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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십자가의 능력과 지혜 (고전 1:1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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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능력과 지혜 (고전 1:18-31)

 
우리가 처음 신앙을 받아들이게 된 계기가 무엇이었습니까? 건강하고 부유하고 행복할 때였습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 반대입니다. 우리가 가난하고 고독하고 병들고 괴로웠을 때 그 때 신앙에 대하여 마음이 열리고 믿음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그리고 믿은 후에 우리는 축복을 경험할 수 있었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번영하게도 되었고 건강도 얻었고 인생의 여유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다 보니까 처음 믿었을 때와 생각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우리가 누리는 축복을 당연하게 생각하게 되었고 그것을 나의 권리로 생각하고 그렇게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한국의 다수 유명한 목사님들의 메시지가 바로 그런 것입니다. ‘당신들도 나처럼 예수를 믿어 성공을 누리시오. 당신들도 나처럼 기도하고 나처럼 헌신하고 헌금을 하면 내가 성공한 것처럼 당신들도 성공할 수 있습니다.’ 유명한 교회가 사람들에게 어필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교회가 크다는 사실 자체가 메시지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장한 것을 보니 뭔가가 있겠지!’라고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틀린 것은 아니에요. 하지만 핀트가 빗나간 것입니다. 주소를 잘못 알려 주는 것입니다. 애초에 주님을 그렇게 만난 것이 아니고 애초에 그런 동기로 주님을 만난 것이 아닌데 결과를 가지고 동기를 만드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세상에 대하여 ‘여러분, 예수님을 믿으시오. 예수님을 믿고 성공하시오. 예수님의 능력을 믿으면 못할 일이 없습니다.’ 이렇게만 가르친다면 세상에 예수님을 안 믿을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안 믿는 것이 손해에요. 당연히 모든 사람들이 믿으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실상은 다수가 믿기를 거부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들이 미련하기 때문에 그렇습니까? 아니에요. 이들이 믿기를 거부하는 이유는 오히려 우리보다 기독교를 더 잘 이해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역설적인 것입니다마는 기독교인들보다 비기독교인들이 십자가의 도를 더 잘 압니다. 다만 그것을 거부하고 싫어하고 저항하는 것뿐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하나님은 약해 보입니다. ‘하나님이 정말로 전지전능하시다면 왜 좀 더 화끈하게, 좀 더 빠르게 세상의 문제를 처리하지 않느냐? 왜 나의 문제를 좀 더 빨리 시원시원하게 해결해 주지 않느냐? 내 문제는 고사하더라도, 하나님 당신의 문제조차도 왜 화끈하게 해결하지 못하지 않느냐? 세상의 많은 범죄자, 마약, 전쟁, 기근, 이단 사이비, 내가 하나님이라면 단숨에 화끈하게 처리 할 텐데, 왜 하나님은 미적거리냐? 하나님이 기적 몇 개만 일으키시면 대한민국 인구의 50는 믿을 텐데 왜 그렇게 하시지 않느냐?’ 여러분은 그런 생각을 하실 때가 없습니까? 하셔야 됩니다. 

하나님이 약하고 무력하게 보일 때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25절에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하나님의 약한 것’이란 단어가 나옵니다. 우리가 평소에 쓰지 않는 말이에요. 우리는 평소에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권능, 하나님의 힘이라는 말 쓰기를 좋아할지언정 하나님의 약함 이런 개념은 우리에게 생소합니다. 제가 오늘 예배를 준비하면서 오늘 설교 주제와 부합한 찬송가를 찾아보았는데 부합한 찬송가가 거의 없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찬송가뿐만이 아니고 그 많은 찬양곡 중에도 십자가의 도를 노래하는 곡이 별로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그건 굉장히 놀라운 일이고 중요한 일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건 그만큼 십자가의 도가 사람들이 깨닫기가 어렵기 때문이고, 깨닫더라도 사람들에게 별로 인기가 없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약함이고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방법을 말하는 것인데 십자가의 도를 모르면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방법이 눈에 보이지 않고 납득되지 않습니다. 

독교의 진리는 십자가의 도에 담겨져 있습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게 맞아요.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에요. 다만 하나님은 당신의 능력을 과시하시지 않고 인생의 불편함, 인생의 모순, 인생의 시련을 제거할 목적으로 당신의 능력을 과시하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그것을 증명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십자가의 수난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할 수만 있거든 이 잔이 나를 지나가게 해 달라’고 구하셨지만 그 잔은 지나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그 잔을 마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잔을 통해서만 이루실 위대하고 선한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케네디 가문을 잘 아실 것입니다. 케네디가의 가부장인 조세프 케네디와 아내 로즈 케네디는 모두 거의 열 명의 자녀를 두었습니다. 조세프 케네디는 자기가 미국의 대통령이 되는 꿈을 가졌지만 그것이 무산된 후에는 자기 아들들이 그것을 이루어주기를 바랬습니다. 그래서 첫 아들 조세프 케네디 Jr에게 많은 기대를 걸었습니다. 조세프 케네디 Jr는 하버드 대학을 나오고 키도 크고 잘생기고 리더십이 있는 유망주였어요. 그런데 그만 2차 대전 중에 전사했습니다. 

그래서 둘째 아들인 John F. Kennedy가 그 바통을 이어 받게 되고 결국 대통령이 되는데 성공했지요. 그러나 그는 비극적으로 저격을 당해 사망했고 그래서 세 번째 아들인 로버트 케네디가 다시 대통령 후보가 되었는데 선거 유세 도중에 그도 암살을 당했습니다. 이것을 가리켜 케네디 가문의 비극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케네디가의 비극은 여기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에요. 그들에게는 로즈메리라는 딸이 있었는데 이 딸이 정신지체아로 태어났습니다. IQ가 70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평생 특수시설에서 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아버지 조세프 케네디는 케네디 가문에 이런 자식이 태어났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어요. 그는 케네디는 위너만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자기도 위너이고, 아들도 위너이고, 케네디 가문에 속한 자는 다 우수하고 똑똑하고 성공적인 인물이 되어야 되는데, 정신지체아가 태어났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고 그것을 가문의 부끄러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아내 로즈 케네디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는데 그는 로즈마리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이 딸을 소중하게 키워야 된다고 믿었습니다. 그 남편 조세프 케네디는 아내의 신앙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왜 우리에게 이런 시련을 주느냐?’ 하나님을 의심했어요. 아내의 신앙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철학자 니체가 기독교 윤리를 비판한 이유도 이와 비슷합니다. 니체는 기독교 윤리가 ‘노예들의 윤리’라고 말했습니다. 약한 자를 위한, 약함을 정당하게 위한 윤리라고 비판했습니다. 니체는 강한 것이 옳고 그는 강한자의 윤리를 믿었어요. 
이후에 독일의 히틀러도 같은 생각을 공유했습니다. 그는 독일 민족은 강한민족이요 우수한 민족이며, 독일 민족의 우수함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열등한 자들을 제거해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히틀러는 독일의 정신지체인들을 가두고 생식을 못하게 하고, 그리고 유태인과 집시들마저도 제거하고자 했습니다. 이것이 소위 그들의 힘의 윤리, 강함의 윤리였던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은 기독교인이 될 수 없습니다. 기독교는 그들에게 미련하게 보이고 연약하게 보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기독교를 배격하고 거부합니다.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지만 기독교는 힘의 윤리가 아니에요. 하나님은 힘으로 세상을 구원하시지 않았습니다. 십자가의 도는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 모두에게 해당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방법으로 역사하십니다. 이것을 모르는 사람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경험할 수도 없고 깨달을 수도 없습니다. 십자가의 도. 고난이 있은 후에 영광이 있고 ,낮아진 후에 높아지고, 죽은 후에야 생명을 얻고, 손해를 본 후에야 유익을 얻고, 회개한 후에야 의롭다함을 얻습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이 온전케 됩니다. 아픔을 겪은 후에야 위로를 받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도에요. ‘이 같은 도는 진리로다’ 십자가의 도를 모르면 하나님의 역사가 멀리보입니다.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어디서 경험할 수 있습니까? 우리의 강함? 우리의 우월함? 우리의 자랑? 아니에요. 우리의 연약함, 실패, 부끄러움, 여기에서 하나님을 경험합니다. 우리가 죄를 짓고 애통해 본 적이 있어야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위대한지를 깨달을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기 전까지는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가난하고 약했을 때, 그 때 하나님이 더 가까웠고 더 은혜를 쉽게 받을 수 있었습니다.

저희 아버님은 캐나다로 이민 가시기 전까지는 예수님을 믿지 않으셨습니다. 교회를 몇 번 나가기는 하셨는데 헌금에 대해서 늘 불평하셨고 예배를 지루하게 생각하셨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저희 아버님으로 하여금 믿음을 갖는 계기가 되었느냐? 몸의 질병이에요. 저희 아버님은 중년의 연세에 심한 관절염을 앓으셨습니다. 저희 아버님은 학창시절부터 테니스를 잘 치시고 좋아하셨는데 관절염을 앓으신 후에는 그렇게 좋아하시던 테니스를 치지 못하셨습니다. 그리고 심할 때는 출근하시기도 힘들었습니다. 와이셔츠의 단추를 혼자 잠그기를 못하셨습니다. 그것이 당신에게는 큰 시련이었는데 이 시련을 통하여 마음이 열리고 예수님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장로님이 되셨고 아들은 목사가 됐습니다. 

우리가 가난하고 아플 때 하나님이 더 가깝습니다. 그런데 건강하고 부유해지고 나니까 모든 것이 귀찮고 따분하고 불필요하게 생각되는 거예요. 그럼 하나님의 은혜를 더 경험하기 위하여 일부러 병들고 가난해야 된다는 얘기냐? 그렇게 말하면 누가 받아들이겠습니까? 아무도 안 받아들일 것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는 가난한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가난한 마음. 오늘 본문 26절에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의 소유든 우리의 문벌이든 심지어 우리의 종교적인 의로움이든 하나님 앞에 자랑할 자가 없습니다. 그래서 ‘기록된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 

십자가의 도란 이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능력이 있어요. 이러한 방법을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가 나타납니다. 십자가는 부적이 아니에요.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가 부적 같은 힘이 있다고 생각해서 십자가를 드라큘라에게 보여주면 드라큘라가 무서워하는 식으로 부적과 같은 것으로 생각해요. 자동차 백미러에 십자가를 걸어 놓으면 사고를 예방에 줄 거라고 생각해요. 십자가는 그런 게 아니에요. 십자가는 금목걸이로 목에 거는 게 아니에요. 

십자가는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방법입니다. 세상이 보면 연약하고 미련해 보이지만 도리어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가 나타나게 하십니다. 
내가 지금 당하는 시련을 하나님이 제거해 주지 않는다고 하나님이 무력한 게 아니에요.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를 믿음으로 이끄시고 그리고 예수님의 마음을 알게 하시고 그리고 선한 결과를 이루십니다. 십자가의 도는 결코 실패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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