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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버가모교회- (계 2: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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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우에 날선 검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계 2:12-17) 

사도 요한의 세 번째 서신은 버가모 교회였습니다. 에베소 교회에 보내는 편지의 발신자는 『 오른손에 일곱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 』라고 했습니다. 서머나 교회에 보내는 편지의 발신자는 『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 』라고 했습니다. 

버가모 교회의 발신자는 『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진 이 』라고 했습니다. 이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각각 다른 묘사입니다. 

버가모(Pergamum)는 "요새"라는 뜻으로 서머나 북방 100km 지점과 에게해에서 약 24km 떨어진 내륙의 높은 언덕에 자리 잡고 있던 고대도시입니다. 당시 이곳에는 20만권이 넘는 양피지 두루마리가 소장되어 있던 곳입니다. 
양피지(parchment)라는 말은 버가모(Pergamum)란 명칭에서 유래되었습니다. 그곳에는 유명한 의학교와 약학교가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버가모는 신전의 도시로 우상숭배가 횡횡했던 곳입니다. 버가모 사람들은 당연히 로마 총독의 칼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곳에 기독신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의 가르침을 따랐습니다. 

버가모에는 사단의 위位가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순교했습니다. 시므온 메타프라스데스(Simon Metaphrastes)에 의하면 안디바는 버가모의 감독이었는데 도미티안 황제 치하에서 쇠로 만든 불타는 황소에 의해 화형 당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안디바를 나의 신실한 증인이라고 했습니다. 버가모가 사단의 보좌라고 일컬음 받은 것은 안디바의 순교와 결코 무관하지 않습니다. 

Ⅰ. 버가모 교회에 주님이 찾아왔습니다. 

본문 2장 12절에 『 버가모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라고 했습니다.

요한계시록 1장 16절에 『 그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취는 것 같더라 』고 했습니다.

왜 날선 검을 가지신 주님이 찾아오셨다고 했습니까? 이유는 사단의 본부가 있는 버가모 교회의 영전靈戰을 지원하기 위함입니다. 

버가모 교회에 나타나신 주님의 모습을 감안할 때 버가모 교회가 필연적으로 영적전쟁을 도모해야 하는 사명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진 주님의 모습은 말씀으로 외적 원수 사단을 응징하고 내적으로 살을 베고 뼈를 깎는 듯한 자기 성찰의 기회를 가지라는 무언의 명령이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검입니다. 

에베소서 6장 17절에 『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4장 12절에 『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라고 했습니다.

계시록 19장 15절에 『 그의 입에서 이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저희를 철장으로 다스리며 또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겠고 』라고 했습니다.

계시록 19장 21절에 『 그 나머지는 말 탄 자의 입으로 나오는 검에 죽으매 모든 새가 그 고기로 배불리우더라 』고 했습니다.

이같이 검은 부정한 것을 잘라낼 때 사용되었습니다. 

예레미야 23장 29절에 『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말이 불 같지 아니하냐 반석을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하냐 』라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24장 32절에 『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라고 했습니다. 

베드로후서 3장 7절에 『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고 했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입으로 나온다고 했습니다. 

본문 2장 16절에 『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임하여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고 했습니다.


Ⅱ. 버가모 교회에 대한 주님의 칭찬입니다. 

본문 2장 13절에 『 네가 어디 사는 것을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단의 위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단의 거하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라고 했습니다.
버가모에는 사단의 보좌가 있었는데 그곳에서 주님을 따르며 살고 있는 자체가 칭찬받을 만한 것입니다. 

여기 『 사단의 위 』를 주격으로 볼 때 사단이 지배하는 곳이라는 말이 됩니다. "사단의 위"라는 말은 버가모 도시 정상에 있는 제우스 제단과 그리고 뱀의 신인 아스클레피오스(Asklepios) 신전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아스클레피오스는 치료의 신, 뱀신입니다. 군의관이나 의사들의 휘장에는 뱀신이 그려져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버가모는 황제숭배의 중심도시였습니다. 이곳에 거주하고 있는 버가모 교인들은 영육간에 피곤하고 힘든 나날을 보낼 수 밖에 없었습니다. 
버가모 교인들은 어떤 지방에서 유입된 사람들이 아니고 이곳에 살고 있는 정착민들로 이른바 토박이들입니다. 
신약성경에서 그리스도인의 거주를 말할 때 파로이케인(Paroikein)이란 단어를 사용합니다. 

베드로전서 1장 1절에 『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라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9절에 『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것 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라고 했습니다.

이 단어는 잠시 머무는 나그네나 혹은 일시적으로 머물다 가는 순례자에 해당됩니다. 그러나 본문 2장 13절에서는 카토이케인(Katoikein)이란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이 단어의 의미는 영구적이고 고정된 장소에 거주하는 토박이적 삶을 의미합니다. 

이들은 잔혹한 핍박 가운데서도 불구하고 그곳을 이탈하거나 삶의 지경을 옮기지 아니했습니다. 
버가모에 살고 있는 대부분의 성도들은 그 믿음을 포기하지 아니하고 신앙의 정절을 지킨 것에 대한 주님의 칭찬입니다. 


Ⅲ. 버가모 교회에 대한 주님의 책망입니다. 

본문 2장 14-15절에 『 그러나 네게 두어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앞에 올무를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라고 했습니다.

버가모 교회가 충성된 자들로 믿음을 지키는 자들이 있었지만 반대로 부분적으로 발람의 교훈을 따르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발람과 니골라당은 그 어원이 "백성을 정복하라"는 동일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발람의 교훈이란 말은 메소포타미아의 술사 발람이 모압왕 발락에게 가르쳐준 꾀를 가리킵니다. 

모세의 지도 아래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든 대적들을 물리치고 마침내 요단강 맞은편 모압평지에 진을 쳤습니다. 
이를 크게 두려워한 모압왕 발락이 당대의 술사 발람을 복술의 예물로 유인해서 이스라엘을 저주하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발람의 저주를 강권적으로 막으셨고 오히려 이스라엘을 축복하도록 했습니다(민 22-24장). 발람은 복술의 예물이 끝내 탐이 났습니다. 그리고 교활한 꾀를 내어 모압왕 발락에게 일러주었습니다. 

그것은 일종의 미인계美人計였습니다. 모압 여인들을 동원하여 잔치를 배설하고 모압평지에 있다 이스라엘 남자들을 끌어들여 모압신 바알브올에게 숭배하도록 하고 그 여인들과 음행하도록 하는 계략이었습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발람의 꾀에 걸려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일에 진노하시고 염병으로 이스라엘 백성 23,000∼24,000명을 죽이셨습니다(민 25:9; 고전 10:8).

그 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시 일어나 모압을 쳐서 파하고 그때 발람도 칼로 쳐 죽였습니다(민 31:8, 16). 그 후로 바알브올 사건 혹은 발람의 사건으로 알려진 이 사건은 유대역사와 신약성경에 우상숭배와 음행사건의 대명사가 된 것입니다(벧후 2:15; 유 1:11).

주님께서 이 발람사건을 예로 삼아 버가모 교회도 니골라당의 교훈을 좇는 자들이 있다고 책망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당시 버가모도 니골라당의 교훈을 좇아 우상을 숭배하고 우상에 바쳐진 고기를 먹고 행음하였습니다. 성적쾌락으로 말미암아 버가모는 매춘도시화 되었습니다.
월간에세이 9월호에 실린 저의 수필 [30년 전 역전이발소]도 이 시대에 변칙 매춘행위를 질타하는 내용입니다. 

우상과 행음은 언제나 교회를 어지럽히는 죄악입니다. 요즘 교회에 청년들의 모임이 활력을 잃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청년들이 말씀에 붙잡히지 아니하고 세속에 붙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갈수록 우리사회가 편의주의와 영합해서 각종 새로운 것들에 대한 경쟁적 개발을 과학문명의 발달로 보지 않습니다. 오직 인간의 무한정한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과학의 자기한계의 발버둥이라고 생각합니다. 


Ⅳ. 주님이 일러주신 버가모 교회의 복고운동입 니다. 

본문 2장 16절에 『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임하여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고 했습니다.
버가모 교회는 회개해야만 했습니다. 만약 권면을 받지 않을 때 일어날 참상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버가모 교회가 복고하려고 하면 오직 한 가지 회개하는 수 밖에 없고 다른 방법은 무익합니다. 회개하지 아니하면 주님이 그들과 싸운다고 했습니다.

『 내 입의 검 』은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발람의 추종자들을 칼로 심판한 것처럼 우상 숭배자나 황제 숭배와 타협하는 자들에게도 하나님의 말씀인 검으로 심판하시겠다는 주님 자신의 분명하고도 확고한 의지 표현입니다.
회개하면 감추었던 만나를 주겠다고 했습니다.
본문 2장 17절에 『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신령하고 참된 양식으로 생명의 양식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지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6장 33절에 『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고 했습니다.
버가모 교인들에게 두 번째 주어지는 것이 본문 2장 17절에 『 …또 흰 돌을 줄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고 했습니다.

버가모 교인들에게 주어지는 두 번째 것은 새 이름이 기록된 흰 돌입니다. 여기에 흰 것과 새 것은 장차 천국에서 누리게 되는 상징적인 개념 중에 하나입니다. 천국과 관련해서 새 하늘, 새 땅, 새 노래, 새 예루살렘 등과 흰 옷, 흰 보좌 등의 표현이 바로 그것입니다. 
여기 흰 돌은 하나님 나라에서 신앙의 정절을 지킨 승리자에게 주는 상급입니다. 어린 양의 혼인잔치에 참여하는 상급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이 승리자에게 주시는 만나는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 자신을 가리킵니다(요 6:31-35).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이 점점 더 분명해지는 삶을 말합니다. 흰 돌은 모퉁이 돌, 산 돌, 뜨인 돌, 머릿돌,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새 이름은 만나가 감추어진 것과 같이 새 이름도 비밀스러운 것입니다. 이것은 구속받은 그리스도인의 새 이름을 가리킵니다. 생명책에 기록된 이름입니다.

빌립보서 4장 3절에 『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 한 자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부녀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 』고 했습니다.

요한계시록 4장 3절에 『 앉으신 이의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 같고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렸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더라 』고 했습니다.

요한계시록 20장 12절에 『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대로 심판을 받으니 』라고 했습니다.

요한계시록 20장 15절에 『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 』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10장 20절에 『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고 했습니다.
이사야 49장 16절에 『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 』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서울의 영적환경 아니 지구촌의 영적환경은 현대판 버가모입니다. 혼탁하고 저마다의 주장이 종교화된 이 세대를 사는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서 그 말씀에 최후최종의 기대를 걸 수밖에 없습니다.

성도여러분, 사탄의지하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주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던 순교자 안디바처럼 살아갑시다. 지금부터 우리에게 있는 우상을 버립시다. 세속주의와 타협할 바에야 아예 죽음을 택하는 비장한 각오로 신앙생활 합시다.
살려고 하면 나약해지고 비참해지고 흉해집니다. 죽으려고 하는 자의 삶은 언제나 활기가 넘칩니다. 자신만만합니다. 

1986년 1월 28일 케이프 캐너베럴에서 발사된 미국 우주 왕복선 챌린저 호는 발사된 지 73초 만에 연료탱크에 이상이 생겨 플로리다 해안에 거대한 불덩어리를 일으키며 폭발했습니다. 남성 비행사 5명과 여성비행사 2명은 모두 사망했습니다. 블랙박스에 기록된 비행사들의 최후의 목소리가 우리의 신앙을 자극하고 있습니다. 
충돌직전에 여자 목소리(예수님 나 혼자 두지… 되었어요 되었…), 남자 목소리(우리 아버지시여, 나는 이제 주의 집에 거하게 됩니다). 

미국 문학의 개척자 마크 트웨인은 사랑하는 딸과 마지막 인사에서 "이렇게 산 것이 얼마나 다행이냐∼ 잘 지내거라 … 우리가 다시 만날 때 까지"라고 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이 세상을 살다가 마지막 순간에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의 싸움을 도와주시고자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시고 우리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우리 곁을 떠나가지 아니하시고 우리와 함께 계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강구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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