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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로다 (욥 1: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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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로다 (욥 1:20-22)

2년 전 일본이 대지진과 쓰나미의 강타를 맞았을 때에 전 세계는 그토록 끔찍한 대재앙을 당하고도 너무나 '조용한' 일본 사람들을 보고 더욱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재난을 당한 수재민들은 생수 한 통을 배급받기 위해서 몇 시간 동안이나 얌전히 질서정연하게 줄을 서 있었고, 가족 중에 희생자가 생긴 사람들이 텔레비전 방송의 인터뷰를 하게 되어도 그저 소리를 죽이면서 쿨쩍쿨쩍 울 뿐이지 대성통곡을 하는 사람을 볼 수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 일본 사람들의 모습은 매사에 '고성방가'가 습관이 되어 있고 더욱이 조금이라도 불만스러운 일만 터지만 시청 앞 광장에 고성능 스피커까지 동원해서 고래고래 소리치는 것을 당연한 권리라고 알고 있는 우리나라 사람에게는 신기하기까지 한 일이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이상하게 보였던지, 당시 우리나라의 어떤 신문기자가 '일본 사람들이여, 소리라도 좀 질러라.'는 제목의 기사까지 인터넷 신문에 올린 것을 제가 보았습니다. 
  
'일본 사람들이 너무 조용하니까 일본 정부도 빨리 대응하지 않고 늑장을 부리고 있다. 좀 비명도 지르고 불만도 터뜨려라.'는 식의 논조였는데, 저는 정말 어처구니가 없었습니다. 
'자동차 사고가 나면 목소리 큰 놈이 이긴다.'는 희한한 법칙이 아직도 우리나라 사회에서는 철칙으로 통하고 있으며, 자기 사는 동네 부근에서 무슨 공사를 하게 될 때에 무조건 '결사반대투쟁'만 외치면 뭔가 콩고물이 떨어지게 된다고 여기는 사고방식이 우리나라 사람의 의식구조 속에 너무나 깊숙이 박혀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그처럼 툭하면 본인이 불평불만의 소리를 지르는 것은 두말할 것 없고 이웃의 다른 민족이 '소리를 지르지 않는 것'까지도 비판할 정도로 특수한 열혈 기질을 가진 우리나라 사람들로서는 정말 꿈에도 이해할 수 없는 한 사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 사람은 바로 '욥'이었습니다. 
그는 실로 끔찍하고도 충격적인 재앙을 당하고서도 그냥 '조용히 참는' 정도가 아니라 전혀 뜻밖의 소리를 외쳤던 것이었습니다. 
이 시간 저는 그런 욥의 신기한 고백을 통하여 진정한 기독신자라면 아무리 힘들고 괴로운 상황이라 할지라도 그 입에서 나와야 할 유일한 소리가 무엇인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인이 무슨 일을 당하든지 무조건 외쳐야 할 고백은 '오직 하나님께 영광'입니다. 

본문 20절부터 22절에 바로 그처럼 신실한 욥의 모습을 기록하기를 "20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 21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22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하니라"고 했습니다. 

'겉옷을 찢는' 것은 고대 사회에서 극심한 슬픔, 격렬한 감정을 나타내는 표현 방법이었습니다. 
'머리털을 미는' 것 역시 높은 자리에서 낮아지는 겸비함을 뜻하는 행위로서 갑작스러운 재앙에 대하여 크게 애통하는 슬픔을 표시한 것인데 당시 메소포타미아나 가나안 등의 근동 지방에서 행해지고 있던 관습이었습니다. 
욥의 이런 반사작용 같은 행위는 그 역시 사람으로서 자신에게 임한 재앙으로 인하여 극도의 슬픔과 충격을 이겨낼 길이 없었음을 고스란히 보여 줍니다. 

앞에 나오듯이 욥의 환난은 그의 재산을 하나씩 하나씩 그리고 결국에는 깡그리 다 잃는 것부터 시작되었고, 마치 그 정도의 재난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이 그의 일곱 아들과 세 딸들까지 한날한시에 다 잃고 마는 기가 막힌 비극이 설상가상으로 이어졌습니다. 
사실 그것은 '큰 시험'이라고만 표현하는 것은 너무나 부족한, 실로 망할 수 있는 모든 것에 대하여 다 망하고 당할 수 있는 모든 고통들을 모조리 다 당해야 했던, 문자 그대로 '극한대의 재앙'이었습니다. 
  
정말이지 신자나 불신자를 다 통틀어 이 지상에 존재하고 살았던 모든 사람들 중에서 욥만큼 큰 시련을 당해 본 사람은 과거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 해도 조금도 과언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니 그런 충격적인 비극의 소식들을 그것도 앉아 있던 바로 그 자리에서 연속적으로 듣고 난 후에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었던" 것은 욥 아니라 세상의 그 어느 누구라도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직후에 욥은 '세상의 그 누구에게서도 볼 수 없는', '세상의 그 누구도 예상할 수 없는' 아주 신기한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는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민 후에 곧 "땅에 엎드려 경배했던" 것이었습니다. 
'땅에 엎드려'까지만 보면 욥이 그 당한 슬픔과 고통의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졸도하여 쓰러진 것이라고 볼 수 있는 장면이고 또 그렇게 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상황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정신을 잃고서 땅에 쓰러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경배하기 위하여' 의식을 가지고 의도적으로 땅에 엎드렸던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정말 놀라운 모습이요 신기하기 짝이 없는 반응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람이 죽음과 같은 극단적인 슬픔이나 고통을 맞이하게 될 때에 그것에 대하여 어떤 식으로 반응하게 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하여 저 유명한 '퀴블러 로스의 5단계 이론'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다브다(DABDA) 모델'이라고도 불리는 그 이론의 첫째 단계는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날 리가 없어,'라는 '부정'(denial)으로 시작되어 '도대체 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되었나?'라는 '분노'(anger)의 제2단계로 이어집니다. 
그리고는 계속해서 자기 스스로 혼잣말을 하면서 '대화와 타협'(dialogue & bargaining)을 하는 3단계, '우울'(depression)에 빠지는 4단계를 거친 후 제일 마지막 5단계에 가서는 자기가 당한 현실을 '인정'(acceptance)하고 받아들이게 된다는 과정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욥이 보여 주는 과정은 딱 두 단계뿐입니다. 
그는 그 모든 충격적인 재난의 소식을 듣게 된 순간 일단 '옷을 찢고 머리털을 미는' 극심한 슬픔과 고통에 빠졌습니다. 
하지만 그 다음에 무슨 5단계 따위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땅에 엎드려 하나님께 경배하는' 단계에 도달했던 것이었습니다. 

욥이 '땅에 엎드린' 것이 너무나 큰 충격 때문에 스스로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가 되었기 때문이 결코 아니라 '의도적으로 하나님께 경배드리기' 위함이었다는 사실은 곧 이어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을 통해서 더욱 명백하게 드러납니다. 
그것은 곧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라는 말이었습니다. 
이것은 사람의 입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가장 단순하면서도 또한 가장 중요한 말입니다. 
그런 까닭에 신자로서는 정말 자기 입에 달고 살아야 할 정도로 가장 '기본적인 고백'인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욥이 당하고 있는 현실은 아무리 보아도 그런 말이 나올 만한 상황은 결코 아니지 않습니까?
그는 지금 하루아침에 전 재산을 다 잃었습니다. 
아니 그 어떤 재물과도 바꾸기는커녕 돈으로 가치를 계산조차 할 수 없는 자기의 아들딸 열 명을 똑같은 날에 한 명도 남김없이 다 잃었습니다. 
더구나 욥으로서는 그런 끔찍한 재앙을 당할 만한 무슨 죄를 지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그런 충격적인 재난을 당한 욥이 그저 '비명을 내지도 않고 고함도 지르지 않고' 그 비극을 조용하고 차분하게만 대처한다고 해도 정말이지 누구나 다 놀라고 우러러 볼 일이 아니었겠습니까?
그런데 욥은 완전히 한술 더 떠서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라고 하면서 꿇어 엎드려 경배를 드렸던 것입니다. 

이것은 불신자에게는 도저히 이해될 수 없는 말과 행동입니다. 
아니 웬만한 기독신자라 하더라도 그런 상황에서는 결코 생각할 수도, 고백할 수도 없는 말인 것입니다. 
오늘날 만일 어떤 교인이 자기의 전 재산과 자기의 사랑하는 자식들까지 하루아침에 다 잃어버리는 재난을 당한다면, 그 교인이 그 다음 주일에도 교회에 나와서 이전과 똑같이 주일예배를 드리면서 '주 예수 이름 높이어 다 찬양하여라 / 무궁한 노래 불러서 만유의 주 찬양'이라고 찬송을 부르기가 쉽겠습니까?

그런데도 욥은 자기에게 있던 모든 물질뿐 아니라 가장 사랑하는 자녀들까지 다 취하여 가신 하나님을 두고, 무슨 원망이나 불평 소리를 내지 아니하기만 해도 놀랍고 기특하기 짝이 없을 것 같은 상황에서 도대체 어떻게 그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이 찬송을 받아야 마땅하다고 보통 사람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욥이 바른 신자라면 꼭 가져야 할 신앙의 최고 정수, 곧 '하나님 절대주권의 신앙'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라는 고백은 바로 그 신앙 때문에 나온 것이었습니다. 
  
이런 신앙고백은 존재하는 모든 것의 소유권자가 오직 하나님이시며, 그 '모든 것'에는 자기 재물은 물론이요 자기 생명과 자기 자식들의 생명까지도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평소에도 늘 잊지 않고 철두철미하게 믿고 살던 진짜 신자만이 할 수 있는 고백입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하나님께서 자기의 소중한 것들을 취하여 가 버리신 행동 그것만을 생각하고 원망과 의심에 빠져버리겠지만, 욥은 자기가 소중히 여기고 살던 것들이 근본적으로는 자기의 소유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서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잠시 맡겨 주신 것이며, 그런 까닭에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언제든지 취하여 가시는 것도 지극히 당연한 줄로 아는 '청지기 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믿는 신앙인은 여호와의 지극히 높고 위대하심 앞에 오직 겸손한 자세를 늘 견지하며, 자기가 그 어떤 일을 당하더라도 그 하나님의 지극히 공의로우시면서도 한없이 선하신 성품을 추호도 의심하지 아니하고 믿습니다. 
즉 지금 눈앞에 보이는 현실이 아무리 인간적으로는 이해되지 않을 만큼 충격적이고 모순처럼 보인다 할지라도, 전지전능하시고 완벽하신 하나님께서는 결코 불의하시거나 무엇을 조금이라도 잘못하실 수가 없다는 믿음에 대해서는 절대로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보통 신자들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무엇을 '주실' 때에만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하지만, 우리 개혁주의 신자들은 주실 때는 물론이고 이처럼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대로 '취하여' 가실 때에도 조금도 다름없이 그 하나님께 마땅히 돌려야 할 찬양과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반면에 기복주의 신앙만 가진 교인들은 만사형통할 때에는 그럭저럭 '형통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신앙이라는 것은 환난시험이 닥치게 되면 그야말로 '속수무책', 정말이지 대책이 없습니다.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로다'라고 영광을 돌리기는커녕, 그 신앙이라는 것이 순식간에 풍비박살이 나는 것입니다. 

22절을 다시 보시면 뭐라고 했습니까?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하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이것은 신자라는 사람이 어떤 환난 시험을 당했다고 해서 하나님께 원망하는 것은 곧 '범죄'라는 뜻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사단이 예상했던, 기대했던 바이기 때문입니다. 
그 '소유물'을 치고 그 '자녀'까지 거두어 가면 틀림없이 하나님께 욕을 할 것이라고 사단은 장담을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무슨 어려운 일을 당한다고 해서 하나님 앞에서 불평불만을 늘어놓는 것은 그냥 '그런 지경을 당하게 되면 누구라도 그럴 수밖에 없겠지.'라고 이해해 줄 수 있는 일이 결코 아니라 어디까지나 '범죄 행위'입니다. 
그것은 '하나님도 불의를 행하실 수 있다.'라고 말하는 것과 똑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왜 내게만 불공평하게 대하시나?'라고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는 실로 무례하기 짝이 없는 신성모독의 범죄인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기복주의 교인들과는 대조적으로 언제 어디서 어떤 일을 당해도 오로지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철저히 믿고 고백하는 개혁주의 기독인들은 그런 시험과 역경 중에서 오히려 그 신앙이 '7배나 연단된 정금'처럼 더욱 빛이 나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것이니 거두어 가시는 것도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이다.'라고 실로 겸손한 '청지기 의식'을 고백할 줄 아는 것은 그 주인이 보시기에 얼마나 '착한' 모습이겠습니까? 복을 받을 때에만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시련과 연단을 통과할 때에도 끝까지 하늘 아버지의 선하심을 조금도 의심치 아니하고 무조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신자는 하나님 보시기에도 그야말로 '똑소리'나는 기특하기 짝이 없는 자녀들이 아니겠습니까?

왜냐하면 이것이야말로 원래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우주와 세상의 다른 모든 피조물들은 하나님께서 그저 '보시기에 좋도록' 지으셨습니다. 
하지만 사람만은 '하나님의 자기 형상과 모양을 따라' 창조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특별한 피조물'이 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다른 피조물들은 그저 하나님께서 스스로 '감상하시는' 대상이었지만, 사람만은 그 아름다운 우주만물을 하나님 곁에서 함께 감상하면서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를 내 마음에 그리어 보니 너무나 아름답습니다. 이 창조주의 높고 위대하심을 제 영혼이 찬양합니다."라고 하나님의 전지전능에 감탄하고 하나님의 주권에 영광을 돌릴 줄 아는 '하나님의 친구'가 되게 만드신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입을 통하여 그처럼 당신을 높이고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을 칭송하는 '영광의 찬송'을 듣고 싶으셔서 사람만 그렇게 '특별한 피조물'로 창조해 주셨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그 얼마나 놀라운 특권이겠습니까?
사람 외에 다른 그 어떤 피조물도 이런 특권은 조금도 받지 못했습니다. 
유전인자로 따져보면 침팬지는 사람과 98퍼센트가 같고 2퍼센트만 다르다고 합니다. 
하지만 침팬지와 사람 사이의 진짜 차이는 그 2퍼센트의 유전자적 차이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침팬지는 절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없는 존재인 반면에 사람은 자신의 심령으로부터 그 입술을 통하여 살아 계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고 영광을 돌릴 수 있다는 사실에 바로 침팬지와 사람의 결정적인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대소요리문답은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이뇨?(What is the chief end of man?)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Man's chief end is to glorify God, and to enjoy him forever.)'라는 문답을 우리 기독신자의 신앙과 행위에 대한 요긴한 문답들 중에서 '제1문답'으로 기록해 놓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 우리 종교개혁자들과 청교도 선배들이 그 얼마나 훌륭한 원리를 우리에게 전해 주고 있는 것이겠습니까?
'도대체 사람이란 존재가 왜 있는 것이냐? 왜 우리가 생명을 영위하면서 오늘도 살고 있는 것이냐?'라는 아주 근본적이고도 존재론적인 질문을 두고, 우리의 신앙 선배들은 성경을 구석구석까지 찾아 읽은 후에 기독신자의 '인생 존재 목적'을 이처럼 일목요연하고도 멋있게 정리정돈해 놓은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애초부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한' 이 한 가지 목적 때문에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지으신 창조물의 아름다움을 보고 하나님께 찬양하고, 그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구원의 은총에 감격하면서, 그 하나님께 무한한 영광과 모든 감사를 돌리는 것이 원래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셨을 때에 그 사람의 '주 기능'이 되게 하셨던 것이었습니다. 
  
죄라는 바이러스가 사람의 영혼에 침투해 들어옴으로써 이 고유의 영적 기능이 마비되었었지만,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중생 즉 그 심령이 '새로운 영적 시스템'으로 교체된 성도는 자연히 이 원래의 기본 기능을 회복하고 발휘하게 됩니다. 
그런 까닭에 진정 '거듭난 새 사람'으로서의 기독신자는 비단 순경 중에뿐 아니라 역경 중에서도 욥처럼 무조건, 반사적으로,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어다'라고 고백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현대교인들의 마음은 이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을 그저 평안하고 행복할 때만 기억하고 시험이나 환난을 당하게 되면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맙니다. 
옛날 삼풍백화점 붕괴 사건이 일어났을 때였습니다. 
그때 참변을 당한 사람들 중에는 기독신자들도 물론 있었는데, 그 중에 서울의 어느 대형교회의 등록교인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교회의 담임목사님은 충격과 고통 중에 빠져 있는 그 유가족들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 목사님께서 나중에 어떤 기독교 잡지사와 인터뷰를 하면서 그때의 유가족들과의 면담을 두고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그것은 "그런 상황에서 제가 도대체 무슨 말로 위로를 해 줄 수 있겠습니까?"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즉 그 목사님도 똑같이 망연자실 속수무책으로 그 환난 당한 자기 교회 교인들과 얼굴만 맞대고 앉아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도 목사님이시니까 설마 기도는 해 주셨겠지만 도대체 무슨 기도를 했겠습니까?
그런 유가족들에게는 자기도 위로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는 목사가 하나님 앞에서는 도대체 어떤 기도의 말이 나올 수 있었다는 것입니까?

저는 그 인터뷰 기사를 보고서 어이가 없었습니다. 
물론 그 유가족들이 당한 일은 '세상적으로만' 생각하면 위로할 말이 없을 만큼 충격적인 참변임은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목사가 '이 세상에 속한 사람'입니까?
그 비극을 당한 유가족 교인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불신자'들입니까?
  
그런데 하나님을 섬긴다는 목사가 하나님을 믿는 신자에게 '위로해 줄 말이 없다'니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입니까?
사람으로서는 위로할 길이 없지만, 피차 '하나님께서 살아 계심과 그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믿는다면' 당연히 위로해 줄 말이 있어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을 모르는 불신자라면 할 수도 없고 알아들을 수도 없겠지만, 적어도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믿는 목사요 신자라면 바로 그런 극한 고통과 환난이야말로 '세상은 알 수 없는, 하늘 아버지의 놀라운 위로와 안위와 평강'을 나눌 줄 알고 누릴 수 있어야 마땅한 것입니다. 

저 역시 지난 10년 동안 경향교회를 섬기면서 그런 '욥의 환난'을 똑같이 당하게 된 유가족 성도들의 장례식을 집례해야 했던 경우들이 자주 있었습니다. 
칠팔 년 전에 우리 교회의 어느 주일학교 학생이 소천했습니다. 
그 어린이는 4년 동안 경향교회 주일학교를 열심히 다녔던 학생이었는데, 백혈병으로 판명이 난 후에도 오히려 병상에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를 전도했습니다. 
그래서 그 부모님들은 순전히 그 아들 때문에 교회에 등록하셨고 세례공부를 착실히 받으신 후에 세례를 받으셨으며 결국 두 분 다 우리 교회의 서리집사님들이 되셨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결국 그 주일학교학생을 데려 가셨습니다. 
사랑하는 어린 아들, 온 교인들이 함께 기도했던 그 착한 주일학교 어린이가 그처럼 일찍 세상을 떠나고 만 것은,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당연히 기가 막히고 억장이 무너질 일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조차 그런 상황에서는 아무 위로해 줄 말씀이 없는 분이시겠습니까?
아닙니다. 
우리 성도들에게는 당연히 위로가 있습니다. 
그 주일학생의 생명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며 취하여 가신 분 역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 하나만 믿어도 넉넉한 위로가 됩니다. 
그 어린이가 '재수가 없어서', 속된 말로 '명이 짧아서' 일찍 죽게 된 것이라면 정말 그 어떤 말로도 위로할 길이 없겠지만, 그 어린이를 지극히 사랑하시고 당신의 독생자를 대신 주셔서 구원해 주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품에 다시 안으셨다는 사실을 확신하면 충분한 위로가 되고도 남는 것입니다. 

물론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절로 원망이 나올 수밖에 없고 욕을 해도 시원치 않을 재앙처럼 보일 것이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그분의 절대주권을 믿는 우리 기독신자는 결코 그렇지 아니합니다. 
사랑스러운 아들이 출생했을 때에 그 귀한 생명의 선물을 하나님께서 주신 줄로 알고 감사함으로 받았다면, 그 아들을 다시 취하여 가신 하나님께도 조금도 다름없이 똑같이 찬양하고 영광을 돌려야 할 뿐인 것입니다. 
그 주일학생은 부모가 사랑하는 아들이기 이전에 하나님께서 훨씬 더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반드시 잊지 말아야 하며, 그를 지극히 사랑하시되 당신의 독생자를 대신 주시기까지 그 아이를 사랑해 주신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그의 생전이나 사후나 조금도 변함없는 것이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바로 그런 신실한 모습을 끝까지 지키는 자녀가 되면 하늘 아버지께서 보시기에 그 얼마나 기쁘시겠습니까?
입에 사탕을 물려주고 손에 선물을 쥐어 줄 때만 좋아하고 감사하는 교인이 아니라, 온갖 연단의 환난을 연타로 맞으면서도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이십니다.'라고 찬송할 줄 아는 성도의 모습이 그 얼마나 사랑스러우시겠습니까?
  
행복하게 장수할 때만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표어를 외치는 것이 아니라, 죽는 순간 그 마지막 호흡을 가지고서도 '이 죄인을 당신의 품에 영접해 주시는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라고 고백하는 당신의 택하신 양자들이 하나님의 눈에 그 얼마나 귀중하게 보이시겠습니까?
순경 중에만 아니라 역경 중에도, 아니 시련과 환난을 당하게 될 때일수록 더욱 '하나님을 원망하는 어리석은 죄'에 빠지지 말고 오직 '생명의 창조주를 더욱 영화롭게 하고 우리의 구원주를 끝까지 찬양할' 줄 아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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