에 내려온다거나, 제사 음식을 먹으러 온다는 것은, 너무도 터무니없는 어리석은 이야기인 것입니다. 3)조상이 복을 준다는 것도 터무니없는 비성경적인 말입니다. 그렇다면 가난하게 살 자식들, 불행하게 살 자식들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오히려 제사를 수없이 많이 지내는 장손이 더 못살고 망하는 일이 많음을 보았지 않습니까? 제사가 아무리 부모 공경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제사는 분명히 우상 숭배적인 요소가 많습니다.

1)제사는 조상 숭배의 형식으로 나타났습니다. 제사가 단순히 부모 공경을 위한 것이 아니라, 신앙이란 것을 이율곡 선생도 밝힌 바 있습니다. 제사의 의미에는 예배하는 것, 진혼(鎭魂)하는 것, 사랑하고 두려워한다는 우상 숭배적인 요소가 다분한 것입니다. 2)제사에서는 조상의 영혼을 귀신(鬼神)으로 여겼습니다. 신주를 만들어 제사를 드리면, 조상들의 혼이 신주를 거처로 삼아 사후 생을 편안히 지낼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커다란 불효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자기의 조상을 원숭이라고 하는 것보다, 오히려 더 큰 불효가 되는 것입니다. 왜 그러합니까? 귀신의 정체가 무엇입니까? 귀신은 사탄의 졸개들입니다. 결코 죽은 자의 영혼이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의 부모를 마귀의 졸개들인 귀신으로 여긴다면, 이 어찌 망령된 불효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3)제사를 화액(災厄)을 면하는 수단으로 보았습니다. 

제사 지내는 사람들의 마음에는, 돌아가신 부모를 잘 공경해 드리면 자신들을 축복한다, 혹은 잘못하면 저주한다는 식으로, 조상들이 화복(禍福)을 주관하고, 가정의 보호자라는 신앙이 밑바닥에 깔려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사는 부모 공경이 아니라, 분명히 신앙인 우상 숭배임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이방인인 불신자가 제사하는 것은, 분명히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하는 것도 아니고, 부모에게 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우상 숭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단호하게 제사를 끊어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 21절에 “너희가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하고, 주의 식탁과 귀신의 식탁에 겸하여 참여하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에 의하면, 만일 주의 성찬 예식에 참여하여, 주의 몸과 피에 참여한 성도가, 귀신의 상과, 귀신과의 교제에 동참하는 일은, 주님과 귀신을 겸하여 섬기는 일로서, 참으로 가증한 일이 된다는 것입니다. 가장 우수한 예수 그리스도의 像 가운데 하나는 ‘돌월드센’이라는 사람이 조각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 돌월드센이 예수 그리스도의 像을 완성한 후, 루불 박물관을 위해 ‘비너스 像’의 조각을 의뢰 받았습니다. 그 때 그는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像을 조각한 손으로, 異敎의 여신상을 조각할 수는 도저히 없다’고 하면서 거절하였다고 합니다. 돌월드센이 조각한 그리스도의 像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조각한 그 손으로 이교의 여신상을 조각할 수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거룩하신 주님의 몸과 피에 참여하고, 주님과 연합된 성도가, 어찌 또 귀신과 교제하며, 자신을 더럽힐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도 없거니와, 그래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것입니다.

22절에 “그러면 우리가 주를 노여워하시게 하겠느냐? 우리가 주보다 강한 자냐?”고 했습니다. 성도가 귀신과 교제하고, 귀신의 상에 참여하는 것은, 주님을 노하시게 하는 일이요, 벌 받을 일임에 틀림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보다 강한 자냐? 우리가 주님보다 강한 자가 아니기 때문에, 주님의 진노와 벌을 피할 길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성경은 예배의 대상을 어떻게 가르칩니까?

1)죽은 인간이 아닌, 영원히 살아 계신 하나님께 드리도록 가르칩니다. 사도행전 14장에 보면, 바울과 바나바가 루스드라에서 앉은뱅이를 고치자, 사람들이 바울은 허메 神이라 하고, 바나바는 쓰스 神이라 하면서, 예배하려고 했습니다. 그 때 바울과 바나바는 옷을 찢으면서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런 일을 하느냐?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함이라.”고 하면서, 자신을 예배하려는 것을 철저히 배격했습니다. 

2)창조주께 하나님께 예배드리도록 가르칩니다. 사도행전 17장에 보면 아데네 사람들은 3만 가지 우상을 섬기고도 모자라서, ‘알지 못하는 신’에게 바치는 제단까지 있는 것을 보고, 사도 바울이 얼마나 통분히 여기는 가를 볼 수 있습니다. 우리 들의 조상은 창조주가 아니므로, 결코 예배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사탄이 예수님을 시험하면서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고 했을 때 주님께서는 “주 너희 하나님께만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고 하면서 단호하게 물리치셨습니다.

3)삼위일체 하나님께만 예배드리도록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천사도, 마리아도, 어떤 성자도, 신앙하거나 예배해서는 절대로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제사가 단순한 부모 공경이 아니라, 십계명 1. 2계명을 다 어기는 우상 숭배라면, 신자들은 어떻게 해야 할 것입니까? 잘 믿는 성도의 가정일 경우, 제사 보단 ‘추모일’(追慕日)로 지킴이 좋을 것입니다. 돌아가신 후 3년 정도가 적당하다고 합니다만, 가정의 형편대로 할 것입니다. 그리고 예배 인도도 가족 중 한 사람이 하는 것이 좋습니다. 고인의 사진이나 육성 녹음을 들어보고, 고인의 유훈을 되새겨 보며, 고인의 사랑과 은혜를 기리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새신자일 경우, 두려움을 갖게 되고, 토속 신앙에서 오는 여러 가지 선입관을 갖고 있으므로, 교역자가 한 두 차례 인도해 주면 좋을 것입니다. 가족의 반은 신자이고, 반은 불신자일 경우, 신자들은 될 수 있는 대로 기독교식으로 하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친척들의 눈치, 시어머니 눈치, 남편의 눈치나 보면서, 제사 지내라 하면 제사 지내고, 교회 나가지 말라고 하면 다니던 교회를 그만 두고 하는 나약한 신자가 되면 아니 될 것입니다. 만일 우리 신앙의 선진들이 그 뿌리 깊은 유교의 틀 속에서 그토록 나약하게 신앙생활을 했더라면, 오늘 기독교가 어찌 이토록 부흥할 수 있었겠습니까? 

죄와 타협하고, 마귀와 타협하고, 미신과 타협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결국 남편도, 시어머니도, 함께 망하고 말 것입니다. 핍박을 당하면서, 매를 맞아 가면서. 머리채를 잡혀가면서라도 죄악 된 습관을 끊어낼 때, 자신도 살고, 남편도 살고, 시부모도 살 길이 트이는 것입니다. 

그 대신 신자들이 평소에 할 것이 있습니다. 기독교의 효도는 살아 계실 때의 효도를 가르치는 것이니만큼, 평소에 불신자들보다 훨씬 더 부모님 공경을 잘 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형제들이나 친척들하고도 사랑하며 우애하고 지내야 합니다. 그리하려고 하면 너무 인색하면 안 됩니다. 이런 절기가 돌아오면 조그만 선물이라도 하시고, 도저히 미워할 수 없도록 사랑스럽게 대해보십시오. 그러면 전도가 잘 될 것입니다. 이번 추석을 맞이하면서 1)모든 감사는 하나님께 하시고 2)부모 형제들을 잘 돌아보시고 3)성묘 같은 일에도 본을 보이시고 4)성묘를 하면서 무상한 인생을 깨달으시고 5)하늘 본향을 생각하면서 지낼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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