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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되찾는 기쁨 (눅 15: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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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찾는 기쁨 (눅 15:1-10)

우리는 가진 것을 잃어버리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누구나 무언가 잃어버리면 가슴 아파하며 그것을 되찾고 싶어합니다. 물론 무엇을 잃어 버렸느냐에 따라서 정도의 차이는 있습니다. 볼펜 하나를 잃어 버리면 다른 것으로 다시 대체하면 그뿐입니다. 그러나 좀 더 가치가 있는 것을 잃어 버리면 쉽게 잊을 수가 없습니다. 

제가 대학원을 다닐 때 지갑을 잃어 버린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다른 학교에 볼 일을 보러 갔다가 어딘가 떨어뜨렸나 봅니다. 신분증, 크레딧카드, 그리고 십칠만 원 가까운 현금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것을 잃어 버렸다는 것을 깨달은 때부터 속이 따갑고 안타깝기가 그지없었습니다. 갔던 길을 다시 되돌아 가보고 여기 저기 두리번거리며 찾아 다녔습니다. 금방이라도 어디선가 나타날 것 같은 생각으로 머릿속은 꽉 찼고 눈은 충혈되었고 몸은 탈진할 정도였습니다. 정말 까만 하루를 보냈습니다.

그 다음날도 마음의 고통이 사라지질 않았습니다. 그런데 불현듯 전화 한 통이 걸려 왔습니다. 학교 주변에 있는 어느 식당 주인 아주머니가 전화를 걸어 왔는데 제 지갑을 보관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택시를 잡아타고 쏜살같이 달려 갔습니다. 알고 보니 그 집의 중학생 아들이 교정 안에서 지갑을 주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학생은 출타하고 없었기 때문에 만나보진 못했지만 그 아주머니에게 입에 침이 마르게 감사하다는 말을 반복하고 감사의 뜻으로 학생에게 선물을 남기고 돌아왔습니다. 그리곤 친구들을 불러모아 한턱 쓰면서 그 일이 무슨 무용담이라도 되는 양 떠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잃어버린 것이 값지면 값질수록 그만큼 마음이 더욱 아프고 되찾고 싶은 생각이 더 클 것입니다. 돈을 잃어 버리고 혹은 집을 잃어버리는 불행이 닥치면 마음이 참 아플 것입니다. 그러나 물질적인 것 이상으로 마음이 아픈 것은 사람을 잃어버리는 경우 혹은 사람의 마음을 잃어 버리는 경우일 것입니다. 

제가 어릴 때에 경포대에서 제 동생을 잃어버린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놀라서 동생을 찾아 다니던 아버지의 모습을 기억합니다. 로미오가 줄리엣을 잃었다고 생각했을 때 그는 모든 것을 다 잃었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쥴리엣이 로미오를 잃었을 때도 마찬가지였겠지요. 한 남자가 한 여인의 마음을 혹은 한 여인이 한 남자의 마음을 잃어버렸을 때 “실연당했다”고 표현합니다. 실연의 아픔은 겪어 본 사람만이 안다고들 하지요. 그만큼 비교할 수 없이 아프다는 것입니다.

잃어버리지 않고 살면 좋겠는데 그게 잘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도 무얼 잃어버리실까요? 하나님이 건망증이 있는 것도 아닌데, 그리고 모든 것을 다 아시는 분이 어떻게 무엇을 잃어버릴 수 있을까요? 그런데 오늘 예수님은 하나님도 잃어버리신 것이 많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양을 잃어버린 목자에 자신과 하나님의 마음을 비유하십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잃었다"를 뜻하는 헬라어가 “플라나오”로 되어 있고(마18:12) 누가복음에는 “아폴뤼미”로 되어 있어(눅15:4) 서로 뜻이 다르다고 합니다. 마태복음의 것은 “양이 스스로 양떼를 의도적으로 벗어나다”라는 의미인 반면에 누가복음의 것은 “다만 그 양이 연약하고 무지하며 혹은 미련하여서 양떼에서 벗어나게 되었다”라는 의미라고 합니다.

어쨌건 예수님 혹은 하나님이 목자라면 그분이 무엇을 잃어버리는 것은 그분의 무지함이나 소홀함 때문이 아니라 그 잃어버린 바 된 것은 의지나 무지함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머리털까지도 세신바 되었다 하였습니다.(마 10:30) 

그러니 그런 하나님이 우리를 잃어버렸다 함은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를 몰라서 잃어버렸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잃어버렸다 함은 “우리가 하나님을 버렸다, 떠났다, 무시하기로 했다, 없는 것이 여겼다, 혹은 그 마음을 알아주지 못했다”라는 것들을 뜻합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잃어버리고 싶어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사야 53:6의 말씀처럼,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잃어버린 바 된 우리를 애타게 찾으십니다. 내가 잃어버린 돈지갑을 찾는 것보다 더 간절하게, 심지어 잃어 버린 자식을 찾는 것보다도 간절하게 찾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고 우리를 찾아 지키려 하십니다. (시121) 그러니 예수님께서 왜 죄인의 무리와 함께하시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잃어버린 저들을 간절히 찾고자 하시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깊은 사망의 골짜기라도 아무리 가파른 절벽이라도 주님께서 찾아가지 않는 곳은 없습니다. 그 분이 밝은 빛으로, 다시 찾으시고 회복시키는 놀라운 구원의 능력으로 우리를 찾고 계십니다. 심지어 죽음이 우리는 삼키는 곳도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못박히시고 장사한지 사흘 만에 살아 나심으로 예외가 아님을 밝히 보이십니다. 놀라우신 구원의 능력으로 모두 회복되고 찾아지시기를 축원합니다. 

내가 도를 닦아서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보이신 십자가의 놀라운 사랑의 은혜 때문에 찾아지는 것입니다. 내가 거룩하게 회복되는 것은 나를 십자가위에서 피 흘리시며 찾아 나서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입니다. 내가 영리해서, 내가 노력해서, 내가 잘 해서 찾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회개할 때, 내가 잃어버린 바 되었음을 깨달았을 때, 내가 하나님을 떠났음을 자각하고 가슴을 칠 때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사랑은 더욱 분명해 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나를 애타게 찾고 계셨는지 알게 되는 것은 회개의 순간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한 사람이 회개에 이르는 것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기쁨이라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영혼을 구하는 것이 온 천하를 얻는 것보다 귀하다 하였습니다.(마 16:26) 

여러분이 바로 그 한 사람 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찾으셨을 때 기쁨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기쁨입니다. 스바냐서는 그가 그 기쁨을 이기지 못한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스바냐 3:17)

여러분,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극진하심을 알게 되길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시라”하셨습니다.(요일4:8) 

이 사랑을 알게 될 때 하나님은 기쁨을 이기시지 못하시고 온 동네 아니 온 우주와 함께 기쁨을 나누실 것입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 하나님의 기쁨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길 원합니다. 사랑을 알게 되는 좋은 방법은 사랑하는 자와 가까이 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넘치는 공동체에 속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사랑을 배우고 사랑을 하게 되겠지요. 또한 역으로 사랑해야 하나님을 알게 된다고 합니다.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요일 4:8) 

오늘도 말씀으로 하나님은 여러분을 찾고 계십니다. 여러분이 버리고 등을 돌렸건, 모르고 등안시 했던, 이제까지 모르고 살았건, 어쨌건 간에 잃어버린 하나의 영혼을 찾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간절한 소원임을 잊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또한 그 영혼을 구하는 일이 이 교회의 목적임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또한 그 일로 함께 기뻐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교회 공동체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기쁨은 거기에 있습니다. 이것이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여러분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가까이 함으로 하나님의 극진하신 사랑을 느끼시고 배우시고 이제 그분처럼 사랑할 수 있게 됨으로 이 사랑의 공동체의 한 일원이 되어 기쁨으로 주를 섬기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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