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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멍에를 지는 마음 (렘 2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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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에를 지는 마음 (렘 22:1-11)

추석 명절을 잘 보내셨습니까? <명절 피로>가 있다고 하는데, 내일부터 다시 열심히 삶에 임하여 열매 많이 맺으시길 바랍니다. 

추석에 가장 아름다운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가족을 만나는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부모를 찾아가는 자녀들, 자녀들 집을 방문하는 부모님들, 모두 보기 좋은 모습입니다. 그러나 추석이 되어도 만날 수 없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북한 땅에 고향을 둔 분들은 명절에 더욱 가족이 그리울 것입니다. 얼마나 고향 생각이 날까요? 얼마나 짙은 고향 향수가 느껴질까요? 

여러분, 정지용 시인의 <향수>라는 시를 아시지요? 이 시는 노래가 되어 많은 이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시를 읽노라면 삶의 고단함이 그대로 느껴져 슬픕니다. 그 중 몇 부분을 찾아보면 이렇습니다.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뷔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벼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이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이라고 했는데, 예전엔 난방시설이 변변치 않아 질그릇 화로에 아궁이 장작불 남은 불을 담아 방안을 데우곤 했습니다. 그런데 질화로에 재마저 식어 냉기가 감도는 방에는 늙은 아버지가 주무시고 계십니다. 베개도 제대로 없어서 짚 베개를 베고 주무십니다. 가난이 물씬 느껴집니다. 

그 중에서도 아내에 대한 묘사는 더욱 마음에 걸립니다.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이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가난하던 시절, 가꾸지 못한 채 거칠게 살아 손발이 갈라터진 농촌 아낙네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신발도 제대로 신지 못하고 사철 맨발로 이삭을 줍는 아낙네입니다. 그렇다보니 여인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습니다. 삶의 고단함이 절절하게 느껴집니다. 

이 자리에 계신 연세 드신 분들 중에 이런 고생을 하지 않고 사신 분들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이런 어렵고 힘든 일이 다시는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모두가 풍요롭고 평안하게 살았으면 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저는 목사로서 교우님 모두가 영육간에 부족함이 없이, 행복한 삶을 누리시길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아무리 간절히 원하는 바가 있어도 세상살이가 마음먹은 대로, 우리가 소원하는 대로 되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 것, 이게 우리를 힘들게 합니다. 

본문은 <하나냐>라는 선지자의 예언으로 시작됩니다. 하냐나가 말씀을 선포한 것은 시드기야 제4년이었습니다.  하나냐는 사람들이 좋아할 내용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기왕에 말을 하려면 듣기 좋게 말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2절을 다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일러 말씀하시기를 내가 바벨론의 왕의 멍에를 꺾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멍에>란 바벨론 왕의 지배를 말합니다. 이때 유다는 바벨론으로부터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주전 605년, <여호야김> 시대에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은 유다를 처음 침공했고, 백성들을 포로로 끌고 갔습니다. 그 때 끌려간 사람들 중에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7년 후인 주전 598년에 바벨론은 다시 유다를 침공하여 왕이 된 지 석 달 밖에 되지 않은 <여호야긴>왕과 많은 포로를 잡아갔습니다. 이 때 에스겔 선지자도 포로가 되었습니다. 여호야긴을 끌어간 바벨론은 그를 대신하여 <시드기야>를 왕으로 세웠습니다. 하나냐가 예언을 한 것은 시드기야가 왕이 된 지 4년이 되었을 때였습니다. 

그러니 이때는 시드기야나 백성들은 바벨론이 다시 침공할까 두려워 좌불안석인 때였습니다. 한 마디의 위로라도 아쉬울 때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바벨론의 왕의 멍에를 꺾었다>는 말씀이 전해졌으니, 얼마나 위로가 되었겠습니까? 하나냐의 예언을 조금 더 읽어봅시다. 

3-4절을 다같이 읽어봅시다. <내가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이 이 곳에서 빼앗아 바벨론으로 옮겨 간 여호와의 성전 모든 기구를 이 년 안에 다시 이 곳으로 되돌려 오리라  내가 또 유다의 왕 여호야김의 아들 여고니야와 바벨론으로 간 유다 모든 포로를 다시 이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니 이는 내가 바벨론의 왕의 멍에를 꺾을 것임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시니라> 

하나냐는 하나님께서 바벨론에게 빼앗긴 성전의 기구들을 과 끌려간 포로들을 모두 돌아오게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이 말씀을 전해들은 백성들은 얼마나 감격했겠습니까? 하나냐의 예언을 들은 사람들은 하나냐를 향해 박수를 보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하나냐에 대해 열광하면 할수록 더 큰 미움을 받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다름 아닌 <예레미야>였습니다. 예레미야가 사람들로부터 더 큰 미움을 받게 되는 이유는 그가 하나냐의 예언과는 정반대의 예언을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냐는 바벨론의 멍에가 꺾일 것이라고 했지만, 예레미야는 바벨론의 멍에를 메어야 한다고 예언했습니다. 그것도 말로만 한 것이 아닙니다. 예레미야는 27장 2절에서 보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시키는 대로 줄과 멍에를 만들어 목에 걸고 예언했습니다. 

예레미야의 예언을 보세요. 27장 12절을 보면 이렇습니다. <내가 이 모든 말씀대로 유다의 왕 시드기야에게 전하여 이르되 왕과 백성은 바벨론 왕의 멍에를 목에 메고 그와 그의 백성을 섬기소서 그리하면 사시리라> 예레미야는 바벨론의 멍에를 꺾으려 하지 말고, 그 멍에를 메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야 살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예레미야는 거짓 선지자들이 나타나 바벨론의 멍에를 꺾을 것이라는 거짓 예언을 할 것이라는 것까지 예고했습니다. 

27장 9-10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너희 선지자나 복술가나 꿈꾸는 자나 술사나 요술자가 이르기를 너희가 바벨론의 왕을 섬기게 되지 아니하리라 하여도 너희는 듣지 말라  그들은 너희에게 거짓을 예언하여 너희가 너희 땅에서 멀리 떠나게 하며 또 내가 너희를 몰아내게 하며 너희를 멸망하게 하느니라> 

이렇게 보면 바벨론의 멍에가 꺾일 것이라고 예언하는 하나냐는 거짓 선지자였고, 예레미야는 참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언을 듣는 백성들은 듣기 좋은 말을 하는 선지자를 더 좋아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백성들은 바벨론의 멍에가 꺾이고 포로가 되돌아올 것이라고 말하는 하나냐를 좋아했습니다. 반면에 바벨론의 멍에를 메라고 하는 예레미야는 미워했습니다. 백성들 입장에서는 당연한 반응이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유다가 바벨론에게 지배를 받아야 한다고 예언하는 예레미야의 마음은 편했겠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았습니다. 예레미야도 유다가 바벨론의 손에서 놓여 잘 살길 간절히 원했습니다. 예레미야도 하나냐의 예언대로 되길 간절히 원했습니다. 하나냐의 예언이 끝난 후 예레미야의 말을 보십시오. 

6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선지자 예레미야가 말하니라 아멘, 여호와는 이같이 하옵소서 여호와께서 네가 예언한 말대로 이루사 여호와의 성전 기구와 모든 포로를 바벨론에서 이 곳으로 되돌려 오시기를 원하노라>  <나도 네 말대로 되길 원한다, 여호와께서 성전 기구와 포로들이 돌아오길 바란다.>고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레미야도 하나냐처럼 예언하면 미움을 받지 않을 수 있지  않겠는가?>라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로서는 그럴 수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선지자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 전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전하는 데 있어서 선지자는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선지자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전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아무리 바벨론의 멍에가 꺾이고, 유다가 행복해지길 바라는 마음이 간절해도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한, 그렇게 거짓으로 예언할 수는 없는 일이었기에, 그는 미움과 핍박을 받으면서도 바벨론의 멍에를 메라고 예언할 수밖엔 없었습니다. 

여러분, 그 후 어떻게 되었습니까? 아무리 사람들이 하나냐의 예언대로 되길 소원해도 소용없었습니다. 본문의 사건이 있는 후 7년이 지난 주전 586년에 유다는 바벨론에게 완저히 멸망했습니다. 시드기야왕은 두 눈이 뽑힌 채로 끌려갔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당하고 포로가 되었습니다. 예레미야의 예언대로 된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두 가지 상황에 직면하게 됩니다. 하나는 <마음의 상황>입니다. 마음의 상황은 다른 말로 <소원>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사람들의 소원은 바벨론의 멍에가 꺾여 유다가 자유롭고 부강하게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앞에서 본 것처럼 그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유다는 백성들의 소원과는 달리 바벨론에게 멸망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직면하게 되는 또 하나의 상황이 있는데, 그것은 <눈앞의 현실>이라는 상황입니다. 유다 백성들은 그들이 원하는 소원과 달리 나라의 멸망과 포로 생활이라는 현실과 맞서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눈앞의 현실>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이 두 가지 현실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습니다. 어떤 때는 마음의 현실에 취해 삽니다. 꿈을 꿉니다. 사업을 하는 분들은 <곧 잘 될 거야. 경기도 회복될 거야. 조만간 주문 물량도 늘고, 수익도 늘어날 거야!>라고 생각합니다. 

자식을 키우는 부모는 <저 녀석이 지금은 저래도 곧 정신을 차릴 거야. 틀림없어. 저 녀석이 머리 하나는 좋으니 늦었지만, 이제라도 열심히 하면 반드시 좋은 결과가 있을 거야!>라고 생각합니다. 또 병약한 분들은 <수술도 잘 끝났으니, 조만간 회복될 거야! 보약 좀 먹고 운동을 계속하면 끄떡없어!  다시는 병원 신세지지 말고 살아야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런 소원대로 모든 일이 다 잘 되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회사가 잘 되길 기대했지만, 오히려 회사를 폐업해야 하는 상황이 옵니다. 아들 녀석이 정신을 차리고 공부하길 원했지만, 오히려 그 녀석이 아예 학교마저 자퇴하고 공부와는 담을 쌓는 경우도 있습니다. 건강을 소원했건만, 수술 후에도 여전히 병원 문턱을 계속 드나들어야 사는 분들이 많습니다. 이게 바로 눈앞의 현실인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지금 무엇을 원하십니까? 또 지금 그 소원과는 다른 어떤 어려운 현실에 살고 계십니까? 또 소원과는 너무도 다른 현실에 사는 마음은 어떠하십니까? 우리는 그 현실을 어떻게 살아내야 하겠습니까? 

이러한 현실 앞에서 사람들의 선택은 여러 가지일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삶을 포기합니다. 전쟁 중에 가족 잃고, 모아 놓은 재산 잃고, 고향 잃고, 포로가 되었을 때, 그 어려움을 어떻게 견디겠습니까? 많은 이들이 스스로 생명을 끊습니다. 어떤 이들은 살기는 살지만 현실을 저주하고 원망하면서 죽지 못해 삽니다. 의욕도 없고, 술로 밤을 지새우는 이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신앙인다운 태도는 아닙니다. 오히려 예레미야는 그 상황을 견디라고 말씀합니다. 바벨론의 멍에를 기꺼이 메라고 하십니다. 

27장 11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그 목으로 바벨론의 왕의 멍에를 메고 그를 섬기는 나라는 내가 그들을 그 땅에 머물러 밭을 갈며 거기서 살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바벨론의 멍에를 메라, 나라의 멸망과 포로의 상황을 견디라! 삶을 포기하지도 말고, 죽지 못해 산다고 말하지도 말고, 힘 있게 살라>, 이게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저는 우리가 더 강한 성도가 되길 원합니다. 강함은 두 가지입니다. 아무런 어려움도 없는 유복한 상황에 살면서 <난 강하다>라고 말하는 것은 거짓된 것입니다. 진정한 강군은 전쟁을 치르는 과정에서만 알 수 있습니다. 평화 시기에 아무리 <우리 군대는 강하다>고 외쳐 보아도 막상 전쟁을 해 보기 전에는 알 수 없습니다. 진정으로 강함은 시련 중에서만 드러납니다. 말할 수 없는 시련을 온몸으로 견디어내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강한 것입니다. 

이 말씀을 준비하는 과정에 가장 많이 생각난 분은 제 아버님이셨습니다. 아버님께서는 전쟁을 온몸으로 겪으셨습니다. 일곱 자녀들을 북한에 두셨습니다. 모두 잃고 홀로 남아 눈물로 사셨습니다. 여러 번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죽고 싶은 생각이 수도 없이 떠올랐다고 했습니다. 실로 처절한 현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못하고 살아남은 단 하나의 이유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 때문이었다고 했습니다. 그 믿음 하나로 힘들고 모진 세월을 살아오셨습니다. 

제가 아버님을 귀하게 여기는 이유는 믿음의 싸움을 끝까지 싸워 오셨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눈물로 하나님 앞에 엎드리면서 살아오셨습니다. 비록 세상을 놀라게 할 대단한 업적을 남기시지는 못했지만, 주어진 현실을 믿음으로 감당해 오셨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귀한 분이라고 여겨왔습니다. 

어찌 제 아버님뿐이겠습니까?  부모님도 없이, 앞도 보지 못하는 상황에서, 누나까지 죽은 상황에서 동생 둘과 함께 견디며 살아온 강영우 박사 같은 분이 존경받아 마땅한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홀로 박스를 주워서라도 그삶을 지켜 가시는 어르신들의 모습이 귀합니다. 남편을 먼저 보내고 가난을 견디면서 자녀를 키워나가는 어머니들이 다 존경받아 마땅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 땅의 모든 부모님들이 다 귀합니다. 민주화도 경제발전도 이루어지지 않은 우리나라의 지난 시절을 참고 살아 오늘의 대한민국의 초석이 되신 모든 분들은 다 존경받아야 합니다. 그 어려운 현실을 이기면서 독일의 광부와 간호사가 되어 지하 갱도에서 열기와 싸운 분들, 혹은 독일 환자들의 피고름을 닦아 낸 분들, 중동의 건설 근로자로 사막의 모래바람을 온 몸으로 받아낸 분들은 모두 위대합니다. 

우리는 무지개빛 환상 속에서 살길 원하지만, 눈앞의 현실이야말로 우리의 삶이 이루어지는 현장입니다. 참 신앙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야 할 현장입니다. 참 신앙의 힘은 거기서 발휘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멍에를 지지 않는 사람들의 행운>보다 <멍에를 지면서 살아온 이들의 눈물>을 백배나 소중히 여기십니다. 예수님께서도 기꺼이 멍에를 메는 삶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지신 멍에는 다름 아닌 십자가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참으셨기에 우리가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고 하셨습니다. 멍에를 벗어던짐으로써 쉼을 얻는 게 아니라, 기꺼이 멍에를 멤으로써 쉼을 얻는 진리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하박국서 3장 17-18절에서 보는 대로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라고 한 하박국 선지자의 고백은 너무도 귀합니다. 나무도 무성하지 못하고, 열매도 없고, 양소, 소도 없어도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보는 믿음으로 이겨나가는 삶이 우리 모두에게 있길 기원합니다. 

여러분, 쉽게 포기하지 마십시오. 참고 걸어가십시오. 오늘을 견디는 사람에게 내일의 기쁨이 주어집니다. 바벨론의 멍에를 기꺼이 지고, 포로 생활을 견디던 사람들은 페르샤의 왕 고레스 때 고국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이 놀라운 복은 포로의 상황에 절망하고 삶을 포기한 이들은 결코 맛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긴 자에게만, 견딘 자에게만 주어진 복이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정지용씨의 <향수>의 끝자락에 가 보면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 거리는 곳>이란 대목이 나옵니다. 지붕도 초라하고, 불빛도 흐릿하지만, 거기 사랑과 기쁨이 있습니다. 가족들이 그 어려운 상황에도 절망하지 않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눕니다.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이것이 지상의 천국입니다. 장차 우리가 들어가게 될 천국은 여러 어려움 속에서도 지상 천국을 이루는 성도들의 몫입니다. 세상살이가 고단하다고 해서, 그 삶을 포기하는 사람, 세상살이는 지옥처럼 여기는 자에게는 장차 천국은 결코 주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믿음으로 오늘을 이기십시오. 잠시 후에 부를 찬양 3절 가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인생의 어려운 순간마다 주의 약속 생각해 보네 내 맘 속에 믿음 잃지 않고 말씀 속에 위로를 얻네 주님의 도우심 바라보며 모든 어려움 이기도다...> 부디 어떤 어려움도 참고 견디면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 나가는 우리 모두가 되길 기원합니다. (김운성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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