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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진리 체질 (고후 13: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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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 체질 (고후 13:5-10)


[여러분은 자기가 믿음 안에 있는지를 스스로 시험해 보고, 스스로 검증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모른다면, 여러분은 실격자입니다. 그러나 나는 우리가 실격자가 아니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여러분이 악을 저지르지 않게 되기를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합격자임을 드러내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실격자인 것처럼 보일지라도, 여러분만은 옳은 일을 하게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진리를 거슬러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해서만 무언가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약하더라도, 여러분이 강하면, 그것으로 우리는 기뻐합니다. 우리는 여러분이 완전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내가 떠나 있는 동안에 이렇게 편지를 하는 것은, 내가 가서, 주님께서 주신 권한을 가지고 사건들을 처리할 때에, 너무 엄하게 대할 필요가 없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 권위는 여러분을 넘어뜨리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세우라고 주신 것입니다.]

• 길들여짐의 거부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오늘은 감리교회가 청년주일로 지키는 날입니다. 몇 십 년 전만 해도 '청년' 하면 불온함을 먼저 떠올리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기성세대의 가치관과 지향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역사를 민주화의 방향으로 돌려놓기 위해 분투하는 사람들, 기성세대의 입장에서는 좀 불편한 존재이지만 그래도 역사 속에 뭔가 푸른 기운을 불어넣는 사람들로서 말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좀 사정이 바뀌었습니다. '청년' 하면 거의 자동적으로 '88만원 세대'라는 말이 떠오르고, 정규직이 되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는 사람들처럼 이미지화되었습니다. 사실 이런 이미지 자체가 청년들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솔직하게 말하자면 저는 젊은 세대들을 보면 좀 슬픈 생각이 듭니다. '길들여진 젊음'처럼 안쓰러운 게 또 있을까요? 자본주의 세상이 요구하는 스펙을 쌓기 위해 아등바등 거리고, 그런 체제가 주조해 놓은 행복을 소비하기 위해 허둥대는 이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사람들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고 말합니다. 연애, 결혼, 출산, 양육이라는 이른바 비용이 많이 드는 쳇바퀴를 돌리기 위해서는 체제에 순응하는 수밖에 없는 것일까요? 이런 질문 앞에 서면 괜히 자괴감이 느껴집니다. 그렇게 살고 싶지 않지만, 딱히 다른 삶의 가능성은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직장생활을 하는 이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이직을 생각하지만, 선뜻 그러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더럽다고, 아니꼽다고 자리를 박차고 나올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방송대학교 김기원 교수는 우리 국민들이 처해 있는 세 가지 어려움을 '고단함, 억울함, 불안함'이라는 말로 요약했습니다. '고단함'이란 생산 과정의 문제입니다. 좋은 학교에 들어가고, 좋은 직장에 들어가고, 진급에서 밀리지 않기 위해 사람들은 지금 여기서만 누릴 수 있는 행복을 자꾸 미루며 살아갑니다. 삶이 고단한 것은 당연합니다. '억울함'이란 1차 분배과정의 문제입니다. 대기업은 중소기업에 단가를 후려치고 기술을 빼앗기도 합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은 하는 일에는 차이가 없지만 임금격차는 상당합니다. 그러니 억울할 수밖에요. '불안함'이란 2차 분배과정, 즉 복지의 문제입니다. 상당히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아직 우리는 아이를 안심하고 낳을 수 없고, 노년에 대한 불안감을 떨쳐버릴 수 없습니다(김기원, <고단함, 억울함, 불안함>, 한겨레신문, 2012년3월 22일 자 컬럼) 이러한 구조적인 문제는 반드시 풀어가야 할 역사의 과제입니다.

• 우리 삶의 중심

하지만 지금 여기의 삶에 충실하기 위해서는 삶에 접근하는 다른 방식을 좀 찾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철봉에 거꾸로 매달려 세상을 바라보면 지금까지 익숙하던 세계가 돌연 낯설게 변하지 않던가요? 삶을 바라보는 시선을 바꾸면 세상도 달리 보이게 마련입니다. 신앙인은 세상 사람들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가치에 물음표를 붙이는 사람입니다. 

세상이 던진 질문에 답을 찾기 위해 고투하는 사람이기보다는 그 질문 자체를 새롭게 구성해 볼 줄 아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월수입 500만원은 되어야 인간다운 삶이 가능하다고 말하는 세상을 향해 '정말 그래?' 하고 물을 필요가 있습니다. 신앙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자기 삶을 다른 기준, 즉 하나님의 마음과 조율하며 산다는 뜻입니다. 물론 그런 삶은 평탄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당신이 걷는 길을 '좁은 길'이라 하셨던 것입니다.

인간의 인간다움은 본능대로 살지 않는 데 있습니다. 본능이 명하는 것을 거스르며, 자기 한계를 넘어설 때 사람은 가장 사람답습니다. 예수님은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바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벗들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 가장 큰 사랑이라 하셨습니다. 인간은 자기를 끊임없이 뛰어넘을 때 비로소 인간다워집니다. 

지하철 선로에 사람이 떨어졌을 때 위험을 무릅쓰고 뛰어내려 그를 구출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런 소식을 들을 때마다 감동합니다. 감동이란 자기 속에 일어난 긍정적 파문입니다. 자기를 뛰어넘는 이들의 존재는 우리에게 사람다움이 무엇인지를 상기시켜줍니다. 믿음의 사람으로 부름 받았다는 것은 어쩌면 다른 이들의 가슴에 감동의 파문을 일으키는 사람이 되라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마감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자기가 믿음 안에 있는지를 스스로 시험해 보고, 스스로 검증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모른다면, 여러분은 실격자입니다."(5)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과연 믿음 안에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계십니까? 그것을 실감하며 사십니까? 저는 믿음이란 자기 속에 흔들리지 않는 중심이 들어서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살다보면 이런 저런 일로 마음이 흔들릴 수도 있지만 그래도 포기할 수 없는 중심, 아니 포기될 수 없는 중심이 있다면 삶은 든든할 겁니다. 예수가 과연 우리의 생각과 행위의 중심입니까?

중부 프랑스의 프랑슈 콩테 지방에는 브장송이라는 작은 마을이 있습니다. 숲과 계곡으로 둘러싸인 이 아름다운 도시에서는 매년 브장송 음악 페스티벌이 열립니다. 1950년 9월 16일, 많은 사람들이 루마니아 출신의 피아니스트 디누 리파티의 연주를 듣기 위해 몰려들었습니다. 그는 당시 33세였지만 세계적인 대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높은 음악성을 인정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리파티는 그 연주를 할 형편이 못되었습니다. 연주회를 앞두고 그가 백혈병에 걸렸다는 치명적인 진단을 받았던 것입니다. 

모두가 말렸지만 그는 특유의 의지와 고집으로 연주를 강행했습니다. 그가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었기에 연주회장 분위기는 숙연했습니다. 진통제를 맞고 무대에 오른 그는 초인적인 집중력으로 바흐의 파르티타 제1번,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 제8번, 슈베르트의 즉흥곡 2곡을 연주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그날 연주의 하일라이트인 쇼팽의 왈츠곡 14곡을 연주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혼신의 힘으로 13곡까지 연주했습니다. 

마지막 한 곡만을 남겨두었을 때 그는 힘든 표정을 지으며 연주를 멈추고는 한참을 가만히 앉아 있었습니다. 관객들은 숨을 죽인 채 리파티를 응시했습니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 마침내 리파티는 손을 건반 위에 천천히 올려놓았습니다. 그런데 그의 손에서 울려 나온 것은 쇼팽의 왈츠가 아니라 바흐의 칸타타 <주 예수는 나의 기쁨>이었습니다. 아름답고 영롱한 연주가 연주장을 가득 채웠습니다. 사람들은 이 영원한 천재와의 영원한 이별을 직감하며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슬픔을 느꼈다고 합니다. 2개월 후 그는 세상을 떠났습니다.(박종호, <내가 사랑하는 클래식2, p. 295 이하)

그는 그렇게 자기 삶의 중심이 누구인지를 드러냈던 것입니다. 죽음 앞에서도 그가 하고 싶었던 말, 유언처럼 연주로 증언하고 싶었던 말, 그것은 <주 예수는 나의 기쁨>(Jesu meine Frede)이었습니다. 삶의 벼랑 끝에 서서도 끝내 주님을 ‘나의 기쁨’이라고 고백할 수 있다는 것,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 체질이라고?

바울 사도는 우리가 믿음 가운데 있는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있는지 스스로 점검해보라고 말합니다. 이 질문을 조금 달리 표현해 보겠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를 통해 당신의 꿈을 이루시도록 허용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우리가 바라는 것을 이루기 위해 주님을 동원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그 말씀에 육체를 부여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까? 그분의 성품을 닮기 위해 늘 자기를 살피고 또 살피며 삽니까? 과연 우리를 통해 사람들은 하나님의 현존을 경험하고 있습니까?

만약 이런 질문에 대해 우리가 긍정적으로 답할 수 없다면 우리는 실격자입니다. 바울은 의도적으로 이런 자극적인 단어를 고른 것 같습니다. 바울은 자신과 복음의 동지들은 실격자가 아니라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그 근거는 무엇입니까? 그들이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 살지 않고 다른 이들의 유익을 위해 사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악을 저지르지 않는 데서 그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는 사람이 되도록 하기 위해 그들은 박해받는 것조차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이 말끝에 덧붙인 말이 참 놀랍습니다.

"우리는 진리를 거슬러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해서만 무언가 할 수 있습니다."(8)

우리가 유의해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울과 동역자들은 진리를 거스르는 일을 하지 않겠다고 의지적으로 결단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진리를 거슬러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무능입니다. 이게 어떤 경지인가요? '진리 체질'이 된 겁니다. 한의사들 가운데도 체질론을 가지고 환자를 진단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일에 적응을 잘 하는 사람을 보면 '체질'이라고 말합니다. 

'군대 체질'도 있고, '술 체질'도 있습니다. 그런데 진리 체질이라니요? 어쩌면 예수님께서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고 하신 것도 같은 사실을 가리키는 게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오직 진리를 위해서만 무언가 할 수 있는 사람. 조금 비인간적으로 보이긴 하지만 신앙인은 그런 체질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답답한 율법주의자가 되라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의 피가 우리 속에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눈물이 우리 속에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숨이 우리 속에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1930년대의 신비주의자인 이용도 목사님의 기도시 <눈물을 주소서>가 떠오릅니다. 그는 주님께 눈물을 청합니다. 눈물이 마르자 온갖 못된 것들만 무성하게 되었다면서 "동정의 눈물이 쏟아질 때, 뜨거운 사랑의 눈물이 쏟아질 때" 모든 악한 병균이 다 죽고, 따스하고 온유하고 미쁜 새 마음이 나온다고 고백합니다. 그는 또한 주님께 피를 청합니다. 우리 속에 예수의 피가 없어 맥 없고, 힘 없고, 담력 없고, 의분 없고, 화기 없고, 생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죄와 더불어 싸울만한 피, 악마가 인간을 유린하는 것을 분히 여기는 피가 우리 속에 돌기 시작할 때 우리는 비로소 진리 체질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 선 사람으로 살기

바울 사도는 주님께서 자신에게 위임해 주신 권위를 가지고 고린도 교인들에게 새 삶을 향해 나아가라고 권고합니다. 진정한 권위란 남을 복종시키기 위해 내세우는 힘이 아니라, 사람들의 자발적인 신뢰 속에서 부여되는 존경입니다. 바울 사도는 자신의 권위가 지향해야 할 방향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습니다. 교인들을 세우는 것입니다. 세운다는 말은 삶의 지향을 새롭게 한다는 뜻일 겁니다. 선 사람의 삶은 어떠할까요?

"형제자매 여러분, 기뻐하십시오. 온전하게 되기를 힘쓰십시오. 서로 격려하십시오. 같은 마음을 품으십시오. 화평하게 지내십시오. 그리하면 사랑과 평화의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실 것입니다."(11)

우리 모두 이 말씀에 붙들려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예수의 눈물, 예수의 피가 우리 속에 있을 때,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여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정신이 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저는 마음이 옹색해질 때마다 시편 36편 5-6절을 묵상합니다. 

"주님,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은 하늘에 가득 차 있고, 주님의 미쁘심은 궁창에 사무쳐 있습니다. 주님의 의로우심은 우람한 산줄기와 같고, 주님의 공평하심은 깊고 깊은 심연과도 같습니다. 주님, 주님은 사람과 짐승을 똑같이 돌보십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특별히 청년의 때를 살고 있는 여러분, 여러분의 정신을 하늘처럼 높이고, 산줄기처럼 든든히 세우고, 심연처럼 깊게 만드십시오. 행복하기를 꿈꾸기보다는 경외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되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와 더불어 세상을 새롭게 만드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꿈에 기꺼이 동참하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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