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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미래와 희망을 주노라! (렘 29: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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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와 희망을 주노라! (렘 29:10-14)
 
희망은 고난 속에서 더욱 큰 의미를 갖습니다. 

노벨평화상을 받은 만델라라는 인물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만델라는 1994년 5월27일 남아프리카 최초의 흑인 대통령으로 취임하게 됩니다. 그는 정부 안에 ‘진실과 화해 위원회(TRC)’를 결성하여 과거역사를 청산하겠다고 선포합니다. 그러면서 용서가 무엇인지, 화해가 무엇인지를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흑인들의 인종차별 반대투쟁을 잔혹한 방법으로 탄압하고, 투쟁한 자들을 고문하고 죽인 가해자들이 진심으로 잘못을 고백하고 뉘우치면 그들을 사면시켰습니다. 전례 없는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하지만 그는 국가반역죄로 붙잡혀 결국 종신형을 선고받습니다. 그래서 무려 27년 동안 감옥생활을 하게 됩니다. 

감옥에 수감된 지 14년 만에, 그는 어릴 때 헤어졌던 딸을 만나게 됩니다. 딸은 이미 성숙한 여인이 되었고, 한 딸의 엄마가 되어 있었습니다. 만델라가 속한 부족에서는 새로 태어나는 아이의 이름을 할아버지가 지어주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손녀의 이름을 ‘희망’이라는 뜻의 ‘자지웨(Zaziwe)’로 지어줍니다. “그렇게 부드럽고 연한 피부를 가진 갓난아기를 오랜 세월동안 삽과 곡괭이 밖에 만져보지 못한 나의 거친 손으로 만졌을 때,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느꼈습니다. 아마 이 세상 어느 누구도 그때의 저만큼 행복하지 못할 겁니다.” 

또 왜 희망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는지에 대해 그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 이름은 저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수감생활을 하는 동안 단 한 번도 희망을 버린 적이 없기 때문이지요.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아이는 인종분리 정책을 먼 기억 속으로 던져버리고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이끌어 나갈 새로운 세대가 될 것이라 확신합니다. 그것이 저의 꿈입니다.” 

그는 손녀에게 이름을 붙여주고 나서도 13년을 더 감옥에서 보냅니다. 앞서 말했듯이 27년 동안 감옥에서 생활한 것입니다. 그 세월동안 그의 마음에 있었던 것은 기대와 희망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인고의 세월을 견뎌 나갈 수 있었습니다. 

우리 안에는 희망을 막는 것들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희망을 갖고 있습니까? 희망을 갖고 있다는 것이 나를 살려 줍니까? 아니면 나를 패배자처럼 만듭니까? 희망은 나를 더 강하게 합니까? 아니면 나를 더 약하게 하여 현실을 도피하게 만듭니까? 희망이 내게 삶의 에너지를 주고 있습니까? 아니면 내 삶의 에너지를 빼앗아가고 있습니까? 

사람들에게는 희망에 대한 두 가지 마음이 있습니다. 희망하면서 동시에 희망을 싫어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희망이 현실세계를 뒤바꿀만한 힘이 없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희망한다.’고 하면서도 그 희망을 전혀 신뢰하지 않은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우리에게는 희망을 반대하는 몇 가지 세력이 있습니다. 첫째는 절망입니다. 희망을 품기에는 현실이 너무 척박하다고 생각하여 먼저 좌절부터 합니다. 삶의 여건이 너무 취약해서 ‘나 같은 사람은 이것을 하기에 역부족이야!’라며 스스로 멈춰버립니다. 자기 자신을 신뢰하지 않는 것입니다. 삶의 부조리와 무의미성을 견딜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절망은 일종의 불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죄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절망은 현실을 부딪치고 도전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어려운 삶의 자리에 그냥 주저앉겠다는, 폐쇄적으로 나를 막아 놓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절망 속에서는 희망이 싹트기 어렵습니다. 

두 번째는 싫증과 권태입니다. 소설가 이상의 ‘권태’라는 글의 한 대목을 소개하겠습니다. “어서―차라리―어둬 버리기나 했으면 좋겠는데, 벽촌(僻村)의 여름날은 지리해서 죽겠을 만치 길다. 동(東)에 팔봉산(八峯山), 곡선은 왜 저리도 굴곡이 없이 단조로운고? 서를 보아도 벌판, 남을 보아도 벌판, 북을 보아도 벌판, 아― 이 벌판은 어쩌라고 이렇게 한이 없이 늘어 놓였을고? 어쩌자고 저렇게까지 똑같이 초록색 하나로 되어 먹었노?” 

여기에 보면 ‘지루하다. 죽을 것 같이 길다. 너무 단조롭다. 동을 봐도, 서를 봐도, 남을 봐도, 북을 봐도 똑같다’ 등의 내용이 나옵니다. 아름다운 푸른 초장을 보면서 ‘왜 이렇게 초록색 색깔로 다 똑같은가?’하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권태와 지루함이 얼마나 우리의 삶을 갉아 먹고 있습니까? 보는 것도, 행하는 것도 똑같다고 느낍니다. 하루를 지내도 어제와 그제의 반복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지루함과 염증을 느끼면서 몸부림칩니다. 미지의 새로운 가능성을 폐기처분하면서, 살아있는 것 자체가 괴롭다고 연신 소리칩니다. 스스로도 짜증난다고 말을 합니다. 상대방을 향해서도, 나 자신을 향해서도 어찌할 수 없는 그 권태 속에서 희망은 사라지고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현실도피적인 태도입니다. 현실을 모르는 희망, 미래만 자꾸 바라보라는 희망을 가진 사람들은 현실에 관심이 없습니다. 현실에 에너지를 쏟아붓지 않고, 피안의 세계만을 그리워하면서 무기력하게 현실을 살아갑니다. 

칼 막스가 기독교를 비판했을 때 그는 당시 기독교에 대해서, 특별히 러시아 종교를 보면서 몸서리를 쳤습니다. 기독교 종교가 피안의 세계만을 바라보며, 현실을 개혁하고 도전하려는 생각을 멈췄을 때 그는 자기 철학을 이렇게 외쳐댑니다. “내 철학은 세상을 해석하는 철학이다. 거기에 한 걸음 더 나아가 내 철학은 이 세상을 변혁시키는 철학이다.” 그러면서 공산주의 운동의 시초를 마련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소망은 분명하고 확실한 것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희망이 정말 이런 것일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갖고 있는 희망을 우리는 ‘소망’이라고 합니다. 막연한 기대나 희망이 아닙니다. 우리가 말하는 희망, 우리가 말하는 소망이란 하나님에 대한 소망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대한 소망이고,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소망입니다. 우리는 막연한 소망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명백히 살아계신 하나님을 향한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녀를 키워본 경험이 있으신가요? 어린 아들이나 딸이 갖고 싶어하는 장난감을 사 줄 마음에 “오늘 저녁에 함께 나가서 사자!”고 하면, 아이는 아직 자기 손에 아무것도 없지만 이미 가진 것처럼 하루를 기쁘게 삽니다. 그 약속을 믿고 말입니다. 

우리의 소망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가 되시고,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겠다는 그것 아닙니까? 우리는 그 소망에 붙잡혀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이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주신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그것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던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향한 것이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예레미야 29:11) 

“내가 지금 너희를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가게 하는 것은 재앙이 아니다. 너희에게 평안을 주려고 하는 것이다. 종과 포로로 만드는 것이 너희를 향한 내 목표가 아니다. 너희가 자유자로 다시 돌아오게 하는 것이 내 목표다. 현실 속에서 힘들고 어려움을 당하게 하는 것이 너희를 향한 내 기대가 아니다. 너희에게 자유의 희망과 미래를 선물해 주겠다.” 이렇게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 소망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통한 이 약속을 역사 속에서 이루어 나가십니다. 이것을 궁극적으로 이루시기 위해서, 인류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직접 이 땅에 오셨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희망이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 미래가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 하나님의 약속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예수님이 우리에게 전하신 첫 메시지가 무엇일까요? 

...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 (마가복음 1:15) 

예수님은 “때가 찼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하나님이 오실 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움직이지 않으시고는 이 역사가 그냥 무의미하게 끝날 것 같은 위기에 빠져 있기에 이제 하나님이 다가오신다는 것입니다. 이제 희망의 시간, 소망의 시간, 하나님이 주시는 새 역사의 시간이 다가오게 됐다는 것입니다. 

즉 권태와 싫증으로 몸부림치고, 무의미 속에서 좌절하는 시간을 예수님이 깨부수시겠다는 것입니다. 허무와 절망으로 탄식하는 것들을 불사르시겠다는 하나님의 선언입니다. 거짓과 불의가 끝나고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가 세워지는 새 역사가 예수님을 통해서 일어난다는 선언입니다. 죽음의 두려움을 파멸시키시겠다는 예수님의 선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권태와 싫증, 무의미성과 허무, 그리고 절망의 자리에 내려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입니다. 가장 비참하고 낮은 곳, 세상 사람들이 가장 싫어하는 그 아픈 자리에 달리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찾으셨던 사람들은 연약한 사람, 낮은 사람, 외로운 사람, 소외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보다 더 슬펐던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 나보다 더 아팠던 사람이 있으면 나와 보라. 나보다 더 소외되고, 나보다 더 큰 인생의 고통을 겪은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 

무슨 뜻입니까? 실제로 나오라는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자들에게, 어떤 것을 지고 있더라도 내게 나오면 내가 너희에게 절망을 넘어설 희망을, 슬픔을 넘어설 기쁨을, 죽음을 넘어설 부활의 생명을 선물로 주겠다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그것을 몸으로 보이신 것이 십자기에 달려 죽은 지 사흘 만에 다시 부활하신 새 생명의 역사입니다. 곧, 인생이란 살 만한 가치가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부활과 생명을 향해서 달려가라고,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고난과 시련을 겪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속에서 좌절하지 말고 다시 일어서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소망을 고백하는 것이 우리의 할 일입니다. 

우리는 오늘 교회의 36주년 생일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36년이란 청년의 나이입니다. 청년의 교회임을 생각하며 우리의 모습을 되돌아봅니다. ‘우리에게 이미 노화가 나타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이 굳어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두렵고, 떨렸던 처음 사랑을 다 잊어버리고 있지는 않은가? 익숙한 것에 안주하고 있지 않은가?’ 하고 말입니다. 

익숙하다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익숙한 것에 안주하게 되면 설렘이 사라집니다. 기대가 사라지고 변화가 사라집니다. 미래를 향해서 달려갈 용기를 잃어버리고 지금 자리에 그냥 앉아버립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비판하신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너희들이 익숙한 곳에 잘 앉아 있구나. 너희들이 종교성 속에 그대로 앉아 있구나. 너희들이 신앙을 가졌다고는 하는데 더 이상 변화의 가능성을 열어두지 않고, 하나님에 대한 기대를 열어 놓지 않고 살아가고 있구나.” 예수님의 비판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우리 교회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가 되는 것, 그것이 우리의 목표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실까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예수님을 보내주신 것을 믿고, 그 예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예수님, 당신은 우리의 생명이며, 세상의 생명이고, 우리의 소망이며, 세상의 소망이십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 속에 하나님의 약속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과 함께 생각하시고, 예수님과 함께 말씀하시고, 예수님과 함께 행동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안에 하나님의 모든 지혜가 들어 있습니다. 그 사실을 내 마음으로, 내 입으로, 내 삶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전도입니다. 그것을 세상에 나가서 선포하는 것이 선교입니다. 우리 교회가 해야 될 일은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내가 이 세상의 그 어떤 만물과도 바꿀 수 없는 가장 소중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향해서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 (마가복음 1:11) 

하나님은 이 말씀을 오늘 우리에게도 하십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딸이다. 내가 너를 기뻐한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너를 기뻐한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이런 자녀가 된 것입니다. 
놀랍게도 구약에서는 우리가 얼마나 멋지고, 얼마나 사랑스럽고, 얼마나 매력적인 존재인가를 다음과 같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아가서 6장 10절 말씀에 나오는 ‘여인, 여자’라는 표현은 우리 성도님들을 가리키는 말이어서 제가 ‘성도’로 바꾸어 보았습니다. 

아침 빛같이 뚜렷하고 달같이 아름답고 해같이 맑고 깃발을 세운 군대같이 당당한 성도가 누구인가 (아가 6:10) 

누구입니까? 바로 나입니다. 바로 여러분입니다. 이 시간, 기도하는 마음으로 이 구절을 다시 한 번 읽으면서, ‘누구인가?’라는 부분에서 오른쪽 손을 가슴에 대고 “바로 나!”라고 해보십시오. 그러면서 내가 하나님 앞에서 이런 소중한 존재임을 다시 한 번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자녀임을 자랑하십시오. 

저는 성경을 읽을 때마다 하나님이 제게 가장 원하시는 것을 가르쳐 달라고 구합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너 자존감을 갖고 살아라. 종처럼 살지 말고, 노예처럼 살지 말고, 하나님의 아들과 딸처럼 살아라. 너는 멋진 존재다. 소중한 존재다.” 바로 이것 아닐까요? 우리는 이렇게 멋진 존재들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아들과 딸인 우리가 그렇게 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소망교회에서 목회를 하면서 제가 해야 할 일에 대해서 생각해 봅니다. 예수님을 자랑하고, 예수님을 사랑하고, 우리 성도님들이 얼마나 귀한 하나님의 자녀인지를 전하는 것이 아닐까 하고 말입니다. 
더불어 우리가 앞으로 함께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다음 세대들과 함께 가는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의 어린 자녀들, 초등학생들, 청소년들, 대학 청년들입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가르쳐야 됩니다. “예수가 소망이고, 예수가 생명이다. 예수님이 곧 지혜야. 예수님 안에 모든 것이 들어 있어. 인생의 모든 문제가, 그 해결책이 예수님 안에 있어.”라고 가르쳐야 합니다. 우리의 다음 세대가 우리를 이어가지 않으면 그것은 끝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 하든 우리의 다음 세대를 바르게 세워 나가야 합니다. 

그리고 또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통일한국, 평화통일의 미래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든 북녘의 백성들이 예수님을 알고,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해야 합니다. 한라산에서부터 백두산까지 하나님께 영광 돌리면서, 이 백성이 지구촌에서 하나님께 마음껏 쓰임 받도록 하는 것이 우리의 할 일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내가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내가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라고 자랑스럽게 여기며 우리에게 주신 복음의 사역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다음 세대와 통일의 한국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앞으로 교회는 여러 행사들을 기획할 것입니다. 소망수양관도 그런 점에서 쓰임 받게 될 것입니다. 장로님들과 각 제직회의 회장단들, 공동체 회장들에게 지금의 북한 사역에 함께하자고 초청했습니다. 성도님들도 다 초청할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해야 할 일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살아있다는 것이 감격이 아닙니까? 그 감격으로 예수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고, 이 백성을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내 남은 인생을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 땅이 이루기 위해서 순종하겠습니다.” 고백하며 나아가는 주님의 귀한 자녀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김지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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