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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할례, 신앙의 재정비 (수 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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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례, 신앙의 재정비 (수 5:2-9) 

여호수아 1장부터 5장까지의 말씀은 가나안 땅 정복을 위한 준비기간이고, 6장부터 실질적인 가나안 정복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1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비전을 주셨고, 2장에서는 라합을 통해서 승리에 대한 확신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3장에서는 승리를 위한 전략을, 그리고 4장에서는 전쟁(싸움)을 하는데 있어서 필요한 자세를, 그리고 마지막 5장에서는 싸우기 전 마지막 최종적인 점검에 대해서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큰 싸움으로 이끌어가시는 것이 아니라 먼저 작은 싸움을 통해서 승리에 대한 확신을 주십니다. 요단강을 건너가게 해주심으로 가나안 정복에 대한 승리의 표징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작은 일에 결코 소홀히 할 수가 없습니다. 새벽에 승리하는 사람이 하루 온 종일 승리할 수 있고, 작은 일에 승리하는 사람이 큰 일에도 승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25장 달란트 비유에서도 말씀하시기를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작은 것을 통해서 먼저 우리를 테스트(시험) 하신 다음에 더 큰일을 맡겨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요단강을 건너는 것이 최종 목적이 아니고 하나님은 그것을 통해서 더 큰 승리를 맛보게 해주신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작은 싸움에 승리함으로써 큰 싸움에서도 승리할 수 있음을 믿고 "주님! 지극히 작은 일에도 충성하게 하옵소서." 이렇게 날마다 기도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라"라고 하셨습니다. 도리어 1절 말씀에 보면 가나안 땅 주변에 있는 나라의 왕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눈으로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요단 물을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말리시고 우리를 건너게 하셨음을 듣고 마음이 녹았고 이스라엘 자손들 때문에 정신을 잃었더라"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두려움에서 이길 수 있는 길은 실상을 알면 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실상을 알면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열왕기하에 보면 엘리사의 시종인 게하시가 쳐들어온 아람군대로 인해 심히 두려워서 떨고 있었습니다. 그 때 엘리사가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한 자가 저와 함께한 자보다 많다"라고 하시면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그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해주옵소서." 이렇게 기도했을 때 게하시의 눈이 열리면서 불 말과 불 병거가 자신들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것을 보고서 모든 두려움이 사라졌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면 절대로 두렵지 않습니다. 우리는 항상 마음 중심이 하나님께 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죄짓고 사는 세상 사람들이 조금도 두렵지 않습니다. 디모데후서 1장 7절에 보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도 "하나님! 저에게 두려움이 아닌 믿음의 눈을 떠서 모든 것을 보게 하옵소서" 이렇게 항상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넌 후에 길갈에서 할례를 행하는 장면입니다. 여러분! 전쟁을 앞두고 할례를 행하는 것은 참으로 무모한 행동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가 뭘까요?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전쟁의 승리는 군사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순종에 있음을 말씀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이 가장 우선이 됨을 가르쳐주고 있는 내용입니다.

여러분의 삶속에 영적인 슬럼프가 찾아오지는 않습니까? 만약에 그렇다면 여러분은 예배를 통해서 다시금 시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실타래가 엉켜져 있으면 실 끝을 찾아야 풀 수 있는 것처럼, 우리의 신앙이 흐트러져 있을 때에는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 회복에서부터 풀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모세가 죽은 후에 여호수아를 지도자로 세운 이스라엘 백성들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향해서 앞으로 앞으로 거침없이 나아갔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장애물들을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건너갈 수가 있었습니다. 

정월 십일 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에서 올라와서 여리고 동편 길갈에다 진을 치고서 거기에다가 요단강에서 가지고 온 열 두 개의 돌을 기념비로 세우면서 ‘우리가 하나님의 도우심을 꼭 기억하자.’ 라고 서로 다짐을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타고 다니는 자동차도 편리하고 좋은 것이지만 한번 사고가 나면 큰 어려움을 입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잘 타고 다니던 자동차라 할지라도 수시로 정비를 한 다음에 차를 타게 됩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사고를 미리 방지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지금까지 큰 어려움이나 사고 없이... 별탈없이 잘 살아왔다할지라도 앞으로도 험하고 유혹이 많으며 더 악한 세상을 살아가야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도중에 탈락하지 않고 끝까지 믿음의 경주를 잘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정비를 잘 해야 합니다.

왜 우리에게 신앙의 재정비가 필요합니까? 믿음의 성장을 위해서입니다. 죽어 있는 믿음은 성장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믿음이 살아있으면 그 믿음은 성장하게 됩니다. 이처럼 성도들의 믿음이 계속해서 자라갈 때 그것이 목회자에게는 기쁨이고 자랑입니다. 바울사도도 믿음이 온전해져가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항상 자랑스럽고 기쁘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여러분, 지금 내 신앙은 어떤가요? 성장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멈추어 서 있습니까? 지금 우리의 신앙이 어떤 가를 날마다 점검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요단강을 건너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목적지인 가나안 땅을 충분히 점령하고도 남을 만큼 사기가 충천해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생각지도 않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에게 주어졌습니다. 할례를 행하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그들의 눈앞에는 꿈에 그리던 약속의 땅,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이 보이고, 이제 그 땅을 막 손에 넣으려고 하는 순간입니다. 이런 중요한 순간에 할례를 행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마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속에 '그럴 시간이 어디에 있느냐?' 하는 생각이 들었을지도 모릅니다.

원래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나오기 전까지는 할례를 행했던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광야 40년 동안에 그들은 할례를 행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이제 할례를 받은 사람들은 거의 다 죽고 할례 받지 못한 사람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때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2절에 보면 “너는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다시 할례를 행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할례를 받고 나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라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바로 여기에서부터 시작이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동안의 광야생활을 끝마치고 이제 약속의 땅이 내려다보이는 평지에다가 진을 치고 하나님의 명령대로 할례를 행하고 유월절을 지키게 되었습니다. 적들이 그 광경을 다 쳐다보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방인들이 도저지 이해할 수 없는 희한한 광경이었습니다.

언제 적들이 공격해올 지도 모르는 긴박한 순간인데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할례와 유월절을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왜 그들이 앞으로 진군하지 않고 이런 일을 행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과의 언약관계를 먼저 회복하는 것이 더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할례'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에게 주신 약속의 증표입니다. 믿음의 흔적을 몸에다가 새기는 것입니다. 또 오늘 읽은 말씀 바로 뒤에 나오는 내용이 '유월절'에 대한 내용입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430년 동안 애굽의 노예상태에서 해방된 것을 기념하면서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설명해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구약시대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지속시키는 길이 바로 할례와 유월절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 동안 광야를 통과하면서 얼마나 많은 하나님의 능력들을 체험했습니까? 인생의 성패는 우리가 전쟁을 얼마나 잘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가 어떠한지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여호수아의 군대는 가나안 진군... 가나안 점령이라고 하는 중대한 문제에 앞서서 가장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부터 다시금 회복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할 때 하나님과의 관계가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회복하는 것이 곧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구주가 되심을 알고 믿는 순간부터 전능자의 손이 우리와 함께 해주시고 그런 우리의 삶에 더 확실하게 변화되는 믿음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원래 이스라엘 백성들이 태어나면 몇 일만에 할례를 받습니까? 8일 만에 할례를 받도록 되어 있지만, 그동안 그것을 제대로 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연인과 똑같은 사람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광야에서 이리 저리 옮겨 다니느라 조상 때부터 물려오던 할례를 잊어버렸습니다. 택한 백성의 표시인 할례를 누구도 받아야 된다고 생각을 못했던 것입니다. 또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지금은 그런 할례를 받을 만한 상황도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은 어떤 상황입니까? 가나안 족속들과 전쟁 중입니다. 전쟁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남자들에게 할례를 행하라고 하는 것은 스스로 무덤을 파라, 고스란히 적에게 잡혀서 죽어라. 하는 말과 다를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창세기에도 보면 야곱의 딸 디나의 일로 유다와 시므온이 세겜에게 "우리와 통혼하려면 너희 민족도 할례를 받아야 한다."라고 해놓고 세겜 사람들이 할례를 받고 걸음이 온전치 못할 때에 쳐들어가서 그들을 완전히 몰사시켰던 적이 있지 않습니까? 

지금 가나안 사람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소식을 다 듣고 그렇지 않아도 조금도 경계를 늦추지 않고 주변 동정을 부지런히 살피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그들이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다면 가만히 놔두겠습니까? 제대로 걸음도 못 걷는다는 적들이 알면 '옳지 기회는 이때다!' 하고 할례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공격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이러한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 할례를 명하신 데는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가 뭘까요?


첫째로, 할례는 "내가 깨끗하게 살겠습니다" 하는 구별됨의 표시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결 즉, 구별됨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가나안 정복은 어떻게 보면 영적으로 마귀와 싸우는 전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전쟁은 하나님께 있는 것이고, 전쟁의 승리 또한 하나님의 소관이었습니다. 마귀와의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누구 편이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거룩하게 구별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참된 백성이 되려면 가장 먼저는 죄를 끊어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사람들로 구별이 되어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소속이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실 목사가 되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목사답게 준비되어 있으면 하나님께서 거기에 맞게 지혜와 지식과 능력과 은사를 다 주시는 것입니다. 사실 이게 우리에게 어려운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잘 구별되어 있으면 하나님께서 모든 식견과 변별력과 재물과 명예까지도 채워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해야 합니다. 우리의 소속이 어디인가를 분명하게 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할례는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소속입니다" 하는 것을 확실하게 밝혀주는 것이고 그래서 더욱 더 깨끗하고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할례는 "내 자신이 죽겠습니다" 하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혈과 육을 죽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고전 15:50에 보면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라고 했습니다. 고전 6:9에도 보면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라고 했습니다. 갈 5:21에서는 "투기와 술취함과 방탕함과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혈과 육으로는 절대로 가나안을 정복할 수 없습니다. 할례는 우리의 혈과 육을 십자가에다가 못 박아 죽이는 것입니다. 혈과 육이 죽지 않으면 우리의 영이 절대로 살 수 없기 때문에.... 동생 아벨을 죽인 살인자의 피가 우리 안에 흐르고 있는 이상은 우리의 영이 결코 살 수 없기 때문에.....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내가 십자가에 죽어버리면 바로 거기에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나의 능력이 바닥이 나고 더 이상 내가 가망이 없다고 여길 때에 하나님의 능력이 그런 나에게서 나타나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쫓을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젊은 화가가 자기의 스승도 결점을 찾아 낼 수 없을 만큼 완벽한 그림을 그렸습니다. 화가는 자신의 그림에 도취되어서 며칠이고 그 그림만을 쳐다보면서 몹시 흐믓해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가 자기 그림 앞에 갔을 때 그의 스승에 의해서 못쓰게 지워져버린 그림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너무 화가 나서 스승에게 따졌습니다.

"아니, 선생님! 이렇게 훌륭한 그림을 왜 이렇게 못쓰게 만들었습니까?" 그랬더니 그의 스승이 하는 말이 "사랑하는 제자여! 자네는 예술을 사랑하지 않고 자네 자신만을 사랑하고 있네. 그 그림이 이론적으로는 완전하지만 예술이 없어. 그러니 아쉬워하지 말고 다시 그리게나" 이 말을 들은 젊은 화가는 너무 부끄러워서 머리를 숙이고 다시금 붓을 가지고 더 열심히 그림을 그렸다고 합니다.

우리 주변에도 보면 자기를 사랑하고 자기 완벽주의에 빠져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으로 새로운 사람이 되면 우리는 내 자신에게서 완벽을 찾는 것이 아니라 나는 없어지고 나에게 예수님의 형상이 나타나기를 간절하게 소망하는 사람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할례는 '내가 하나님만 의지하겠습니다.' 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 연결된 삶을 살겠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서 있는 적들 앞에서 할례를 행하는... 이런 무모한 행동은 참으로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적들 앞에서 할례를 행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겠다고 하는 믿음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할례를 받게 되면 제대로 걸을 수도 없고, 걸을 수 없으면 싸울 수도 없기 때문에 적들이 쳐들어오면 완전히 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전적으로 순종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아무 불평도 없이 그대로 순종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순종은 내가 골라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게다가 하나님의 말씀이면 더 순종해야 합니다. 나에게 유익이 없어도 하나님의 말씀이면 무조건 순종해야 합니다. 이것이 그물을 내리라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했던 베드로의 자세입니다.

지금까지의 승리도 하나님께서 주셨기 때문에 앞으로의 승리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거라는 믿음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진실로 하나님은 아파서 걸음을 걷지 못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공격하지 못하도록 적들을 막아 주셨습니다. 승승장구 승리하게 해주셨습니다. 순종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는 길은 천하무적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순종하는 자에게는 바로 이런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경험을 의지하는 베드로에게는 실패하는 밤을 주셨고, 자기 지식을 의지하던 아볼로에게 오직 성령으로 된다는 것을 깨우쳐주셨고, 맹목적인 믿음을 가진 바울에게 예수님이 함께 하신다는 실제적인 믿음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여러분!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김서방의 이야기를 한 번 들어보십시오. 윗마을 김서방과 아랫마을 박서방은 서로 친분이 두터운 사이인데 오랫동안 왕래하지 않아서 서로 궁금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루는 김서방이 박서방 집을 찾아갔더니 마당에서 박서방과 아이들이 장난을 치고 있었습니다. 박서방이 먼저 한 아이를 안아다가 높은 곳에 세워놓고는 한 걸음 물러서서 그 아이에게 뛰어내리라고 하자 그 아이는 겁도 없이 뛰어내려 박서방의 품에 안겼습니다. 이번에는 또 다른 아이를 높은 곳에 올려놓고 뛰어내리라고 하자 아이는 뛰어내리지 못하고 벌벌 떨기만 했습니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김서방이 "아니, 어째서 처음 아이는 잘 뛰고 두 번째 아이는 무서워 떨기만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박서방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처음 아이는 내 자식이라 내가 붙잡아줄거라고 믿기 때문이고, 두 번째 아이는 남의 자식이어서 나를 믿지 못하기 때문에 무서워 저렇게 떨기만 한다네"라고 대답해주었습니다. 

여기에서 김서방이 크게 깨달은 것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아무리 위험한 곳에 들어가라고 해도 염려하지 않고 순종하지만, 마귀의 자식들은 믿음이 없어서 위험한 일 앞에서 두려워하고 무서워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냐 아니냐 하는 것도 우리의 그런 믿음을 보면 금방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흔히 우리 인생을 피아노의 건반에다 비유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인생의 건반을 누구의 손에 맡겨야 할까요? 하나님의 손에 맡겨드려야 합니다. 

이런 멘델스존의 일화가 있습니다. 멜델스존은 어떤 성당에서 값비싼 올겐을 샀다는 소문을 듣고 한번 연주해보고 싶어서 그 성당을 찾아갔습니다. 마침 한 젊은 연주자가 그 올겐을 연주하고 있었습니다. 멜덴스존이 연주해볼 수 없느냐고 부탁했지만 젊은이는 누군지 모른다는 이유로 두 번씩이나 거절했습니다.

다시 한 번 연주할 수 없겠냐고 요청하자 젊은이는 화가 나서 성당을 나가버렸습니다. 그때 멘델스존이 올겐을 조용히, 장엄하게 연주하기 시작했고, 문을 나서려던 그 젊은이가 황급히 올겐 있는 곳으로 돌아와서 멘델스존을 존경스럽게 우러러보면서 물었습니다.

"선생님이 누구신지 말씀해주십시오." "제 이름은 멘델스존입니다." "선생님, 저를 용서해주십시오. 선생님이 누구신지 몰라 뵈었습니다. 감히 제가 선생님께 제 자리를 내어드리지 못했습니다." 

여러분! 혹시 우리도 내 인생의 건반을 무지한 내가 연주하려고 하지는 않았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로 하여금 네 건반을 만지게 해다오. 그러면 내가 너를 아름다운 화음으로 연주해 주겠다."

성도 여러분! 성도들의 승리는 하나님이 주셔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마음의 할례를 받아야 할 때입니다. 다시 한 번 신앙을 재정비해야 할 때입니다. 어느 때보다 우리의 영과 육이 하나님 앞에서 구별되게 살지 않으면 우리의 패배는 불 보듯이 뻔합니다. 하나님께서 이기게 해주시도록 먼저 구별된 생활을 하십시오. 내 자신을 완전히 죽이십시오. 그리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십시오.

오늘 마지막 9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떠나가게 하였다 하셨으므로 그 곳 이름을 오늘까지 길갈이라 하느니라"

여기서 애굽의 수치는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하던 때의 아픈 기억을 말합니다. 더 나아가 광야에서 40년 동안 방황하면서 이방인들에게 당했던 조롱과 비웃음이기도 합니다. 물론 하나님의 연단과정이었겠지만 애굽 사람들의 눈에는 "아직도 광야를 헤매고 있느냐" "그럴 것이면 차라리 애굽에 그대로 남아 있었으면 배도 부르고 등 따시게 살 수 있었을 텐데"라고 비아냥거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할례를 행하던 그 날,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새롭게 회복된 그 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새로운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광야생활의 수고를 끝마치게 되었습니다. 애굽의 수치가 다 물러갔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의 축복을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5:17)" 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아직도 과거의 수치를 버리지 못하고 계신 분은 안계십니까? 아직도 과거의 나쁜 습관들, 술 취함과 방탕함, 음행과 사치에 빠져서 방황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직도 광야의 수고를 그대로 짊어지고 살아가는 분들은 안 계십니까? 무거운 짐을 나 홀로 지고 견디다 못해 쓰러지고 넘어지는 분은 안 계십니까? 그렇다면 다시 주님 앞으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이 시간 함께 찬양하겠습니다. [주께 가오니 날 새롭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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