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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 : 회개 (시 51: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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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고 통회하는 마음 : 회개 (시 51:10-17)
 
마지막을 생각하지 않으면 함부로 살게 됩니다. 

우리나라 초, 중, 고교생 이만천명을 대상으로 흥사단 투명사회운동본부 윤리 연구센터가 지난 6월부터 ‘2013년 청소년 정직지수’를 조사했습니다. 결과는 정직지수가 작년보다 낮아졌다는 슬픈 소식이었습니다. 

특별히 두 가지 특징이 있었는데, 첫 번째는 학년과 학력이 높아질수록, 또 사회생활에 더 많이 노출될수록 정직지수가 낮아진다는 것입니다. 초등학생은 84점, 중학생은 72점, 고등학생은 68점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대학생, 청년, 장년, 중년으로 올라가면 어떻겠습니까? 점수가 더 떨어지지 않겠습니까? 

두 번째는 매년 정직지수가 낮아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몇 가지 항목을 살펴보자면, ‘이웃의 어려움과 관계없이 나만 잘 살면 된다’는 항목에서 초등학생은 19%, 중학생은 28%, 고등학생은 36%가 ‘그렇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또 ‘시험을 보면서 컨닝한다’는 항목에서는 초등학생 96%, 중학생 93%, 고등학생 92%가 ‘그렇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백 명 중 아흔 몇 명이 컨닝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안 된다는 것은 알지만 아무도 지켜보고 있지 않거나, 처벌받을 가능성이 없으면 그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또 이런 항목도 있었습니다. ‘10억이 생긴다면 죄를 짓고 1년 동안 감옥에 가도 괜찮다.’ 여기에 ‘그렇다’라고 대답한 고등학생은 절반에 가까운 47% 였습니다. 작년(44%)보다 3%가 오른 수치입니다. 중학생도 작년(28%)보다 4%가 오른 32%였고, 초등학생도 작년(12%)보다 4%가 올라 16%의 학생이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10억만 있으면 나쁜 짓을 해서 감옥에 들어가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돈에 대한 청소년들의 생각을 보여주는 통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1년 정도 감옥에 들어가 10억이 생겼다고 해도, 결국 10억보다 몇 배 더 보상을 해야 될는지 모를 일입니다. 하지만 학생들은 그래도 좋다는 것입니다. 감옥에도 들어가고, 삶도 뺏기고, 인생 전체가 망가지는 데도 10억이 생기면 그렇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에 대해서는 생각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단지 현재의 재물, 돈, 쾌락 등이 우선이 되는 세상의 가치관이 우리 젊은이들에게 그대로 스며든 것입니다. 

회개는 현실에 안주하지 않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을 읽어보면 예언자들은 회개하라고 외칩니다. 신약성경에 나타나는 세례요한과 예수님의 첫 번째 메시지도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왜 회개하라고 말씀하실까요? 

여러분은 회개하라는 말을 들으면 마음이 편하십니까, 불편하십니까? 누군가 내 앞에 나와 회개하라고 하면 무슨 생각이 드십니까? ‘너나 회개해라. 왜 남의 일에 참견이냐.’ 이런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회개하라는 말 속에는 지금의 삶을 뒤집으라는 의미가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처럼 쉽고 무난한 삶을 살면 좋겠는데, 기득권을 누리면서 살고 싶은데, 회개하라고 하니 그 말이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책들이 발간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자기계발서는, “너 지금 그대로 괜찮아! 조금만 더 열심히 해봐. 앞으로 잘 될 거야!” 라는 말을 반복하며 우리의 모습을 호도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다릅니다. 성경은 ‘지금 괜찮다’는 말들이 자기기만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사람을 잠깐 안도하게 할 수는 있지만 진정한 평안을 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위로와 평안은 내가 누구인지, 내 실존이 무엇인지, 내 인생의 길과 종말이 무엇인지를 깨달아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회개하라고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무감각 속에 안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살아있다는 것은 참으로 소중한 것이기에 심각한 물음을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회개하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골치 아프고 심각해지는 것이 싫어 거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회개하기를 거부합니다. 

회개를 거부하는 사람들의 몇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첫 번째 유형은 자신의 정체성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이천년 전으로 되돌아가서 성경을 살펴보면, 당시 예수님 주위에는 민중들이 있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소외되고 병든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꾸짖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들 자체가 너무 심각한 위기 속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목자 없는 양처럼 헤매고 있구나!” 하시며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삶의 문제를 그대로 용납하셨습니다. 아픈 자가 오면 만지시고, 고치시고, 죄 많은 자가 오면 용서해 주셨습니다. 슬픔에 빠진 자가 오면 위로해 주시고, 외로운 자가 오면 그의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그들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초청이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태복음 11:28) 

“너희의 짐이 무엇이냐? 너희의 고통과 슬픔, 답답함이 무엇이냐? 모두 가지고 그대로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만지고, 치유하고, 너희의 상처를 아물게 하겠다.” 예수님은 그렇게 그들을 대하셨습니다. 
두 번째 유형은 자기 정체성을 알면서 회개하기를 거절한 사람들입니다.

 이 유형으로는 첫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자랑스러운 율법 전문가들이며 영적인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율법을 꿰뚫고 있고, 하나님의 뜻을 안다고 여기며 사람들 앞에서 뻐기고 뽐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놀랍게도 그들을 아주 엄중하게 꾸짖으셨습니다. 그것은 참된 지도자의 모습이 아니라고 말입니다. 

“이 독사의 자식들아! 이 화 받을 사람들아! 너희들이 말하는 바는 그럴 듯한데, 너희들이 행하는 바는 정말로 잘못됐구나! 가식적이구나! 형식 속에만 빠져있구나! 너희는 천국 문 앞에 서서 사람들을 못 들어가게 한다. 너희만 못 들어가면 되는데, 왜 그리로 들어가는 사람까지 막고 있느냐?” 마태복음 23장에는 그들에게 저주의 말씀을 퍼부으시며 엄중하게 야단치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왜 야단을 맞고, 꾸중을 받아야 했을까요? 회개하는 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다 됐다. 내가 모든 것을 안다.’ 여기며 삶을 돌아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지도자는 지도자답게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영적 지도자, 정치적 지도자, 경제·사회 지도자 모두 지도자이기에 그만큼 책임이 더 크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선한 의지로 행동하며 살았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선도 베풀었고, 이웃을 구제하기도 했다고 자신하는 사람들입니다. 마태복음 19장에는 청년 부자가 바로 이러한 모습으로 예수님 앞에 나와서 당당하게 말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칭찬 받기를 원했습니다. “저요, 십계명 다 지켰는데요. 금식도 했는데요. 이웃의 어려움을 보면 구제 행위도 잘 했는데요. 제가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대로 했는데, 어떠십니까?” 

그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모든 것을 잘했구나! 그런데 한 가지 더 해야겠다. 네가 갖고 있는 돈과 재물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주고 나를 쫓아와라.” 부자는 깜짝 놀랐습니다. 자랑했던 것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오히려 재물이 많아서 근심이 생겼습니다.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마태복음 19:22) 
“네가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잘났다고 하지만 네 재물이 너의 우상이구나! 네가 그렇게 떵떵거리며 사는 것이 오히려 네가 회개할 수 있는 기회, 변할 수 있는 기회를 차단시키고 있구나!” 그렇게 예수님은 꾸중하고 계신 것입니다. 

셋째는 회개해야 할지를 알면서, 또 지금이 회개해야 할 때인지를 알면서 게을러서 회개를 안 하는 사람입니다. 지금 누리고 있는 영적 쾌락이 너무 좋고 달콤해서 “잠깐만요, 하나님!”하며 조금 더 즐기기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회개를 미루는 것입니다. 

성 어거스틴이 『참회록』이라는 유명한 책을 썼습니다. 그는 그곳에 어렸을 때부터 자기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 죄인이었는지, 어떤 죄악을 행했는지를 서술합니다. 그는 마니교에 빠지고, 육체적인 쾌락에 탐닉하면서 자기가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이런 기도를 드립니다. “주님, 순결을 주옵소서. 주님, 절제를 주옵소서. 그러나 지금은 마옵소서.” 

우리의 미적미적한 신앙 속에 이런 태도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하나님, 믿기는 믿겠습니다. 우리 엄마도 믿었으니까 저도 믿기는 믿을 텐데, 지금은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그러니 지금은 마옵소서.” 이런 마음이 얼마나 많습니까? 

회개는 용기를 필요로 합니다. 

골치가 아픈 것이 곧 살아있다는 것입니다. 삶이란 만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삶이란 치열한 전쟁터 속에 놓여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삶이란 언젠가는 죽음을 직면하게 되는 것입니다. 살아있다는 것은 마지막에 종말이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내 재물과 권력이 결코 이것을 보장하지 못합니다. 다시 말해 회개하라는 것은, 네 마지막을 기억하면서 현재를 바꾸라는 것입니다. 네 종말이 어떻게 될지 알면서도 지금 너의 삶이 이대로 괜찮냐고 묻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란 용기 있는 사람이 지닌 삶의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 용기가 있어야 할까요? 잘나가는 것, 자랑스러운 것뿐만 아니라 약한 점, 부족한 점, 삶의 어두운 그림자까지도 다 받아들이고 하나님 앞에 토해내라는 요청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회개하는 사람에게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비난할 준비를 해야 합니다. 자기를 향해서 외쳐야 됩니다. “너 이렇게 살아도 되냐? 너 지금 괜찮냐? 네가 생각하는 것이 올바른 거냐? 이렇게 살다가 마지막에 하나님 앞에서 떳떳할 수 있겠냐?” 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곧 자기 자신을 웃음거리로 만들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나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놓을 줄 알고, 내 속의 그림자들이 나를 억누르고 있다는 사실을 하나님 앞에서 토해내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 충격을 주는 것이지만, 동시에 나를 살리는 길이라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피주기 위해서 회개하라고 하시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네 본질을 알고, 네 정체성을 알고, 네 마지막을 알아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가 회개하면 나 하나님이 너를 용서하고, 너를 나의 아들과 딸로 세우고, 이 세상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복 되고 소중한 존재로 너를 세우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회개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는 선과 악이 공존합니다. 

우리 인간 안에는 두 가지 성향, 즉 천사와 동물적 성향이 함께 있습니다. 빛과 어두움, 밝고 어두운 면이 함께 있습니다. 선한 것이 있고 악한 것이 있습니다. 높고 고상한 것이 있고, 낮고 천한 것이 있습니다. 초월성과 영원을 잇대는 영혼이 있는가 하면 현실의 나락 속으로 추락하는 탐욕도 우리 안에 있습니다. 

회개는 이 두 가지가 내 속에서 공존하며 투쟁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언제 깨달을까요? 하나님 앞에 서 있는 내 실존을 경험할 때 깨닫게 됩니다. 

20세기 최고의 기독교 변증학자로 알려진 C.S 루이스가 인간 속에 있는 악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육체의 죄는 악하지만 다른 죄에 비하면 가장 미미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쾌락 중에 가장 나쁜 것은 전적으로 영적인 쾌락입니다. 즉, 잘못을 남에게 전가시켜놓고 즐거워하는 것, 남을 마음대로 조정하거나 선심 쓰는 척하고 남의 흥을 깨뜨려 놓고 좋아하는 것, 남의 험담을 즐기는 것, 권력을 즐기는 것, 증오를 즐기는 것이야 말로 악한 죄입니다. 내 안에는 두 가지 적이 있습니다. 하나는 동물적인 자아이고, 또 다른 하나는 악마적 자아입니다. 교회에 정기적으로 출석하면서도 여전히 차갑고, 독선적인 잔소리꾼이 거리의 매춘부보다 훨씬 지옥에 가까울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둘 중 어느 쪽도 되지 않는 편이 좋겠지요.” 

회개란 이런 잘못된 자아가 가는 길을 하나님 앞에서 깨부수는 것입니다. 이런 투쟁이 내 속에 있음을 하나님 앞에 겸허하게 고백하는 데서부터 우리의 회개는 시작됩니다. 

이 시대가 어떤 시대입니까? 무감각과 무감동과 무관심을 끊임없이 부추기는 쾌락의 시대입니다. 명품 옷을 입고, 명품 백을 들면 된다고 사람들을 부추깁니다. 멋진 시계를 차고, 고급 자동차를 모는 것이 좋다고 우리를 미혹합니다. 그러면서 그게 바로 너라고, 그게 바로 너의 정체성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실존이 흔들리는 것을 감추라고, 불안과 걱정이 없는 것처럼 보이라고, 인생이 멸망하고, 파멸하는 것을 감추라고 사탄은 우리를 유혹합니다. 

회개란 무엇일까요? “하나님, 내 속에 근심과 두려움이 있습니다. 우울함이 있고, 걱정도 있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보는 시선에 괴롭습니다. 나를 정죄하는 죄책감도 있습니다. 하나님, 제게 겁을 주고 두렵게 하는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라고 하나님께 아뢰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것들을 넘어설 수 있습니다. 
회개란 또 무엇일까요? 내 인생의 죽음과 종말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결코 영원한 존재가 아닙니다. 생명도 언젠가는 끊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때가 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지금까지의 삶에 대해서 책임을 지라고 요구하십니다. 그러한 사실을 깨닫고, 주님 앞에 머리를 숙이는 것입니다. 
다윗은 그의 부끄러움을 시편 51편 17절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시편 51:17) 

다윗은 왕이었습니다. 권력자였습니다. 돈과 재물이 가득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 앞에서 회개해야 할 자인 것을 깨닫고 무릎을 꿇은 것입니다. 

회개함으로 다시 시작하십시오. 

회개한다는 것, 회개의 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애통하는 언어를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격정의 언어를 표현한다는 것입니다. 애통의 언어 속에서 하나님 앞에 겸손히 무릎 꿇고, 격정의 언어 속에서 이웃의 아픔과 슬픔에 동참하며 아파할 줄 아는 사람이 회개의 영을 갖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회개함으로 무기력과 무능함을 고백할 때, 하늘의 생명의 기운과 능력을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내 열등감을 고백함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세상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는 하나님의 자녀로 세워주십니다. 우리가 사람의 눈치를 보고, 비겁해지고,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아뢸 때 “무슨 소리냐. 나 하나님만 바라보라. 오직 나 하나님만 두려워하라!”고 담대함을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오만불손하여 교만한 모습으로 살았던 것을 하나님께 고백할 때, 죄악과 사탄에 얽매였던 나에게 “너는 자유자다. 나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다.”라고 선포하시기 위해서 지금도 회개하라고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회개란, 지금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시 기회를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모든 것을 새롭게 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회개의 영으로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그래야 오늘 또 성숙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야 오늘 새롭게 되는 것이며 어떤 경우에도 주님과 함께 우리의 가야할 길을 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귀한 성도님들 한분한분 모두에게 회개하는 영을 허락하셔서 모두가 하나님을 높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이 땅의 모든 세계를 하나님이 주신 선물로 알고, 겸손한 마음으로 감사하면서 살아가는 주님의 귀한 자녀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김지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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