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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축제의 시작 (눅 14: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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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제의 시작 (눅 14:7-14)


9월의 첫 날 첫 주일입니다. 진작부터 9월이 오기를 손꼽아 기다리시던 분들이 참 많으시리라 생각합니다. 이젠 더위가 물러가지 않을까... 그런 마음도 있고... 무엇인가 그동안의 부진이나 어려움을 잊을만한 좋은 소식들이 새달엔 들려 올 거야... 그런 기대감을 가지고 계신 분들도 있겠지요. 이달엔 우리들 모두에게 기쁘고 좋은 소식들이 많이 들려오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겐 이 달에 팔월 한가위 명절이 있지만, 유대인들에겐 유월절만큼 소중한 날도 없습니다. 유월절을 앞둔 어느 날, 한 가난한 유대인이 랍비를 찾아 왔습니다. ‘유월절 촛불을 밝히고 싶은데, 제게는 지금 그런 돈도 없으니 초 살돈이라도 좀 도와주십시오.’ 딱한 사정을 들은 랍비는 그에게 돈을 꺼내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건넨 돈이라는 것이 초를 사기엔 터무니없이 많은 돈이었습니다. 랍비가 책만 읽다보니 세상물정을 잘 몰라서 그런 것일까요? 제자들이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지금 당장 초를 살돈도 없는 사람이라면... 그에게 포도주를 준비할 만큼의 돈이나 누룩 없는 유월절 빵을 살 돈인들 있겠느냐? 다른 음식인들 장만할 수가 있겠느냐? 그래서 단지 초만이 아니라 포도주도 준비하고 빵도 사고... 다른 여러 가지 필요한 것들을 준비할 만큼의 돈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단지 초를 살 만큼의 돈을 얻으러 왔던 그 사람의 마음은 어떠하였을까요? 너그럽기 이를 데 없는 마음을 가진 랍비가 보태 준 돈으로 포도주를 사서 잔에 따르고... 사람들과 함께 나눌 때... 유월절 빵을 사서 그것을 떼고 나누면서... 그리고 여러 가지 음식들을 장만해서 함께 먹을 때... 그들은 유월절은 어느 해보다 풍성하고 용기와 위로를 얻는 시간이었을 것은 분명합니다. 더 아름답고 풍성한 것은 이렇게... 단지 초를 살 돈만을 주지 않고 유월절 저녁을 멋지게 보내기에 넉넉한 것을 베풀어 주었던 그 랍비의 마음이겠지요. 유월절이라서 더 쓸쓸하고 궁핍한 마음을 가졌을 한 가족이 그가 베푼 것을 통해서 마음 따스하고 감동이 있는 시간을 보내는 것은 상상만 해도 참 즐겁고 좋은 일이겠지요. 

오늘의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어떤 집에 초대를 받으셨을 때, 주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유대인처럼 낯을 가리는 사람들도 없을 것입니다. 그들은 유대인과 유대인이 아닌 사람들을 아주 엄격하게 구분해서, 예수님 시대에는 유대인이 아닌 사람들과 한 식탁에 둘러앉는 것조차도 금했습니다. 같은 유대인들끼리도 따지는 것이 참 많았습니다. 그들은 어디에서 어떤 사람들과 식탁에 앉아서 음식을 먹는가? 이것을 굉장히 따졌습니다. 그런 면에서 오늘 예수님이 앉으신 자리는 좀 독특합니다. 
   
‘어느 안식일에 예수께서 바리새파 사람의 지도자들 가운데 어떤 사람의 집에 음식을 잡수시러 들어가셨는데, 사람들이 예수를 지켜보고 있었다.’(v.1) 예수님으로서는 그다지 편안하지 못한 자리입니다. 바리새파 사람들 자체가 예수에게 우호적인 것은 아닙니다. 예수나 제자들이 어떤 말이나 행동을 하면, 그것이 율법에 맞는 것인지를 따져서 비판합니다. 그런 사람들 중의 지도자에 집에 초대를 받아서 가셨으니... 당연히 예수님의 마음이 편안하지는 않습니다. 게다가 ‘사람들이 예수를 지켜보고 있었다...’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이러니 밥이 목으로 제대로 넘어 갈 수가 있을까요? 가만히 예수님이 지켜보니 그들끼리도 묘한 긴장과 갈등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의 앞부분엔 결코 편안할 수 없는 그 자리의 분위기가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7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이 바로 그 대목입니다. 다른 식탁과는 분위기가 사뭇 다릅니다. 팽팽한 긴장감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예수가 세리나 죄인들의 집에 초대를 받아서 함께 하는 식탁... 아마도 그곳은 지금 이 자리처럼 격식이 있고, 품위가 있고, 그럴 듯한 사람들은 없어도... 그 자체가 기쁨이요 즐거움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 자리는 안타깝게도 그렇지를 못합니다. 

여기에서 바탕이 되고 있는 것은 계산적인 관계라고나 할까요? 주인부터 참 계산적인 사람입니다. 그가 예수를 자기 집으로 초대한 이유... 예수가 좋다든지... 예수를 사랑한다든지... 그런 순수한 마음이 아닙니다. 자기가 적어도 이 마을에서는 가장 영향력이 있고, 존경받는 자리에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과시하고 싶어서... 그런 계산적인 마음을 품고 예수를 초대하였습니다. 
   
초대를 받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그런 긴장과 갈등이 있는 것이지요. 난 적어도 저 사람보다는 높은 자리에 앉아야 해... 난 적어도 저 친구보다는 더 대접을 잘 받아야 해... 그런 생각들이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일단 좋은 자리를 찾아서 앉고 보는 마음입니다. 한 번 앉으면... 누가 감히 나더러 자리를 양보해 달라고 할까... 그런 엉뚱한 계산으로 ‘기를 쓰고...’ 그들은 높은 자리에 앉으려 합니다. 골치 아픈 것은 잔치를 연 주인이겠지요. 손님들의 서열을 정리해서 자리를 다시 배정을 하려니... 서로가 얼굴 붉히는 일을 피할 수 없습니다. 이런 난리를 한바탕 겪고 나면... 음식이 아무리 맛이 좋은들... 그게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거기에서 어떻게 삶을 나누고 우정 어린 대화가 이루어 질 수 있겠습니까? 

얄팍한 계산 같은 거 하지 말고... 아예 가장 낮은 자리에 앉으라고... 좋은 자리는 아예 생각도 하지 말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더 잘 대접을 받으려하는 생각... 더 좋은 자리에 앉으려 하는 생각... 이런 것들을 버릴 때... 바로 그 자리가 축제가 시작되는 자리이겠지요. 기쁘고 즐거워야할 인생인데... 공연히 자리 때문에 마음 상하고... 기분 잡치고 사는 일은 적어도 우리들 그리스도인들에겐 없어야 할 것입니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세상에서 인정받고 대접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높여 주시고 인정해 주시는 일이라는 것을 마음 깊이 새기시기를 바랍니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면 낮아질 것이요, 자기를 낮추면 높아질 것이다.’(v.11) 주님이 우리에게 하시는 이 말씀을 뜻을 곰곰이 새기며 하루하루를 살기를 바랍니다. 

이어서 나오는 이야기... 12절에서부터 14절까지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이상적으로 생각하시는 식탁... 지금 예수님이 앉아 있는 불편한 자리를 대체할 대안(alternative)과 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현실에서의 식탁이 철저히 계산에 의해서 이루어진 자리라면... 주님이 소개하시는 식탁엔 계산은 발붙일 수 없습니다. 철저하게 은혜의 토대위에서 이루어진 식탁이라고 하겠습니다. 
   
주님이 생각하시는 식탁에선 모든 계산적인 사고방식을 넘어서는 곳이어야 합니다. 주님은 먼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점심이나 만찬을 베풀 때에, 네 친구나 네 형제나 네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 사람들을 부르지 말아라. 그렇게 하면 그들도 너를 도로 초대하여 네게 되갚아, 네 은공이 없어질 것이다.’(v.12)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좀 황당하기도 합니다.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들을 초청하지 말라면... 도대체 누구를 초청하라는 말이지? 누구를 초청하는가? 누가 오는가? 하는 것은 주인의 격을 드러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는 것인데요... 그럴 듯한 사람들... 평소에 한 번 쯤 초대하고 싶었던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모두 명단에서 제외 하라고 하시니... 도대체 이것이 말이 되기나 할 일일까요? 
   
그런데 여기서 그치지를 않습니다. 예수님이 꼭 초대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사람들... 그 사람들은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던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잔치를 베풀 때에는, 가난한 사람들과 지체에 장애가 있는 사람들과 다리 저는 사람들과 눈먼 사람들을 불러라...’(v.13) 예수님이 초대하라고 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가난하거나 신체에 결함이 있는 사람들뿐입니다. 어쩌면 이 사람이 이제까지 별로 가깝게 지내지 않던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사람을 잔치에 초대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잔치를 열면서... 이런 생각을 가지는 사람이 정말로 있을까요? 다른 때는 몰라도... 그래도 잔친데 말이지요... 삶의 어둔 단면을 좀 잊고 싶기도 하고... 벗어나고 싶기도 한 것이... 아마도 잔치를 여는 우리들의 마음이 아닐까요? 낯설고 어색한 것은 왜 그리 표가 잘 나는 것인지요... 사실 우리들은 그런 것을 잘 견디지 못합니다. 그런 핑계를 잘 대기도 합니다. 청년 시절에 여름 수련회를 제 또래의 장애우들과 함께 하였던 적이 있습니다. 그 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참 부끄럽습니다. 그 분위기가 얼마나 낯설 던지요... 바닷가에서 열렸던 수련회 기간 동안... 그 친구들에게 가깝게 다가설 수가 없었습니다. ‘아... 내겐 너무 낯설어...’ 이렇게 탄식하면서 참 어색한 수련회를 보낸 적이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이들은 이제껏 축제와 같은 인생에서 철저히 배제를 당한 사람들입니다. 자기 스스로가 생각해도 자기를 받아들이기가 힘들겠죠. 이렇게 불편한 몸과 마음으로 살아가는 삶에 뭐 그리 기쁘고 즐거운 일이 있을까요? 그렇기에 이런 이들이야 말로 정말 축제가 필요한 사람들이겠지요. 초대해주고 대접해 줄 때... 가장 기쁘고 즐거워할 사람들... 그들이 바로 이런 사람들입니다. 자기가 앉은 자리가 높건 낮건... 이들에게 그게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단지 이렇게 특별한 자리에 초대를 받았다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참 행복합니다. 
   
바로 여기가 계산은 사라지고 은혜만 남게 되는 자리입니다. 초대하는 사람도 그런 생각을 합니다. 내가 받은 사랑... 내가 받은 은혜를 어떻게 보답하고... 어떻게 하나님께 고백할 수 있을까? 그런 마음이 있습니다. 도저히 초대 받을 수 없는 은혜의 자리인데... 그런 곳에 나를 불러 주신 하나님... 이 풍성한 식탁에서 먹고 마시며 사는 기쁨을 다시 찾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한다면... 이런 잔치를 열 기회가 있을 때... 그냥 남들이 하는 것처럼 그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 자기가 받은 하나님의 사랑을 다른 이들과 나누고 싶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제껏 은혜의 자리에서 철저하게 배제 되었던 이들을 초대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려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네가 복될 것이다.’(v.14)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런 마음을 가진 사람... 내가 이익을 보고 손해를 보고... 높은 자리에 앉고 낮은 자리로 밀려나고... 이런 치열하고 살벌한 현실을 살면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는 사람... 하나님이 이렇게 나를 불러 주셨기에... 세상에서의 높고 낮음에 별로 신경 쓰지 않는 사람...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이 동기가 되어... 그 사랑 나누고 전하고 베푸는 기쁨으로 세상을 사는 사람... 그 사람이 정말 행복한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들이 네게 갚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하나님께서 네게 갚아 주실 것이다.’(v.14) 하나님처럼 계산이 정확하신 분은 없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베풀기 위해서 손해를 보면 본 만큼... 그만큼의 상급을 하늘에서 준비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것은 마지막 날에 하나님께서 주십니다. 

이렇게 은혜와 사랑을 생각하며 세상을 사는 사람들에겐 이미 축제는 시작되었습니다. 
남들이 잘 찾지 않는 낮고 누추한 자리를 찾아가는 일은 참 즐겁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남에게 베풀고 양보하며 손해를 보면 보는 만큼...  그것처럼 유쾌하고 삶이 풍성해 지는 일은 없습니다. 
   
그것도 좋은 일인데... 하늘에서 그만큼의 상급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니... 우리는 항상 기대감으로 오늘을 살아갑니다. 
축제는 내게 베풀어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기억하며, 그 사랑으로 다른 이들에게 선뜻 손을 내미는 푸근하고 넉넉해진 나의 마음...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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