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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선데이 크리스천 (행 5:3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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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데이 크리스천 (행 5:33-42)
  
며칠 전 KBS 뉴스는 연비를 과장한 현대·기아자동차가 미국에서 무려 8천 억대 소송에 휘말렸다고 보도했습니다. 연비를 과장해 자동차를 팔아오다 자발적으로 13개 모델에 대해 연비를 하향 조정하고 보상 방침을 밝혔지만 소송을 한 사람들은 보상안에 중고차의 가치하락 부분은 빠져 있고 보상방법이 소비자에게 불편을 떠넘기는 식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 뉴스를 보면서 다시 한 번 깨닫게 된 것이 있습니다. 사실을 과장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엄청난 피해를 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에도 연비를 과장해서 팔았던 자동차 회사와 같은 현상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에 대한 기대를 갖고 있습니다. 그 기대는 자신들과 다른 삶을 살 것이라는 기대입니다. 서로 사랑하고 물질을 나누며 봉사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경험한 실제 교인들의 모습은 그들의 기대와는 너무나 다른 것이었다고들 말합니다. 교회 안에서 서로 갈등하고 싸우고 물질에 대한 더 큰 집착을 갖고 있고 자기들끼리만 모임을 가질 뿐 세상에 어려운 이웃들을 향해 봉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그런 사람들을 가리켜서 어느 날부터인가 선데이 크리스천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주일에 교회는 가서 예배드리지만 그것 말고는 자신들과 거의 다르지 않는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대표적인 선데이 크리스천 한 사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은 바로 가말리엘이라는 사람입니다. 본문 34절 보실까요?

“바리새인 가말리엘은 율법교사로 모든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자라 공회 중에 일어나 명하여 사도들을 잠깐 밖에 나가게 하고”

가말리엘이 어떤 사람이라고요? 그는 유대인들의 위대한 스승이자, 모든 백성에게 존경을 받을 만큼 매우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또한 율법교사로서 바울의 스승이기도 했습니다. 사도행전 22장 3절 보세요.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그런데 이렇게 훌륭한 사람, 가말리엘이 참된 그리스도인은 아니었다고 본문은 이야기해 주고 있습니다. 감정적이고 폭력적인 사람들과는 달리 균형 잡힌 정신의 소유자로서 모든 일을 매사에 공정하게 처리하는 사람이었지만 그는 그리스도 예수를 따르는 그리스도인, 주님의 참된 제자는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이런 사람이 오히려 교회에 필요한 것, 아닐까요? 

그렇다면 도대체 선데이 크리스천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세상적인 지혜는 있지만 영적인 것에 대한 분별력이 없습니다. 본문 35절 보세요.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너희가 이 사람들에게 대하여 어떻게 하려는지 조심하라”

이 한 마디에 사도들을 죽이려고 했던 공회의 사람들의 마음이 누그러졌습니다. 대단하지 않습니까? 그가 이어 말한 내용을 보세요. 본문 36-37절 보세요.

“이 전에 드다가 일어나 스스로 선전하매 사람이 약 사백 명이나 따르더니 그가 죽임을 당하매 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흩어져 없어졌고 그 후 호적할 때에 갈릴리의 유다가 일어나 백성을 꾀어 따르게 하다가 그도 망한즉 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흩어졌느니라” 

자, 가말리엘이 흥분한 공회의 사람들을 어떻게 진정시키고 있습니까? 유대인들이 알고 있는 역사와 그 역사 속에서 그것이 성공했는지 아닌 지를 말함으로서 지금 사도들의 현상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역시 학식이 있는 사람은 다릅니다. 참, 가말리엘이라는 사람이 매력적이지 않습니까?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균형 잡힌 생각과 탁월한 지식, 공회에 잡혀온 사람들에 대한 열린 자세, 죄인이라 할지라도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관용정신, 뭐 하나 흠잡을 때가 없어 보이는 사람입니다. 정말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하지만 가말리엘에게는 결정적인 문제가 있었습니다. 영적인 분별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자, 가말리엘이 사도들의 손을 통하여 일어나는 표적과 기사를 보고 어떻게 이해했습니까? 유대인들의 역사 속에 있었던 실패한 반란쯤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사도들로 인해 일어난 현상은 단순한 인간의 역사가 아니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은 성령의 역사였습니다.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허다한 무리가 고침을 받고 날마다 구원받는 사람들이 더해진 것, 그것이 어찌 인간이 행할 수 있는 역사란 말입니까? 하지만 가말리엘은 사람들이 듣기에 그럴 듯한 세상지혜는 갖고 있었지만 영적인 것에 대해서는 포악한 종교지도자들과 똑같이 무지한 사람이었습니다. 

오늘날 그런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예수를 구주와 주님으로 믿고 변화된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도 그들의 모습을 자신의 머리로만 판단하고 생각합니다. 은혜받고 변화된 사람들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보지 못합니다. 하지만 고린도전서 1장 21절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그렇습니다. 자기 지혜로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아무리 탁월한 학식과 균형 잡힌 인격과 성경공부와 기도생활을 많이 한 종교인이라 할지라도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 수는 없습니다.어떻게 그렇게 단정할 수 있냐고요? 탁월한 사람 가말리엘이 바로 그것을 증거 합니다. 우리 중에 가말리엘의 수준에 이른 사람이 있습니까? 그렇게 탁월한 학식과 인격과 성경에 대한 세세한 지식을 갖고 있었지만 그는 하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왜요? 자기 지혜로 하나님의 역사를 판단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선데이 크리스천이 아닌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자기 지혜를 버리고 성령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한 발 더 나아가서 선데이 크리스천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성경에 대한 짧은 지식은 있지만 복음을 받아들이지는 않습니다. 선데이 크리스천들은 특별한 일이 없으면 주일마다 교회를 나오기 때문에 나름대로 성경에 대한 지식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들어서 알게 된 몇 가지 짧은 지식을 가지고 나름대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선데이 크리스천의 문제가 바로 그것입니다. 성경에 대한 짧은 지식을 갖고 기독교를 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한 가지 질문을 해 보겠습니다. 선데이 크리스천들이 가말리엘만큼 성경을 알까요? 

가말리엘, 그는 학식이 뛰어난 성경교사였습니다.하지만 놀랍게도 그런 그가 사도들이 전한 복음을 듣고 전혀 뜻밖의 모습을 보입니다. 자, 가말리엘이 복음을 듣고 어떻게 반응했나요? 본문 38-39절 보세요.

“이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사람들을 상관하지 말고 버려 두라 이 사상과 이 소행이 사람으로부터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만일 하나님께로부터 났으면 너희가 그들을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 하니”

본문을 언듯 읽어보면 가말리엘은 참된 신앙인처럼 보입니다. 무슨 말이냐면 지금 사도들의 소행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 일 수도 있다는 거에요. 사도들을 잡아 죽이려 했던 공회원들과는 다른 모습입니다. 사도들을 죽이려 했던 사람들은 다 하나님 때문에 먹고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생각하며 일을 결정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가말리엘은 달랐습니다. 그는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사도들을 함부로 대하지 않고 하나님께 맡기자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정도쯤 되면 우리는 가말리엘이야말로 신실한 크리스천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선데이 크리스천들의 두 번째 특징은 성경에 대한 나름대로의 지식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들은 어려운 순간이 찾아오면 가말리엘이 하나님을 생각한 것처럼 하나님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예수가 구주이시고 주님이시라는 복음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여전히 자신의 뜻대로 살고, 자신의 생각대로 살아갑니다.

가말리엘이 그랬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이름은 들먹거립니다. 마치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처럼 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쓰임 받고 있는 사도들이 누구인지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전한 복음, 예수가 구주요 주님이시라는 복음에는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을 매질하는 공회원들의 모습을 지켜만 볼 뿐이었습니다. 왜요? 성경에 대한 지식은 갖고 있었지만 복음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선데이 크리스천의 두 번째 문제는성경에 대해 나름대로의 지식은 갖고 있지만 복음을 깨닫고, 복음을 받아들이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나오지만 예수가 구주이시고 주님이시라는 질문 앞에서는 늘 도망을 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선데이 크리스천은 복음 앞에서 자신의 죄와 허물을 깨닫고 예수님을 영접해야 합니다. 오직 예수님을 영접하는 사람만이 참된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선데이 크리스천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기독교에 대해서는 관대하지만 복음을 위해 희생하지는 않습니다. 예수께서는 요한복음 14장 6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관용적인 태도는 중요하지만 진리보다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의 세상은 다원주의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그런 세상에서 기독교만이 참된 종교라고 주장하는 것은 무례하고 어리석은 것이라고들 말합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교회다니는 사람들조차 그런 풍조에 동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볼 때 광신자 취급을 받지 않으려면 관용적인 태도를 가지라고 말합니다. 가말리엘이 그랬습니다. 본문 38절 다시 한 번 읽어보세요.

“이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사람들을 상관하지 말고 버려 두라 이 사상과 이 소행이 사람으로부터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얼마나 관용적인 태도입니까? 공회원들이 사도들이 전한 복음을 듣고 분노하여 잡아 죽이려고 할 때 가말리엘은 그들을 상관하지 말고 버려두라고 말한 것입니다. 

상대방의 소행이 하나님에게서 나올 수도 있다는 생각, 무조건 정죄하지 말라고 말하는 열린 자세, 누구의 편도 들지 않는 객관적인 태도, 화난 군중들에게 둘러싸인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도 상대방을 위해 변론하는 아름다운 관용의 모습, 이것이야말로 기독교인들이 보여주어야 할 자세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기억하십시오. 가말리엘은 참된 기독교인이 아니었습니다. 열린 자세로 기독교에 대해 관용을 베푸는 것, 그것이 기독교인의 참된 모습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참된 기독교인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요? 바로 사도들의 모습입니다. 본문 40-41절 보세요.

“그들이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사도들은 가말리엘처럼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거리며 객관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옳고 그들도 옳을 수도 있다는 적당한 태도를 취하지 않았습니다. 사도들은 오직 그 이름을 위하여,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아니 그 이름을 위하여 고난당하는 것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갔습니다. 

왜요? 그것은 예수가 그리스도였기 때문입니다. 예수가 그리스도, 인류를 구원하실 수 있는 유일하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고난당하는 것을 이상한 것처럼 여기지 아니할 수 있었습니다. 아니 복음을 전하기 위해 자신들의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본문 42절은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살았던 그들의 모습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라”

미국 켄터키 주 루이빌에 있는 사우스 이스트 크리스천처치 교육목사인 카일 아이들먼이 쓴 ‘not a fan’이라는 책에 선데이 크리스천에서 진정한 크리스천으로 바뀐 사람들의 간증이 몇 편 실려있습니다. 그중에 한 편을 간략히 소개합니다.

“나는 비자이 위리어이다. 나는 교회에 다닐 생각이 전혀 없었다. 아내를 교회까지 태어다 주기는 했지만 예배가 끝날 때까지 차 안에서 담배를 피우며 기다렸다. 차에서 기다리는 동안 고향 생각이 자주 났다. 인도에서 나는 힌두교를 믿고 자랐다. 나의 결혼 상대는 부모가 정해 주었다. 하지만 아내 기리자는 우리가 부모 때문에 억지로 결혼한 부부가 아니라 잘 맞는 짝이라고 믿었다. 나는 아내의 성경 사랑을 참아 주려고 애썼다. 그런데 신앙이 다르다 보니 어쩔 수 없이 가정이 화목하지 않았다. 결혼하고 나서 처음 10년간은 갈등의 연속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도 이유는 모르겠지만 차에서 담배만 피우지 말고 안에 들어가 커피라도 한 잔 마시자는 생각이 들었다. 교회 안에 작은 카페가 있었다. 그런데 커피를 들고 앉아 있는데 눈 앞의 스크린을 통해 방송되는 설교가 자꾸만 귀로 빨려 들었다. 그때부터 주일 아침마다 그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설교에 심취했다.  어느 주일, 아내가 함께 기도실로 가자고 했다. 기도실에서 린과 캐럴이라는 부부를 만났다. 설교를 많이 듣다 보니 어느새 질문도 많이 쌓여 있었다. 그래서 린에게 기독교에 관해 하나씩 물어 갔다. 

하지만 유일신이라는 개념은 여전히 거북스러웠다. 어릴 적부터 배웠던 것과는 너무도 달랐다. 게다가 그리스도인이 되면 인도에 있는 가족과 연을 끊을 수밖에 없었다. 가족의 실망이 극에 달할 것이다. 하지만 성경을 공부하고 기도하고 교회 식구들의 사랑을 받을수록 놀라운 깨달음이 찾아왔다. 지난 42년간 찾아 온 그 대상을 드디어 만났다.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다. 그분께 내 안에 역사해 달라고 기도했다. 나를 위해 가정의 회복을 위해 그분의 역사가 절실했다. 우리 부부는 이미 이혼 서류를 작성하고 별거를 하던 중이었다. 한시가 급했다. 오직 예수님만이 나를 구원하실 수 있다고 생각했다.

돌아오는 주일, 믿음을 고백하고 세례를 받았다. 곧바로 이어서 두 아들도 믿음을 고백하고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그 날로 가정을 다시 합쳤다. 하나님은 나를 위한 계획을 품고 계신다. 하나님만이 모든 상처를 치유하고 모든 질문에 답해 주실 수 있다. 내 이름은 비자이 워리어다. 나는 팬이 아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단순한 예수의 팬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은 세상적인 지혜는 갖고 있으나 영적인 분별력이 없는 사람, 성경에 대한 짧은 지식을 갖고 있으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 기독교에 대해서는 관대하지만 복음을 위해 희생하지 않고 적당히 믿고 사는 사람, 성경은 그 사람을 가말리엘과 같은 선데이 크리스천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선데이 크리스천은 크리스천이 아닙니다. (김인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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