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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교회, 하나님이 목자이신 양 무리 (시 2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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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하나님이 목자이신 양 무리 (시 23:1-6)


성경은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의 관계를 여러 가지 비유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비유는 아버지와 자녀의 비유이겠지만 그에 못지않은 비유가 신랑과 신부의 비유이며 또한 목자와 양의 비유입니다. 하나님에게 있어서 그의 백성은 양 무리 같은 존재이고, 하나님의 백성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목자 같으신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양 치는 목자가 양들에게 어떤 존재인지를 잘 아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에게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신지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열쇠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 전체에서 목자의 목양하는 모습을 오늘 본문인 시편 23편보다 더 잘 보여주는 말씀은 없을 것입니다. 시편 23편의 저자로 알려진 다윗은 바로 양 치는 목동이었고 그는 자기 자신의 목양의 경험을 통해서 그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깊이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먼저 본문 2절에 보면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합니다. 양에게 있어서 목자는 푸른 풀밭에 누울 수 있게 해주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해주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양들을 푸른 풀밭에 눕게 해주고 물가에서 쉴 수 있게 해주는 일은 목자에게 있어서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목자가 많은 수고와 자기희생을 치러야 가능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우선 양이란 동물이 풀밭에 편안히 눕기 위해서는 적어도 다음의 네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첫째, 양들을 불안하게 만드는 존재가 주변에 보이지 않아야 합니다. 양은 아주 겁이 많고 의심이 많은 동물이어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물체가 시야에 들어온다거나 들어본 적이 없는 소리가 들리면 불안해서 누워있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한 마리 양이 놀라서 뛰기 시작하면 다른 모든 양들도 덩달아 뛰는 바람에 삽시간에 혼란이 일어나곤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양들을 편히 누워 쉬게 하기 위해서는 목자는 쉬지 않고 부지런히 주위를 살피며 양들을 불안하게 할 수 있는 모든 요소들을 제거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을 위해서 그런 수고를 아끼지 않는 목자 같은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둘째, 양들이 풀밭에 편안히 눕기 위해서는 양들을 귀찮게 하는 요소들이 없어야 합니다. 양은 아주 신경질적인 짐승이어서 하루살이 같은 것이 눈앞에서 어른거리기만 해도 그걸 참지 못하고 그래서 눕지를 못한다고 합니다. 따라서 양들을 편히 누워 쉬게 하기 위해서는 목자는 양들을 귀찮게 하고 짜증나게 하는 벌레나 곤충들을 열심히 쫓아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을 위해서 그런 수고를 아끼지 않는 목자 같은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셋째, 양들이 풀밭에 편안히 눕기 위해서는 배가 고프지 않아야 합니다. 양들은 만족스러울 만큼 배불리 꼴을 먹기 전에는 절대로 눕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니 목자들은 양들이 편히 누워 쉴 수 있도록 좋은 꼴을 풍성히 먹이기 위해서 늘 많은 수고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을 위해서 그런 수고를 아끼지 않는 목자 같은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넷째, 양들이 풀밭에 편안히 눕기 위해서는 양들 자체 안에서 평화가 유지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흔히 양을 양순하고 평화의 상징인 짐승인 줄 알고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양들끼리만 내버려두면 힘없고 어린양들은 힘세고 못된 양들 때문에 늘 시달리며 좋은 자리는 언제나 빼앗기기 때문에 잠시도 편안히 누워 쉴 틈이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모든 양들이 골고루 편히 누워 쉬게 해주기 위해서 목자는 특별히 신경 써서 양들 사이를 잘 살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을 위해서 그런 수고를 아끼지 않는 목자 같은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목자는 양들에게 물을 먹이러 갈 때에도 먼저 그 물이 양들에게 안심하고 먹일 수 있는 깨끗한 물인지, 물가에 양들을 귀찮게 하거나 양들에게 해로운 벌레들이라도 없는지 세심히 살펴본 후에야 양들을 데려갑니다. 또 양들에게 가장 좋은 물은 새벽 동트기 전에 풀잎에 맺히는 이슬이라고 하는데 좋은 목자들은 양들에게 그 물을 먹이기 위하여 새벽잠을 설치면서 양들을 일일이 깨워 풀밭으로 이끌고 가는 수고를 아끼지 않는다고 합니다. 양들이 만족하며 “우리가 쉴만한 물가로 인도되었구나”라고 여기게 되는 것은 목자의 지극한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그렇게 사랑하는 목자 같은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본문 3절에 보면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라고 합니다. 이 말 속에는 은혜 넘치는 뜻이 들어있습니다. 양은 몸이 둥글고 다리가 짧아서 그런지 나뒹굴기 잘한다고 합니다. 평평한 곳인 줄 알고 누우려다가 조금만 웅덩이진 곳이면 쉽게 나뒹굴게 되는데 한번 배를 하늘로 향하고 나뒹굴게 되면 제 발로 다시 서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 뿐 아니라 스스로 일어서려고 발버둥 치다보면 체내에서 기포가 형성되어서 혈액순환을 막게 된다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날씨가 흐리고 바람이라도 좀 불 때에는 3일 정도 버틸 수 있지만 뙤약볕이 내려 쬐는 때에는 단 세 시간 만에도 질식사를 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목자들이 양을 치면서 가장 신경을 써야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어느 구석인가에 한 마리라도 배를 하늘로 향한 채 나뒹굴어 있는 양이 없는지 살피는 일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비유말씀 중에 한 마리 잃은 양을 찾아 아흔 아홉 마리 양을 두고 나서는 목자의 비유말씀을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양 한 마리가 보이지 않을 때 목자가 제일 먼저 생각에 떠올리는 것은 그 양이 어딘가에서 배를 하늘로 향하고 나뒹굴어 있지나 않나 하는 것이며, 그것은 1분 1초가 급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양을 발견했을 때 목자는 그 양을 얼른 바로 세워 가슴에 안고 전신을 잘 마사지 해 주어야 하며, 그렇게 하면 질식해 가던 양이 정신을 차리며 되살아난다는 것입니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라는 말은 내가 어디서 무슨 변을 당해 죽어 가는 일이 있을지라도 곧바로 내게 달려와 나를 살려 줄 목자 같은 분이 바로 내 하나님이시라는 믿음의 고백인 것입니다. 

3절 뒷부분에는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하는데 이 말 속에도 참으로 깊은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양은 습관성 동물이어서 자기들끼리만 다니게 내버려두면 한 번 가본 길로만 계속해서 다닌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풀이란 풀은 다 뜯어먹고, 더 이상 풀이 없으면 뿌리까지 다 캐먹으며, 또 다니면서 싸놓는 배설물로 땅을 산성화시켜 다시는 회복이 불가능한 땅으로까지 만들어놓는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풀밭이라 할지라도 목양이 불가능한 땅으로 만들어버리는 것, 그것이 곧 불의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목자가 목양에 성공하려면 무엇보다도 유의해야 하는 일의 하나가 양들을 여러 목초지로 차례로 번갈아가며 이끌어가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좋은 목자에 의해 인도되기만 하면 양들은 목초지를 버려놓지 않을 뿐 아니라 그들이 적당히 남겨놓는 배설물은 오히려 목초지가 잘 유지되는 데에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그것이 말하자면 의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스스로는 불의를 행할 수밖에 없는 양들을 의를 행할 수 있게 해주는 목자처럼 하나님은 불의의 길을 갈 수밖에 없는 우리를 의의 길을 가도록 인도하시는 그런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본문 4절에 보면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합니다. 낮은 평지에서 양들을 치다가 더 이상 꼴을 먹일 목초지가 없어지면 높은 산지대로 새로운 목초들을 찾아 양들을 이끌고 가는데 그 길이 종종 험하고 가파르기도 하며 또 사나운 산짐승들이 나타날 수도 있고 해서 양들에게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와도 같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들은 양 손에 각각 지팡이와 막대기를 들고 가는 목자가 눈에 보이는 한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발을 잘못 디뎌 골짜기나 가시덤불에 떨어지게 되면 끝이 둥글게 휜 지팡이로 목이나 다리를 걸어 끌어올려 줄 것이고, 맹수가 나타나면 막대기로 물리쳐 줄 것이라고 철저히 믿기 때문입니다. 

팔레스타인 지방의 목양관습에 따르면 목동이 처음 양치는 일을 시작하기 전에 하는 일이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인근 숲에 가서 튼튼한 나무에서 싱싱한 가지를 하나 꺾어 그 나뭇가지를 자기의 체격과 팔 길이에 맞게 적당히 자르고 잘 다듬어 막대기를 만든 다음 그것을 휘두르는 연습을 하는 것입니다. 맹렬한 훈련 끝에 어떤 짐승이나 적수가 나타나도 그 막대기로 능히 물리칠 수 있을 만큼 완전한 무기를 갖춘 후에야 아버지나 형님에게서 양 몇 마리를 물려받아 목자의 일을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양들에게서 목자의 손에 들려진 지팡이와 막대기는 그들이 절대로 안전할 수 있다는 보장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당신의 백성을 언제 어디서나 어떤 상황에서도 안전하게 지켜주시는 목자와도 같은 존재시라는 것입니다. 

본문 5절에 보면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하는데 그것은 아무리 양들을 노리는 위험요소들이 널려져 있는 가운데서도 목자는 양들이 마음 놓고 꼴을 먹을 수 있도록 밥상을 차려준다는 말입니다. 그 말은 한편으로는 아무리 험준하고 위험한 고지대에서도 목자는 밥상처럼 평평한 목초지를 찾아 양들을 인도해줌을 뜻할 수도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양들이 뜯어먹을 풀들 사이에 양에게 치명적인 독초들이 섞여 있다 하드라도 목자들은 미리 그것들을 다 솎아낸 뒤에야 양들을 데리고 가기 때문에 양들은 마음 놓고 뜯어먹을 수 있음을 뜻할 수도 있습니다. 양들을 위해 그런 수고를 아끼지 않는 목자같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에게 그러하시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보면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하는데 이것 또한 양들을 돌보는 목자의 세심한 주의와 책임감을 잘 보여주는 말입니다. 양의 콧구멍 입구는 늘 물기가 촉촉해서 종종 거기에 벌레가 기생하는 수가 있다고 합니다. 그 벌레는 양의 콧구멍에다 알을 까기도 하고 또 거기서 애벌레가 나와 콧구멍 속으로 파고 들어가기도 하는데 그렇게 되면 양에게 통증도 일으키고 때로는 실명하게도 한다고 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성마른 짐승인 양은 그것을 참지 못해서 땅바닥이나 나무 등걸이나 바위에다가도 머리를 찧고 코를 비비대다 보면 상처가 나거나 깨져서 피를 흘리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면 목자는 상비약처럼 지니고 다니는 올리브기름을 곧바로 그 상처에 발라주어 낫게 해 준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라는 말 또한 양을 기르는 목자의 지극한 정성과 배려를 엿보게 해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에게 그들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다치고 상처받고 깨지고 피 흘리는 일이 있어도 어김없이 찾아와 고쳐주고 살려주는 목자 같은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는 말은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분에 넘칠 정도로 감사하다는 뜻이기도 하겠지만, 그 말 자체만으로도 특별한 의미가 숨어있는 표현입니다. 목자들은 밤에 들판에서 양들을 지킬 때가 많으므로 추위나 오한이 날 때에 대비해서 물병에 술을 약간 탄 물을 늘 가지고 다닌다고 합니다. 그런데 양들도 오한이 날 때에는 목자가 그 술 탄 물을 따라 마시우곤 하는데 양들에게는 목자의 품에 안겨 그가 따라주는 물 한 잔 받아 마실 때보다 더 행복해할 때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 때의 그 행복감의 표현이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는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그의 백성에게 사랑과 은혜가 넘치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을 목자로 둔 양 같은 백성이라면 부족한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이 시편의 저자가 본문 첫 절에서 먼저 한 말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한 것입니다. 우리는 시편 23편의 모든 구절 뒤에 숨어 있는 이야기들을 통해 양을 치는 목자의 사랑과 정성과 돌봄이 어떤 것이며 양들을 위한 목자의 책임감과 수고와 희생이 어떤 것인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부모가 자기 자식들에게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목자는 양을 지키기 위해서는 자기 목숨의 위험까지도 마다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바로 당신의 백성에게 그러한 목자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자는 본문 6절에서 결론을 내리기를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합니다. 왜냐하면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를 것”이기 때문이라 합니다. 그런 목자처럼 하나님께서는 평생토록 오직 선하심과 인자하심으로 당신의 백성과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선한 목자라고 선언하셨고 그 선언이 진실임을 우리 대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써 확증해주셨습니다. 우리는 그런 목자 되신 하나님을 믿고 따라야 합니다. 그 하나님하고만 일생을 함께 해야 합니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걸으라 하시는 길이 따르기 힘들고 이해하기 어렵다 하더라도 자기 목자를 절대적으로 믿고 따라가는 양 같이 따라가야 합니다. 

예수 믿는 것이나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종종 얻는 것 없고 손해만 볼 것 같으며, 배부름도 시원함도 편히 쉼도 재미도 없고, 피곤과 오해와 조롱과 실패와 위험밖에 없어 보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삶이 그야말로 물 한 방울, 풀 한 포기, 구름 한 점 없는 광야를 걷는 것과 같이 여겨질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 눈에는 당장에 안 보여도 주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만 따라가면 거기에 진정한 기쁨과 만족과 성공과 평안과 행복이 있음을 굳게 믿어야 합니다. 악하고 험한 세상에서 예수 믿는다고 하는 것이 어쩌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니는 것 같이 생각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양손에 지팡이와 막대기를 드시고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스스로는 불의의 길밖에 갈 수 없는 우리 인간들이 의의 길을 가는 존재가 되게 하는 것은 다름 아니라 우리의 선한 목자 되신 주님을 따르는 것뿐임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양 무리인 우리들이 우리의 목자 되신 하나님 앞에서 지켜야 할 믿음의 길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이것이 오늘 우리 모두의 신앙고백과 삶의 다짐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목자로 삼고 따르는 백성에게는 하나님께서 영원히 함께하시며 참된 만족과 평안, 치유와 회복, 그리고 구원과 부족함이 전혀 없는 영원히 복된 삶을 주실 것입니다. 그런 양 무리를 교회라 합니다. 

오늘 한국교회 최초로 창립 126주년을 맞은 이 교회에 귀빈으로 초청되어 오신 여러분, 우리와 함께 하나님이 목자이신 양 무리가 되시기를 진심으로 소원합니다. (이수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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