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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아들이 가라사대 -두아디라교회- (계 2: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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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눈이 불꽃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가라사대 (계 2:18-29)
-두아디라 교회에 보내는 편지-  

두아디라 교회는 버가모에서 동쪽으로 약 70km쯤 떨어진 내륙에 위치한 곳입니다. 당시 이곳은 상업의 요충지였습니다. 그런데 당시 이 지역의 대개의 상거래는 신당에서 이교신에게 바쳐졌던 음식을 먹으면서 행해졌습니다. 
이 일로 인해 두아디라 교인들은 생계 수단인 상업 활동에 적지 않은 지장을 받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때 생겨난 것이 세상과의 타협을 정당화하는 이세벨의 교훈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하나님은 엄히 경계하시면서 친히 그들을 징치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두아디라인들은 제우스의 아들로 여겨지는 아폴로 신과 그리고 당연히 로마황제를 숭배했습니다. 예수님은 두아디라 형편을 잘 알고 계십니다. 
따라서 본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불꽃같은 눈으로 이 모든 사실을 보시고 빛난 주석 같은 발로 진리를 거스르는 원수들을 밟아버린다는 의지가 예수님 자신의 모습에서 묘사되어 있습니다.

Ⅰ. 주님은 두아디라 교회를 칭찬하셨습니다. 

본문 2장 19절에 『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라고 했습니다. 
두아디라 교회를 향한 칭찬은 교회가 가지고 있는 성숙함(진보)입니다. 너의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고 할 때(딤전 4:15), 여기 진보는 성숙함입니다.

1) 사업이 있었습니다.
이 교회는 일하는 교회였습니다. 삶의 현장에서 행위와 수고와 인내를 통한 선행의 실적이 있었던 교회였습니다(계 2:2).

2) 사랑이 있었습니다.
사랑은 에베소 교회가 부족했던 것인데 사랑이야말로 그리스도의 공동체의 핵심적 규범입니다(마 22:37-40; 고전 12:31-13:3).

3) 믿음이 있었습니다.
믿음은 구원의 빙거입니다(롬 1:17).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엡 2:8). 저들은 이러한 믿음을 가지고 사랑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두아디라 교회가 믿음보다 사랑이 먼저 언급된 것은 사랑을 강조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교회는 믿음을 통한 구원교리를 분명히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과 믿음의 기초가 없는 사람들이 이세벨 같은 이단을 아무런 비판 없이 수용한 것입니다.

4) 섬김과 인내가 있었습니다.
여기 섬김은 사랑의 외적 표현입니다(롬 15:25; 고전 16:15). 인내는 섬김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덕목을 이루기 위한 수단입니다(눅 8:15; 21:19; 딤전 6:11; 딤후 3:10; 살후 1:4; 3:5).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인내는 아무리 강조해도 과함이 없습니다.

히브리서 10장 36절에 『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 』고 했습니다.

야고보서 1장 4절에 『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고 했습니다.

요한계시록 3장 10절에 『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고 했습니다.

요한계시록 13장 10절에 『 사로잡는 자는 사로잡힐 것이요 칼로 죽이는 자는 자기도 마땅히 칼에 죽으리니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 』고 했습니다.

요한계시록 14장 12절에 『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고 했습니다.

5) 나중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았던 교회였습니다.
이것은 에베소 교회와는 정반대 현상입니다. 두아디라 교회 신앙상태가 외적으로는 많은 진보를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믿는 도리를 강조하다보니 사랑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나 두아디라 교회는 사랑이 식지 않았습니다. 계속해서 사랑의 사업이 번창하고 진보해서 처음보다 더 많아지고 풍성해져 갔습니다. 주님은 이 사실을 알고 계신다고 했습니다.


Ⅱ. 주님은 두아디라 교회를 책망하셨습니다.

주님의 책망은 포기가 아니라 기대입니다. 주님의 책망은 미움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주님의 책망은 절망이 아니라 소망입니다. 주님의 책망은 버림이 아니라 소유입니다. 주님의 책망은 부끄러움이 아니라 자랑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책망은 교회의 비전이며 실패한 역사가 아니라 성공한 역사를 위한 것입니다.

1) 이세벨주의를 용납한 것입니다.
본문 2장 20절에 『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라고 했습니다.

구약에서 이세벨은 시돈의 황녀였습니다(왕상 16:31; 왕하 9:7). 그녀는 이스라엘 왕 "아합"의 왕비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바알신을 이스라엘에 가져와 이스라엘로 하여금 우상숭배를 하게 함으로 이스라엘로 하여금 영적 간음을 행하게 하였습니다. 
이세벨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을 유린하였고 진리의 종 엘리야와 맞선 여자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이세벨은 진리에 대항한 악녀로 상징되고 있습니다(왕상 18:4; 16:31; 왕하 8:22).

두아디라 교회에도 거짓 선지자인 이세벨이 있었습니다. 두아디라 교회에 있던 "이세벨"이 누구인가에 대한 상이한 견해가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여러 학자들은 구약성경에 나타난 이세벨과 같은 역할을 하는 상징적인 이단자라고 주장합니다. 거짓 선지자의 정체를 폭로하기 위해 구약성경의 이세벨이란 명칭을 상징적으로 사용했습니다. 

두아디라 교회는 이세벨의 정체를 분명히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교회 내에서 그들이 활동하도록 방관했습니다. 이것은 그 자체가 범죄행위입니다. 
그들은 분명히 이세벨을 징계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무관심하므로 주께로부터 책망을 받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한편 이세벨이 저지른 죄악은 두아디라 교인들을 유혹하여 행음하게 하고 우상제물을 먹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말하자면 두아디라 교회가 이세벨주의자들이 주장하는 혼합종교를 용납하고 방치한 것입니다. 이세벨의 행위는 에베소 교회와 버가모 교회의 니골라당과 발람의 가르침과 유사합니다. 

2) 회개할 기회를 놓친 것입니다.
본문 2장 21절에 『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그 음행을 회개하고자 아니하는도다 』라고 했습니다. 두아디라 교회에 대하여 주님으로부터 결정적인 경고가 주어졌다는 말입니다. 그런데도 그치지 않고 악행이 계속되었습니다. 이세벨은 주어진 회개의 기회조차도 거부했기 때문에 심판을 자초한 것입니다.

히브리서 6장 6절에 『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12장 17절에 『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저가 그 후에 축복을 기업으로 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고 했습니다.

사도행전 11장 18절에 『 저희가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 』고 했습니다.
회개하지 않는 자는 던져버린다고 했습니다

(1) 그를 침상에 던져버린다고 했습니다.
본문 2장 22절에 『 볼찌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터이요… 』라고 했습니다. 여기 침상은 잠자는 침상, 환자용 침상, 잔치용 상을 의미합니다. 많은 주석가들은 이 침상을 환자용 침상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2) 환난 가운데 던져버린다고 했습니다.
본문 2장 22절에 『 …또 그로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치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 던지고 』라고 했습니다.
여기 『 환난 』은 환자용 침상의 고통과 아픔을 말하는 것입니다. 결국 죽음에 던져버린다는 말입니다. 이세벨과 함께 범죄한 두아디라 교인들도 동일한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3) 그 자손들은 사망으로 죽일 것이라고 했습니다.
본문 2장 23절에 『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줄 알찌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고 했습니다.

여기 그 자손들은 이세벨의 가르침과 교훈을 따르는 모든 자를 말합니다. 따라서 이세벨의 교훈을 따르면 심판의 형벌은 면할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본문 2장 24절에 『 두아디라에 남아 있어 이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소위 사단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다른 짐으로 너희에게 지울 것이 없노라 』고 했습니다.

두아디라 교회의 시급한 짐은 우상숭배와 행음입니다. 이것을 시급히 해결하라는 말입니다. 이 짐 외에 더 말할 것이 없다는 말은 이것부터 시급히 해결하라는 말입니다.


Ⅲ. 주님은 두아디라 교회의 조건부 승리의 비전(소망)을 약속했습니다.

1) 있는 것을 굳게 잡는 것입니다.
본문 2장 25절에 『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 』고 했습니다.
기독교의 진리, 곧 두아디라 교회가 처음 가졌던 믿음에 관한 구원의 핵심교리를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두아디라 교회가 빼앗기지 않고 굳게 잡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들이 잡고 있어야 할 기간은 "내가 올 때까지"라고 했습니다. 『 내가 올 때까지 』라는 말은 주님이 재림하시는 날(우주적 종말)까지 곧 각자의 생이 끝날 때(개인적 종말)까지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2) 환난을 이기고 내 일(주님 자신의 일)을 지키는 것입니다. 
본문 2장 26절에 『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이라고 했습니다.

『 이기는 자 』는 그리스도의 권면을 붙잡고 순종하여 승리하는 자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 내 일을 지킨다 』라는 말은 이세벨주의자들의 교훈과 가르침에 정반대되는 일로 두아디라 교회가 칭찬받은 바로 그 일을 말합니다. 이 일이 내 일 곧 주님의 일입니다. 
반대로 책망 받은 그 일 역시 내 일(주님의 일)입니다. 주님의 칭찬과 주님의 책망은 다 같이 내 일(주님의 일)입니다. 

3) 승리자에게 주어지는 약속입니다. 

(1)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신다고 했습니다. 
본문 2장 26절에 『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라고 했습니다.
여기 『 권세 』는 능력이 아니고 지배권입니다. 주님께 충성한 자들에게는 새 하늘, 새 땅에서 새 통치의 권세를 주신다고 약속했습니다. 천국에서의 성도들의 권세는 엄청난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이 이 땅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의 긍지입니다.

계시록 2장 27절에 『 그가 철장을 가지고 저희를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 』고 했습니다.
시편 2편 9절의 인용입니다. 기독신자들에게 최후 소망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2) 새벽 별을 준다고 했습니다. 
본문 2장 28절에 『 내가 또 그에게 새벽 별을 주리라 』고 했습니다.
『 새벽 별 』은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광명한 새벽 별이라고 했습니다(계 22:16; 벧후 1:19). 

승리한 그리스도인들은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합니다. 온전한 빛이신 그리스도와 동행하기 때문에 온전한 승리를 약속받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두아디라 교회는 갈수록 사랑이 넘치고 많아지는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두아디라 교회가 세상과 타협으로 인해 얻어진 부산물입니다. 이것을 주님은 지적한 것입니다. 
정상적인 성숙(진보)이 요청되는 오늘의 교회입니다. 현대판 이세벨주의는 타협주의입니다. 무엇을 믿든지 어떻게 믿든지 믿는 자들은 하나가 되자고 하는 것이 W.C.C.운동입니다. 

W.C.C.운동은 진리도 사랑도 없는 운동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진리를 벗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밖에서는 1+1=2도 진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진리는 이 세상의 정치와 타협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진리는 이 세상의 과학문명과 타협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진리는 이 세상의 황금만능주의와 타협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진리는 이 세상의 교육만능과 타협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굳게 잡아야 할 것은 오로지 신구약 성경 66권 뿐입니다. 왜냐하면 다른 것은 모두 유한한 것이고 변하는 것이고 썩어 없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직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굳게 잡아야 합니다. 

주님은 이 땅에 살아가는 성도들의 모든 사실을 알고( , 오이다) 계신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자 긍지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주님을 잡는지 안 잡는지도 다 알고 계십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각자의 내 이름을 굳게 잡아야 합니다(교회의 직분). 나에게 부여된 교회적 사명을 굳게 잡아야 합니다(섬김).
(강구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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