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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것이 교회다! (계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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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교회다! (계 1:9-20)

지나온 길이 있다!

어떤 사람이 드넓은 태평양 한가운데서 난파를 당해 황량한 무인도에서 혼자 살게 되었습니다.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멀리 지나가는 배를 보게 되었고, 자신을 발견할 수 있도록 미친 듯이 손을 흔들며 구조를 요청하였습니다. 결국, 그를 발견한 배가 섬을 향해 다가왔습니다. 배에서 내린 선장은 여기저기를 둘러보다 질문을 했습니다.
“저기 오두막이 왜 세 채나 됩니까?”
“저쪽에 있는 건, 저의 집이지요.”
“그럼 그 옆에 있는 건요?”
“그건 제가 다니는 교회랍니다.”
“그렇군요. 그럼 그 옆에 있는 건요?”
“아, 그건 전에 다니던 교회죠.”

교회를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아니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오늘 말씀은 초대교회 대표적인 일곱 교회에 보내시는 메시지입니다. 본문 20절을 보세요.
“네가 본 것은 내 오른손의 일곱 별의 비밀과 또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오늘 소아시아 일곱 교회의 특징을 다 말하려 하지 않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 교회들이 어떤 상황에 부닥쳐 있었든지 간에 칭찬을 받는 교회든, 책망을 받는 교회든, 목회를 잘하고 있었든지 잘 못하고 있었든지, 주님이 보여주신 것이 있습니다. 교회에는 일곱별의 비밀과 일곱 금 촛대가 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젊었을 때 교회를 경멸하고 무시했었다. 그러나 내 조국이 어려워졌을 때 교회는 우리 유대민족의 유일한 희망이었고 소망이며 안식처였다. 내 나이 먹어 석양녘에 교회 외에 내 영혼의 위로를 경험할 수 있는 어떤 곳도 찾지 못했다. 나는 이제 그리스도와 교회로 돌아온다."

여러분에게 교회는 어떤 존재입니까? 사실 만나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처음 시작한 사람보다 여러 가지 이유로 다른 교회에서 오신 분이 많습니다. 그렇다면, 이전교회와 지금의 만나 교회가 어떻게 다르며 여러분이 여기에 앉아서 예배를 드려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혹 또 여러분의 삶에서 다른 교회를 선택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창립 기념일을 맞이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에 주시는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많이 묵상했습니다. ‘교회가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길을 가느냐?’를 심각하게 묻도록 하셨습니다.
“네가 본 것은 내 오른손의 일곱 별의 비밀과 또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20절) 

예수님 손에 들고 있었던 일곱별의 비밀, 일곱 금 촛대가 무엇인지? 모르기는 해도 교회는 새까만 밤하늘에 별처럼 빛나야 하고, 금 촛대처럼 존귀한 존재여야 하지 않겠냐는 생각을 합니다. 언제부터인가 사라져 버린 그 가치를 찾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워드 슐츠가 본질에 대하여 생각하게 되었던 계기가 있습니다.
[Onward] 173~174페이지에 나오는 글입니다.

“내가 입을 열었다. 비틀스 해체가 언제 시작되었느냐는 질문에 대해 폴 매카트니가 답한 내용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 다음 나는 해당 내용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1965년 여름, 비틀스는 처음으로 뉴욕의 시스타디움에서 공연을 했다. 5만 5,000명의 팬이 열광하고 있었는데, 이는 비틀스 라이브 공연 사상 최대 규모의 관중이었다. 그러나 비틀스는 팬들의 아우성과 혼돈 때문에 자신들이 연주하는 곡을 들을 수가 없었다. 그들의 예술이 그들의 인기에 묻혀버린 것이다.

우리가 더는 우리의 음악을 못 듣게 된 게 언제부터입니까? 매장 수가 4,000개를 돌파하면서부터였을까? 우리가 커피에 대한 사랑 및 열정 그리고 고객을 향한다는 사실을 언제부터 잊은 것일까? 관료주의와 분기별 동일매장 비교매출 증가에 연연하면서부터였을까? 그리고 왜 우리는 더는 사업 운영에 있어 커피를 만들 때처럼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지 않는 것일까? 정답은 없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모두 스타벅스가 방황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사실이었다.

스타벅스가 행동을 극적으로 변화시키는 일에 새로이 전면하고 있음을 입증하는 증거로, 나는 일주일 전에 미국 내 7,100개 매장의 문을 일제히 닫고 에스프레소 엘설런스 트레이닝을 실시한 사실을 언급했다."

오늘 우리가 답해야 하는, 아니 한국 교회와 만나 교회가 이 자리에 세워져 있으므로 필연적으로 답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본질입니다.”

요즘 저에게 가장 관심이 있는 것은 “이 교회를 통해 하나님께서 무엇을 이루시기를 원하시느냐?”가 아니라 “이 교회가 왜 이 시대에 존재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게 하셨습니다.

요즘 제가 탐독한 책이 하나 있습니다. 옥한흠 목사님의 [평신도를 깨운다] 개정판입니다. 인상적이었던 부분이 두 개가 있습니다.

하나는, 초대교회가 가졌던 역동성이 종교개혁을 중심으로 소극적이고 방어적이 되었는가?
다른 하나는, 왜 교회에서 평신도와 목회자를 구분하여 평신도 사역을 스스로 소극적으로 만들고 있는가?

첫 번째 질문에 대하여,

초대교회는 선교하지 않으면 안 되는 공동체요, 전도와 선교는 교회의 생명력에 관한 문제였던 반면, 개혁시대에는 전도대상에 대한 고민이 아니라 더는 예수를 믿지 않으면 박해받던 시대에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지 않으면 안 되는 문제였다는 것이죠.

그래서 ‘교회가 무엇이냐?’라는 본질의 문제는 시대적으로 다른 요청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 시대마다 물음에 답해야 합니다. 교회는 살아 있는 유기체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만나 교회의 역사를 바라보며 시대마다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에 주셨던 비전이 얼마나 놀라운지를 보게 됩니다.
만나 교회가 광야와 같은 벌판에 천막을 치고 개척을 하던 때가 1981년입니다.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많은 혼란과 고통을 경험하던 시기에, 광야에서 맛볼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의미로 ‘만나 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사진)

그때 상징적인 성구가 두 개가 있었습니다. 지금도 곳곳에 붙어 있지요.
마태복음 11장 28절,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태복은 28장 19~20절
가라 내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

당시 만나 교회는 쉼이 필요한 사람에게 생명의 만나를 제공해 주고, 그 말씀을 가지고 세상 가운데 살아갈 힘을 주는 교회였습니다. 당시 김우영 목사님은 유명한 설교가였지요. 그래서 사람들이 교회에 모여야 했던 이유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만나 교회가 분당시대를 맞이하던 때, 한국사회 현상과 맞물려 경제발전과 더불어 대형교회의 건물이 지어 졌습니다. 당시에 많은 경제적인 어려움이 있었지만, 건물이 지어지면서 우리 삶의 부흥을 꿈꾸던 그런 시대였습니다. 지금 우리가 고백하는 것은 당시 교회를 지으면서 많이 힘들었지만, 그 헌신 때문에 많은 사역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만들어진 표어가 있습니다.
“모이는 교회와 흩어지는 교회”

이제 이 큰 건물에 교인들이 모여야 하는 이유를 말해야 했고, 모여진 사람들이 흩어져서 무엇을 할 것인지 고민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김우영 목사님은 교회에 장례식장을 만들려고 시도했고, 의대생들을 공부시키며 종합병원을 꿈꿨고, 호스피스를 시작했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모세의 시대와 여호수아 시대로 표현하는데, 그 꿈을 바라보면서 그다음 사역을 남겨 놓고 김우영 목사님은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다음 세대에서 만나 교회는 ‘교회 중심적 교회와 하나님 중심적 교회’를 구별하며 사역에 중심을 두기 시작했습니다. 그동안 교회 건물이 중심이었다면, 이제 이 건물이 무엇을 위해 사용되어야 하는지를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음 세대를 위한 공간에 투자하고, 아직은 세상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존재하는 교회로서 하나님의 마음을 품기를 원했습니다. 또한, 예배 공동체를 통해 영적으로 충만한 삶을 경험하도록 예배 사역에 최선을 다하게 되었습니다.

5번의 다른 예배, 그리고 변화산을 통한 새벽기도 운동은 만나 교회의 특징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역의 기초를 세우게 되었지요.
비전 선언문, 7개의 핵심 사역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 예배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으로 훈련된 제자가 되어
성령의 능력으로 세상을 섬긴다.
그리고 지난해 하나님께서는 만나 교회의 존재 이유에 대한 물음을 던지셨습니다.

우리 교회가 무엇이냐가 아니라 어떤 의미가 있는 교회인지, 그래서 요한복음 15장 말씀을 가지고 아버지, 예수님, 성령님과 연관이 있는 풍성한 열매가 있는 교회가 무엇인지를 고민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지금까지 걸어온 만나 교회의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분명하게 주신 비전이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창립 30주년에 선포했듯이 이 세상을 향해 하나님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게 하셨고, 정말 기적적으로 인도하여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걷는 것도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걷는 것이 되어야겠지요.

WHB는 하나님께서 주신 가장 큰 선물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교회의 이름이 아닌 하나님의 마음으로 사역을 감당하자는 취지에서 시작한 이 운동이, 많은 교회의 연합운동이 되었습니다. 모든 교회가 이름을 내려놓고 헌신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세상에 영향을 주는 단체가 되어, 정부와 지자체와도, 그리고 많은 기업이 동참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처음 시작했던 1% 나눔 운동에 230여 개의 자영업자들이 참여했습니다.
많은 성도가 회원이 되어서 충무로에 있는 사무실이 잘 운영이 되고 있습니다. 교인들과 기부자들이 낸 돈이 가장 적절하게 사용되는 단체가 된 것이죠.

미혼모를 돕는 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처음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죠. 미혼모를 돕는 것이 도덕적으로 올바른지에 대한 물음도 던졌고요.
하지만 누군가 돌봐야 할 사람이라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이라는 생각에서 출발했는데, 많은 도움의 손길들이 찾아오기 시작했습니다. 남양유업과 시작한 모아 사랑 운동은 이제 전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행사가 되어 전국을 순회하며 사랑을 전하는 운동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이제 다시 한 번 교회가 세상을 이끌고 갈 수 있는 가장 정직한 단체로서 누군가 걷지 않은 길에 발자국을 새기는 사역이 될 것입니다.

지난해 시작한 MMP 사역은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에 주신 가장 큰 특권이자 선물이라고 생각합니다. 만나 교회가 외형을 키우는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헌신하기로 작정했을 때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었습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할 수는 없지만 149개의 교회 중에 10여 개를 선발해 시작한 작은 교회 살리기 운동이 150개의 나무가 동참하는 거대한 숲의 운동으로 번져갔습니다.

멀게는 안동에서 가깝게는 성남에 있는 교회까지 우리 교인들이 주일에 함께 예배드리고, 주중에 찾아가서 전도하고, 여름에 찾아가 여름성경학교와 여러 가지 사역을 함께하며 열매가 생겼습니다.
총각 목사였던 한 분이 우리 교회 청년과 결혼하게 되는 일도 일어났고요.
올해 다시 경제적 도움이 필요한 교회와 사역의 도움이 필요한 교회 12개를 새로 선발하여 함께 가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해외 선교에서도 좋은 열매가 맺혔습니다.
가장 성공적인 사역 중의 하나로 선정된 볼리비아의 IT 학교 건립과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운동이 너무 잘 운영되고 있습니다. 먹지 못해 잘 자라지 못한 한 아이가 남양에서 후원한 분유를 먹고 건강을 되찾는 모습을 보면서 우유와 요구르트를 생산할 수 있는 공장을 세워줘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가 다음 주일에 창립기념감사헌금으로 드리는 것이 이런 위대한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모릅니다.
이제 이 일은 우리 교회가 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로, 만나 교회, 사회의 기업, 그리고 정부 단체가 함께하는 프로젝트로 만들어 가게 될 것입니다.
참 가슴 뛰는 일이 많지만, 여기서 다 설명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분명한 것은 이 시대에 물음을 던지신 그 물음에 대답하는 교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교인이 함께 그 길을 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간 이 길을 다음 세대가 따라오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할 수는 없지만, 누군가에게 길을 제시해 주고 믿음의 후배에게 하나의 role model이 될 수 있다면 우리의 사명을 다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두 번째 질문에 대하여,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성경에서 사람들을 구별하는 조건은 단 한 가지라는 사실입니다. ‘세상 사람’과 ‘하나님의 자녀’만이 존재합니다. 교회 안에서 어떤 신분의 구별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두 택함 받은 하나님의 자녀일 뿐, 단지 기능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오순절 이후의 본래 교회는 성령을 받은 평신도의 변화된 삶의 모습이었을 뿐입니다. 세상은 평신도를 보면서 교회를 알게 됩니다. [평신도를 깨운다]에서 옥한흠 목사는 로렌스 경의 말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평신도가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들은 교회답게 보이는 건물과 그들 보기에 성직자답게 성장한 목사와 평소 몸에 익은 스타일대로 드리는 예배를 원한다. 그리고 여기에 한 가지 더 원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교회가 그들 혼자 가만히 있게 내버려 두어 달라는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하여 여기에 앉아 있는 많은 사람이 공감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교회의 위기가 여기에 존재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불꽃 같은 눈으로 바라보시는” 주님이 일곱 교회에 편지를 보낸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교회에서 교인들이 살아가야 하는 신앙의 본질을 버렸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교회에서 모임을 하고 예배를 드리며 우리의 만족을 추구해 왔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교회, 원하는 예배, 원하는 목회자를 바라보며 단 하루의 위안처로 삼아온 것이 사실입니다.
50년 전 영국에 가득 찼던 교인이 사라져 버리고, 미국 주류교단의 교회에는 할머니와 할아버지 그리고 단지 수십 명의 사람이 텅 빈 교회를 지킬 뿐입니다.
오늘 우리 교회가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모였느냐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언젠가 빈자리만이 남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교회에서 예배드리는 사람들을 보기 원하는 것이 아니라 예배드리는 평신도가 살아가는 것을 보고 싶어 합니다. 그것이 교회의 역동성입니다.

70년대 통계에 의하면 한 해에 교회가 수천 개가 세워졌던 때가 있습니다. 교회가 세워지는 것이 큰 의미가 없습니다. 교인이 어떻게 살아가느냐가 중요합니다.

93~97년까지 우리나라의 장 차관으로 임명된 인사 중의 기독교 신자의 비율이 67.8%에 이를 정도로 대단했습니다. 그럼에도, 그 당시 한국 사회는 정신적으로 도덕적으로 심지어 시민 질서에 이르기까지 점점 악화 일로를 걸었습니다.
사도행전 2장 42~47절의 초대교회 공동체는 교회의 모습이 아니라 그곳에 모인 교인의 모습이었습니다.


가야할 길이 있다!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에 보면 그 교회의 특징에 맞게, 그 교회를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나와 있습니다. 때로는 좌우에 날 선 검을 가지고, 때로는 불꽃 같은 눈으로 말입니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마지막 절에 있는, "내 오른손의 일곱별의 비밀과 또 일곱 금 촛대라 일곱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20절)"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도 요한이 환상을 보고 보냈던 편지에서 중요한 것은 모든 교회에 모두 하나님의 사자가 갔다는 것이며, 아직은 살아 있는 교회에 대하여 분명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몇 년 전 우리가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 대한 말씀을 나눈 적이 있습니다. 일곱 교회에 같은 메시지는 처음 신앙으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처음 신앙을 회복하라는 것입니다. 지금 일곱 교회가 당하는 고난과 박해는 처음 있는 것이 아니라 처음 교회가 세워지고 박해를 받던 예루살렘 교회와 다를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당하는 모든 문제는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다를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전히 하나님은 계시고, 여전히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고 계시고, 여전히 사단은 하나님의 나라를 방해하며, 여전히 하나님은 세상 모든 민족이 구원받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이제 만나 교회의 비전이 무엇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먼저는 바로 여러분의 삶을 통해 교회가 무엇인지, 하나님이 누구이신지가 증명되어야 합니다. 훈련받지 않은 사람, 더는 자라지 않는 신앙인은 이 세상에서 근심거리가 될 뿐입니다. 히브리서 5장 12절 말씀을 보세요.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

한심한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입니다.

언젠가 김동호 목사님이 저에게 편지를 했던 것이 기억에 남습니다.
‘한국은행 같은 교회’가 되자고 말입니다.

한국은행이 다른 은행을 위해 있는 것처럼, 우리 교회가 다른 교회를 위해 존재하는 교회가 되자고 말입니다. 세상 사람은 자기가 무엇을 가지고, 많은 재산을 자랑할 때, 우리는 가진 것이 없는 것을 하나님 앞에 자랑스럽게 이야기할 수 있는 그런 교회가 되자고 말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재산을 사회에 내놓고, 다른 교회를 위해서 교회의 소유를 나눠주고, 조금은 이해가 안 되는 일이 일어났으면 좋겠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히 11:38)"라고 했습니다. 세상이 재산을 가지려고 싸우는데 우리는 안 가지겠다는 데 싸움이 되겠습니까? 세상은 권력과 명예를 가지겠다고 아등바등하는데 우리가 그런 것에 관심이 없다고 하면 상대가 되겠습니까?

우리가 잘 아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스티브 잡스가 사업을 시작하면서 유능한 펩시의 회장 존 스컬스를 영입할 때의 일화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스컬스가 애플에 갈 이유가 없습니다.
그때 스티브 잡스가 이렇게 묻죠.
“남은 생애를 설탕물을 파는 데 허비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저와 함께 세상을 바꾸는 일을 하시겠습니까?”

[기도의 기본으로 돌아가라]라는 책에서 ‘서툰 사람들’이라는 책에 나오는 박광수 씨의 글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제목은 ‘사랑, 그 미친 짓’입니다.

"사랑에 빠지면 좋은 것이 많습니다. 하지만 그 반대로 나쁜 것도 많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내가 먹고 싶은 것만 먹기가 힘들어집니다. 내가 좋아하는 만화 가게도 가기 힘들고, 일요일에 좋아하는 야구를 하는 것도 눈치가 보입니다. 쉬는 날 늘어지게 낮잠 자기도 눈치가 보입니다. 오랜 친구들과 마주 앉아 밤늦게 소주 한 잔 기울이는 일도 힘들어집니다. 일도 손에 잘 안 잡히고, 생활 리듬도 깨지기 일쑤이지요. 어디 그것뿐입니까? 늘 조바심으로 마음을 애태우고 전에 없던 의심병도 생깁니다. 혼자 있을 때보다 지출도 많아지고, 훌쩍 떠나는 혼자만의 여행은 더더군다나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늘 사랑이 끝날 땐 스스로 다짐합니다. 그 미친 짓을 또 해? 그런데 우리는 아무래도 진짜 미쳤나 봅니다. 그런 굳은 다짐을 잊은 채 또 사랑에 빠져드니 말입니다."

아마도 사랑을 해 본 사람들이라면 이 미친 짓이 이해가 되지 않을까요?
적어도 우리가 교회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라면 좀 미친 것 같은 그 일이 얼마나 귀한지 이해가 가지 않을까요? 결코, 편한 것, 우리가 원하는 것을 꿈꾸는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과 비전을 꿈꾸는 교회가 교회입니다.

저에게 꿈이 있다면 강단에서 이렇게 선포하는 것입니다.
“저보다 교회를 위해 기도를 많이 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의 말을 듣겠습니다. 하지만 저보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 없다면 따라오십시오!”

혹시 하나님의 뜻을 따라가는 것이 불안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기도의 사람 죠지 뮬러를 생각하십시오.
그는 5만 번의 기도 응답을 받았다고 하는데 그 비결이 중요합니다. 그는 말하기를, “나는 기도할 때, 100% 하나님을 신뢰했다.”라고 말합니다. 이 말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기도는 하나님께 문제를 가지고 나오는 것이지만, 문제에 대한 해답을 100% 하나님께 일임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사명을 놓고 고민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사명을 놓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무언가 하나님의 일을 할 때 쉽게 포기하거나 부정적인 말을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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