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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편애 하심 (시 103: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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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애 하심 (시 103:1-11)

여러분, 명절 잘 보내셨습니까? 그립던 이들을 만나 함께 시간을 가지면서 안부를 확인하는 것, 인간미 넘치는 아름다운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딴죽을 거는 사람이 있습니다.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Mohandas Karamchand Gandhi)입니다. 그는 가족이나 친구의 일상적인 인연을 끊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배타적인 사랑을 하면 불공정, 편파, 편애가 생기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당시 간디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 것은 계몽주의(啓蒙主義)였습니다. 여기에 ‘분배의 평등’을 강조하는 사회주의,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는 공리주의도 끼어들고, 결국 공산주의까지 탄생하게 됩니다. 이렇게 유럽 전체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상황으로 바뀌어가자, 타협의 산물로 생긴 것이 ‘종교다원주의’ 사상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차별 없이 다 사랑하신다,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하나님의 편애가 논쟁의 핵심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믿고 있습니까? 

성경은 공정, 나눔, 사랑을 강조합니다(눅 3:11, 신 24:21, 마 5:39,40,44). 특히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이 가르침이야말로 ‘기독교’를 규정짓는 최고의 가치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가 믿는 하나님이야말로 도무지 차별이 없는 ‘공정’하신, 모든 것을 다 품으시고, ‘사랑’이 한이 없으신 하나님으로 믿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성경을 열면 그 하나님이 이삭은 선택했으나 이스마엘은 버리셨습니다. 이스라엘은 사랑하셨으나 여타민족은 이방인으로 취급하셨습니다. 이렇게 성부 하나님의 선택과 유기(遺棄)가 성경 전체를 관통하고 있습니다. 분명 성부 하나님의 편애(偏愛)입니다.

성자 예수께서는 많은 무리들 가운데서 특별히 열두 명, 그 열둘 중에서도 세 제자, 그 셋 중에서도 유난히 편애한 한 제자가 있었습니다(요 21:20). 그분은 온 인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니라 오직 택함 받은 자들만을 위해 죽으셨습니다. 칼뱅은 이를 ‘제한속죄설’이라고 명명했습니다. 분명 성자 예수님의 편애(偏愛)입니다. 

오순절 성령께서는 오직 그 방에 함께 모여 있던 사람들에게만 임하셨습니다(행 2:1). 사울 일행 중 사울에게만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셨고(행 9:17), 군중 가운데 스데반에게만 성령이 충만히 임하셨습니다(행 7:55). 분명 성령님의 편애(偏愛)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공평하게, 더군다나 모든 사람을 무한한 사랑으로 대하지 않으십니다(롬 9:15, 말 1:2-3, 마 24:40-41). 어떤 면에서 성경은 편애로 가득한 책이요, 그 성경이 소개하는 하나님 또한 편애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편애하심이야말로 하나님의 중요한 성품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신앙생활이란,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편애, 즉 나 같은 죄인에게만 주신 특별한 은혜, 주권을 경험하고, 덧입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편애를 몸소 맛볼 때에 비로소 ‘은혜의 세계’, ‘하나님주권의 세계’, 더 깊은 ‘영적세계’를 맛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편애하심’을 깊이 체험했던 한 사람을 만납니다. 다윗입니다. “내 영혼을 옥에서 이끌어 내사 주의 이름을 감사하게 하소서 주께서 나에게 갚아 주시리니 의인들이 나를 두르리이다”(시 142:7). 다윗은 분명 그 굴에서 나와 하나님께 감사의 찬송을 올렸을 것입니다. 저는 그 현장을 시편 103편이라고 확신합니다. 

그 근거로 첫째, ‘네 청춘을 독수리같이…’(5절), ‘억압당하는…’(6절), 이런 표현들은 다윗이 젊었을 때, 왕이 되기 전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생명구원에 대한 감사와 찬송으로 전체가 구성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그가 142편에서 ‘내 영혼을 옥에서 이끌어내사…’라고 했습니다. 그런 그가 103편에서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고 노래합니다. 그러므로 142편에 이어지는 시편이 103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굴속에서 ‘의인이 나를 두르리이다’라고 기도했는데 그 의인이 어디에 있을까요? 시편 103편 1~2절은 다윗 혼자서, 3절 이하는 그 누군가가, 10절 이하는 다윗과 그의 곁에 다가온 그 누군가가 함께 노래하는 특이한 형식입니다. 다윗 곁에 다가온 ‘사람’은 바로 그 ‘의인’, 즉 오실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과 함께 ‘푸른 초장’을 거닐면서 그분을 송축하고, 그분이 비는 복을 받는 현장입니다. 

다윗은 주체할 수 없는 기쁨으로 여호와를 송축합니다(시 103:1-2). 그러자 그분이 다윗을 향하여 축복의 메시지를 선포합니다(시 103:3-5). 다섯 가지 축복입니다. “첫째,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둘째,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셋째, 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넷째,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케 하시며. 다섯째, 네 청춘을 독수리같이 새롭게 하신다.” 

‘너’란 단어가 다섯 번에 걸쳐서 강조되고 있습니다. 오직 ‘너’에게 이 은총이 나타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시편 103편이야말로 다윗을 향한 ‘하나님의 편애’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현장입니다. 하나님이 특별한 사람을 지칭하시면서 그분의 편애하심을 드러내실 때가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입니다(창 12:2-3). 이삭입니다(창 26:3-4). 야곱입니다(창 28:15). 동일하게 다윗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특별히 다윗에게 이런 편애하심을 보이셨을까요? 다윗이 제일 먼저 관심가진 것은 죄에 대한 민감함입니다(시 103:3,10,12). 그는 하나님 앞에서 올곧게 살려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의 허물, 잘못에 집중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눈 속에 있는 티에 집중합니다. 그리고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시 103:8,9,11,12,13). 그래서 미국 대각성운동의 선구자 요나단 에드워즈는 성경에서 거룩한 정서를 가장 잘 보여주는 인물로 다윗을 제시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천 국제공항 근처에 ‘타워 인피니티’(Tower Infinity)란 건물이 세계 최초로 보이지 않는 건물로 신축될 예정이라고 합니다. 건물 뒷면의 카메라가 주변의 실시간 풍경을 촬영하여 건물 앞면 프로젝터를 통해 보여주면 마치 건물이 없는 듯 착각하게 되지만, 건물은 엄연히 존재합니다. 

우리가 갖가지 방법으로 허물과 죄를 덮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여전히 우리가 쌓은 죄악의 바벨탑은 그 자리, 그대로 존재합니다. 이 허물과 잘못을 씻고,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나의 허물과 잘못을 덮어주시는 길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그분을 바라보며, 그분을 향하여 나아갈 때 그분은 다가오셔서 우리에게 선포하실 것입니다.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우리의 죄를 사해주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질병까지 고쳐주실 줄 믿습니다. 파멸에서 구속하시고, 우리의 청춘으로 독수리같이 새롭게 해주시는 은혜를 주실 줄 믿습니다. 이 하나님의 편애하심을 사모하면서 주님께로 다윗처럼 나아가는 주의 귀한 자녀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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