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보는 눈을 주시옵소서 (눅 10:23-24)

첨부 1


보는 눈을 주시옵소서 (눅 10:23-24) 
 
 
눅10:23 제자들을 돌아보시며 종용히 이르시되 너희의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
10:24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많은 선지자와 임금이 너희 보는 바를 보고자 하였으되 보지 못하였으며 너희 듣는 바를 듣고자 하였으되 듣지 못하였느니라

"몸이 천냥이면 눈은 구백냥"이란 말이 있습니다.  인체의 10분의 9라는 가중치를 눈에게 두는 말입니다. 그만큼 눈이 소중하다는 이야기입니다.  눈은 시각 정보를 수집하고 이를 전기.화학 정보로 변환하여 시신경이라는 통로를 통하여 뇌로 전달하는 기능을 하는 신체의 기관입니다. 눈을 생각하면 창조주의 그 솜씨가 얼마나 오묘하고 놀라운 것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어떻든 인간이 받아들이는 총 정보량의 85퍼센트 이상이 눈을 통해서 들어옵니다. 그런데 만약 눈이 잘못된다면 그 정보가 얼마나 잘못될 가능성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보는 것이 수준입니다. 낮은 수준만 보이면, 수준이 낮은 것입니다. 높은 것을 보면 수준이 높은 사람입니다. 높은 수준의 사람은 가시밭에서도 백합화를 봅니다. 신앙의 눈으로 보면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이며 또한 일반계시입니다. 은혜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불신앙의 눈으로 보면 모든게 다 우연일뿐이며 재수가 있거나 재수가 없었을 뿐입니다. 

1962년은 미국과 소련이 우주경쟁을 치열하게 벌이던 때였습니다. 소련이 미국보다 한 발 앞서서 가가린 소령을 태운 유인 우주선을 발사했습니다. 인류 최초의 우주인 가가린이 우주에 나갔다 온 소감으로 "지구는 푸르다!"라고 한 말은 너무도 유명합니다. 그는 공산당원답게 한 마디 덧 붙였습니다. "우주 어디에도 하나님은 없었다!" 그러나 5개월 후 미국의 글렌 중령이 우주여행 뒤에 그 소감을 말한 것은 너무 대조가 되었습니다. "우주에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하였다!" 그렇습니다. 같은 우주를 보고 왔는데, 한 사람은 하나님이 없다고 했고, 다른 한 사람은 우주에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한 것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한 사람은 영적인 눈이 멀었고, 다른 한 사람은 영적인 눈이 건강했습니다.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은 안경을 쓴분이 더러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 육신의 눈은 정상적인 눈입니다.  그러나 육신으로는 정상적인 눈을 가졌으나 그 눈으로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고, 또한 보아도 잘못 보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무엇보다도 눈을 떠야 할 것이 있는데, 바로 그것은 '영적인 눈'입니다. 무엇보다도 건강한 눈을 가져야 하는 데 바로 그것은 '영적 눈'입니다. 이것을 못 뜨면, 늘 삶의 염려, 생활의 불안 가운데 살게 되고 불신앙인으로 살게 됩니다. 

창 6:1-2절에, 노아 홍수 심판이 왜 일어났는지 그 근본적인 원인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면 당연히 하나님의 딸들이 아름답게 보여야 하거늘 하나님의 아들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딸들이 아름다워 보이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경건한 여인들의 아름다움, 그  내면적 속사람의 아름다움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 대신 이 세상의 여인들의 외적인 모습에서 아름다움을 찾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딸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의 딸들이 경건한 하나님의 아들들을 좋아해야 하는데 세상의 아들들의 외모와 가진 것에 눈이 멀어서 더 사랑한 것입니다. 
진정한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눈은 멀어 버렸고, 거짓된 아름다움에 속아서 죄를 짓게 되었고, 결국 그것은 뒤이은 홍수 심판(창 7장)으로 일단락되고 말았습니다.

신앙의 사람들은 신앙적 눈으로 썩지 않을 것을 사모하고 그것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런데 신앙인들이 썩어질 것을 사모하고 사랑하는 것은 심판을 피하지 못할 죄를 짓는 것입니다. 마치 노아시대의 하나님의 아들들과 하나님의 딸들의 예와 다를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으로부터 각 마을로 70인의 제자가 파견되어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고 병자를 고쳐주고 마귀들을 몰아냈습니다. 제자들은 그것을 보고 기뻐했습니다. 이런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은 "악령들이 복종한다고 기뻐하기보다는 너희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고서는 "너희 보는 것을 보는 자들이 복이 있도다"하셨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많은 선지자와 임금이 너희 보는 바를 보고자 하였으되 보지 못하였다"라고 했습니다. 

보고자 해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보고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아니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많은 선지자와 임금들, 그들은 지금 제자들이 보고 있는 것을 보고자 했으나 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라고 하셨습니다.(눅 10:21)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 즉 자기 이성과 자기 잘남으로 사는 자들은 보지 못합니다. 세상의 지혜와 슬기로 되는 것이 아나기 때문입니다.
어린아이 같이 순진무구하게 믿고 맡기는 자에게 보여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예수님을 좇는 제자들이 바로 그런자들이기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보는 눈의 복이 있다"고 하셨던 것입니다. 누구든지 어린 아이들과 같은 심령을 가진 자들은 예수님을 믿을 수 있고 또 그를 통하여 계시를 접할 수 있습니다. 

민수기 22장 이하에 보면 발람이란 사람이 나옵니다. 
발람은 모압 왕 발락이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해 달라면서 많은 재물과 높은 사람들을 보내자 하나님의 뜻보다는 욕심에 끌려 나귀를 타고 그들을 따라갔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보내 길을 막아서셨습니다. 
  
천사가 칼을 빼서 길에 서 있자 그것을 본 나귀는 길을 벗어나 밭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러자 발람은 나귀를 길에 들어서게 하려고 체찍질했습니다. 다시 천사가 포도원 양쪽 담 사이에 서자 나귀는 담에 기댔으며 이로 인해 발람의 발이 다메 비벼져 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바람은 다시 채찍질했습니다. 
그 때에 하나님이 보낸 천사가 앞으로 더 나아가 좌우로 빠져 나갈 틈이 없는 좁은 곳에 섰습니다. 이에 나귀가 땅에 엎드리자 발람은 화가 나서 지팡이로 나귀를 때렸습니다. 
  
이 때에 하나님이 나귀의 입을 여시자 나귀는 "왜 나를 세번씩이나 때립니까?"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발람이 "네가 나를 놀렸다. 네 손에 칼만 있었으면 너를 죽였을 것이다"라고 말하지 나귀는 "내가 언제 당신에게 오늘처럼 한 적이 있습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발람이 "없었다"라고 대답하지 그 때 하나님께서 발람의 눈을 여시사 하나님의 천사가 칼을 뺴어들고 서 있는 것을 보게 하셨습니다. 그제서야 발람은 머리를 숙이고 땅에 옆드렸습니다. 그러면서 "내가 죄를 범했습니다. 이제라도 돌아가라고 하시면 돌아가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천사는 "내가 네게 이르는 말만 해야 된다"라고 다짐하고 그의 길을 가게 하셨습니다. 

요 11:40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을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신대'하셨습니다.
자기가 지혜롭고 슬기롭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도 볼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영적인 눈'을 뜨게 해 달라고 간구했습니다. 
엡 1:18~19절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성도 여러분!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인지? 
그의 힘이 걍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인지? 알지못하고, 또한 알려고도 하지 아니하고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쫓아가며, 그것을 탐내기만 하는 것은 우리의 영안이 감겨져 있든지, 아니면 영적 시력이 현저히 퇴화되었기 때문입니다.

포장된 8차선 도로와 비포장된 오솔길이 있습니다. 어느 길이 좋은 길입니까? 그러나 이질문은 명제가 아닙니다. 
예','아니오'로 말할 수 있는 질문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길은 목적지가 중요합니다. 아무리 포장이 잘된 도로라고 해도 목적지에 다다를 수 없다면 그길은 나쁜길입니다. 반면에 아무리 험한 길이 라도 목적지에 잘 도착하도록 난 길은 좋은 길입니다. 그러나 어리석게도 사람들은 '끝'은 보지 않고 '길'만 비교합니다. 나는 순종하는 삶을 사는데 왜 이리 험한 길로 인도하시느냐고 원망합니다. 그러나 이때 명심할 것은 '길'이 아니라 '끝'을 비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여. 길이 아니라 그 '끝'을 보는 눈을 주시옵소서." 

"주님이 오신 것은 보지 못하는 자들을 보게 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주님, 제가 바로 그 '보지 못하는 자들'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러니 제 눈을 열어, 보아야 할 것을 보게 해 주십시오, 눈에 보이는 겉모습에 속아서 그것의 참 모습을 놓치는 일이 없도록, 부디 제 눈을 맑게 닦아주십시오."  

우리의 눈을 밝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시 19:8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했습니다.
말씀을 가까이 하면, 평소에 자기가 보지 못하던 자기 죄도 보입니다.

눈의 기능과 역할을 잘 하도록 하는 것이 여러가지 있겠으나 한 가지 소개할 것은 눈물입니다. 눈물샘에서 눈물이 흘러나와 안구를 적셔주기 때문에 눈이 건강하게 그 기능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영혼의 눈도 눈물의 기도를 통해서 열리고 건강하게 그 기능을 수행하게 됩니다. 거룩한 눈물, 신령한 눈물, 사랑의 눈물이 우리의 영안을 맑게 하는 줄로 믿습니다. 

사물을 보는 눈, 자신을 보는 눈, 진리를 보는 눈, 내일을 보는 눈이 건강하고 정밀하고 수준 높은 눈이 되어서 여러분의 눈이 복되다는 칭찬을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