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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아 베드로! (요 18:15-18, 2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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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베드로! (요 18:15-18, 25-27)


휴 애런슨은 18세의 젊은 나이에 고향 스웨덴을 떠나서 혼자 미국으로 이민을 갔으나 누구 한 사람 반겨주는 사람도 없었고 일자리를 찾기도 쉽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가지고 있던 돈도 다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하루는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서 무작정 서부로 가는 기차 화물칸에 올라탔으나 그만 열차 승무원에게 발각되어 실컷 얻어맞고 열차에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매맞은 몸으로 강가에 쪼그리고 앉아있는 강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그렇게도 처량해 보일 수가 없었습니다. 차라리 저 강물에 몸을 던져 버릴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때 불현듯 그의 마음속에 떠오르는 성경 구절이 하나 있었습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그는 그 말씀을 가만히 묵상하면서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나의 인생길에서 얼마나 힘있게 뛰어보았는가?’ 
그는 그 자리에서 두 주먹을 쥐고 일어났습니다. 
그리고는 자기가 지나온 모든 과거를 흘러가는 강물 위에 떠내려 보내기로 했습니다. 그리고는 힘있게 뛰어보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30년 후, 휴 애런슨은 몬테나 주의 영광스러운 주지사로 선출되었습니다. 
현실이 어렵다고 해서 용기를 잃지 마십시오. 내일을 바라보면서 힘차게 달리시기 바랍니다. 바람이 불어도, 눈보라가 휘몰아쳐도 그들은 낙심하지 말고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쉬지 않고 전진하는 인생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작심삼일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만큼 뜻을 정해서 이루어나간다고 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라고 했고 큰소리를 조심해야 한다는 말도 합니다.
하지만 이는 반대로 이야기하면 우리가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우리의 삶이 달라질 수도 있다는 뜻도 됩니다. 즉 마음을 정하고 그 뜻을 이루기 위해 흔들림이 없다면 그리고 끈기를 가지고 앞으로 나아간다면 이윽고는 그 뜻을 이룰 수 있는 날도 올 것입니다. 하지만 반드시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마음을 정하여 내 할 도리를 다 했다면 뜻대로 이루지 못했다고 해도 결코 후회는 없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여기에 또 하나의 변수가 있는데 그것은 때가 맞아야 한다는 것이요 좋은 조력자도 있어야 하고 거기에 더하여 하나님의 도우심도 있어야 합니다. 

세상에 한두 번쯤 이런 저런 결심을 하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또 어떤 때는 아주 손에 장을 지진다고 하면서 큰소리를 치기도 합니다만 세상 일은 그렇게 만만한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이 내 뜻대로만 된다면 이보다 더 좋은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만 세상 일이 결코 그렇지 않다고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업을 시작한다고 할 때도 나름대로는 최선을 다해 준비를 하고 자신만만하게 사업에 뛰어들지만 성공하는 사람은 가뭄에 콩 나듯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래서 모든 것이 때가 맞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거기다가 나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결국 우리 인생은 나 혼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나와 너 우리 모두가 함께 하는 그런 삶이 되어야 하는데 모두가 나에게 우호적인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내가 나를 바로 알지 못할 때 더욱 그렇습니다. 나도 나를 믿지 못한다면 누가 나를 믿어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과연 우리는 나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나도 참 대단하다고 생각될 정도로 그렇게 살고 계십니까? 아니면 역시 나는 안 돼 하고 좌절하는 인생을 살고 계십니까? 

같은 것을 보고도 그것을 어떤 눈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습니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험산준령도 넘어갑니다. 하지만 저런 산을 어떻게 넘어 하는 사람은 조금 시작하는 듯하다가 포기하고 말죠. 나는 역시 안 돼 그러면서 말입니다. 
더욱 큰 문제는 우리가 큰 소리를 쳤습니다. 그런데 그만큼 자신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안 될 때입니다. 왜 그런 결과가 나타날까요? 그건 나를 너무 맹신할 때도 그렇고 스스로 나는 안 될 거야 하고 포기할 때 그렇습니다. 죽을 때 죽더라도 나는 끝까지 간다는 마음으로 해도 갈까 말까 한데 힘들면 포기하면 되지 하는 마음으로야 어떻게 앞으로 나아갈 수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아무리 자신이 있다고 해도 여건과 형편이 맞지 않으면 그것 또한 불가항력일 경우도 생깁니다. 내 힘으로는 도무지 들 수 없는 물건이 있다고 합시다. 그렇다면 누군가가 나를 돕거나 아니면 무거운 것을 들어 올릴 수 있는 지게차라든가 기중기라던가 하는 것의 도움을 받지 않는다면 내 힘만으로 어떻게 그 무거운 것을 들어 올릴 수 있단 말입니까? 그래서 자기를 안다는 것도 중요하지만 거기에 더하여 나를 돕는 지혜와 이웃도 필요합니다. 그리고 심을 때와 거둘 때가 있듯이 모든 것이 때가 있다는 것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정말로 간사한 것은 우리 마음입니다. 아니 우리 생각입니다. 마음먹기로는 다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큰 소리 쳤다가 망신당하는 일이 벌어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먼저 생각할 것은 베드로의 부인입니다.
작심삼일이란 말이 본래는 선(先) 삼일 후(後) 작심 즉, 3일동안 생각한 후에 결심을 한다는 뜻이었습니다. 지금은 그것이 선(先) 작심 후(後) 삼일 즉, 결심이 3일을 가지 못한다는 뜻으로 쓰입니다. 
술을 끊겠다고 결심해도 바로 그 날 저녁에 다시 술을 마십니다. 다이어트를 하겠다고 결심해도 회식에서 그동안 먹지 못했던 것까지 다 먹어치웁니다. 새벽을 깨워 집요하게 기도하겠다고 결심해도 1주일이 못되어 그 결심을 깨고 맙니다. 

금방 결심을 깰 경우 괴로워하는 것까지는 누구나 다 하지만 그 다음에 어떻게 하는가는 사람마다 다릅니다. 결심을 깬 순간부터 ‘이왕 버린 몸 어쩔 수 없지’ 하고 결심하기 전의 행태로 편하게 돌아갑니까? ‘결심하고 못하면 괴로움만 더할 뿐인데…’ 하면서 결심도 하지 않는 안일한 삶을 삽니까? ‘결심은 인간적인 생각이라 성령의 인도대로 살기 위해 결심 같은 것은 하지 않는다’는 식의 고도의 ‘신앙적인’ 생각을 합니까?

사람은 타락한 존재라 아무리 결심해도 금방 옛 습관으로 돌아가는 타성이 있습니다. 이런 타성은 어떤 논리로 정당화해도 그것은 타락한 존재의 부패한 논리일 뿐입니다. 성도는 썩어져가는 구습으로 돌아가는 자신과 끊임없이 싸우면서 구습을 정당화 하려는 마음을 깨어버려야 합니다. 
성도는 날마다 순간마다 “썩어져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어야” 합니다. 성령께서는 성도로 하여금 매순간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도록 감동시키십니다. 성도는 성령의 감동을 받아 그대로 살기로 결심하고 그대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결심대로 사는 것과 성령의 인도를 받는 것은 서로 충돌하는 것이 아닙니다. 

새 사람을 입는 삶을 순간마다 결단하고 살지 않으면 옛 사람의 삶에 빠질 뿐 아니라 그것을 정당화하는 궤변적 논리까지 만들게 됩니다. 작심삼일이 괴로우면 삼일마다 작심하면 됩니다. 아니 작심일일(作心一日) 매일 결심하고 작심일순(作心一瞬) 매순간 결단하면 됩니다. 성령에 따른 작심일순(作心一瞬), 순간마다 새롭게 결단하고 새롭게 변화하는 삶을 살도록 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 성만찬 예식을 행하실 때 제자들에게 “너희 가운데 나를 배반할 자가 있다”고 말씀하셨고 또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온다”고 하시면서 제자들이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떠나게 될 것을 예고하셨습니다.

특히 베드로에게는 “네가 닭이 울기 전에 나를 세 번 모른다고 하리라”고 구체적으로 말씀하시면서 경고까지 하셨습니다. 
이때 베드로는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라고 큰 소리를 쳤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각오를 하고 결심하였어도 실제에 일을 당하여 보면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 것이 인간입니다.

오늘 본문에 두 명의 제자가 나오고 있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모두 다 도망가고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 한 사람만이 예수님을 따랐다고 했습니다.
여기 또 다른 제자 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요한복음을 기록한 사도 요한이 아니겠느냐고 말을 합니다. 
요한복음 19:26-27절에 보면 자신의 이름이 나와야 할 곳에 이름을 감추고 “예수님의 사랑하는 제자”라고 기록을 하였습니다. 특히 잘한 일을 말할 때에 자기 이름을 나타내지 않는 동양인의 겸허한 미덕을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15절 끝에 보면,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라 들어가지 않고 문 밖에 서 있었고 사도 요한은 예수님이 계신 대제사장의 집 뜰 안으로 들어갔다고 했습니다. 이어 19:25~27을 보면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 사도요한은 예수님의 십자가 앞까지 따라갔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모든 제자들이 다 도망갔으나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 서 있었던 것입니다. 참으로 훌륭한 제자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을 만한 제자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 못 박히셔서 그 고통으로 다른 생각으로 경황이 없으실 터인데도 불구하고 십자가 밑에서 울고 계시는 어머니를 내려다보시며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라고 말씀하시고는 사도 요한에게 “보라 내 어머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이때부터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어머니인 마리아를 자기 집에 모셨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가장 약한 것 같으나 죽음 앞에서도 늠름한 모습으로 자기가 해야할 도리를 다 하는 사도 요한의 강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어떻습니까? 

그는 예수님을 배반합니다. 베드로는 배반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배신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적을 본 사람, 물위를 걸은 사람, 주는 그리스도라는 고백을 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베드로가 배신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잡혀가셨습니다. 현실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15절을 보세요. 요한은 대문 안뜰까지 들어갔지만 베드로는 대문밖에 서 있었습니다. 대문밖에 서 있는 베드로의 심정을 어떠했을까요? 촌에서 성공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선생님은 비참하게 끌려갔습니다. 그래도 무엇인가 기대하면서 따라 가보았지만 아무런 변화가 없었습니다. 그는 멀리 쫓아갑니다. 과연 그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한번 베드로의 마음을 읽어봅시다. 그에게 절망감, 수치심, 초라함, 두려움, 분노 등 수없는 감정들이 베드로의 마음 안에 교차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평소 예수님을 따를 때, 큰 소리를 잘 치고 가장 용감했는데 오히려 기가 죽어 따라 들어가지 못하고 문 밖에 서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본문 16절 이하에 보면 사도 요한이 문 지키는 여종을 시켜 베드로를 안으로 들어오게 했더니 마지못해서 끌려들어 왔습니다. 그때입니다. 문을 지키는 여종이 베드로에게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난 아니야”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천천히 했겠습니까? 빠르게 “난 아니야” 했을 것입니다. 게다가 바깥 날씨까지 추웠습니다. 더운 나라인데도 바깥 날씨가 추웠습니다. 그의 마음의 표현입니다. 그는 두려웠지만 너무나 추워서 살짝 불 곁에 갔습니다. 불을 쬐다보니 자신의 얼굴이 드러났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너도 그 제자중 하나가 아니냐?”고 물었습니다. 한 사람이 알아보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알아보게 된 것입니다. 그는 “난 아니야”라고 더 강하게 부인했을 것입니다. 정말 떨렸을 것입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한 것은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짓이었습니다. 그 때 베드로가 있었던 자리는 빌라도의 법정이 아니며 사형을 집행하는 곳도 아닌데,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것입니다. 칼을 든 군인 앞에서 죽음이 두려워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다면 그래도 이해가 되겠는데, 계집아이 앞에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만 한 것이 아니라 맹세하고 저주까지 하였다고 마태복음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주님을 버릴지라도 나는 죽을지언정 버리지 않겠다고 큰 소리 쳤던 베드로가 이렇게 돌변한 것입니다. 베드로의 이 모습 앞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다시 한번 발견해야 합니다. 우리라고 예외가 아닙니다. 우리도 얼마든지 베드로처럼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보세요. 그렇게 큰 소리쳤던 베드로도 자기도 붙잡혀서 처형될까봐 두려웠던 것입니다. 그 결과 더 이상 부인할 수 없는 자리까지 가고 맙니다. 베드로가 동산에서 귀를 잘랐던 말고의 친척이 베드로를 알아본 것입니다. “네가 그 사람과 함께 동산에 있던 것을 내가 보지 아니하였느냐” 아마 베드로는 아연실색하였을 것입니다. “아이구! 끝났구나!” 

그러자 곧 닭이 울었습니다. 눅 22:60 이하에 보면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열심히 부인하고 있을 때 닭이 울었다고 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는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하신 말씀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 심히 통곡했다고 했습니다.
주님과 베드로의 눈이 마주칠 때 베드로의 마음이 어떠하였겠습니까?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열심히 부인하고 있는 그 시간에 예수님께서는 가야바로부터 갖은 모욕과 비난을 받으셨습니다.

그 때 예수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셨겠습니까?
분명히 베드로는 예수님과 눈이 마주쳤을 때 큰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우리도 때로는 시험에 빠질 때가 있고 예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할 때가 있습니다. 그 때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보시고 계시며 우리의 말과 행실을 지켜보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아야겠습니다. 이 때 깨닫고 베드로처럼 회개하면 살 길이 열릴 줄 믿고 먼저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부끄러움이 없도록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 랍비가 어느 유대인에게 물었습니다.
“만일 길에서 돈이 많이 들어 있는 지갑을 주웠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저에게는 딸린 식구가 많이 있으며 보시다시피 저는 매우 가난합니다. 그래서 솔직히 말씀드린다면 그것을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로 받아드리겠습니다.”
그러자 랍비가 그에게 말했습니다.

“그대는 도둑이다.”
랍비는 두 번째 유대인에게 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저는 주운 즉시 그것을 주인에게 돌려주겠습니다.”
“그대는 바보이다.”
랍비는 세 번째 유대인에게 똑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저는 그 돈을 주인에게 돌려 주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동시에 제가 얼마나 약한 인간인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일을 맞게 되면 그 지갑을 어떻게 처리할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총에 달려 있습니다.”
“그대의 대답이 옳은 대답이다.”

우리는 스스로가 완전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결코 완전할 수가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베드로처럼 폭풍과 비바람이 몰아치면 추풍낙엽처럼 흔들리게 될 것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혹시 우리는 자신이 어떠한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지 않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우리의 자만에 기인한 확신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실로 풀잎처럼 약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자신이 어떻게 행동할지는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 유명한 크랜머 대주교도 기독교를 박해하는 정부에 의해 체포당하자 처음에는 두려움 속에서 자신의 신앙을 철회하였습니다. 그 후 한 동안의 방황을 거친 후에야 그는 비로소 그리스도를 위하여 화형틀로 걸어갔습니다.
쟌 다르크도 어려움이 닥치자 역시 처음에는 자기의 주장을 굽혔던 경험이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자신의 신앙이나 신념에 대해 결코 완전한 장담할 수 없는 나약한 인간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완전을 주장하기 전에 우리 생애의 매 순간마다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해주시기를 먼저 기도해야 합니다.

자신의 나약함으로 인해 모든 면에서 주님을 배반하지 않도록 말입니다.
인간의 나약한 체질을 하나님께서는 잘 알고 계십니다.
다락방에서 최후의 만찬을 나누시면서 제자들을 위해서 기도하셨던 주님은 이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십니다. 거기서 제자들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시면서 고민하고 슬퍼하사 말씀하시기를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저희를 떠나 돌 던질 만큼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십니다.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예수님은 처음부터 자기의 뜻은 하나도 없이 아버지의 뜻을 구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면 못하실 일이 없으시고 또 아버지가 원하신다면 이 잔을 내게서 옮겨지게 하실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내 뜻이어서는 안 됩니다. 어디까지나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어지를 원합니다. 얼마나 열심히 기도하셨는지 땀방울이 흘러내리는데 마치 핏방울처럼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기도를 하실 때 사자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도왔다고 말합니다. 즉 우리가 아버지의 뜻을 따라 아버지의 뜻을 구하는 기도를 드릴 때 그 기도를 하나님께서 사자를 보내시어 도우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내 힘으로 기도하려고 하면 피곤하고 힘들고 도무지 기도가 막히고 그래 억지로 기도하려니 더욱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뜻을 구하는 기도가 드려질 때 그 기도는 하나님이 사자를 보내서 도우신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우리의 기도가 어떤 기도여야 할지를 생각해 보게 됩니다.

기도하러 가시면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시험에 들지 않기를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깨어 있지 못하고 기도하지 못하면 시험에 들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잘 알려 줍니다. 기도하고 나서 주께서 제자들에게 와서 보니 제자들이 슬픔을 인하여 잠들어 있었습니다.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시몬아 자느냐 네가 나와 함께 한시 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는 다시 나아가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셨습니다. 그런데 다시 와서 보니 저희들이 눈이 심히 피곤하여 잠이 들어 있습니다. 

다시 세 번째 가서 기도하시고 돌아오셔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그만이다 때가 왔도다 보라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우느니라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말씀하실 때 유다가 군병들을 이끌고 왔고 군병들이 손을 대어 제자들을 잡으려고 하니 베드로가 검을 가졌는데 그것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오른편 귀를 베어 버리니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검을 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자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시고는 그 귀를 만져 낫게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이 군병들에게 잡히시는데 그때 제자들이 다 도망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시몬 베드로와 다른 제자 하나가 예수를 따르는데 이 제자는 대제사장과 아는 사람이라 예수와 함께 대제사장의 집 뜰에 들어갔고 베드로는 문밖에 섰습니다. 그때 먼저 들어간 제자가 나가서 문 지키는 자에게 말하여 베드로를 데리고 들어 왔는데 문 지키는 여종이 베드로에게 말합니다.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그리고는 이제 세 번에 걸친 예수 부인이 이어지게 됩니다.

베드로는 너희가 다 나를 버리고 도망하게 될 것이다 하실 때 “내가 죽으면 죽었지 결코 주님을 버리지 않겠습니다” 다짐을 했고 “아니다 네가 오늘밤 닭 두 번 울기 전에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실 때도 맹세코 그런 일이 없을 것을 다짐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연약함을 잘 아시는 주님은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고 거듭 거듭 당부하시건만 결국 베드로는 잠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용기를 내어 예수를 잡으러 온 자들과 마주서 검을 빼들고 싸웠습니다. 

예수님의 책망으로 검을 도로 집어넣기는 했으나 예수를 결코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잡혀 가시는 예수를 따라 대제사장의 집에까지 갔지만 하인들과 함께 불을 쬐다가 문 지키는 여종의 질문에 얼떨결에 나는 아니라 하였던 것입니다. 끝까지 예수를 지키려고 애썼던 베드로가 왜 그렇게도 쉽게 무너졌습니까? 깨어 있어 기도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실패의 원인입니다. 믿음의 담력은 기도에서 옵니다. 믿음의 용기는 기도를 통해서 얻어지는 것입니다. 믿음의 용기는 타고 나는 것이 아닙니다. 결심한다고 생겨나는 것도 아닙니다. 믿음의 담력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다니엘은 간사한 자들의 꾐에 빠져 왕이 조서를 내린 사실을 압니다. 그것은 왕 외에 그 누구에게라도 무엇을 구하는 자는 사자 굴에 처넣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즉 왕만이 신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도 다니엘은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난 창을 열고 그 앞에서 하루에 세 번씩 기도하는 일을 그치지 않았습니다. 당당하게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를 계속했습니다. 그 결과 그는 사자굴 속에 던져졌지만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사 사자의 입을 열지 못하게 봉하심으로 오히려 안전하게 밤을 지낼 수 있었고 오히려 저를 모함했던 무리들이 사자밥이 됐던 사실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기도만이 이런 놀라운 능력의 원동력이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주님이 계시기에 이 모든 일은 가능한 일입니다.
하지만 반면에 기도가 부족했던 베드로는 실패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상생활에서 개인 기도의 시간이 없는 사람은 어떤 환난과 시험이 오게 되면 넘어지기 쉽습니다.
성도 여러분! 아마도 대단한 사람들이 베드로를 잡아서 너도 그 무리지 그 일당이지 했다면 아마 당당하게 그렇습니다 대답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조그만 계집 종 하나가 이런 질문을 하니까 얼떨결에 한다는 말이 아니라 했던 것입니다. 그래요 여러분 시험이란 것이 대단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별 것도 아닌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너무나도 평범하고 쉽기 때문에 그만 나도 모르게 넘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가 깨어 있어 기도하지 못하면 이렇게 시험에 빠질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어떤 시험에 부딪치고 나면 그제서야 부랴부랴 기도하네 뭐하네 합니다. 시험에 들었을 때도 물론 기도가 필요하겠죠? 그러나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기도문에서도 “우리로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시험에 들지 않기를 위해 깨어 있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혹시나 어떤 어려움이 있습니까? 우리 마음에 시험에 들 만한 일들이 있습니까?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지키시고 우리의 마음을 잡아주실 때 우리는 당당하게 오늘을 이겨나가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는 쉽게 베드로를 비난합니다. 어찌 그럴 수가 있냐고요? 그러나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보기 전에 결코 비난부터 앞세우지 마십시오. 인간이 아무리 강한 것 같아도 또 한편 아주 연약한 구석이 있습니다. 사실 베드로의 입장을 우리는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베드로는 집도 재산도 사업도 다 버리고 예수를 좇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예수 안에서 큰 자리를 보장받은 자입니다. 물론 그 큰 자리가 영적으로 얻을 수 있는 자리라는 것을 그는 몰랐습니다. 

어쨌든 예수를 잘 지켜 드려야 그 자리가 보장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문제는 죽은 자도 살리는 능력의 주님이 스스로 죽음의 길로 걸어 들어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결국 주님이 잡혔을 때 이제 베드로에게 남은 것은 무엇입니까? 이제 주님을 안다고 시인하는 것은 곧 죽음과 직결이 됩니다. 예수와 함께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럴 때 목숨을 걸고 그렇다고 말할 수 있는 자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이 고백이란 단지 내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입술의 고백으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게 주일을 성수한다는 것, 하나님께 온전한 십일조와 예물을 드린다는 것 그리고 나가서 내가 그리스도인임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 이 모든 것이 다 예수가 나의 구주라는 고백인 것입니다. 집 안에서 뿐 아니라 어디 가서든 먼저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고 어떤 음식이 앞에 놓였든 간에 또 누가 보던 간에 기도할 수 있는 것 이것이 또한 삶을 통한 고백인 것입니다. 여러분 점치러 가서도 그 집에 들어가 앉아서 기도하십니까? 술집에 들어가서 먼저 머리 숙여 기도할 용기가 있으십니까? 술상을 앞에 놓고도 기도하실 수 있습니까? 그럴 수 없다면 왜 그렇습니까? 

우리의 신앙이 바로 되고 이 신앙고백이 바로 되지 않으면 또 우리가 날마다 깨어 있어 기도하지 못하면 우리는 결국 예수를 부인하는 자가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여 언제든지 나의 삶을 통하여 주를 시인하는 삶을 사시며 깨어 있어 기도하는 하나님의 사람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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