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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 (계 2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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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 (계 21:1-8)
 
우리는 새롭지 않은 것에 쉽게 싫증을 느낍니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내 모습을 돌아보면 어떠하십니까? 어떤 분들은 하루가 지루하고 싫증난다고 말씀하시기도 하고, 또 어떤 분들은 기대와 설렘으로 새로운 삶이 될 것 같다는 고백을 하시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직장인들은 어떠할까요? 직장인 700명 이상에게 ‘일상적인 삶에 만족하십니까?’ 라는 질문을 했더니 놀랍게도 87.3%가 만족스럽지 않으며 싫증난다고 답했습니다. 거의 10명 중 9명이 일상이 지루하다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유가 무엇인지 두 가지씩 복수 답변을 하도록 해 보았습니다. 그 결과 첫째, 똑같은 일들이 어제도 오늘도 반복이 되어서(62.9%), 둘째, 미래에 대한 걱정이 너무 많아서(46.8%), 셋째, 일상에 활력소가 없어서(39.6%), 넷째, 열심히 살아도 변화와 발전이 없다고 여겨져서(35.7%)라고 대답했습니다. 즉 쳇바퀴처럼 반복되는 일상성이 힘들다는 것입니다. 

반복적인 일이 지루하고 싫증이 나면 금방 피곤해집니다. 피곤해지면 또 모든 일이 금방 싫증나게 마련입니다. 서로 상승작용을 일으키면서 정신세계를 망가뜨리는 것입니다. 이렇듯 마치 악성종양처럼 인간의 창조성과 삶의 의욕을 파괴시키는 것이 바로 삶의 일상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로마의 정치가이자 철학자였던 세네카는 악명 높은 네로 황제의 자문관으로 활동하던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는 일상적인 삶의 위기를 다음과 같이 지적합니다. 

“언제까지 똑같은 나날이 반복될까? 나는 어김없이 잠에서 깨고, 잠자리에 들 것이네. 또 배고플 것이고, 춥고, 더울 것이네. 끝이란 없는 것일까? 모든 것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것일까? ... 밤에 이어 낮이 오고, 낮에 이어 밤이 오고, 여름에 이어 가을이 오고, 가을에 이어 겨울이 오고, 또 봄이 오네. 지나간 모든 것이 다시 돌아오네. 나는 어떤 새로운 일도 하지 않네. 어떤 새로운 것도 보지 않지. 그래서 때로는 구토를 느낀다네...” 

하루하루가 너무나 권태롭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삶에 대한 비아냥이며, 혐오증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2000년 전 철학자의 이야기라면, 이보다 1000년을 앞서 산 3000년 전에 쓰여진 전도서는 그 위험성을 더 심각하게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해는 뜨고 해는 지되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고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아가며 이리 돌며 저리 돌아 바람은 그 불던 곳으로 돌아가고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 강물은 어느 곳으로 흐르든지 그리로 연하여 흐르느니라 모든 만물이 피곤하다는 것을 사람이 말로 다 말할 수는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아니하도다 (전도서 1:5∼8) 

전도서 기자는 아무리 곰곰이 생각하고, 체험해 봐도 해 아래 있는 모든 것 중에 도무지 새것이 없다면서 탄식합니다. 

우리가 찾는 새로움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이런 쓸쓸하고 허무한 날을 보낸 기억이 있습니까? 내 인생은 왜 이렇게 무상한가, 왜 나는 쳇바퀴 돌듯 권태 속에 살 수밖에 없는가 하고 탄식해 본 적 있습니까? 그렇게 좋아하던 브랜드 옷을 입어 보고, 명품 가방을 들어보아도 잠깐 뻐기는 것 같을 뿐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고, 손꼽아 기다리던 전자제품도 며칠 동안 만져보다 보면 곧 시시해지는 것을 경험한 적 있습니까? 아무리 취미생활을 즐겨도 영혼이 새로워지는 것을 느끼지 못했습니까? 신나게 술을 마시고는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 왜 이렇게 인생을 살아야 하는지 가슴을 때리면서 후회해 본 적 있습니까? 

우리는 오늘도 이 질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하늘 아래, 정말 새것이 없단 말인가요?”, “새로움을 매일매일 경험할 수는 없는 것인가요?” 

저는 예수님을 처음 믿게 되었을 때도 이 질문을 해 보았고, 오늘 목사로서도 이 질문을 해 봅니다. 예수님을 처음 믿었을 때는 의심을 가지고 이 질문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목사가 되고 나서는, 아니 예수 믿는 사람이 되고 나서는 ‘하나님이 주신 새로움을 오늘 내가 내 것으로 삼을 수는 없을까? 오늘도 기대와 설렘으로 하나님이 내게 주신 새로움 속에서 기뻐하며 살 수는 없는가?’ 라고 묻게 됩니다. 

전도서에 나오는 ‘해 아래 새것이 없다’는 탄식은 제게도 가까이 다가왔습니다. 그러면서 묻게 된 것이, ‘해 아래 새것이 없다면 해 위에는 새것이 있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가 해 위의 새것을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이 계심을 예수님을 통해서 배우게 되었습니다. 진정한 새것을 주시는 하나님이 해 위에 계시다는 것을, 새로움의 원천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어떤 분인가 생각하며 성경을 다시 펴 보았을 때, 창조주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하늘과 땅을 만드셨습니다. 만드실 때마다 “보기에 좋구나!” 하시며 스스로 찬탄하셨습니다. 그리고 여섯째 날에는 당신과 닮은 형상으로 인간을 만드시고 “보기에 참으로 좋구나!”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늘과 땅의 모든 것들은 우리가 보기에도 멋있습니다. 아름답고 조화롭습니다. 우주 공간에 이 지구만큼 멋지고 아름다운 곳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이것은 누구나 다 공감하는 것입니다. 

내가 새로워지면 모든 것이 새로워집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지루함과 권태 속에서 허덕일 때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 주셨습니다. 이것은 곧, “네가 보는 것, 듣는 것, 만지는 것에 새것이 없느냐? 그렇다면 문제는 네게 있다. 너 자신이 새로워져 보아라.”라고 말씀하신 것과도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날 수 있는 축복을 믿음의 사람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옛 자아를 벗고 하나님이 주시는 새로운 자아를 가슴에 품도록 허락하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린도후서 5:17)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우리 자체가 새로운 피조물로 변해진다고 그는 고백합니다. 내게 있었던 과거의 모든 것들이 다 지나가고 새것이 된다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 사실을 알고 나서부터 예수님을 믿는 것이 참으로 좋았습니다. 예전에는 내가 보고, 듣고, 만지는 것에 왜 새로운 것이 없을까 하고 투정부리며 화를 냈습니다. 그저 지루하고 싫증이 났습니다. 모든 것이 귀찮았습니다. 꼭 해야 할 일도 없고, 하고 싶은 일도 마땅치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으면서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세상이 바뀌기 전에 내가, 내 판단이 먼저 바뀌었습니다. 그러자 내가 보고 듣고 만지는 것이 새로움으로 다가오기 시작했습니다. 

지금도 예수님만 생각하면 가슴이 설렙니다. “예수님, 내가 당신을 사랑합니다. 예수님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었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되었습니다.”라는 고백이 절로 나옵니다. 예수님이 주신 삶에 호기심이 생기고 하나님이 내 인생에 어떤 축복을 주실지 기대하는 마음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이런 자부심까지 갖게 되었습니다. ‘맞아, 하나님은 위대한 창조주이시지. 나는 하나님을 대행하여 하나님의 몫을 부분적으로 감당하는 작은 창조자야!’ 그 생각이 저를 기쁘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주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신앙 속에서 그저 희미한 추억으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과거에는 창조주셨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들은 창조라는 말을 자주 쓰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세상이 기독교적인 언어들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남발하기까지 합니다. 

기업들의 선전 글에서, 정치, 경제, 문화, 교육, 과학의 각 분야에서 창조성과 창의성, 새로움에 대한 이야기가 엄청나게 쏟아지고 있습니다. 박근혜 정부가 ‘창조경제’라는 말을 사용했을 때, 불교의 일각에서는 창조라는 말이 기독교적인 언어가 아니냐며, 왜 그런 말을 쓰는가 하고 탐탁지 않게 여겼던 일도 있었습니다. 어쨌든 이렇게 곳곳에서 창조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것이 목사로서 조금 걱정이 됩니다. 창조라는 말은 매우 중요한 말인데, 함부로 사용되고 때론 남용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구약을 읽어보면 하나님이 주어로 사용될 때는 ‘바라’라는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어일 때만 사용하는 ‘창조하다’는 뜻의 동사입니다. 반면 인간이 무엇인가를 만들 때는 ‘아싸’라는 또 다른 히브리어를 사용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창조와 인간의 창조가 구별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본래 아무것도 없는 ‘from noting’의 창조, 즉 무(無)에서부터 만들어내는 것이지만, 우리 인간은 이미 있는 것에서 또 다른 무언가를 만들어가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창조성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창조’라는 말을 쓰지 않으려는 이유에는 이 언어에 대한 몇 가지 두려움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내 노력이 들어간 창조된 것이다.”라고 말할 때 우리는 무엇이 떠오릅니까? 창세기 11장에 나타난 바벨탑사건이 떠오릅니다. 

우리에게는 ‘내가 이렇게 창조적인 활동을 하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저항과 반역이 아닐까?’하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창의적인 생각을 위축시킵니다. 내가 하나님과 대결해서는 안 되지 하며 멈춰서는 것입니다. 창조적인 일을 위해 수고하고 땀 흘리면,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거스르는 것이 아닐까?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은혜와 은총을 저버리는 위험한 발상이 아닐까?’하는 염려를 하게 됩니다. 

이렇듯 우리는 내면에 감춰진 창조적인 능력을 어떻게 하든지 묶어 둬야 된다는 생각으로 창의력을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이 때로는 믿음의 사람들에게 정신적인 게으름을 야기시키기도 합니다. 영적인 게으름으로 우리를 몰아갑니다. ‘하나님이 다 주시겠지. 나야 이 정도까지만 하면 되지 않을까?’ 하며 자기 속에 있는 잠재된 창의력과 그 역할들을 확대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자기암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에 나타난 바벨탑은, 그것을 쌓은 것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 목적과 방향이 잘못된 길로 가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들은 자신을 위해서 바벨탑을 쌓았습니다. 인간의 이름을 높이기 위해서 쌓은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등해지기 위해서 바벨탑을 쌓았을 때, 하나님이 그것을 뒤흔드신 것입니다. 한 마디로 바벨탑은, 하나님의 창조성을 감사하며 그 능력을 개발하는 모습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그분의 자녀인 것입니다. 자녀를 키워보셨으면 아실 것입니다. 내 아들에게 내게 있는 인생의 노하우와 능력을 전수해 주고 싶지 않습니까? 내 딸에게 내 성품의 좋은 것들을 주고 싶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라고 한다면, 하나님도 당신의 창조적인 능력과 지혜를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고 그것을 키우시기를 원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그 능력들을 마음껏 발굴하고 활용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잘하십니까? 악기를 잘 연주하십니까? 그림을 아름답게 그립니까? 글을 쓰는 사람입니까? 건축하는 사람입니까? 의학에 종사하고 있습니까? 법률을 다루는 사람입니까? 경제금융가입니까? 기업을 하는 사람입니까? 과학을 하는 사람입니까? 모두가 복 받은 사람들입니다. 어떤 직업을 가졌어도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질서와 조화, 아름다움을 통해서 그 속에 참여하는 축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를 우리의 것으로 삼고 우리 속에 잠재해 있는 것들을 주님과 함께 열어갈 분명한 당위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보좌에 앉으신 이가 이르시되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요한계시록 21:5∼6) 

창세기 1장은 하나님이 태초에 하늘과 땅을 만드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존재가 되도록 하나님 나라로 불러주셨습니다. 또 역사의 마지막에 하나님은 새 하늘과 새 땅을 허락하시면서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는 하나님이다.” 말씀하시며 목마른 자들을 생명수 샘물로 채워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고 계십니다. 

그 생명수 샘물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생명의 영, 지혜의 영, 창조의 영, 축복의 영이 아니겠습니까?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이 나를 새롭게 하시고, 내 생각과 내가 하는 일을 새롭게 하시도록 하나님께 기도하며 삶을 새롭게 열어갈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 나를 맡길 때, 새로움은 시작됩니다.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은 창조주 하나님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창조주 하나님이 주시는 창조적 에너지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서 창조적 에너지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그들은 막연한 신, 거대한 천기, 이런 것들에 멈춰설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하늘과 땅을 만드신 인격적인 하나님,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런 하나님 앞에 우리 자신을 맡길 때 우리에게 새 역사가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의 옛 생각을 버려야 됩니다. 그것은 회개하는 것입니다. ‘나는 못났어. 나는 무기력해.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 이 세상 다 보기 싫어.’ 그렇게 말하는 옛 자아의 무능한 모습을 하나님 앞에 다 아뢰고, ‘이제 주님 안에서 새롭게 변화될 거야. 주님과 함께 할 수 있어. 주님이 기뻐하시면 내가 그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고 달려갈 수 있어!’ 라고 결정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며 하나님이 주신 생명의 영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창조의 목표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보기에 좋았다’ 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로 카오스의 세계가 코스모스의 세계로 바뀌었습니다. 멋있고, 아름답고, 선하고, 신실한 세계로 나아갈 수 있는 하나님의 역사가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가정주부입니까? 음식을 만들 때도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마음으로 맛있게 예쁘게 만들 수 있을까 생각하십시오. 직장인입니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마음으로 창조적인 일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하셔야 합니다. 기업인입니까? 내가 만드는 제품들을 통해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아름답고 선한 모습이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질 수 있을지 생각하십시오. 예술가여도, 학자여도, 공부하는 사람이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직분을 가져도 괜찮습니다. 그저 기도하면서 하나님 말씀 앞에 접목하십시오. 세상말로 하자면, 하나님과 접선해야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내 것으로 받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말씀 속에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 즉 생명의 영, 창조의 영을 간직하시고, 오늘도 삶의 현장인 가정에서, 직장에서 하나님의 선하고 아름다운 창조의 역사를 만들어가시는 주님의 복된 자녀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김지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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