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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두 아들의 비유 (마 21:2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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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아들의 비유 (마 21:28-32)

1. 한 번은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 당시 유대 종교의 최고 지도자들인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와서 ‘누구의 권세로 성전에서 가르치느냐?’ 며 따졌습니다. 만약 예수께서 이러한 권세를 하나님께 받았다고 한다면 신성모독 죄로 그들의 최고 기관인 산헤드린에 고소할 책략으로 그렇게 질문했던 것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먼저 한 가지 묻겠다. 너희가 내 물음에 답하면 나도 너희 물음에 답하겠다. 요한의 세례에 관한 것인데, 그것이 누구에게서 온 권한이냐? 하늘이냐? 사람이냐?’ 고 물으셨습니다. 

이 말씀은 사람들이 요단강에서 요한으로부터 세례받은 것이 성령에 이끌린 것이냐 아니면 단순히 인간적인 충동에 따른 것이냐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종교 지도자들은 궁지에 몰렸습니다. 

만약 요한의 세례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고 하면 요한의 증언을 사실로 인정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요한이 사람들에게 증언한 내용은 한 마디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이시라는 것입니다.

(요1:29-34)...‘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같이 하늘로서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 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노라 하니라.

그러므로 요한의 증언이 성령으로 된 것이라고 말한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해야만 했습니다. 반대로 요한의 세례가 단순히 인간적인 충동에 따른 것이라 하면, 백성들의 분노가 두려웠습니다. 왜냐 하면 모든 백성들은, 요한을 하나님이 보내신 참된 선지자로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들은 비겁하게도 “우리는 알지 못하노라”고 대답했습니다. 알지 못한다는 얘기는 자신들의 책임을 저버리는 행위였습니다. 이들 종교 지도자들의 의무는 선지자의 진위 여부를 분별하는 것이었는데, 알지 못한다는 얘기는, 참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를 전혀 구별할 수 없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참된 증인과 증언을 통해 진실과 진리를 알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체면과 자신들의 위치를 지키기 위해, 비겁하게 모른다고 답변한 것입니다. 위선과 가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진실을 밝히 말하지 못하고 ‘우리는 모른다.’ 라고 대답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그렇다면 나도 너희 물음에 대답하지 않겠다.’ 고 하시며 오늘 본문의 ‘두 아들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너희 생각을 말해 보아라.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다. 그가 큰 아들한테 가서 말했다. ‘얘야,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여라.’ 그 아들이, 대답은 ‘그럼요, 가고 말고요’ 해놓고 실제로는 가지 않았다. 아버지가 둘째 아들에도 똑같이 말했다. 그 아들은 ‘싫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그러나 나중에 생각을 고쳐먹고 포도원으로 갔다. 두 아들 가운데 아버지가 하라는 대로 한 사람은 누구냐?” 그들이 말했습니다. ‘둘째 아들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맞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사기꾼과 매춘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것이다. 요한이 와서 너희에게 바른길을 보여주었다. 너희는 그에게 코웃음을 쳤으나, 사기꾼과 매춘부들은 그를 믿었다. 그들의 달라진 삶을 보았으면서도, 너희는 도무지 그를 믿고 달라질 생각이 없었다.’ 

이 비유 말씀에서 ‘두 아들’을 둔 ‘사람’,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을 뜻합니다. 그리고 ‘맏아들’은 세례 요한의 세례와 그의 가르침, 예수의 가르침과 권위를 부인하는 유대 종교지도자들(대제사장, 바리새인, 서기관, 장로 등)을 가리키는 것이고, 넓게는 하나님의 선택받은 선민이라고 자처하는 유대인을 뜻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둘째 아들’은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모든 사람(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사람)을 비유합니다. ‘맏아들’은 하나님을 위해 일하겠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한 세례 요한과 예수를 거절한 유대지도자들을 상징하고, ‘둘째 아들’은 율법을 완전히 실행할 수 없음으로 인해 스스로가 죄인임을 알고 있으나, 예수를 믿음으로써 새사람이 되려고 하는 사람들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2. 포도원 주인되는 아버지가 ‘맏아들’에게 ‘얘야,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여라.’ 고 말하자, ‘맏아들’은 아버지의 부르심을 기다렸다는 듯이 즉시 ‘그럼요, 가고 말고요.’’ 하고 대답했습니다. 언뜻 아버지에 대한 존경과 순종을 보여주는 듯 했습니다. 그러나 대답을 그렇게 하고 일하러 가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사실상 ‘맏아들’은 복종할 생각도 없었고, 이에 대해 뉘우칠 마음의 변화도 전혀 없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태도입니다. 이 모습은 바로 성전 안에서는 하나님의 뜻에 따르겠다고 맹세하면서도, 성전 밖에서는 그 맹세를 이행치 않는 서기관, 바리새인 등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위선적인 생활상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말만하고 행하지 않았던, 영락없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지적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행세는 이렇습니다.

(마23:3-7)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저희는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하며,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저희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하나니, 곧 그 차는 경문을 넓게 하며 옷술을 크게 하고,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성경은 잘 아는데 자신은 전혀 성경대로 살지 않고, 백성들이 성경을 지키기 힘들만큼 세분화하여 무거운 짐이 되게 하면서 정작 자신들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으며, 자신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 헌신과 봉사를 약속하고 그렇게 살지 않는 사람들이, 바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었습니다. 

여기 <맏아들>은 오랜 신앙 경륜을 지닌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잘 알고, 잘 섬긴다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두 아들>은 하나님 교회의 일군들, 오늘 교회의 성도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두 아들 중 <맏아들>은 언행이 일치하지 않으며 책임감이 없는, 그러면서도 상석, 즉 높은 자리를 좋아하고 칭찬받기를 좋아하는 교인들을 나타냅니다. 이런 교인들의 결과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 7:21-27)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유대인 외경에 있는 얘기입니다. 하루는 하나님께서 일군을 찾기 위해 천사 가브리엘을 세상에 보냈습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세상을 두루 살피고 난후 하나님께 보고 하길, “하나님의 일군될 사람을 두루 살펴보았더니, 두 종류의 사람으로 나눠지는데, 첫째 부류는 사람은, 아주 유능하고 지혜도 있으나 진실성이 좀 결여되어 있는 사람이고, 둘째 부류에 속하는 사람은, 좀 미련하고 우둔하지만 진실하고 성실한 면이 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천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미련하고 우둔한 자를 데려오라. 내가 그에게 지혜와 재능을 주리라.”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결국 뛰어난 재능과 능력, 지혜와 지식이 아니고 진실한 믿음인 것입니다. 예수께서 말만하고 행함이 없는 유대 종교지도자들을 두고, 그들의 위선(僞善)을 일곱 가지로 지적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하나님의 율법에 관해서라면 유능한 교사들이다. 그러나 그들을 따르는 것을 조심하라. 그들은 말은 잘하지만, 그 말대로 살지는 않는다. 그들은 그것을 마음에 새겨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다. 모두 겉만 번지르르한 가식(假飾)이다.’ 이러한 위선적이고 가식적인 사람들에 화를 선포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심판을 선고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일곱 가지 위선과 가식 중 첫째와 둘째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이제 너희라면 지긋지긋하다! 너희 서기관, 바리새인, 사기꾼들아! 너희는 도무지 구제불능이구나! 너희 삶은 하나님 나라의 길을 막는 장애물이다. 너희도 들어가지 않으면서, 다른 누구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구나. 사기꾼들인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으려고 세상을 반 바퀴나 돌다가 일단 얻으면, 그를 너희 복제품으로 만들어서 갑절로 저주받게 하는구나.”(마23:13,15) 

한 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 그들 자신의 위선과 가식으로 인해, 예수 믿고 구원받고자 하는 사람마저도 실족하게 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리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셋째와 넷째 위선과 가식을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도무지 구제 불능인 너희들은 얼마나 교만하고 미련하냐! 너희는 ‘새끼 손가락 걸고 약속하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성경책에 손을 및고 맹세하면 중요하다.’고 말한다. 

이 무슨 무식한 소리냐! 성경책 가죽이 네 손의 살가죽보다 더 중요하단 말이냐? 또 ‘악수하면서 약속하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하나님을 증인 삼아 손을 들면 중요하다.’는 말 같지도 않은 말은 어떠냐? 이런 하찮은 것이나 따지고 있으니 얼마나 우스우냐! 악수를 하든 손을 들든, 무엇이 다르단 말이냐? 약속은 약속이다. 예배당 안에서 하든 밖에서 하든, 무엇이 다르단 말이냐? 약속은 약속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그 자리에 계셔서, 너희를 지켜보시며 너희에게 책임을 물으신다. 

너희 바리새인들아, 사기꾼들아! 너희는 도무지 구제 불능이구나! 너희는 꼼꼼히 장부를 적어 가며 동전 하나까지 십일조를 내지만, 하나님 율법의 알맹이인 공평과 긍휼과 헌신과 같은 절대적인 기초는 이래도 그만 저래도 그만, 안중에도 없다. 정성스런 장부 정리도 좋다만, 기초는 반드시 필요하다. 처음부터 끝까지 다 틀려먹은 인생 이야기를 쓰면서 시시콜콜 맞춤법과 구두점을 따지고 있으니, 너희 꼴이 얼마나 우스운지 알기나 하느냐?”(마23:16-24) 

이어 그들의 다섯째와 여섯째 위선과 가식을 이렇게 말씀하시고, 그들에게 화를 선포하셨습니다. “너희 바리새인들, 사기꾼들아! 너희는 도무지 구제 불능이구나! 너희는 햇빛에 반짝이도록 컵과 그릇의 겉에 광을 내지만, 그 속에는 너희의 탐욕과 탐심이 득실거린다. 미련한 바리새인들아! 속을 깨끗이 닦아라. 그래야 반짝이는 겉도 의미 있을 것이다. 너희 바리새인들아, 사기꾼들아! 너희는 도무지 구제 불능이구나! 너희는 잘 가꾼 묘지처럼 잔디도 가지런하고 꽃도 화사하다만, 2미터 아래 땅속에는 온통 썩어 가는 뼈와 벌레가 파먹은 살뿐이다. 사람들은 너희를 보며 거룩한 사람인 줄 알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너희는 완전히 사기꾼이다.”(마23:25-28) 

요즈음 말로 ‘외모지상주의’, 외식(外飾)주의자들에 대한 경고와 심판을 선고하신 말씀입니다. 마지막 일곱째 위선과 가식은 이렇습니다. “너희  바리새인들, 사기꾼들아! 너희는 도무지 구제 불능이구니! 너희는 예언자들을 위해 화강암무덤을 쌓고, 성인들을 위해 대리석 기념비를 세운다. 그러고는 만일 너희가 너희 조상들의 시대에 살았더라면, 손에 피를 묻히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말이 지나치다! 너희도 그 살인자들과 근본이 똑같다. 그래서 죽은 사람들의 수가 날마다 늘어나는 것이다. 뱀들아! 비열한 뱀들아! 너희가 여기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으냐? 벌을 받지 않아도 될 성 싶으냐? 바로 너희 같은 사람들 때문에 내가 예언자와 지혜로운 길잡이와 학자들을 대대로 보냈건만, 너희는 대대로 그들을 업신여기고 폭력배들을 보내 그들을 구박하며 쫓아낸다. 너희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여기서 빠져나갈 수 없다. 선한 사람 아벨의 피에서부터 기도 중에 너희에게 죽임을 당한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이 땅에 흘린 의로운 피 한 방울 한 방울이 다 너희 책임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 모두가 너희에게, 너희 세대에게 돌아갈 것이다.” 한 마디 말씀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보낸 선지자들을, 박해하고 죽인 자들에 대한 경고와 심판입니다. 이러한 말씀을 통해 보면,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죄악은 분명 살인이나 간음, 도둑질과 같은 것이지만, 그에 못지않게 증오하시는 죄악이, 곧 위선과 가식적인 행위와 그로 인해 형제들을 실족하게 만들거나, 잘못된 길로 인도하는 행위라는 것입니다. 교회 지도자들이 교인들을 사랑한다며,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면서도, 자신들은 전혀 그 말씀대로 행하지 않는다면, 위선과 가식으로 가득한 유대 종교지도자들과 다를 바 없습니다. ‘맏아들’처럼 ‘그럼요, 가고 말고요.’ 

이렇게 대답하고서는, 실제로는 가지 않은 사람들이, 바로 위선과 가식인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본래부터 복종할 생각도 없었고, 이에 대해 뉘우칠 마음의 변화도 전혀 없었던 ‘맏아들’로, 오직 ‘맏아들’이라는 사실만으로 ‘맏아들’의 특권을 내세우지만, 속히 회개하지 않으면 화를 당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예수 믿는 교인들이나 교계 지도자들 가운데, 세속 정치 뺨치게 온갖 부정과 권모술수를 일삼으며, 위선과 가식으로 가득하여, 예수 믿고자 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실족하게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들은 예수께서 그들에게 ‘화’를 선고하신 것처럼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다윗 왕은 충신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하는 간통죄를 짓고, 그 간통 사실을 감추기 위해 충신 우리아를 전쟁터로 보내 죽임을 당하도록 하여 간접 살인죄까지 범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단 선지자를 보내 다윗 왕의 죄악을 지적하자, 다윗은 즉시 깨닫고 하나님 앞에 통렬하게 회개하며 기도합니다.(삼하12:1-13) 시편51편입니다.

하나님이시여, 주의 한결같은 사랑으로 나를 불쌍히 여기시며 주의 크신 자비로 내 죄의 얼룩을 지워 주소서. 나의 모든 죄악을 씻어 주시며 나를 죄에서 깨끗하게 하소서. 나는 내 잘못을 인정하며 항상 내 죄를 의식하고 있습니다. 내가 오직 주에게만 범죄하여 이런 끔찍한 일을 하였습니다. 주께서 이 모든 것을 다 보셨으니 주의 말씀은 옳고 주의 심판은 정당합니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죄인이었으며 우리 어머니가 나를 밴 순간부터 죄성을 지니고 있었습니다.....우슬초로 나를 정결하게 하소서. 내가 깨끗할 것입니다. 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보다 희게 될 것입니다....내 죄에서 주의 얼굴을 돌리시고 나의 모든 죄를 씻어 주소서. 하나님이시여, 내 속에 깨끗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확고한 정신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고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나에게 주의 구원의 기쁨을 다시 주셔서 기꺼이 주께 순종하게 하소서....하나님이시여,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시여, 사람을 죽인 죄에서 나를 구하소서....하나님이 원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입니다. 주께서는 겸손하게 뉘우치며 회개하는 마음을 업신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이같은 다윗의 회개를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용서하셨습니다.
(삼하12:13)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하매 나단이 다윗에게 말하되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 

마음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 항상 진실되고 정직하여,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 “(마 18:6-7)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실족케 하는 사람은 차라리 목에 큰 맷돌짝을 달아 깊은 바다에 빠져 죽는 것이 더 낫다. 실족케 하는 일 때문에 이 세상에 불행이 닥칠 것이다. 세상에는 실족케 하는 일이 항상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실족케 하는 그 사람에게는 불행이 닥칠 것이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실족케 한다.’는 것은 ‘남을 넘어지게 한다, 다른 사람을 죄 짓게 한다.’ 는 뜻입니다. 예수 믿으면서 자신의 잘못된 행위로, 그 행위를 보고 다른 사람이 예수를 믿지 않게 만드는 것이, 바로 남을 실족케 하는 것입니다. 자신으로 인해 가족이나 형제자매 가운데 실족하여 예수 믿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면, 다윗처럼 통렬하게 통회 자복하여 회개하시고 하나님의 용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약1:22)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약2: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3. 다음으로, 포도원 주인되는 아버지가 둘째 아들에게 ‘얘야,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여라.’ 말씀하시자, 그 아들은 ‘싫습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처음에 둘째 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후회하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돌아왔다는 말씀입니다. 나중에는 회개했다 할지라도 처음에 행한 불순종이 정당화 될 수는 없습니다. 이 말은 죄는 어디 까지나 죄이지, 죄를 회개했다고 해서 그 불순종했던 죄 자체를 정당화시킬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 둘째 아들의 행위를 놓고 아비의 뜻대로 행했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뒤 늦게나마 회개했다는 점에서 맏아들보다는 좀 낫다는 평가받을 정도인 것입니다. 창기와 세리들이 하나님 앞에 돌아온 것은, 그들이 그 전에는 그 죄를 죄로 알지 못했기 때문에, 돌아왔을 때 하나님께서 그것을 기뻐한 것이지, 그들이 그것을 죄로 안 다음에도 그 노릇을 계속하고, 그 뒤에 주님께 돌아왔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둘째 아들이 뒤늦게나마 회개하고 돌아왔다는 것은, 마음과 생각과 의지가 변화되었다는 것입니다. ‘둘째 아들’은 그 당시 세리와 창녀와 같은 천민(賤民)들을 말합니다. 율법이 무엇인지 모를 뿐 아니라, 그 율법과 상관없이 살아간 사람들이 갈릴리에 많이 모여 살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경제적으로 가난했고, 혈통적으로도 순수하지 못한 혼혈족이었으며, 따라서 그들의 신앙도 순수한 유대교 신앙이라기보다는 잡다한 신앙들이 혼합된 것이었으며, 정부의 보호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각지대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따라서 이들은 세리처럼 로마에 충성하면서 세금을 갈취하여 살아가거나, 창녀처럼 자기의 몸을 팔아 목숨을 연명해야 했습니다. 이들은 그 당시 사회에서 따돌림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누구도 그들을 가까이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세리와 창녀, 이들은 그 당시 사회의 가장 밑바닥 인생을 대표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그들의 삶이 도덕과 윤리에서 벗어난 것은 분명합니다. 그들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백성의 대열에 끼일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따라서 저들은 말씀을 들으려고 회당에 갈 수도 없었고, 예배를 드리거나 절기를 지키려고, 예루살렘 성전에 갈 수도 없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마치 병이 들었지만 어떤 병원도 그를 받아 주지 않아서, 그대로 그 병을 안고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과 같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요단강에 나타난 세례 요한의 회개하라는 외침에, 마음에 찔림을 받고 회개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다시 말해서 저들이 쉽게 접근할 수 없는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라, 누구나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요단강 들판이었기에, 세리와 창녀들도 세례 요한에게 나가서, 그 외침을 듣고 회개했던 것입니다. 예수님도 오셔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고 그 복음을 전하실 때, 주로 들판에서 혹은 바닷가에서 많은 사람들을 상대로 하셨습니다. 특히 병든 자들, 가난한 자들, 소외된 자들을 가까이 오게 하셨고, 저들의 병을 고쳐주셨으며, 가난한 자가 복이 있는 까닭은 천국이 저희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가난한 백성들이 많이 몰려 사는, 갈릴리를 그의 선교 활동 무대로 삼으셨고, 누구나 쉽게 접근하도록 들판에서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이제까지 하나님 나라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고 생각되었던 죄인들이, 너무나 아름답고 귀한 하늘의 소리들을 듣게 되자, 저들은 주저하지 아니하고 예수님을 따랐으며, 그 말씀을 따라 자신의 삶을 변화시켰던 것입니다. 

그런 사람 가운데 예수님의 제자가 된 세리 마태가 있었고, 뽕나무에 올라가서 예수님을 보려고 했다가, 그 예수님을 자기 집에 모신 세리장 삭개오가 있습니다. 세리 마태는 자기의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었고, 삭개오는 자기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고, 또 그가 누구에게서 강탈을 했으면 4 배로 갚아 주겠다고 다짐하였던 것입니다. 이들은 병을 치료받기를 원하면서도 그들을 받아주는 의사가 없어서 외로웠는데, 예수님이 바로 그들을 기쁨으로 맞아주는 의사가 되시어, 저들의 병을 고쳐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9:12-13)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자신을 의인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던 바리새인이나 율법학자들은 회개하기를 거부하고, 예수님이 전한 하나님 나라를 거절했지만, 자신을 죄인이라고 여겼던 사람들은, 진실로 회개하고 기쁨으로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를 믿었으며, 그 말씀을 따라 그들의 삶을 바꾸었던 것입니다. 이들은 자기들이 죄인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잘 보이려고 위장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회개하라는 세례 요한의 외침이나, 예수님의 천국 복음을 들었을 때, 그들은 주저하지 아니하고 곧바로 회개하고, 세례를 받고 예수님을 영접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어설프게 예수를 믿게 되면 위선자가 되기 쉽습니다. 실제로 회개하지 않았으면서 회개한 척 하고, 구원에 대한 확신이 없으면서도 구원에 대해서는 졸업한 것처럼 행동하기 쉽습니다. 처음부터 자신의 죄에 대한 철저한 깨달음이 있어야 하고, 그래서 철저하게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가장 먼저 외치신 말씀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였습니다. 회개함 없이, 자기를 철저하게 깨트림 없이는 천국은 우리에게서 멀리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속에 깨지지 않는 자존심, 세상을 향한 온갖 욕망, 자기만을 위하는 이기심 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죄악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예수를 믿고, 그 자존심, 그 욕망, 그 이기심을 그대로 키워가고 있습니다. 중한 병이 걸리거나, 탕자처럼 자기 욕망을 따라 살려다, 철저하게 깨어지거나, 삭개오처럼 그 사회에서 따돌림을 당하게 될 때에, 우리는 비로소 자신의 나약함과 이기심과 욕망을 깨닫게 되면서 회개하게 되는 것입니다. 

갈릴리의 세리나 죄인이나 창녀들이 기쁨으로 예수를 영접했던 것은 그들의 가난이, 그들의 병이, 그들의 사회적 따돌림당함이 그들로 하여금 쉽게 예수님께로 나아가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아직도 우리는 믿노라고 하면서도, 우리의 삶을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그럴듯한 교회에 속하여 제대로 된 그리스도인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무기력하기 짝이 없는 신앙인에 불과합니다. 

우리 자신의 죄인됨을 철저하게 깨닫고 회개하는 생활로, 변화된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어설픈 신앙 상태, 뜨겁지 차지도 않은 미지근한 신앙의 삶에서 벗어나, 뜨거운 눈물이 있는 신앙의 삶으로 올라서야 합니다. 맏아들처럼 말로만 말씀에 순종하는 자리에서 벗어나, 행동으로 순종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둘째 아들처럼 말씀을 처음부터 벗어나서 잘못된 길로 나가던 삶에서 돌이켜, 진정으로 뉘우치고 그 말씀을 그대로 받아 순종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과거에 회개하지 못했던 죄를 회개하는 기회로 삼아, 완전하게 거듭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구원의 확신 없이 교회 문턱만 넘나들던 신앙에서 벗어나서, 죄 사함의 은혜를 감사하는 삶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여러분 자신을 돌아보고, 내가 맏아들이었다고 생각된다면, 속히 그 위선과 가식에서 벗어나 진실로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기꺼이 여러분의 죄를 깨끗하게 하여, 새로운 은혜와 생명이 넘치는 삶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둘째 아들처럼 ‘아니오’ 하면서 나갔던 탕자라면, 주저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 찢기고 상처받은 삶을 들어내어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집으로 돌아온 탕자를 위해 베푼 하나님 나라의 잔치’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4. 마지막으로,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는 말씀은,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일과 그에 대한 책임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 사람은 누구나, 이 세상에 어떤 모습으로 태어났던 그 모습 그대로, 주어진 사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 각자에게 사명을 주시고, 그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은사와 재능, 능력과 지혜를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여러분은 자신이 분명한 하나님의 목적에서 세상에 보냄을 받았고, 그에 따른 크고 작은, 많고 적은 은사와 재능을 각각 부여받았습니다. 모두가 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기 때문에 그 주어진 직분과 사명, 은사와 재능을 소중히 여겨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영국 속담에 “바닷가에 놓여진 조약돌도 무의미하게 놓여진 것은 하나도 없다.” 라는 것이 있습니다. 바닷가에 조약돌 하나도, 그 놓인 위치에 따라 하나님의 뜻이 있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은 인생들에게, 각자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뜻과 사명이 없겠느냐는 것입니다. 

인간은 모두가 다 하나님의 사명자들입니다. 사람에 따라 의롭게 쓰임받든, 불의의 병기로 쓰임받든 인류 모두에게는 하나님의 사명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은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오늘”, 지금 하나님의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천하든 귀하든, 큰 일이든 작은 일이든,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일이라고 생각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일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누구를 위해 일하며 살고 있습니까? 단순히 목구멍에 풀칠하기 위해서 일하고 있습니까? 아버지되시는 하나님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일을 하되 누구를 위한 일이냐, 자신을 위한 것이냐, 아니면 하나님을 위한 것이냐는 것입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모두 하나님을 위하여 일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내일로 미루는 것이 아니라, 오늘 해야 합니다. 회개할 것은 당장 회개하고 내일로 미루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과 기회는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을 마지막 결단의 시간으로 알고,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사시기 바랍니다. 뒤 늦게나마 회개하고 포도원에 가서 일한 둘째 아들은, 먼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갔으나, 맏아들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습니다. 맏아들이나 둘째 아들이나 모두가 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움직인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은,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는 명령에 즉시 아멘하고, 즉시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 모두에게 명령하십니다.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모든 인류에게 전파되고 있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하고 “아니라”하신 적이 없으셨습니다. 

예수는 하나님 아버지 앞에 항상 “예”하시고 그대로 행하셨습니다.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은 언제든지 진실무망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 말씀에 항상 “예”(아멘)하고 그대로 순종하는 생활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고린도 후서 1: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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