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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요 21: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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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요 21:15-17)

우리 주변에는 가슴을 찡하게 하는 사랑의 이야기들이 참 많습니다. 서로 사랑하지만 양쪽 집안이 원수지간이라 결혼하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한 비극적인 사랑의 이야기 로미오와 줄리엣, 두 사람의 사랑을 이루어 주기 위해 까마귀가 다리를 만들어 주었다는 견우와 직녀의 오작교 이야기, 사랑하는 남편을 기다리다 돌이 되었다는 망부석 이야기, 권력 앞에서도 사랑을 지킨 춘향전 등은 모두가 사랑을 주제로 한 이야기입니다.

지난 5월 13일 오후 4시20분쯤 경북 청송군 부남면 한 저수지에서 88세 된 할아버지가 치매를 앓고 있던 83세 된 아내를 태우고선 저수지로 돌진하여 목숨을 끊었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경찰 관계자에 따르면, 할아버지는 자신이 죽고 난 뒤 치매상태로 혼자 남아 고생할 할머니가 걱정되어 그런 것 같다고 합니다. 저수지로 돌진하는 것과 요양원이나 집에 모시는 것, 어느 쪽이 진정한 사랑일까요? 그러고 보면 인간의 모든 행동의 기저에는 예외 없이 사랑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성경도 사랑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예수님의 사랑을 담고 있는 것이 바로 성경입니다.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다른 가장 근본적인 차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해 주셨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은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사랑, 십자가의 사랑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요 3: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의 뿌리는 하나님의 사랑에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신앙은 여기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이란 이 사랑에 근거가 되어 움직이는 것입니다. 예배도 나를 위해 죽어주신 주님의 그 사랑에 감격하여 감사와 찬송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선교를 하든지, 지역사회에 봉사를 하든지 무엇을 하든지 여기서 출발해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생활과 삶의 동기는 하나님의 사랑이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장면입니다. 예수님을 배신하고 떠나 물고기 잡으러간 베드로와 여러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주님은 베드로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 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예수님께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하신 이 말씀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이 질문의 의미를 깨닫고 함께 은혜를 나누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이 말씀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1.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말씀은 “나는 아직도 너를 사랑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갈릴리 바닷가에서 가장 처음으로 부른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12제자 중 가장 인정을 받는 수제자였으며, 누구보다도 예수님을 사랑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베드로도 주님을 부인하고 도망갔습니다. 더 기가 막힌 것은 베드로가 예수님의 빈 무덤을 확인하고, 또 실제로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도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하고 동료들을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제자들에게 만일 여러분들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스승을 배신한 제자, 다시 만나지만 거절하고 떠나 버린 제자들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한마디로 심하게 책망하거나 욕설을 퍼붓거나 다시는 거들떠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찾아 가셔서 밤새도록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 지친 그에게 그물 가득히 고기를 잡게 해 주십니다. 그리고 밤새 고기를 잡느라고 지치고 허기진 그들에게 정성껏 조반을 준비하여 먹입니다. 그리고 베드로를 향하여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 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물으십니다. 

그것도 한번이 아니라 무려 세 번씩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었습니다. 베드로는 세 번이나 거듭되는 예수님의 질문에 당황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의도를 가지시고 질문을 하셨습니다. 그것은 베드로가 예수님이 잡히시던 날밤 세 번씩이나 부인했던 것을 기억하시고, 잃어버린 자신의 대한 사랑을 회복시키시기 위하여 연속으로 세 번이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질문하신 것입니다. 결국 이 말씀은 “베드로야, 너는 나를 부인하고 배반하고 나를 버리고 떠났지만 나는 여전히 너를 사랑한다. 그러니 너도 나에 대한 사랑을 회복하라”는 말씀입니다.

누가복음 19장에 탕자의 비유가 나옵니다. 둘째아들이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아버지의 재산을 가지고 집을 나가 버렸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변함없는 사랑으로 아들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재산을 낭비해도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은 변함없습니다. 부모의 은혜를 망각해도, 아버지를 버렸음에도 아버지의 아들에 대한 사랑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매일 동구 밖을 바라보며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께서는 오늘도 베드로 같이 주님을 배반하고 떠나 버린 우리를 여전히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똑같이 “나는 너를 여전히 사랑하는데 너도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이 질문은 주님이 우리에게 사랑의 프러포즈를 하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프러포즈를 하실 때 우리도 사랑으로 응답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프러포즈할 때 꽃을 잘 사용합니다. 장미꽃 백송이를 들고 프러포즈를 하면 얼마나 감동적입니까? 

그런데 우리 주님은 장미꽃보다 더 붉고 아름다운 것으로 우리에게 프러포즈를 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우리 주님의 십자가는 장미꽃보다 더 붉고 백합보다 더 아름답습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통하여 자신을 우리들에게 주셨습니다. 장미 백송이보다 더 붉고 진한 십자가의 사랑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이러한 엄청난 사랑의 프러포즈를 받은 우리도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하나님도 우리에게 사랑의 고백을 이미 하셨습니다. 사 43:4절에 “네가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며 내가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생명을 대신하리니”라고 하시며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놀라운 사랑의 프러포즈를 하셨습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다 ‘사랑한다’는 말을 듣고 싶어 할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도 우리들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듣고 싶어 하십니다. 이제는 우리가 사랑을 고백할 차례입니다. 주님은 사랑을 확인하고 싶어 하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는지 아시지만 그 고백을 듣고 싶어 하시는 것입니다. 사랑은 고백하는 것입니다. 표현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일방적인 것이 아니고 쌍방이 주고받는 관계적인 것입니다. 혼자서 하는 사랑은 일방적이지 관계적인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 물음은 2천 년 전에 예수님이 베드로에게만 하신 질문이 아닙니다. 이것은 지금,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날마다 묻는 질문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시면 우리는 “네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합니다.”라고 확신있게 대답하시기를 축복합니다.  


2.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말은 사랑을 “자신의 욕심에 이용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동안 가는 곳마다 예수님을 따라 다니는 군중들은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군중들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이들이 아니라 예수님을 이용하는 이들이었습니다. 자신의 병을 고침 받으려고 몰려 든 사람들이었습니다.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몰려들었고, 자신의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예수님께로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따라 다니던 제자들까지도 예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이용하였습니다. 지금 예수님이 하시는 것을 보니 왕이 될 것 같았습니다. 인기가 최고였습니다. 어느 누구도 행할 수 없는 기적을 행하고 계셨습니다. 오병이어 시간 후에 사람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고 하였습니다. 

마가복음 10장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와서 요청하였습니다. “선생님,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장관자리 하나 차지하고 싶다는 말이었습니다. 이처럼 모두가 예수님을 이용하려는 제자들뿐이었습니다. 결국 베드로와 제자들이 예수님을 배반하고 도망한 것도 예수님 때문에 자신들이 피해를 당하지 않겠다는 생각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이용하려고 한 베드로에게 질문한 두 번의 질문은 희생적인 사랑인 아가페의 사랑을 말합니다. ‘네가 나를 위해서 희생할 수 있느냐?, 나를 위해서 희생적인 사랑을 할 수 있느냐?’라는 질문입니다. 그때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질문에 ‘사회적인 사랑인 필리아의 사랑’으로 대답합니다. 이 말은 단순히 ‘제가 주님을 인간적으로 좋아합니다.’라는 대답입니다. 이것은 친구간의 사랑, 사회적인 사랑, 존경하고 좋아하는 상태의 사랑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네가 정말 나를 사랑하느냐?, 네가 나를 위해 정말 희생할 수 있느냐?’라고 물으셨는데, 그런데 베드로는 그렇게 대답을 하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위해 죽기를 각오한 베드로는 감히 최고의 사랑,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신 예수님의 사랑 앞에 자신을 희생하겠다는 완전한 사랑을 고백할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고, 예수님을 배반했던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께 완전한 사랑을 고백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한때 “모든 사람이 주님을 버릴지라도 나는 버리지 않겠다.”고 큰소리쳤고, “주를 위해 목숨을 버리겠다.”고 호언장담했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감히 배신자였던 자가 또 큰소리 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베드로는 주님의 사랑을 확인하고 그는 평생 주님을 위해 헌신의 삶을 살았습니다. 목숨을 내 놓고 담대하게 예수님을 증거 하였고, 최후에는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신앙생활에서 실패하는 많은 이유 중에 제일 큰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온전히 헌신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나를 위해 희생하시고 헌신하신 것처럼, 나도 주님을 위해 생명을 바치겠다는 희생과 헌신의 믿음이 있어야 하는데, 우리는 여전히 나 자신만을 위하는 이기적인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언제나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하나님과 주님을 만나는 영적인 교제의 시간인 예배를 개인적인 이유로 너무나 쉽게 범하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사람은 언제나 대화하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하나님과 주님과의 대화시간인 기도를 얼마나 등한시 하고 있습니까?

사랑하는 사람은 모든 것을 주어도 아깝지 않은데, 우리는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물질과 시간과 내 삶을 드리는 것이 너무나 힘들지 않습니까? 오늘 주님이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실 때 우리 모두가 주님을 사랑하므로 헌신과 희생의 삶을 살겠다고 고백하는 시간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3.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말은 “사랑한다면 표현하라”는 의미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물음은 사랑한다면 그 사랑하는 행위를 보여 보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예수님을 정말 사랑하십니까? 그러면 그 사랑을 고백하십시오. 그리고 사랑을 표현하십시오. 사랑에는 의무가 수반됩니다. 사랑한다면 지킬 것이 있고 할 일이 있습니다. 

이제 말 보다 행동으로 네 사랑을 보이라고 명하십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 했습니다. 실천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 삶의 현장에서 드러나지 못하는 믿음, 표현할 줄 모르는 믿음은 거짓 믿음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말이나 철학이나 이론이나 생각에 그쳐서는 안 됩니다. 사랑은 우리의 삶의 행위로 구체적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자 베드로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15절에 “내 어린양을 먹이라”고 하셨고, 16절에서는 “내양을 치라”고하셨고, 17절에서는 “내양을 먹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처음 만났을 때 "내가 너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사명을 주셨습니다. 가장 위대한 사명을 부여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믿었던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배신했습니다. 이 세상사람 같으면 두 번 다시 기회를 주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더욱 큰 책임을 주셨습니다.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고 하셨습니다.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신다는 것은 단순히 복음 전도자가 되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내 양을 먹이라는 것은 생명을 양육하고 관리하는 더 무거운 책임을 말하는 것이며, 같은 사명이지만 더 무겁게 책임을 지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한평생 두 가지 일을 해야 했습니다. 하나는 잃어버린 영혼을 찾는 것이요, 사람을 낚는 일이요, 전도하는 것이요. 또 하나는 주님 앞으로 돌아온 사람들을 목자가 양을 돌보듯이 돌보고 먹이고 인도해야 되는 사역입니다. 이 영광스러운 사역을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맡기신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귀한 직분을 주셨습니다. 귀한 사명도 주셨습니다. 우리가 받은 직분과 사명을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에 잘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부탁을 거절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친한 친구의 부탁을 거부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하나님이 맡기신 일을 기쁨으로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정말로 주님을 사랑합니까? 참으로 주님을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사랑을 하고 있습니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이 물음은 2천 년 전에 있었던 어느 작은 마을에서 예수님이 베드로에게만 물었던 질문만은 아닙니다. 이것은 지금,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날마다 물어지는 질문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주님이 물으실 때, 우리 모두 “제가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을 위해 헌신과 충성의 삶을 사시며, 주님의 명령을 잘 감당하므로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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