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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약함은 내 음료요, 가난은 내 양식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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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함은 내 음료요, 가난은 내 양식이라

(고린도후서 11:30-33)

 

2014년 3월 16일 주일예배

박 총 형제

(작가, 도심형 재속재가수도원 '신비와 저항' 원장)

  

약함과 가난. 이보다 인간을 더 좌절케 하고 몸부림치게 하는 것이 있을까요. 가난과 약함. 이보다 더 인간이 수치로 여기며 벗어나려 하는 것이 있을까요. 우리는 약함과 가난 때문에 눈물 흘리고 괴로워하며 죽기도 합니다. 실제로 많은 이들에게 인생이란 내가 약함을 없애거나 아니면 약함 때문에 내가 없어지거나 하는 생사의 전투입니다. 그런데 여기 한 정신 나간 사람이 있어 자신의 약함을 자랑하겠다고 합니다. 자신의 약함으로 인해 크게 기뻐한다고 합니다. 그에게 약함보다 더 위대하고 찬란하며 은혜로운 것도 없습니다.

 

사연인즉슨, 사도 바울의 여러 약점으로 인해 고린도 교인들은 시험에 들었습니다. 그의 사도권까지 의심하면서 그리스도께서 당신 안에서 일한다는 증거를 보여 달라고 요구할 정도로 관계가 악화되었습니다. 저 같으면 바울이 사람들 앞에 내놓을만한 자랑거리―순수한 혈통, 대단한 학벌, 율법으로 온전한 바리새인,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난 체험 등―를 쫙 늘어놓아서 반대파의 입을 다물게 했을 텐데 바울은 사람들이 어떻게든 숨기려고 하는 사연을 나열합니다. 매 맞고, 돌에 맞아 피 흘리고, 감옥에 갇히고, 쫄쫄 굶고, 헐벗고 떠는 것은 아무리 복음을 전하다가 받은 고난이라지만 자신의 약함을 고스란히 반영하는 수치스러운 경험입니다. 심지어 그는 이런 말도 합니다.

  

"내가 꼭 자랑해야 한다면, 나의 약함을 자랑하겠습니다. 영원히 찬송받으실 우리 주 예수님의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내 말이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아십니다. 내가 다마스커스에 있었을 때에는 아레다 왕의 총독이 나를 체포하려고 다마스커스 성을 지키고 있었는데, 나는 광주리를 타고 성벽 창문 아래로 내려와 총독의 손아귀에서 빠져 나온 적도 있었습니다." (고후 11:30-33)

  

바울이 하나님 앞에 맹세하면서까지 꺼내놓은 자랑거리는 다메섹에서 광주리를 타고 도망간 사건이었는데 당황스럽게도 이는 그 시절의 남성이라면 어떻게든 지우고 싶은 오욕거리였습니다. 당시 고린도에서는 코로나 무랄리스(Corona Muralis)라는 관을 얻는 것이 가장 큰 영예였습니다. 그것은 자살에 가까운 용기를 발휘, 적의 성에 가장 먼저 올라가는 무훈을 세운 용사에게 수여하는 관입니다(영화 같은 데에서 성벽 모양으로 생긴 관을 본 적이 있을 겁니다). 당대의 모든 부모들은 제 자식이 그러한 영광의 주인공이 되길 원했습니다. 팍스 로마나(Pax Romana)의 신화에 젖어 살던 당대인들은 강함을 숭배하고 있었고 그리스도인들도 시대의 지배적인 가치관에서 자유롭지 않았습니다.

  

이에 바울은 성에 첫 발을 디디기는커녕 성에서 도망쳤다는 얘기를 떠벌리며 심지어 그것을 하나님 앞에서 맹세하는 역주행을 감행합니다. 바울은 강함의 허구성을 탈탈 털어버리려고 작심한 듯 되레 자신의 약함을 엄숙하고도 유쾌하게 폭로합니다만, 고린도 교인들 입장에서는 얼마나 어이가 없었을까요. N. T. 라이트가 자신의 주석서 Paul for Everyone: 2 Corinthians에서 밝혔듯이 바울은 ‘코로나 무랄리스’의 신화를 거꾸로 뒤집어엎습니다. 바울의 가장 아름다운 문장 중의 하나인 고후 12:10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약할 때나 모욕을 받을 때나, 궁핍하게 될 때나 핍박을 받을 때나, 어려움이 있을 때에, 그리스도를 위해 기뻐합니다. 왜냐하면 나는 약할 그 때에 강하기 때문입니다."

  

18세기 예수회의 탁월한 영성가 장 피에르 코사드는 “당신이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새로이 발견할 때마다 기뻐하라.”며 바울에게 화답합니다. 바울이 이처럼 강함을 숭배하는 문화에 깊숙이 똥침을 놓는 ‘대안적 상상력’을 선포할 수 있었던 것은 그리스도가 “약하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지만,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 계”(고후 13:4)심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는 연약한 자신의 몸과 마음도 하나님의 능력이 흐드러지게 피는 꽃밭이 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가치가 전복되는 곳, 교회

  

기독교의 탁월함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인간의 무기력함, 무능력함, 연약함, 가난함, 부족한 인격, 불만족스러운 외모를 통해 자신을 활발하게 계시하기를 즐기는 요상한 취미를 갖고 계시다는 데에 놓여 있습니다. 하지만 고린도 교인들이 강함의 신화에 사로잡혀 있었듯이 우리 역시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이 시대의 코로나 무랄리스, 즉 힘 있고, 빽 있고, 능력 있고, 돈 많고, 학벌 좋고, 세련되고, 인기 많음을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우리는 자신의 약함과 부족함을 직면할 때마다 강하게 해달라고, 채워달라고 간구합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으려면 더 능력 있고 더 강해져야 하다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심지어 우리의 약함과 부족함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린다는 강박에 젖어 있습니다. 이는 평생 순복음교회에 다니시며 “저의 약함으로 주의 영광 가리지 않게 하소서”라고 입버릇처럼 기도하시는 저희 어머니에게만 해당되는 건 아닙니다.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표현의 방법만 다를 뿐 약함과 가난을 어떻게든 극복해보고자 하는 심사는 동일합니다. 이런 분위가 하에서 교회는 코로나 무랄리스 숭배를 더 확대, 재생산하는 기구가 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모임인 교회가 여타의 모임과 갈피를 달리하는 결정적인 지점은, “더 약하게 보이는 몸의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고전 12:22, 23)게 된다는 점에 있습니다. 무릇 교회란 세상의 가치가 전복되는 곳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를 위해 부름을 받았습니다. 부자와 잘 생긴 자와 성공한 자와 많이 배운 자들이 세상에서처럼 교회에서도 여전히 높임을 받는다면, 빈자와 못난 자와 실패한 자와 가방끈 짧은 이들이 세상에서처럼 교회에서도 루저와 잉여가 된다면, 단언하건대 그건 교회가 아닙니다. 하지만 뼈아프게도 한국 교회는 지극히 작은 자들이 점점 몸담기에 불편한 곳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내가 약할 때 곧 강함이니라”는 바울의 혁명적인 고백은 약자의 정신승리법이 아닙니다. 현실의 냉혹함을 모르는 신앙도취자의 낭만적인 발상 또한 아닙니다.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이 된 신인류의 삶의 방식입니다. 약하고 가난한 이들이 강하고 부자가 되려고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는 세상에서,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악마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이 세상에서, 우리 그리스도인은 약함과 가난이 하나님이 가장 즐거이 거하시는 장소임을 드러내도록 부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것이 강함과 부함이 경배 받는 세상에서 우리가 받잡은 소명입니다. 강해지려고 해도 강해질 수 없는 우리와 같은 보통 사람에게 이보다 큰 하나님의 은혜가 있을까요.

  

이제 더는 약하다고 느낄 때 강함을 구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대신 약함 속에 머물 수 있는 용기를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그 약함 속에 거하시는 하나님과 벗하며 동행할 수 있는 믿음을 달라고 구하십시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의 강함이 하나님의 때에 나의 약함을 통해 드러나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부디 내가 강하게 되는 것과 하나님의 강함이 나를 통해 흘러나오는 것을 혼돈하지 마십시오.

  

  

 약한 자와 가난한 자 사이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것 역시 약함과 가난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장 바니에가 이를 감동적으로 표현한 바 있는데 조금 길지만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가난함과 상처와 연약함을, 우리의 모든 능력과 부요함과 권력, 심지어 다른 이들에게 후하게 베푸는 행위로써 숨기려고 합니다. 우리가 부름받은 그 길은 이렇게 숨겨 놓은 우리의 가난함과 상처와 연약함을 발견하고 기꺼이 받아들이는 데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연약하고 버림받고 병들고 ‘무능력한’ 사람들의 삶은 모든 사람들에게 중요합니다. 그들의 삶에는 비밀스러운 뜻이 담겨 있으며 아름다움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버림받은 아이, 배반당한 남자, 알코올 중독자인 아들을 둔 어머니, 정신지체 장애가 있는 소녀, 노인, 죄수, 죽어가는 사람들은 ‘낙오자’도 아니고 ‘쓸모없는 사람’도 아닙니다. 이들은 인류라는 큰 나무의 보이지 않는 은밀한 뿌리와 같습니다.

  

우리는 줄기와 가지와 잎과 열매만을 봅니다. 우리는 강자들과 학자들과 힘 있는 자들과, 대낮에 드러나게 활동하면서 과시하는 유능한 자들만을 높이 평가합니다. 땅 속에 숨은 채 밤에 나무 전체에 생명을 전달하는 뿌리들, 그 연약한 자들과 가난한 자들과 불행한 자들은 무시해 버립니다.

  

“나에게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그분이 숨어 계신 연약한 자와 가난한 자 사이로 그분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장 바니에, 『희망의 사람들 라르슈』중에서)

  

진심으로 아멘입니다. 장 바니에에게 그러했듯이 저와 여러분에게도 예수를 따른다는 것이 지극히 작은 자 사이로 그분을 따르는 것이 되기를 두 손 모읍니다.

  

  

 불안을 나의 음료로 삼으라

  

이렇게 감동적인 이야기를 접해도 약함에서 오는 불안을 견디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저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하나님의 능력을 그렇게 많이 경험했음에도 강함에서 오는 안정감을 선택하곤 합니다.

  

이렇게 일러주어도 백성은, 사무엘의 말을 듣지 않고 말하였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도 왕이 있어야 되겠습니다. 우리도 모든 이방 나라들처럼, 우리의 왕이 우리를 다스리며, 그 왕이 우리를 이끌고 나가서, 전쟁에서 싸워야 할 것입니다." (사무엘상 8장:19-20)

  

다른 나라들처럼 왕을 세워달라는 것은 왕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제를 구축하고, 언제든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준비를 갖추겠다는 것입니다. 전쟁을 통솔할 왕이 없고 강력한 상비군이 없는 그 불안에서 벗어나 안정감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 있는 약함과 불안함보다 하나님 없는 강함과 안정감을 택하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우리들도 하나님나라의 자유민이기보다 제국의 신민이길 원할 때가 허다합니다.

  

부디 제 말을 믿으십시오. 그리스도인의 존재 방식은 불안과 약함입니다. 우리네 믿음의 조상으로 칭해지는 양반(아브라함)이 안정된 삶의 기반인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간 그 불안한 걸음이 우리의 발걸음이 되어야 합니다. 반복합니다. 불안한 삶, 나약한 삶이 바로 우리 생의 본질임을 받아들이십시오. 이를 거부하고 세상 사람들처럼 스스로의 힘과 방법에 기대어 안정과 강함을 추구하는 것은 제국을 확대, 재생산함으로써 자신과 다른 이들을 억압하는 삶으로 끝나고 맙니다. 불안을 나의 양식으로, 약함을 나의 음료로 삼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모든 선한 것은 약한 나를 안아주는 데에서 비롯된다

  

누군가 저를 찾아와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했고, 무언가 변화가 있는 것 같다가도 한순간 와르르 무너지는 자신을 보면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제 연약함을 도저히 극복할 수가 없습니다.”고 말하며 상담을 요청할 때면, 저는 이렇게 대답해주곤 합니다. “자신이 연약하다는 사실을 절절히 깨달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훌륭한 신앙생활을 하신 겁니다.”

  

우리가 약함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나를 용납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보통 약하고 죄짓고 실패하는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약함에서 오는 죄와 허물, 수치심과 열등감을 혐오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도 않고 옳지도 않습니다. 그런 모습을 반복하는 자신을 증오하는 한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해도 달라질 수가 없습니다. 죄를 멀리하려는 거룩한 열망과 이것을 혼돈해서는 아니 됩니다. 이런 방식은 자아를 쪼개고 분열시키는 것이며,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토록 갈망하는 평화와 기쁨은 우리의 연약함을 극복함으로서가 아니라 연약함을 끌어안는 삶, 그 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약함과 강함, 단점과 장점, 죄와 거룩함, 이기성과 이타성, 어둠과 빛을 동시에 지닌 존재임을 푸근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우리가 온전해지는 길입니다. 지금 내 모습을 있는 모습 그대로를 지으신 하나님을 경배하는 길입니다. 나 자신의 어떤 모습도 거부하지 마십시오. 아무리 내가 약하고 악하다 해도 그 모든 것을 참된 나로 받으십시오. 하나님은 그런 나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랑 그 자체입니다. 이상은 하나님과의 가장 깊은 사귐으로 들어갔던 영성의 대가들이 이구동성으로 전하는 바입니다.

  

우리의 약함이 가장 핍진하게 폭로되는 장(長)은 중독입니다. 중독은 인간의 존엄성 자체를 부인하고 싶을 정도로 사람됨의 약함과 악함을 처절하게 드러내고, 당사자와 가족을 거듭 절망으로 내동댕이치며 종내 죽음으로 몰아갑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이 지긋지긋한 중독이야말로 신이 즐겨 입장하는 문(門)입니다. 융 학파의 심리분석자인 매리언 우드맨은 “중독은 신을 경험하도록 돕는다. ... 인간은 자신이 가장 연약해졌을 때 항복하고, 그 항복을 통해 신을 만나게 된다. 신은 상처를 통과해 온다.”고 말함으로써 은혜의 정수를 적확히 짚었습니다.

  

알콜중독, 게임중독, 섹스중독, 도박중독, 일중독과 같이 내남이 공인하는 공식적인 중독에 빠지지 않았다고 해도 내가 어떤 죄를 되풀이한다는 것은 그 죄가 주는 쾌락 내지 만족감을 끊지 못하는 일종의 중독입니다. 이런 면에서 보자면 저 역시 중독자입니다. 그런데 제가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반복하는 죄를 내치지 못하는 저의 약함과 예수님보다 죄를 더 사랑하는 저의 악함 덕(탓이 아니라!)이었습니다. 그리고 더 놀랍게는 약하고 악한 제 모습이 조금은 사랑스럽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제는 싱어송 라이터 레오나드 코헨이 왜 이렇게 노래했는지 알 것 같습니다. “아직 울릴 수 있는 종을 울려라. / 자신의 완벽한 헌물은 잊어라. / 모든 것에는 흠이 있다. / 그래서 빛이 들어오는 것이다.”

  

지금까지 펼쳐놓은 ‘약함 예찬’에 화룡점정을 찍기 위해 앤소니 드 멜로 신부의 『일분 지혜』에 나오는 이야기를 옮겨봅니다. 신은 이 땅에 사는 각 사람을 줄로 매어 붙들고 있는데, 우리 인간은 죄를 지을 때마다 그 줄을 끊습니다(죄란 확실히 하나님과의 단절입니다). 그러면 신은 자애롭게도 끊어진 줄을 매듭으로 묶어 다시 연결하고 인간은 그만큼 신에게 가까워집니다. 우리 인간은 연약함 때문에 거듭거듭 죄를 지으며 줄을 끊지만 신 또한 거듭거듭 매듭을 묶습니다. 결국 죄와 약함이 우리를 신에게 더 가깝게 해준다는 거지요. 문득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롬 5:20)란 말씀이 사무칩니다.

  

  

 코다: 못됐기에 더 고마운 주님

  

이제는 감히 말할 수 있습니다. 약함이야말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가장 큰 선물이며, 그 약함을 한껏 누리는 것이야말로 선물을 주신 분을 가장 영화롭게 하는 길임을. 물론 이제 막 ‘약함의 은혜’에 눈을 뜬 저로선 감당할 수 없는 말입니다. 약함을 한껏 누리다니요. 여전히 약함은 피하고 싶은 불편한 친구입니다. 하지만 어느새 약함을 친구라고 부르는 절 보면서 스스로 놀랍니다. 가장 약했기에 가장 강하셨던 분과 길벗하며 걷다보면 머잖아 약함을 친구라 부르며 한껏 우정을 누리는 날도 오겠지요.

  

가만 생각해보면 참 못됐습니다. 강함이 아니라 약함을 통해 이 모든 것을 허락하는 하나님은 참 못됐습니다. 사람을 이토록 천하고 독하게 만들고 나서야 은혜가 무언지 깨닫게 하시는 하나님은 참 짓궂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약함을 이겨보려고 몸부림치다가 어쩔 수 없이 그 약함을 내 모습으로 받아들이고 나면 그제야 환히 웃으며 “이제야 내가 가장 사랑하는 네 모습을 너도 사랑하게 됐구나.”하시는 그 야속한 분이 눈물겹게 고맙습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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