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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행 8:2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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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행 8:26-40)  
  
하나님의 선하신 손길이 교회와 모든 성도들과 함께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행복한 사람, 건강한 교회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어저께(19일)는 민족의 대 명절이라는 추석, 한가위였습니다. 

여러분은 추석하면 무엇이 생각나십니까? 어떤 분들에게는 어린 시절이 생각날 것입니다. 제게도 어린 시절, 추석이 되면 추석빔으로 새 옷을 입던 기억이 있습니다. 고향을 떠나 사는 분들에게는 ‘민족의 대이동’이라는 것을 실감하면서 ‘그래도 이 맛이야!’하면서 차안에서 보내는 시간이 즐거우셨을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한가위만 같아라!’는 말은 송편을 비롯하여 먹을 것이 많을 때라는 것으로 기억만으로도 즐겁습니다. 아무래도 한가위의 상징은 보름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달과 관련된 아름다운 추억 한 가지가 없고, 달을 보며 소원을 빌 일이 없을 지라도 한가위 보름달을 보면 왠지 풍성해 보이지 않습니까? 추석의 보름달은 풍성함입니다.

추석날 저녁, 잠시 사무실로 나오다가 환한 보름달을 한 참이나 쳐다보았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고등학교 한문 시간에 배웠던 ‘월만즉휴(月滿則虧)’라는 말이 생각났습니다. 달 월, 찰 만, 곧 즉, 이지러질 휴 자를 써서 달이 차면 기운다는 뜻입니다. 달이 차이 차면 기울 듯이 사물이 왕성하면 곧 쇠하여진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있는 말씀으로 표현하자면 “모든 일에는 다 때가 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마다 알맞은 때가 있다. 태어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다. 심을 때가 있고, 뽑을 때가 있다.”(전 3:1-2[새번역])는 것입니다. 

추석의 보름달을 보면서 그 달이 이지러질 것을 생각한다는 것은 그만큼 나이가 들었다는 이야기일까요, 아니면 이제 좀 세상 이치를 깨닫게 되었다는 것일까요? 달은 차면 기울어집니다. 그러나 기운 달은 다시 차오릅니다. 달이 차면 기울어진다는 것에서 겸손을 배우고, 기운 달이 다시 차오른다는 것에서 희망을 배웁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겸손하지만, 부활을 믿기에 희망을 잃지 않는 성도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크게 부흥하던 예루살렘교회에 엄청난 박해가 있었습니다. 스데반은 순교를 당하였고, 성도들은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하지만 흩어진 사람들은 흩어진 곳에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타오르는 불을 내리치면 불똥이 이리저리 튀어서 번지는 것처럼 흩어진 사람들을 통하여 복음이 확산되었습니다. 그 중에, 빌립은 사마리아에 가서 복음을 전하여졌습니다. 빌립이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자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를 통하여 많은 기사와 이적이 나타났습니다. 그 성에 큰 기쁨이 있었습니다(8:8). 그런데 하나님께서 빌립에게 사마리아에서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I. 가라
  
우리는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께서 빌립에게 어디로, 어떻게, 왜 가라고 하시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먼저, 26절 말씀입니다.

:26 주의 사자가 빌립에게 말하여 이르되 일어나서 남쪽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 하니 그 길은 광야라.

하나님께서 그의 천사를 통하여 빌립에게 “일어나서 남쪽으로 나아가서,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로 가거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는 두 개의 명령어가 들어있습니다. 하나는 ‘일어나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가라’는 것입니다. ‘일어나라[ajnivsthmi/아니스테미]’는 말은 ‘일으키다’, ‘세우다’는 뜻입니다. 힘들고 어려워도, 일어나고 싶지 않아도 일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라[poreuvomai/포류오마이]’는 ‘횡단하다’, ‘여기저기 데리고 가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강조하는 것은 그가 반드시 일어나 가야한다는 것입니다. 북쪽 사마리아에서 예루살렘이 있는 중간의 유대 지역을 통과하여 남쪽 광야로 가라는 것이었습니다. 더욱이 광야로 가라는 것입니다.

1. 일어나 가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는 이렇게 일어나 가라는 명령이 주어질 수 있습니다. 이것은 반드시 다른 도시로 이사 가야하고, 지금까지 하던 일을 그만 두라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살고 있는 곳을 떠나지 않고도 일어나 갈 수 있습니다. 자신의 자리를 떨치고 일어나 사명의 위하여 결심하고 새롭게 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분명한 것은 성령님께서 우리의 삶을 때때로 광야로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빌립에게 사마리아는 성공한 곳입니다. 예루살렘에서 박해를 받아 쫓겨났지만 사마리아 사람들이 그의 말에 귀를 기울여 주었습니다. 빌립의 전도에 많은 사람들이 따랐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일어나 가라고 하십니다. 빌립에게 사마리아는 안전한 곳입니다. 정통파 유대인들에게 사마리아는 터부시되는 곳입니다. 유대인들이 들어가기를 꺼리는 곳입니다. 그래서 박해를 피하여 숨어있기에 딱 좋은 곳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일어나 가라고 하십니다. 빌립에게 사마리아는 풍성한 곳입니다. 성령께서 빌립을 사용하셔서 표적이 나타났습니다.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이 크게 소리를 지르면 나갔습니다. 중풍병자와 못 걷는 사람이 나아서 걸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일어나 가라고 하십니다. 

성령에 이끌리는 삶은 성공하고, 안전하고, 풍성한 곳에서 일어나 가라고 하시면 순종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공하지 못하고, 안전하지 못하고, 풍성하지 못하다면 더욱이 일어나 가라는 말씀에 순종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성공이나 실패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순종하여야 합니다. 비록 하나님이 이끄시는 곳이 광야라고 할지라도 일어나 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빌립에게 일어나 가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은 또 그에게 어떻게 하라고 하셨습니까? 29절 말씀입니다.

:29 성령이 빌립더러 이르시되 이 수레로 가까이 나아가라 하시거늘, 

빌립은 말씀에 순종하여 사마리아를 떠났습니다. 그의 생명을 노리고 있는 사람들이 도사리고 있는 예루살렘 인근을 통과하였습니다. 그리고 유대 남쪽의 광야로 내려갔습니다. 광야는 사람이 살지 않는 곳입니다. 그런데 빌립이 순종하여 갔더니 거기에서 사람들의 행렬이 있었습니다. 성령님께서 “가서, 마차에 바짝 다가서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가까이 가라[prosevrcomai/프로셀코마이]’는 말은 ‘접근하다’, ‘가까이 끌어당기다’는 것입니다.


2. 가까이 가라는 것입니다.

사랑은 한 걸음 다가서는 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떤 이유에서든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선을 긋고, 담을 쌓는 것은 잘못입니다. 더욱이 사랑한다면서 멀찍이 서서 관망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런데 자주, 너무도 자주, 사람들에게 다가서지 못하고 망설이고 머뭇거렸던 것이 저의 모습이었습니다. 저의 문제였습니다.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라고 묻는 율법교사에게 예수님께서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눅10:25-37)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누가 이웃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이웃이냐 아니냐의 차이는 어디에 있습니까? 강도를 만난 사람을 피하여 지나가는 사람은 이웃이 아닙니다. 그가 제사장이거나 레위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피하여 지나가면 이웃이 아닙니다. 

강도 만난 사람에게 가까이 가서 돌보아 주는 사람이 이웃입니다. 비록 멸시하고 천대하는 사마리아 사람이라도 가까이 다가오면 그가 이웃입니다. 이웃은 가까이 다가가서 자비를 베풀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웃에게 베풀어야 할 자비란 가까이 가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빌립에게 ‘가까이 가라’고 하신 말과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 만나 사람에 ‘가까이 갔다’(눅10:34)는 말은 같은 단어입니다. 우리가 일어나서 가야 하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그것은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서입니다. 광야와 같은 세상, 이웃이 없는 곳에서 한 사람에게 다가서시기 바랍니다.
  
가라는 주제로 생각할 때, 오늘 말씀에서 우리가 지나치지 말고 반드시 주목하여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39절 말씀입니다.

:39 둘이 물에서 올라올새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간지라. 내시는 기쁘게 길을 가므로 그를 다시 보지 못하니라.

빌립이 광야에서 만난 그 사람에게 말씀을 들려주고 세례를 베풀고 함께 물에서 올라오자 주의 영이 그를 어디론가 이끌어가셨습니다. ‘이끌어가다[aJrpavzw/할파조]’는 말은 본래 ‘빼앗다’, ‘낚아채다’는 뜻입니다. 주께서 빌립을 낚아채듯이 빼앗아 갔습니다. 그 사람은 빌립을 다시 볼 수 없었습니다. 어쩌면 감사하다고, 고맙다고 인사할 겨를도 없이 후딱 떠나버렸습니다. 이것은 성령님께서 빌립을 억지로 이끌어 가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가 있었습니다. 그를 강권적으로 이끌어 가셨던 것입니다.


3. 이끌어 가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삶에서 순간순간 선택합니다. 우리는 최선의 선택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지식과 경험을 총동원합니다. 하지만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 16:9)는 말씀 앞에서 겸손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계획하지만 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사도 바울이 제3차 전도 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갈 때의 일입니다. 바울이 가이사랴에 이르렀을 때, 아가보라는 예언자가 유대에서 내려왔습니다. 아가보는 유대 사람이 바울을 묶어서 이방 사람의 손에 넘겨 줄 것이라고, 성령님이 말씀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을 듣고, 그 곳의 성도들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고 간곡히 만류하였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해서, 예루살렘에서 결박을 당할 것뿐만 아니라, 죽을 것까지도 각오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성도들의 만류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성도들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하고 만류하기를 그쳤습니다(행 21:14). 주의 뜻대로 입니다.

때때로 무엇이 더 나은 선택인지 우리가 알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다만 우리는 주의 뜻이 이루러지기를 기도하여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의 삶을 통하여 주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축원합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빌립에게 왜 무엇을 위하여 일어나 가서, 가까이 가도록, 강권하였는지를 함께 생각하려고 합니다. 그에 앞서 잠깐 동안 ‘솔로몬과 스바여왕’에 대하여 생각하려고 합니다.

구약성경 열왕기상은 스바의 여왕이 솔로몬을 방문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왕상 10:1-13). 이 스바는 지금의 아프리카 예멘 지역입니다. 스바여왕은 솔로몬의 명성을 듣고 솔로몬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솔로몬에게 감동하여 많은 예물을 드렸습니다. 솔로몬도 스바여왕에게 규례대로 물건을 준 것 외에 또 스바의 소원대로 구하는 것을 주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스바여왕이 소원대로 구한 것이 무엇입니까? 성경은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궁금합니다. 여기에서 소설이 쓰였습니다. 에티오피아 지역으로 돌아온 스바여왕이 솔로몬왕의 혈통인 아들 메넬리크(Menelik) 1세를 낳았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도 에티오피아인들은 자신들의 국가시조인 메넬리크 1세가 솔로몬 왕과 스바여왕의 아들임을 굳게 믿고 있습니다. 자신들이 솔로몬과 스바여왕의 후손임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에티오피아에는 유대교신자와 기독교신자들이 유난히 많습니다. 수만 명의 유태인이 집단 거주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빌립이 광야에서 만난 사람이 바로 에티오피아의 고위관리입니다. 그는 솔로몬의 후손으로 할아버지 나라를 방문하고 돌아가는 길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솔로몬과 스바여왕의 사랑 이야기가 아닙니다. 에티오피아의 역사와 혈통에 관한 것도 아닙니다. 오늘 말씀에서 우리는 자신의 사명을 발견하여야 합니다. 

  
II. 사명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일어나 가서, 가까이 다가가라고, 강권하여 이끌어 가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30절 말씀과 31절 말씀입니다. 

:30 빌립이 달려가서 선지자 이사야의 글 읽는 것을 듣고 말하되 읽는 것을 깨닫느냐? :31 대답하되 지도해 주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냐 하고 빌립을 청하여 수레에 올라 같이 앉으라 하니라. 

빌립이 일어나 가서 광야에서 만난 사람은 에티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고위 관리였습니다. 그는 여왕의 모든 재정을 관리하는 신하였습니다. 그는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구약성경 이사야의 글을 읽고 있었습니다. 

빌립이 가까이 다가가서 “지금 읽으시는 것을 이해하십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는 대답하기를 “나를 지도하여 주는 사람이 없으니, 내가 어떻게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하였습니다. 그리고 빌립더러 올라와 곁에 앉으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말씀의 뜻을 가리켜달라는 요청입니다. 빌립은 이미 말씀을 읽고 있는 사람에게 말씀을 설명해주는 사명을 감당하였습니다. 말씀을 지도하여 주기 위하여 그는 사마리아를 떠나 광야로 온 것입니다.

1. 말씀을 지도하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의 큰 문제 중에 하나는 빈부의 격차입니다. 있는 사람은 점점 더 부자가 되고, 없는 사람은 점점 더 가난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심각하게 왜곡된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원리가 있습니다. 바로 ‘더하기의 원리’입니다. 영적으로 거듭난 사람이 더 영적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말씀을 사모하는 사람들이 더 말씀을 깨닫게 됩니다. 지혜를 사모하는 사람들이 더 지혜를 얻게 됩니다.

우리교회 꿈꾸는 뜰 정문으로 들어오셔서 바로 왼편 벽을 보면 이런 말씀이 예쁘게 조각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지혜 있는 자에게 교훈을 더하라. 그가 더욱 지혜로워질 것이요. 의로운 사람을 가르치라. 그의 학식이 더하리라. -잠언 9장 9절-

어리석은 자에게 교훈을 더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지혜 있는 자에게 지혜를 더하여 더욱 지혜로워지게 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마 7:6a)고 하셨습니다. 돼지에게 진주를 주어보았자 돼지는 진주의 가치를 모르기에 그것을 발로 밟아버립니다. 그리고 먹을 것을 주지 않고 진주를 주었다고 진주를 준 사람을 찢어 상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조심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사모하면 말씀을 더 깨닫도록 지도하는 사람을 붙여주십니다. 그러나 다른 은사에 관심을 가지면 이에 적절한 지도자를 보내주실 것입니다. 교회에서 말씀을 가르치는 은사만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성도들이 말씀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자신의 은사로 섬기시되 말씀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은사는 다양합니다. 잘 할 수 있는 것이 사람마다 다릅니다. 그러나 다양한 은사를 통하여 반드시 이루어야 할 한 가지 공통의 사명이 있습니다. 35절 말씀입니다.

:35 빌립이 입을 열어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

에티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고위 관리가 읽고 있던 이사야의 말씀은 이사야 53장의 고난 받는 종에 관한 것입니다. 이 관리는 예루살렘까지 예배하러왔습니다. 마차 위에서 성경을 읽는 열심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이 읽고 있는 글이 구체적으로 누구를 가리키고 있지를 몰랐습니다. 이에 빌립이 이 성경 말씀에서부터 시작하여, 예수님에 관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37절 말씀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본에는 그 관리가 빌립에서 “내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인 줄 믿노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정황 상 이런 고백이 있었을 것이 틀림이 없습니다. 빌립은 예수님을 전하였고 고관은 예수님을 믿은 것입니다.


2. 예수님을 전하는 것입니다.

복음의 내용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리스도이시라는 것입니다. 나사렛 예수! 동정녀 마리아를 통하여 이 땅에 오셨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으나 사흘 만에 다시 사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이 인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신 그리스도이심을 믿습니다. 우리가 전도를 하는 이유도, 예배당을 짓고 꿈꾸는 뜰을 세운 이유도, 각종 행사를 하며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이유도 예수님을 전하기 위한 것입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요 20:31). 

예수님이 증거 되지 않고 예수님의 생명을 풍성하게 누리게 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 어떤 일이라도 교회의 자원을 허비하는 것입니다. 교회에는 더 다양한 은사가 발휘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더 단순한 복음이 증거 되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들을 수 없는 예수님을 전하는 아름다운 교회가 더욱 되기를 간절히 원하고 바라고 소망합니다.
  
이렇게 말씀을 가르쳐 예수님을 전하여 그 결과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36절 말씀입니다.

:36 길 가다가 물 있는 곳에 이르러 그 내시가 말하되 보라 물이 있으니 내가 세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냐?

빌립을 통하여 바로 그 선지자 즉 그리스도가 예수님이라 사실을 알고 믿은 관리는 세례를 받겠다고 하였습니다. 38절입니다.

:38 이에 명하여 수레를 멈추고 빌립과 내시가 둘 다 물에 내려가 빌립이 세례를 베풀고,

빌립은 마차를 세우게 하고, 관리와 함께 물로 내려가서, 그에게 세례를 주었습니다. 여기에서 세례를 받았다고 하는 것은 개인적인 신앙의 고백이자,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신앙공동체의 일원이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승천하시기에 앞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마 28:19)라고. 예수님은 사도들에게 제자삼기 위하여 세례를 베풀라고 하셨습니다. 제자가 되는 외적인 조건은 세례를 받는 것이었습니다. 빌립보교회의 루디아라는 여인은 바울에게 세례를 받은 후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고. 이렇게 세례는 오랫동안 보이는 교회의 일원이 되는 조건이었습니다. 


3. 교회를 세우는 것입니다.

말씀 선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여 교회를 세우는 것이 모든 그리스도인의 사명입니다. 이것을 위하여 자신의 은사를 따라서 할 수 있는 일을 하여야 합니다. 복음이 전하여 지는 곳에 교회가 세워져야 합니다. 건강한 믿음의 공동체가 세워져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월만즉휴, 달은 차면 기웁니다. 그런데 반대말도 있습니다. 월휴즉만, 달이 기울면 반드시 다시 차게 마련입니다. 회자정이(會者定離)라는 말도 있습니다. 만나면 헤어진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이자정회(離者定會), 헤어진 사람은 또한 반드시 만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반드시 천국에서 다시 만날 사람들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겸손하되 예수님의 부활을 믿으시기에 용기와 희망을 가지고 사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사명을 위하여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여야 합니다. 우리를 통하여서 예수님이 증거 되고,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이 땅에 건강한 교회들이 세워져야 합니다. 

행복한 사람, 건강한 교회가 되기 위하여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기를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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