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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선택과 거절의 신앙 (히 11:2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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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과 거절의 신앙 (히 11:23-26)    
 
인간의 가치를 결정하는 말 중에 꿈을 가진 존재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세상에는 내가 가져야 할 꿈이 있고 버려야 할 꿈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허황된 꿈을 가졌다가 망하는 사람도 있고, 잘 된 꿈을 가지고 성공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계속 가서는 내가 망할 꿈이라면 빨리 깨어나야 됩니다. 이 꿈 이대로 가다가는 나도 망하고 남도 망하게 할 꿈이라면 얼른 꿈에서 깨어나 제 자리로 돌아와야 합니다. 

자, 그런데 비단 꿈만이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영역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 정말 가져야 할 것과 진정으로 버려야 할 것을 구분하지 못하여 신앙의 퇴보의 길을 걸을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잡으라고 주시는 것도 가지지 못할 때가 있는가하면 일찌감치 하나님께서 포기하라고 명하신 것을 아직까지 부여잡고 목을 매고 있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런데 왜 아직까지 이것들을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까? 무엇이 나로 하여금 버려야 할 것을 버리지 못하도록 움켜잡게 하느냐 말입니다. 이 애착이 어디에서 시작 되는지를 가만히 생각해보면 결국 어리석은 욕심에서 비롯됩니다. 

욕심이라는 말을 우리사전에는 “무엇을 지나치게 탐내거나 누리고 싶어 하는 마음” 이라고 적어 놓고 있습니다. 히브리말로 그 뜻을 살펴보아도 같습니다. “무엇을 가지기 위해서 온 마음이 그 곳으로 쏠리는 것” 이라고 정리 할 수 있습니다. 

사실 무언가를 가지기를 원하는 마음은 하나님께서 주신 순수한 감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본래의 순수한 마음에 인간의 지나침이 더해져서 문제의 욕심이라는 감정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욕심이라는 인간 감정을 이길 수 있는 단 하나의 방법은 본래 그 감정의 주인이신 하나님께로 가야만 해결 될 수 있습니다. 욕심이라는 감정을 제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신앙뿐이라는 말입니다. 신앙으로 극복 할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물질에 관한 욕심, 명예에 관한 욕심, 그 어떤 것도 신앙 외에는 달리 풀 수 있는 방법이 어디에도 없습니다. 

위대한 사도 바울은 자기의 지나온 모든 것들, 즉 공적, 명예, 신분, 지위까지도 “배설물처럼 여기노라.” 는 전대미문의 신앙고백을 한 사람으로 유명한데 이런 고백이 있기까지 얼마나 우여곡절을 겪고 얻어 낸 고백입니까? 

사실 바울도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입니다. 왜 편하고 좋은 것을 몰랐겠습니까? 왜 욕심이 없었겠습니까? 정말 버리기 싫은 것들도 많았겠지요. 그러나 그가 예수 안에 사는 법을 배웠을 때 이 모든 것들의 가치 없음을 깨닫게 되었고 배설물처럼 여겨 버렸노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욕심이 어떤 것인지도 알고, 그러기에 그 욕심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도 알고, 더 더욱이 그 욕심에서 벗어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잘 알지 않습니까? 그래서 고민하고 갈등하며 살아갑니다. 날마다 이 갈등이 없는 날이 없습니다.

사실 사람이 아무런 의식 없이 살 수 있다면 고민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의식이란 것이 생기면서 고민과 갈등은 더욱 커졌습니다. 사는 것이 무엇인지, 죄가 무엇인지, 하나님 앞에서의 욕심이 어떤 것인지를 깨달은 순간부터는 날마다 고민과 갈등 속에 살게 되었습니다. 

특히나 신앙인으로서 이런 갈등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참으로 괴로운 일입니다. 이러한 욕심을 버릴 줄 아는 신앙에까지 나아가야 되는 줄 알면서도 불쑥불쑥 불신앙 적인 생각들이 앞 설 때도 있고, 세상적인 해결 방법들이 먼저 떠오를 때도 있습니다. 이게 신앙과 세상 사이에 끼어 사는 신앙인들의 어려운 현실입니다. 

자, 신앙인으로서 우리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할 것입니까? 사도 바울의 중요한 고백 하나를 생각합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 는 고백입니다. 이 고백처럼 우리도 예수 안에서 날마다 죽는 경험을 할 수만 있다면 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 한다.” 는 속담을 두고 이야기가 있습니다. 지렁이를 밟으면 꿈틀하는 이유가 뭐냐는 겁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덜 밟았기 때문에 죽지 않아서 꿈틀거린다는 재밌는 답입니다. 단번에 죽을 정도로 밟지 않았기 때문에 꿈틀거리는 것이지 제대로 밟으면 꿈틀거릴 겨를이 어디 있겠냐는 겁니다. 

오늘 아직까지도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온전히 순종치 못하고 때때로 내 고집이 꿈틀거리고, 내 욕심이 꿈틀거리며 내 자존심이 살아 꿈틀거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고백처럼 우리가 날마다 예수 안에서 죽는 경험을 한다면 순종하지 못할 일이 없을 것이고, 버리지 못할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신앙생활은 언제나 우리에게 결단을 요구합니다. 이 결단의 중심에는 언제나 버릴 것을 요구하는데 인간이 자기의 것을 버리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 없기에 여전히 머뭇거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은 신앙적인 차원입니다. 버릴 것을 버리고 선택할 것을 잘 선택하고 나면 얻어지는 것이 훨씬 유익한 것들이요, 영원한 가치가 있다는 것이 신앙의 원리이며 성경이 보여주는 바입니다. 

바로 오늘 우리는 본문에서 거절과 선택의 분명한 신앙을 가진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늘 우리가 갈등하고 있는 버릴 것을 버리고 가질 것을 가질 줄 아는 신앙의 모범을 보여주는 [모세] 입니다. [모세] 는 자기가 인간적으로, 세상 적으로 누릴 수 있었던 모든 영화들을 버렸던 사람입니다. 

사실 모세가 버린 것들은 인간이 이 땅에서 살면서 누리기에 최고의 것들이었습니다. 이것들만 있으면 세상에서 남을 부러워할 일이 없고,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하며 살아갈 수 있는 정도의 것들이었습니다. 당시 세상 사람들이나 오늘 비 신앙적인 사람들은 그를 바보라고 비웃을지도 모릅니다. 우리 또한 신앙 없는 눈으로 바라보면 모세가 바보처럼 여겨집니다. 

그가 과감하게 버린 것들이 어떻게 얻어진 것들인지 아십니까? 순탄하게 얻은 것이 아닙니다. 죽음의 지경에서 벗어난 뒤에 주어진 것들입니다. 더구나 얻은 것을 버린 뒤에 그에게는 다시 죽음이 닥쳐왔습니다. 그 정도로 자기의 목숨을 부지해 줄만한 세상 적 가치가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모세는 버렸습니다. 믿음을 위해서라면 버리는 일을 주저하지 않고 오히려 죽음의 길을 택했던 모세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고자하는 모세의 신앙이자 우리가 가져야 할 믿음의 자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모세가 취한 뚜렷한 신앙의 결단 행위를 표현하자면 “거절하고 선택했다” 는 말로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거절과 선택이라는 그 내용을 좀 더 세밀하게 들여다보면 궁극적으로는 신앙과 불신앙의 갈림길이라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즉 오늘 모세는 신앙과 불신앙의 사이에서 보여 주어야할 뚜렷한 행로를 결정해 줍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십시다. 무엇을 선택하는 것이 쉬울까요? 거절하는 것이 쉬운가요? 그렇습니다. 사람은 선택하기보다 거절하기가 훨씬 더 어려운 겁니다. 

자 그렇다면 선택보다 힘든 거절에 대해 모세는 어떻게 했습니까? 무엇을 거절합니까? 먼저는 명예와 지위를 거절했습니다. 모세가 거절한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는 자리는 엄청난 명예와 지위가 있는 자리입니다. 명예와 지위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분명히 세상에서 추구해야할 삶의 목표 중에 하나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면 그런 명예는 마땅히 거절돼야 하며 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 바로 살아가는 데 거침이 되는 지위라면 거절해야 한다는 것이 모세가 보여주는 의미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분명히 인식해야합니다. 

이것을 착각해서 교회 안에서 남선교회 회장이나, 여전도회 회장을 시키려는데 “나는 명에 따위에 관심이 없고, 지위를 탐하지도 않는 사람이야!” 한다면 이것은 거절이 아니라 교만인 것입니다. 이 지위는 분명히 하나님 나라와 교회를 위한 일이기 때문에 마땅한 것입니다. 올해도 기관별로 총회할 때는 이런 따위의 거절을 가장한 교만은 없기를 바랍니다. 

뿐만 아니라 모세는 일확천금을 누릴 수 있는 재물의 기회도 거절했습니다. 본문에서 이 사실을 “애굽의 모든 보화를 거절했다.” 고 표현했는데 이 말의 배경을 쉽게 이해하려면 당시 애굽의 재력이 어마어마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당시 애굽은 경제력, 군사력, 기술과 과학, 학문과 문화가 발달해있었고 돈과 힘이 있었습니다. 고로 본문이 말하고 있는 “애굽의 모든 보화” 라고 하는 것은 한 마디로 이 세상에서 인간이 얻을 수 있는 그 모든 것들의 대명사로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모세는 이 모든 것을 다 버렸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세상 물정을 몰라서 그랬을까요? 아닙니다. 오직 그의 믿음 때문입니다. 모세가 버렸던 애굽은 이 세상의 상징이요, 불신앙의 요소들입니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모세가 버린 것은 불신앙적인 모든 요소들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단순한 명예, 지위, 재물의 의미보다는 불신앙을 버리고 신앙을 택했다고 보는 것이 옳습니다. 

더 나아가 모세의 신앙이 위대한 것은 모든 것을 버리는 것으로 끝내지 않았다는데 있습니다. “거절 한다” 는 것은 소극적 차원이고, “선택 한다”는 것은 적극적인 차원입니다. 거절은 그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보다 낳은 것을 선택하는 것에 의미가 있습니다. 결국은 선택하기 위해서 우리는 거절해야 합니다. 더 좋은 것을 선택하기 위해서는 좋지 못한 것을 거절해야 합니다. 불신앙적인 것을 거절할 줄 아는 용기가 있다면 신앙적인 것을 선택할 줄 아는 적극적인 자세가 필요합니다. 

모세는 애굽의 이 화려한 모든 것을 거절하고 무엇을 선택했습니까? 26절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더 큰 재물로 여겼다.” 고 했습니다. 이 분명한 신앙적가치관이 모세를 뜨겁게 만들었습니다. 가치관의 문제입니다. 세상이냐, 신앙이냐는 것이나 신앙과 불신앙의 사이에서 선택의 결과는 가치관의 문제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앙과 불신앙의 사이에서 늘 갈등하며 살아갑니까? 거절과 선택이 중요한 신앙을 가늠합니다. 특별히 지난 주간은 민족의 고유명절인 중추절이 끼어 있는 주간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흥청대는 속에 우리들에게는 신앙과 불신앙의 사이에서 수 없는 갈등이 오고가는 명절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이든지 여러분의 신앙적 가치관이 신앙과 불신앙의 사이에서 현명한 결단을 가져다주는 거절과 선택이기를 바랍니다. 

앞으로도 살아가시면서 신앙에 방해가 되는 것들은 과감히 거절하시고 올바른 선택을 하셔서 우리 믿음의 성도들이 하나님께서 더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속에 살아가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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