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신자가 가장 멋있을 때는 언제인가 (마 5:1-10)

첨부 1


신자가 가장 멋있을 때는 언제인가 (마 5:1-10)

앞으로 얼마동안 우리 예수님의 산상수훈을 가지고 여러분들과 말씀을 나누게 될 것입니다. 이 말씀을 나눌 때 여러분들에게 먼저 밝힐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제가 산상수훈의 말씀을 나눌 동안 영국의 석학 마틴 로이더 존스 박사에게 상당부분을 의존하고 참고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저는 다른 신학자, 목회자의 말씀에 의존하고 참고하면서 부끄러움으로 여러분들에게 이것을 밝히는 것이 아니라 당당하게 밝힙니다. 그것은 제가 여러분들에게 마틴 로이더 존스를 소개한다는 자체가 저에게 영광이고, 또 여러분들에게 영광이 될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세묜 이라는 구두방 주인이 있었습니다. 교회 옆에서 벌거숭이 남자를 보고 그 남자를 자기 집으로 데리고 옵니다. 자기 집도 형편이 넉넉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혼자 둘 수가 없어서 그 남자를 집으로 데리고 오는데, 그 남자 이름은 미하일입니다. 사실은 천사입니다. 미하일은 이 집에 기거하면서 주인 세묜의 구두수선 기술을 배웁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미하일은 주인보다도 일을 더 잘 합니다. 

어느 날 한 부자가 아주 비싼 고급 가죽을 가지고 세묜에게 와서 신고 다닐 구두를 만들어달라고 부탁합니다. 세묜은 이 일을 미하일에게 맡깁니다. 그런데 미하일은 신고 다닐 구두를 만드는 대신에 죽은 사람이 신는 시신용 슬리퍼를 만들고 맙니다. 큰일 났습니다. 세묜은 이 사실을 알고 앞으로 크게 망신을 당하겠다고 생각하고 당할 준비를 하고 있는데, 그 부자의 집에서 어떤 사람이 세묜을 찾아와서 그 부자가 죽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제 그 부자가 필요한 것은 신고 다닐 구두가 아니라 시신용 슬리퍼이므로 그것을 만들어 달라고 이야기합니다. 사람들은 그 부자에게 꼭 필요한 것이 신고 다닐 구두로 생각했지만 천사인 미하일은 그 부자에게 필요한 것은 신고 다닐 구두가 아니라 죽을 때 신는 시신용 슬리퍼라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톨스토이의 소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의 한 부분입니다. 

톨스토이는 이 우화를 통해서 오늘 우리들에게 너무도 중요한 말을 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에게 정작 필요한 것을 알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서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추구하고 그 일을 위해서 힘쓰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을 향하여 애를 쓰고 모든 것을 다 바치고 산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마틴 로이더 존스는 ‘사람들이 행복을 추구하는 방법을 보고 있다 보면 참으로 비극이다.’ 라고 말합니다. 그는 그 까닭을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행복을 얻겠다고 하면서 실상은 불행을 불러오는 방법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존스는 이어서 ‘사람들은 한순간의 편안함을 위하여 어려움을 피한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 어려움을 피하는 대신 불행과 문제를 더할 뿐이다.’ 라고 말합니다. 정말 맞는 말입니다. 잠시 힘든 일, 잠시 손해 보는 일, 당장 내 눈앞에 보이는 어려움을 피하려고 하다보면, 그것만 피하면 내가 더 좋고 행복할 것 같지만 전혀 반대방향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다보면 정말로 어렵고 힘들고 복이 아닌 불행의 길로 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죄가 이렇게 만듭니다. 죄가 우리를 얼마나 얄팍하게 유혹하는지 모릅니다. 우선 쉽게 보이도록 만듭니다. 우선 손해 보지 않고 이익을 보는 것처럼 그 길로 우리를 자꾸 끌고 갑니다. 우선 편하고 쉬운 길로 죄가 인도하는 데로 가다보면 마침내 우리에게 비극만, 불행만 찾아올 뿐입니다. 세상은 이런 죄가 가득합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생각 있으신 분들은 이 세상을 보시면 알 것입니다. 시대가 그렇습니다. 갖가지가 우리를 그 쪽으로 유혹합니다. 특별히 걱정스러운 것은 우리 젊은이들입니다. 젊은이들은 그것이 최고로 좋은 줄 알고 그냥 따라갑니다. 이 사실을 참으로 슬프게 생각하시는 분들도 많을 것입니다. 

이런 시대에 우리 예수님은 참된 행복의 길로 산상수훈을 우리들에게 제시합니다. 이것이 행복으로 가는 참된 길이라고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런 의미에서만 생각해도 예수 믿는 사람들은 참으로 복된 사람들입니다. 아무 생각 없이 아무것도 모른 채 잘못된 길로 가는 우리들에게 순간순간 말씀해주시는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오늘부터 산상수훈을 시작합니다. 그 중에서 팔복을 시작하는데, 성경을 볼 때 한 부분 한 부분을 들여다보기 전에 전체를 보는 것이 참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세부를 보려고 전체를 보지 않다보면 하나님의 말씀, 성경을 해석할 때 오류를 범할 가능성이 참 많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전체로서 주는 의미가 대단히 중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을 놓칠 수 있습니다. 정말로 큰 덩어리를 놓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성경을 보실 때에 구석구석을 보기 전에 전체를 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팔복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복, 한 복을 보기 전에 팔복전체를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들에게 팔복 전체를 통해서 주시는 귀중한 말씀을 하시는데, 네 가지로 말씀을 드립니다. 

첫 번째는 기독교인이라면 모두가 팔복의 인격을 가진 사람이 되어야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얼른 생각하면 팔복이란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일부 특수 기독교인들만이 그런 성격, 그런 인격을 가지는 것이지 우리 모두가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수도자라든지, 목회자라든지, 교회 장로님들 같은 중직분자들이나 이런 인격을 가지는 것이지 우리가 어떻게 다 가질 수 있는가를 말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거기에 대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기독교인이라면 모든 기독교인은 누구나 이 팔복의 인격을 갖추어야 한다고 오늘 여러분들에게 먼저 말씀하십니다. 

두 번째로는 기독교인들은 이 여덟 가지 인격 중에 한 가지 혹은 둘, 일부만 갖출 것이 아니라 여덟 가지 모두를 갖춰야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은 이런 복을 가지면 되고, 저런 사람은 저런 인격을 가지면 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이 중에서 한두 가지를 가지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우리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든지 모두 다를 갖추어야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실제에 있어서는 좀 다른 것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마음이 가난한 쪽으로 많은 특징을 가지고 있으면서 거기에 관한 것을 잘합니다. 또 긍휼을 잘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나누어 주는 것을 잘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덜 성숙하고 덜 성장했기 때문일 뿐, 성숙해갈수록, 성장해나갈수록 더 많은 것들을 가지게 됩니다. 이것도 가지고 저것도 가지고 이런 인격 저런 인격을 다 가지게 되고, 그러다 나중에 어느 정도 성숙을 다 이루었다고 할 때는 여덟 가지 인격을 다 가지게 됩니다. 

애통하는 마음을 가지는 사람은 마음이 가난합니다. 또 그런 사람은 긍휼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은 마음이 청결하고 다른 사람들을 다 평화롭게 만들어갑니다. 바가지와 같습니다. 새는 바가지는 다 샙니다. 집에서도 새고 밖에서도 새고, 콜라를 부어도 새고 물을 부어도 샙니다. 화평한데도 무언가 모자라고, 마음이 가난한데도 무언가 모자라지만 단단한 바가지는 집에서든 밖에서든, 무슨 음료수를 부어도 새지 않습니다. 똑같습니다. 제대로 된 기독교인들은 마음이 가난하고 애통하고 긍휼을 베풀고 청결하고 모든 사람들을 평화롭게 만드는 그런 인격을 다 가지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가 아주 구체적인 문제 하나를 생각합니다. 참으로 주의할 것입니다. 여러분 주변에 이런 저런 여러 가지 인격들을 많이 갖춘 것 같은데 무언가 하나가 부족하다고 느껴지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그 모자라는 것이 화평하게 하는 것이라면 그가 가는 곳마다 분란이 생겨나고 다툼이 생겨나고, 그가 가면 시끄럽고, 그가 말하면 다른 사람들의 가슴을 긁는 일들이 있고, 가정도 편하지 않고, 사람들이 자꾸 그를 피하고, 그 사람과 같이 일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이처럼 다른 것은 다 괜찮고 인격적인 것 같은데 이상하게 이것만은 정말로 아니라고 생각되어지는 사람이 있다면 여러분은 이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이 때 이 사람은 다 괜찮고 인격적인 것 같은 것이 아닙니다. 사이다를 부으면 새는데 콜라를 부으면 안 샐 수 있습니까? 그가 잘한다고 하는 것은 위선일 뿐입니다. 그렇게 연출하는 것일 뿐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다른 것을 정말로 잘한다면 평화를 만들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바가 바로 참된 기독교인 그리고 성숙이 더해 가면 갈수록 그 사람은 모든 인격들을 다 갖추게 된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여덟 가지 인격은 그 어느 것 하나도 천성적인 것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모두 다가 후천적이라는 말씀입니다. 너무도 중요한 말씀입니다. 간혹 태어날 때부터 천성적으로 성품이 아주 좋은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에 대해서 사람들이 묻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든다면 교회도 안 나가고 성경도 알지 못하지만 기독교인들보다도 훨씬 더 인격적이고 착한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실제로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것은 생리적일뿐 그 분의 인격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그것을 인격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태어날 때부터 타고난 기질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요즘은 태어날 때와 얼굴이 다른 경우가 많지만, 본래부터 얼굴이 예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을 그 사람의 인격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태어날 때부터 얼굴이 예쁘게 태어났습니다. 제대로 먹지 못했다고 하면서 키가 큰 사람도 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키가 크도록 되어있는 사람일 뿐 그 사람의 인격이나 그 사람의 노력하는 것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이것과 똑 같습니다. 본래 성격이 착하고 인격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팔복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여덟 가지 인격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인격은 본래 그런 사람이든 아니든 하나님의 은혜로 만들어진 후천적인 성품, 인격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천성적인 인격은 태어날 때부터 타고 나지 않으면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로 주시는 이 후천적인 여덟 가지 인격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시는 것입니다. 이 여덟 가지 인격은 그가 참된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든지 결국은 이룰 수밖에 없는 인격입니다. 

그것을 거부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실제로 있습니다. 그러나 그 분이 진정한 기독교인이라면 결국 긍휼한 사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들어가고야 마십니다. 이것이 우리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여덟 가지 인격입니다. 만약 끝까지 거부한다면 어떻게 되는지 아십니까? 우리주님은 끝까지 그 사람을 그렇게 만들고 마십니다. 누가 이기겠습니까? 우리 하나님이 이기십니다. 터지고 때려서라도 기어이 그런 사람이 되게 만들고야 맙니다. 

대표적인 예가 야곱입니다. 처음에 야곱은 하나님의 사람 같지 않았습니다. 형을 속이고 아버지를 속이고 자기만 생각했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으로부터 여기저기 터졌습니다. 그럼에도 야곱은 한참동안 자기만 생각하였습니다. 빈털터리로 온 자기를 거두어준 외삼촌과 같이 잘 살 생각하지 아니하고 자기만 생각하면서 재주를 부리다 얼마나 밉보였습니까? 외삼촌들이 그냥 미워한 것이 아니라 저런 인간이 어디 있는가? 라고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말을 잘 듣지 않자 매를 드셨습니다. 그렇게 사랑하던 아내가 아이를 낳다 죽었고, 아들은 아들로서 못할 짓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이 못쓸 일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사랑하는 아내를 잃어버렸는데, 그 아내가 낳은 정말로 사랑하는 아들을 또 잃어버렸습니다. 

참으로 쉽지 않습니다. 나중에는 힘들고 어렵게 모은 재산도 아무 소용없는 것처럼 되고 마는 어려운 일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목표하신 그 인격까지 이르도록 키워나가신 것입니다. 기어코는 아주 멋진 하나님의 사람이 되지 않았습니까? 반드시 그렇게 되고 맙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시기 때문입니다. 

다시 봅니다. 여덟 가지 인격은 하나님의 은혜로 얻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우리가 얻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들 가운데, 여러분들 주변에, 또 자녀들 가운데 저 사람은 아무리 생각해도 사람이 되지 않겠다고 생각되는 사람이 있을 때 이 말씀을 생각하십시오. 아무리 안 될 사람이라도 하나님 손에 잡히면 안 될 수 없습니다. 반드시 되도록 되어있습니다. 멋진 인간으로 만들고야맙니다. 절대로 포기하지 마십시오. 

혹시 여러분 자신이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의 아들 딸이 그렇다면, 여러분의 배우자가 그런 사람이라면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를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보면 희망이 보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틀림없이 그렇게 만들고야 마십니다. 세 번째 말씀하시는 것이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여덟 가지 인격은 하나도 선천적인 것이 없고, 다 후천적이라는 것입니다. 

네 번째, 여덟 가지 인격은 참된 기독교인과 참되지 않은 기독교인을 구분하는 절대적인 기준이 되고 절대적인 차이가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제가 참되지 않은 기독교인이라는 용어를 쓰는 까닭은 교회 안에도, 오랫동안 교회를 다님에도 불구하고 참된 기독교인들이 아닐 수 있기 때문입니다. 참되지 않은 기독교인들은 교회 밖에도 있고, 교회 안에도 있습니다. 교회 안이든 밖이든 참된 기독교인들과 참되지 않은 기독교인들은 엄청난 차이가 납니다. 이 인격들이 절대적인 기준이 되고 차이가 됩니다. 

인류역사상 기독교가 가장 위대한 때는 참된 기독교인과 참되지 못한 기독교인들 사이의 차이가 가장 분명할 때였습니다. 진짜로 예수 믿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과의 차이가 너무도 그 간격이 클 때에는 기독교가 정말로 위대했습니다. 기독교에 많은 사람이 모이고, 기독교가 국교가 되고 많은 돈이 있고 좋은 예배당을 지을 때 기독교가 위대한 적은 없었습니다. 

반대로 오히려 세상 사람들이 멀리하여 더 가난하고 사람들이 적게 모일 그때 기독교는 세상과 차이가 많았고, 가장 위대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요즘 특별히 이 나라의 기독교는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의 차이는 너무 작아지고 말았습니다. 어떻게 보면 차이가 거의 없습니다. 한국 교회, 한국 기독교가 그만큼 형편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세상 사람들을 교회 안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교회가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 매력적인 곳이 되어야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 아주 조심해야 합니다. 여러분, 이 말처럼 위험한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곧 교회가 세상과, 예수 믿는 사람들과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과 비슷해져야 한다는 말인데 이것만큼 교회를 위협하는 일이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은 교회가 세상과 비슷할 때에, 기독교인들이 비기독교인들과 비슷할 때에 세상 사람들이 교회에 많이 몰려 올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큰 착각입니다. 

여러 사람들이 많은 기간 동안 연구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교회가 교회 밖의 사람들을 교회로,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끌어들일 수 있었던 때는 교회가 세상과 다를 때였습니다. 비슷할 때가 아니었습니다. 같을 때가 아니었습니다. 교회가 세상과 다를 때 세상은 교회를 미워하고 싫어합니다. 

그런데 희한한 것은 미워하고 싫어하면서도 세상이 교회를 관심가질 때는 바로 이럴 때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관심을 가지고 존경할 때는 믿는 사람들과 믿지 않는 사람들의 차이가 날 이때밖에 없었습니다. 

교회가 세상과 같을 때, 예수 믿는 사람들이 세상 사람들과 비슷할 때에 처음에는 세상 사람들이 교회에 쉽게 접근합니다. 들어오기도 합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사람들은 결국 세상으로 발길을 돌리게 됩니다. 그 사람들은 교회 안에 들어와서도 참된 기독교인들이 되지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여러분, 교회에서 세상과 똑같이 편한 것 찾고, 쉬운 것 찾고 더 좋은 것만 찾다보니 그런 문제가 생겨납니다. 그들이 왜 발길을 돌리게 됩니까? 쉽고 편하다고 생각하고 교회 안에 왔습니다. 그런데 와보니 생각과는 달랐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아무리 타락해도 세상보다 쉬울 수 없고, 더 편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 더 편하고 쉬운 세상으로 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교회에 남아있는 사람들은 만약 경우를 생각해서 보험 드는 심정으로 남아있을 뿐입니다. 오늘날 생각 있는 어른들이 개탄하는 일이 이것입니다. 

이것은 기독교 신자 개인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저 분은 교회의 목사님이다. 저 분은 장로님이라는 이야기만 들어도 존경할 때가 언제입니까? 그것은 기독교인들이 세상 흐름과 같이 잘 흐르고, 세상 사람들과 같이 잘 어울리고 잘 놀 때가 아닙니다. 무언가 다르다는 것이 있을 때, 예수 믿는 사람들은 정말로 멋지게 될 수 있습니다. 

그 중에서 하나가 여덟 가지 인격입니다. 여덟 가지 인격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어떤가에 따라 내가 참된 기독교인가, 아닌가를 알 수 있습니다. 이 일 에 있어서 참된 기독교인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너무도 큰 차이가 납니다. 

심령이 가난한 것에 대해서 생각해봅니다. 비기독교인들은 그것을 좋아하지 않고, 못난 사람이나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세상의 자랑거리, 내 얼굴, 내 이름을 내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 세상에서 강한 것을 더 좋아하고 세상에서 이름이 나는 것을 좋아하고 세상에서 잘난 것을 더 좋아합니다. 그러나 참된 기독교인들은 심령이 가난한 것을 좋아합니다. 그리고 세상 다른 사람들에게 좀 바보같이 보일지라도 자기는 그렇게 되기 원합니다. 

긍휼을 생각해봅니다. 비기독교인들은 그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그렇게 살다가는 손해 봅니다. 이득 보는 것이 적습니다. 그러나 참된 기독교인들은 손해 보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긍휼의 마음을 버리지 못합니다. 그 속에 예수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또 주리고 목마른 것에 대해서 생각해봅니다. 세상 사람들은 어떤 곳에 주리고 목마릅니까? 나의 부귀, 영화, 내 이름에 목을 매달지 않습니까? 어떻게 하든 간에 내 이름을 내려고 하고 그저 내가 무엇을 했다고 자기 자랑을 합니다. 참된 기독교인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나라는 이름이 없습니다. 그 사람의 말에는 주어에 나라는 것을 집어넣으려고 해도 들어갈 데가 없습니다. 참된 기독교인들이 그렇습니다. 그 대신 하나님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좋아하신다면,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면 그 쪽을 선택하게 됩니다. 

이제 여러분, 팔복의 거울이라는 것을 하나 만들어 놓으시고 그 앞에 서서 비춰보십시오. 그리고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의 모습이 팔복이라는 그 거울과 어울린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라고 생각하십니까? 어울리든 안 어울리든 내가 저 여덟 가지 인격을 향해서 한 번 애를 써볼만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되십니까? 만약 여러분들이 그 여덟 가지 인격은 나와는 아니라고 생각되고 비춰진다면 내가 참된 기독교인이 아닌가? 심각하게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 하나님은 확실하게 아실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어느 정도 어울린다고 생각되어지거나 혹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나도 저렇게 한 번 살아보아야겠다고 생각된다면 분명하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진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여러분들은 여덟 가지 인격을 다 갖추게 될 것입니다. 거기다 혹시 조금 더 노력한다면 여덟 가지 인격을 갖추는 것이 훨씬 더 빨라지게 될 것입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