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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복종하여 죽으신 십자가 (대하 34:32-33, 빌 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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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종하여 죽으신 십자가 (대하 34:32-33, 빌 2:6-8)
  
우리시대는 반려동물 천국 시대입니다. 애완견을 비롯하여, 고양이, 뱀 등 파충류 심지어는 호랑이나 사자에 이르기까지 반려동물을 많이 키우고 있습니다. 애완견은 집에서 함께 생활하기에 강아지를 잘 훈련시키는 것에 또한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강아지의 복종훈련에 관심이 고조되고 있습니다. 강아지에게 복종훈련을 하는 내용이 몇 가지로 나와 있습니다. 

첫째는 서열훈련입니다. 강아지에게는 상하의 우열을 가리기를 잘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강아지와 함께 갈 때는 항상 주인이 앞서 가야 한다고 합니다. 강아지가 앞서가게 하면 자기가 높은 줄로 안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잘못을 했을 경우에는 배가 보이게 뒤집고 호되게 야단을 쳐야 합니다. 배를 보이는 것은 항복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셋째는 놀이할 때는 항상 주인이 이겨야 합니다. 그리고 넷째는 훈련은 짧게 하고, 훈련을 마치면 칭찬하고 간식 등으로 보상을 반드시 하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강아지를 복종훈련 하는 것이나, 하나님이 우리를 훈련하는 것이나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종하는 훈련을 하는 것도 첫째는 하나님의 높으심, 하나님의 창조주이심을 인정하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둘째는 항상 하나님께 항복하는 훈련이 잘 되어야 합니다. 셋째는 매사에 하나님이 승리하시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넷째는 우리의 복종훈련은 하나님의 축복과 칭찬과 보상이 있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복종’이란 중요한 하나님의 명령이며, 우리에 대한 영성적 훈련입니다. 강아지가 주인에게 하는 복종은 맹종입니다. 복종하지 않으면 매를 맞기도 하고, 밥을 굶기도 하고, 팔려가기도 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영성적 복종이란 억지로 맹종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기쁘고 감사함으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복종하므로 우리에게 복이 되고 은혜가 되는 것을 알고 따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르틴 루터는 “세상은 술 취한 농부를 닮았다. 그를 말안장 한쪽으로 올려놓으면 곧 다른 한쪽으로 넘어가 버리고 만다”고 하였습니다. 인간이 중립을 유지하는 것은 힘듭니다. 인간은 율법주의와 도덕폐기론 중 한쪽으로 치우쳐 있습니다. 우리의 육체는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둘째 아들과 같은 명백한 불순종이 아니면 큰 아들과 같은 위선적 순종 둘 중 한쪽에 치우쳐 있습니다. 결국 인간의 의지로는 하나님께 복종한다는 것은 힘들다는 말입니다. 
  
인간이 자기의 의지로 하나님께 온전히 복종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죄 때문입니다. 죄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분리시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게 합니다. 불순종하게 하는 것이 죄입니다. 또한 죄란 루터가 말한 대로 ‘자기 추구’입니다. 하나님을 추구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 뜻대로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이 자기 추구이며 죄입니다. 
  
죄를 지어 복종하지 않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불순종의 아들”이 되었습니다. 디도서  1:10에는 “불순종하고 헛된 말을 하며 속이는 자가 많은 중 할례파 가운데 특히 그러하니”라고 합니다. 할례를 강조하고, 할례라는 형식을 갖추었지만 마음으로 순종하지 않았음을 말합니다. 아무리 문자적으로 순종한다고 하더라도 마음으로 하지 않으면 참 순종이 아님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아버지께 순종하는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성경에는 어린 시절 애급 피난에서 돌아온 예수님께서 나사렛에 정착하셔서 부모님께 순종하여 받드셨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에서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소서”라고 하셔서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복종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성경 본문에는 하나님께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셨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순종을 가르치십니다. 
 
십자가는 그리스도의 복종의 징표입니다. 예수님인들 십자가에서 죽고 싶었겠습니까? 인간 구원을 위한 최선의 길이 십자가였기에 아버지의 뜻을 받드신 것입니다. 십자가와 그 길 외에 다른 길이 없었기에 그 길을 복종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아버지께 복종하여 “알았습니다. 내가 십자가에서 죽겠습니다”라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께 대한 완전한 복종을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첫째, 십자가는 자기비하의 징표입니다. 

빌립보서 2:8 상반절에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십자가를 지기 위한 그리스도의 자기 비하를 의미합니다. “자기를 비었다”, “종의 형체를 가졌다”, “사람들과 같이 되셨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났다”, “자기를 낮추셨다”, “죽기까지 복종하셨다”는 등의 모든 표현은 극도의 자기 비하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자기를 완전히 비우고, 자기를 끝까지 낮추는 ‘자기포기’ 없이는 결코 십자가를 질 수 없습니다. 자기를 완전히 포기한 자만 십자가를 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것도 완전한 자기포기이며, 우리에게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신 것도 완전한 자기포기를 요구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십자가를 질 수 없습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은 사람이 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사람같이, 사람 모양으로’ 되셨습니다. ‘사람의 모양’이란 말은 헬라어로 ‘호모이오마티’인데 죄의 본성을 제외한 그리스도의 모든 면이 다른 모든 인간들과 같이 되셨음을 뜻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와 똑같은 참인간이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사람이 되셔야 십자가를 질 수 있고,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인 그리스도께서 스스로 낮추지 않고, 비우지 않고, 사람이 되지 않으셨다면 절대로 사람들로부터 침 뱉음을 받고, 매를 맞고, 죽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의 비하가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탄생부터 전 삶이 자기를 낮추신 자기비하입니다. 이런 자기비하가 십자가에서 마무리된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태어나실 때부터 하나님의 아들이 태어날만한 자리가 아닌 마구간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사람들에게 멸시를 당하셨습니다. 세상의 권력에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전 삶은 자기를 낮추는 삶이었습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님이 아들과 함께 노스캐롤라이나의 숲을 걷고 있었습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님이 한 개미집 앞을 지날 때에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목사님은 사람들이 개미집 앞에서 짓밟아 죽인 개미들을 쓸어주었습니다. 그 때 아들이 허리를 구푸려 죽어가는 개미를 보면서 말했습니다. “아빠, 이 개미들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이 없나요?” 그 때 목사님은 “없단다. 오직 네가 개미가 될 수 있어야만 그들을 이해할 수 있을거야. 그래야만 도울 수 있단다”라고 하였습니다. 
  
내가 개미가 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다는 것은 이 보다 더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일입니다. 완전히 낮아지지 않으면 완전히 구원하지 못합니다. 완전히 낮추는 방법은 하나님이 사람이 되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완전히 낮아지셔서 사람이 되신 것입니다. 
 
‘인간이 됨’ 혹은 ‘인간적’이란 말을 ‘휴먼’(human)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겸손’(humility) 혹은 ‘겸손한’(humble)이란 말과 동의어입니다. 이 말은 ‘휴머스(humus)’라는 말에서 나온 말입니다. ‘휴머스’는 식물이 썩어서 생긴 갈색 혹은 검은색의 물질로 토양을 구성하는 요소입니다. ‘휴먼’이라는 말의 어원은 자기 자신을 아래로 낮추는 흙의 물질의 성질을 뜻합니다. 사람이 되었다는 것, 인간답다는 것은 낮추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신학에서는 ‘Kenosis Theory’(자기비하의 이론)라는 것이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을 중심으로 하여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비어 낮추셨다는 이론입니다. “자기를 비어”라는 말이 헬라어로 ‘케노오’라는 말로 이 말에서 나온 용어입니다. 예수님께서 무엇을 비웠습니까? 그리스도께서는 성육신하실 때 하나님의 본체를 비우셨습니다. 무엇이든 비우기 힘들지만 비우면 가장 편안합니다. 왜냐하면 이 때부터 가장 소중한 것들로 차기 시작하는 법입니다. 
  
바닷물은 대조(한사리) 직전에 가장 많이 빠지듯이 하나님은 우리를 높이시기 전에 낮추십니다. 하나님이 낮추시는 것은 높이시기 위한 것이며. 죽이시는 것은 살리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의 가장 큰 영광은 부활입니다. 예수님의 가장 큰 고통은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전에는 십자가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영광 전에 고통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높이시기 전에 가장 낮추신 것입니다. 
  
십자가는 우리에게도 자기비하와 비움이 되어야 합니다.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받은 우리도 예수님처럼 자신을 낮추고 비워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골로새서 1:24에서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고 합니다. 자신을 이미 비웠기에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신의 몸에 채울 수 있었습니다. 
  
십자가가 왜 무겁습니까? 낮추시려고 무거운 것입니다. 가벼우면 높아질 것입니다. 십자가가 왜 수치스럽습니까? 낮추시려고 수치스러운 것입니다. 십자가가 왜 험합니까? 낮추시려고 험한 것입니다. 십자가는 예수님께도 우리에게도 완전히 자신을 낮추어야 하는 도구입니다. 낮추는 것은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의 참 모습입니다. 

  
둘째, 십자가는 복종의 징표입니다. 

빌립보서 2:8 하반절에는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복종은 억지가 아니라 자발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자발적 겸손’(voluntary humility)이란 말로 표현합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죽으셨지 억지가 아닙니다. 마지못해 죽어주는 것도 아닙니다. 로마군인과 유대인들에 의하여 죽으셨지만 그들이 예수님의 죽음의 원인이 아닙니다. 
  
히브리서 5:8에는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고난까지도 하나님께 순종하여 당하셨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 복종하여 영광도 얻으셨으니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복종하여 고난을 당하는 것은 아들이라도 어려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앤드류 머레이는 ‘겸손’이란 책에서 그리스도는 자신에 대한 전적으로 포기하는 삶, 아버지의 뜻에 전적으로 복종하고, 전적으로 의존하는 삶이 완전한 평안과 기쁨을 얻는 삶임을 아셨다고 합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드렸지만 아무것도 잃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은 절대 잃을 것이 없을 것입니다. 복종하는 우리의 삶도 잃을 것이 없는 삶입니다. 십자가의 복종은 마치 잃는 것 같지만 얻는 것입니다. 패배한 것 같지만 승리하는 삶입니다. 죽음 같지만 새 생명입니다. 
  
고대사회, 특히 1세기에는 복종을 사회적 규범으로 강조하였습니다. 복종이란 종속관계에서 책임이며 명령이었습니다. 복종이란 백성들이 왕이나 방백에게, 종이 상전에게, 자녀가 부모에게 해야 하는 철저한 법이었습니다. 골로새서 3:18에는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고 합니다. 에베소서 5:22에는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고 합니다. 우리가 주님께 복종하는 것이 억지로 하는 것이겠습니까? 자발적이며 기쁨으로 하는 것입니다. “주께 하듯 하라”는 것은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할 때도 억지로 하지 말며, 자발적이며 기쁜 마음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주께 하듯 하라”라는 말씀의 해답은 에베소서 5:21에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복종이 일방적인 개념이나 명령이 아니라 쌍방적인 것임을 말합니다. 남편과 아내가 상호복종관계라는 것입니다. 남편도 아내에게 기쁜 마음으로 따라주어야 합니다. 기쁨으로 상호복종이 가능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존경하기 때문입니다. 감사하기 때문입니다. 복종의 결과를 알기 때문입니다. 
  
궁극적 의미에서 복종은 하나님께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유대 관원들이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절대로 복음을 전하지 말라고 하는 강요를 받았습니다. 이 때 베드로는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행 5:29)고 하였습니다. 사람의 말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께 복종하기로 하였다는 결심을 포고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서의 복종은 그 순간에 생긴 것이 아니라 평생의 삶에서 나온 것입니다. 누가복음 2:51에는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 30년의 세월을 사셨음을 말해줍니다. ‘순종하며 사셨다’는 두 단어에 하나님께 대한 복종의 삶을 요약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완전한 복종은 우리 모두가 좇아야 할 유일하게 안전한 길입니다. 
  
도스도에프스키는 그의 소설 ‘악령’에서 “인간은 언제나 자신보다 무한히 큰 존재 앞에 굴복할 수 있어야 존재할 수 있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은 우리의 존재가치입니다. 모든 피조물의 생존방식입니다.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은 죽는 것이 아니라 사는 것입니다. 
 
“죽기까지 복종하셨다”는 말은 복종은 죽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죽음으로 복종은 가능한 것입니다. 내가 살아서는 절대 복종을 할 수 없습니다. 죽으면 복종은 어려운 일도 아닙니다. 복종의 끝은 죽음입니다. 복종은 죽음으로만 가능합니다. 복종은 그 자체가 죽는 것입니다. 죽지 않고는 복종은 있을 수 없습니다. 
  
오래 전 그리스를 여행할 때입니다. 버스를 타고 데살로니가로 가던 길이었습니다. 데살로니가는 성경에 나오는 지명인데 요즘 도시 이름은 테살로니끼입니다. 버스 기사가 운전하고 가는 도중에 교회를 만나고 십자가를 보면 성호를 그었습니다. 개신교는 성호를 긋지 않지만 성호를 긋는 것은 천주교, 성공회, 정교회의 중요한 신앙 표현입니다. 

맥스 루케이도의 책에 보면 성공회 사제인 그의 친구가 있는데 식사 기도를 마치면 “아멘” 한 후에 다시 성호를 그었습니다. 그래서 루케이도가 “왜 아멘 하면 되었지 또 성호를 긋느냐?”고 물었다고 합니다. 그 때 성공회 사제는 상하로 먼저 긋는 것은 ‘I’(나)를 의미하고, 좌우로 긋는 것은 나를 반 동강 내는 셈이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십자가는 나를 자르는 것입니다. 나를 죽이므로 십자가의 은혜는 완성되는 것입니다. 나를 죽이면 복종은 저절로 됩니다. 나를 죽이지 않고서는 아무리 애써도 복종은 안 됩니다. 복종은 철저하게 나를 죽이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2:9에는 “또 우리 육신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며 살려 하지 않겠느냐”고 합니다. 복종은 공경의 극치입니다. 존경은 복종으로 마치게 됩니다. 
  
중국 속담에는 “존경보다 더 나은 것은 순종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복종 행위의 첫째는 하나님께 대한 것입니다. 복종하는 것은 존경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복종의 결과였습니다. 그리고 그 복종은 아버지께 대한 존경의 극치입니다. 우리들의 십자가의 삶도 하나님께 대한 복종이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복종이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존경의 표현이기를 바랍니다.  
  
  
결론 

사막의 교부들의 글을 모은 ‘깨우침’이란 책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은둔자가 대답합니다. “자신을 낮추시오. 가난한 삶을 사시오. 남을 판단하지 마시오. 그 것이 바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오”. 자신을 낮추는 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믿음의 시작입니다. 하나님께 복종하는 자기 겸손은 긍정적 포기입니다. 십자가란 적극적 죽음입니다. 영성적 사람의 달콤한 멍에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의 거룩한 부담감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그리스도인은 아무에게도 종속되지 않은 가장 자유로운 주인인 동시에 모든 사람에게 종속된 종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참 자유는 하나님께 복종할 때 비로소 가능합니다. 참 생명은 십자가에서 죽을 때 비로소 얻는 것입니다. 
  
십자가로 구원받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본받아 완전히 자신을 낮춥시다. 그리스도의 복종처럼 우리도 죽음으로 하나님께 복종합시다. 자신을 낮추고 죽기까지 복종하여 십자가의 구원을 이루신 우리의 주님 그리스도를 닮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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