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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불신자 속에 사는 신자의 삶의 원리 (창 21:2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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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신자 속에 사는 신자의 삶의 원리 (창 21:22-34)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고 아비멜렉은 그랄 왕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신자의 대표이고 아비멜렉은 불신자의 대표인 것입니다. 신자와 불신자가 세상 속에 섞여 살 때 어떤 관계를 맺고 살아야 되는지에 대해 아브라함과 아비멜렉의 관계가 좋은 모범이 됩니다. 

아브라함과 아비멜렉은 창세기 20장과 21장에서 두 번 만납니다. 창세기 20장에서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을 속였습니다. 자신의 아내인 사라를 누이라고 속여서 아비멜렉이 하마터면 하나님으로부터 큰 벌을 받을 뻔했습니다. 그래서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을 책망합니다. 그런데 창세기 21장에서 아비멜렉의 종들이 아브라함의 우물을 빼앗았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을 책망했습니다. 책망을 주고받아 일대일로 비긴 것입니다. 창세기 20장에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에게 큰 선물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창세기 21장에는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에게 암양 새끼 일곱 마리를 선물로 주었습니다. 선물도 주고받아 일대일로 비긴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아비멜렉은 우리 성도들이 세상 속에서 불신자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살아야 되는지 좋은 예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Ⅰ. 아브라함은 아비멜렉으로부터 좋은 평판을 받았다(Respected Person) 

창세기 21장에서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에 대해서 좋게 이야기합니다. “때에 아비멜렉과 그 군대 장관 비골이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가로되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 (창 21:22). 

아비멜렉과 그 군대 장관 비골이 아브라함에 대해서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이라며 좋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창세기 20장과 21장 사이에는 6년의 간격이 있는데 6년 전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을 거짓말쟁이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6년이 지난 뒤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에 대해서 좋게 말하는 것은 그동안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복주시고 그와 함께하신 것을 본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불신자들에게 좋은 평을 듣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창세기 41장에도 애굽 왕 바로는 요셉에 대해서 최고의 평가를 내리고 있습니다. 

“바로가 그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와 같이 하나님의 신에 감동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얻을 수 있으리요 하고 요셉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네게 보이셨으니 너와 같이 명철하고 지혜있는 자가 없도다” (창 41:38~39). 

요셉은 17세에 구덩이에 갇혔다가 애굽의 시위대장 보디발의 집으로 팔려가 노예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모함을 받아 감옥살이하는 중 30세에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요셉이 애굽을 통치하는 동안 애굽은 복을 받았습니다. 흉년이 와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요셉의 지혜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다니엘도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을 때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다니엘을 좋게 평가했습니다. 그러다 바벨론이 메대와 바사 연합군에 의해서 B.C. 539년에 멸망당했습니다. 그런데 메대의 왕이었던 다리오는 다니엘을 높이 평가합니다. “

다니엘은 마음이 민첩하여 총리들과 방백들 위에 뛰어나므로 왕이 그를 세워 전국을 다스리게 하고자 한지라” (단 6:3). 

메대 왕 다리오가 다니엘을 높여서 전국을 다스리는 총리가 되게 하니까 메대 사람들이 다니엘을 시기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도 아니고 우리가 점령한 나라의 포로가 어떻게 총리가 되느냐며 다니엘을 고소하기 위해서 흠을 잡으려고 한 것입니다. 

하지만 다니엘에게서 아무 허물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이에 총리들과 방백들이 국사에 대하여 다니엘을 고소할 틈을 얻고자 하였으나 능히 아무 틈, 아무 허물을 얻지 못하였으니 이는 그가 충성되어 아무 그릇함도 없고 아무 허물도 없음이었더라” (단 6:4). 

우리 성도들은 세상 속에서 불신자들에게 욕먹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초대교회가 부흥된 이유를 찾아보면 그들이 불신자들에게 칭송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행 2:47). 

“저 사람들은 좋은 사람들이다. 저 사람들이 모여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모습이 아름답다.” 

이렇게 세상 사람들 사이에서 교회가 칭찬을 받으니까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더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지난번 한기채 목사님도 말씀하셨지만 한국에서 현재 개신교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평판이 굉장히 좋지 않습니다. 

기독교윤리실천협의회 조사에 의하면 한국교회의 신뢰도는 겨우 17.6% 밖에 안된다고 합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들의 책임이 아니고 우리들의 공통된 책임인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 사람들에게 좋은 평판을 얻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목사들도 좋지 않은 평판을 얻었고 장로, 권사, 집사들 모두가 좋지 않은 평판을 얻다보니까 그것들이 모여서 이렇게 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에게 좋은 평판을 얻은 것처럼 좋은 평판을 얻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불신자들이 저 사람은 교회 다니는 사람이라고 말하기보다는 저 사람은 정직한 사람이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이라는 평판을 들어야 될 것입니다. 불신자들이 신앙에 관해서 이해하지 못해도 비판하는 것은 잘합니다.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마 7:3). 

예수님이 인간을 이렇게 평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불신자들이 그리스도인들에 대해서 내리는 평가는 비교적 정확합니다. 굉장히 훌륭한 사람이라서 알아 봤더니 강남중앙침례교회 권사님이네. 그럼 나도 그 교회에 나가봐야겠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평소에 얌체 같고 못된 사람이 강남중앙침례교회 집사라면 교회에 나오려고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아브라함처럼 불신자들에게 칭찬받는 성도가 되어야겠습니다. 


Ⅱ. 아브라함은 아비멜렉과 평화를 유지하며 살고자 했다(Peace Maker) 

하나님께서 우리 신자들이 세상 속에 살면서 할 수 있거든 평화롭게 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롬 12:18).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좆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히 12:14).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약 3:18). 

우리 성도들은 사람들과 싸우려는 자세가 아니라 항상 화평하게 지내려는 자세로 살아야 됩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삶의 자세인 것입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이 추구한 평화는 정의를 희생시키는 평화가 아니었습니다. 불의한 상태에서는 평화가 있을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일체 십분의 일을 그에게 나눠 주니라 그 이름을 번역한즉 첫째 의의 왕이요 또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 (히 7:2). 

예수 그리스도는 먼저 의의 왕이시고 그 다음에 평강의 왕이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하나님과 원수가 됩니다.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머리가 좋고 착하고 똑똑하고 부유하고 능력이 있어도 소용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고 죄사함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를 얻게 되면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평화는 먼저 의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북한과도 평화를 누려야 됩니다. 북한이 우리의 동족인데 매번 전쟁이나 하고 그러면 되겠습니까? 하지만 자유민주주의를 포기하고 공산주의에 굴복하는 형태로 이루는 평화는 참된 평화가 아닙니다. 그것은 불의를 전제로 해서 이루어진 평화이기 때문에 언제 깨질지 모르는 거짓된 평화인 것입니다. 평화는 언제나 의가 전제되어야 합니다. 부부 사이에도 부부싸움이 일어난다면 화해해야 되겠지만 그전에 불의가 있으면 그것을 먼저 해결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의가 먼저 있어야 그 다음에 평화가 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아비멜렉이 제안한 평화조약을 받아들입니다. 

“그런즉 너는 나와 내 아들과 내 손자에게 거짓되이 행치 않기를 이제 여기서 하나님을 가리켜 내게 맹세하라 내가 네게 후대한 대로 너도 나와 너의 머무는 이 땅에 행할 것이니라 아브라함이 가로되 내가 맹세하리라 하고” (창 21:23~24). 

아브라함도 아비멜렉과 평화조약을 맺기 원했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이 그냥 평화조약을 맺은 것은 아닙니다. 평화조약을 맺기 위해서 먼저 해결해야 될 불의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아비멜렉의 종들이 아브라함의 우물을 늑탈한 일에 대하여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을 책망하매” (창 21:25). 

아비멜렉의 종들이 아브라함의 우물을 늑탈한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평화조약은 좋지만 당신 종들이 나의 우물을 늑탈해간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이야기해보라고 한 것입니다. 

중동지방에서는 우물이 제일 중요한 재산입니다. 물이 없으면 사람이나 짐승이나 생명유지가 불가능합니다. 물은 문자 그대로 생명수입니다. 사람의 몸도 약 80% 이상이 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물을 마시지 않으면 죽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우물을 아비멜렉의 종들이 빼앗아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거하고 있는 땅은 그랄 땅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비멜렉의 종들이 우리 땅에서 판 우물이니까 우물도 우리 것이라며 늑탈한 것입니다. 

하지만 창세기 20장 15절을 잘 보면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에게 그랄 땅 일부를 주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내 땅이 네 앞에 있으니 너 보기에 좋은 대로 거하라 하고” (창 20:15). 

땅을 주면 땅 속에 있는 물도 준 것이지 땅은 주었지만 그 속에 있는 물은 안 주었다는 것은 말이 안됩니다. 아브라함이 옳게 따진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도 불의한 일을 당했을 때 가만 당하지 마시고 가서 따지십시오. 아무리 불신자라도 불의한 일을 마음대로 행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평화조약이 체결될 수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 문제를 자기 마음속에만 간직하지 않았고 다른 사람에게 말하고 돌아다니지도 않았습니다. 아비멜렉을 찾아가 일대일로 직접 말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비멜렉이 이렇게 답변합니다. 

“아비멜렉이 가로되 누가 그리하였는지 내가 알지 못하노라 너도 내게 고하지 아니하였고 나도 듣지 못하였더니 오늘이야 들었노라” (창 21:26). 아비멜렉이 알았다면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했을 것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이 평화조약을 받아들이고 언약을 세웁니다. “아브라함이 양과 소를 취하여 아비멜렉에게 주고 두 사람이 서로 언약을 세우니라” (창 21:27). 

언약을 세울 때는 양과 소를 둘로 쪼개 놓고 그 사이로 언약을 체결하는 사람이 지나갑니다. 만약 언약을 어기면 둘 다 쪼개진 짐승과 같은 신세가 될 것이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언약이라는 것은 생명을 걸고 맺는 것입니다. 

결혼도 언약입니다. 그러므로 한번 남자와 여자가 결혼하면 목숨 걸고 죽을 때까지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조금 살다 싫으면 헤어집니다. 더 좋은 사람을 찾아가서 또 그 사람이랑 결혼했다가 또 싫어지면 처음에 같이 살던 사람을 찾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정말 문제가 심각합니다. 결혼도 언약임을 기억하고 그 언약을 지키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아브라함은 평화조약을 체결하고 아비멜렉에게 선물까지 줍니다. 

“아브라함이 일곱 암양 새끼를 따로 놓으니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일곱 암양 새끼를 따로 놓음은 어찜이뇨” (창 21:28~29).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체결했는데 일곱 얌양 새끼는 왜 따로 놓았냐고 물어본 것입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이 선물로 주는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창세기 20장에 받은 것이 있으니까 21장에서 돌려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땅의 이름을 ‘브엘세바’라고 불렀습니다. ‘브엘’은 ‘우물’이라는 뜻이고 ‘세바’는 ‘일곱’ 혹은 ‘맹세’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브엘세바’는 ‘일곱 우물’ 혹은 ‘맹세의 우물’이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스라엘을 가보면 가장 꼭대기가 ‘단’입니다. 그리고 맨 아래에 ‘브엘세바’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단에서 브엘세바까지’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아비멜렉과의 문제를 해결하고 평화로운 언약을 체결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다 아비멜렉에게 선물까지 주면서 불신자들과 평화롭게 지낸 것입니다. 우리도 세상 사람들과 평화롭게 지내는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Ⅲ. 아브라함은 아비멜렉에게 자신은 하나님을 예배하며 사는 사람임을 증거하였다(Worshipper) 

우리가 세상 사람들 속에 살면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인지 불교를 믿는 사람인지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게 몰래 믿고 교회 올 때도 몰래 오고 성경책도 신문지에 싸가지고 오고 식사할 때 기도도 아무도 모르게 하면 천국에 가서도 예수님이 우리를 모른다고 할 것입니다. 사람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인정해야 천국에서도 예수님이 우리를 인정해주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에셀나무를 심고 거기서 영생하시는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으며” (창 21:33).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은 예배했다는 말입니다. 에셀나무는 상록수인데 5m 높이로 크는 나무입니다. 에셀나무를 심었다는 것은 기념식수를 한 것입니다. 아비멜렉과 언약을 맺고 이것이 영구히 지속되기를 바라며 기념식수를 하고 그곳에서 영생하시는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을 예배하면서 살아야 됩니다. 예배하는 것이 인간의 본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예배를 받으실 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해야 되는 존재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올바로 예배하기 위해서는 먼저 다른 사람과 얽혀있는 관계를 풀어야 됩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마 5:23~24).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관계가 사람과의 수평적인 관계에 의해서도 영향을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부부관계가 나쁘면 아무리 기도해도 기도가 응답이 안됩니다. 남편이 아내를 학대하면 아무리 열심히 기도해도 소용없습니다. 아내도 남편을 멸시하고 교회 와서 아무리 열심히 기도해도 소용없는 것입니다.

“남편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벧전 3:7). 남

편이 아내를 귀히 여기지 않으면 하나님께 아무리 기도를 열심히 해도 기도가 막혀버린다는 것입니다. 남편은 아내에게 잘해야 됩니다. 물론 아내들도 남편에게 잘해야 합니다. 남편이 불신자라고 해서 함부로 대해서는 안됩니다. 평소에도 안 좋은데 교회 가더니 더 나빠졌다고 생각이 들면 교회에 나오려고 하겠습니까? 당신은 하늘이고 나는 땅이라고 하면서 끼니마다 따뜻한 밥 챙겨주고 남편 나갈 때 신발도 갖다놓고 그러면 교회 다니더니 저렇게 변하는구나 하면서 나도 한 번 나가봐야겠다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사람과의 관계는 중요합니다. 사람과의 관계에 갈등이 없어야 하나님과의 관계도 막히지 않는 것입니다. 


결론 

아브라함은 아비멜렉과의 관계를 잘 풀고 하나님을 예배하며 불신자들에게 자신은 하나님을 예배하며 사는 존재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줬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시되 영생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우리에게도 영원한 복을 주십니다. 기독교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영생을 주시는 종교입니다. 진시황이 그렇게 가지고 싶어 했던 영생이 예수님 안에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 그의 의는 자손의 자손에게 미치리니” (시 103:17).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그 자손의 자손까지 하나님의 사랑을 받습니다. 

여러분, 이런 사랑을 주시는 하나님을 우리가 마땅히 예배해야하지 않겠습니까? 세상 속에서 불신자들과 섞여 살면서 아브라함처럼 “저 사람은 좋은 사람이다. 저 사람은 평화로운 사람이다.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저 사람은 여호와를 예배하며 사는 사람이다.”라는 좋은 평판을 듣고 사시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피영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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