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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도들이 예수께 모여 자기들의 행한 것과 가르친 것을 고하니.

  • 궁극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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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21절-30절: 마침 기회 좋은 날이 왔으니 곧 헤롯이 자기 생일에 대신들과 천부장들과 갈릴리의 귀인들로 더불어 잔치할쌔 헤로디아의 딸이 친히 들어와 춤을 추어 헤롯과 및 함께 앉은 자들을 기쁘게 한지라 왕이 그 여아에게 이르되 무엇이든지 너 원하는 것을 내게 구하라 내가 주리라 하고 또 맹세하되 무엇이든지 네가 내게 구하면 내 나라의 절반까지라도 주리라 하거늘 저가 나가서 그 어미에게 말하되 내가 무엇을 구하리이까 그 어미가 가로되 세례요한의 머리를 구하라 하니 저가 곧 왕에게 급히 들어가 구하여 가로되 세례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담아 곧 내게 주기를 원하옵나이다 한대 왕이 심히 근심하나 자기의 맹세한 것과 그 앉은 자들을 인하여 저를 거절할 수 없는지라 왕이 곧 시위병 하나를 보내어 요한의 머리를 가져오라 명하니 그 사람이 나가 옥에서 요한을 목 베어 그 머리를 소반에 담아다가 여아에게 주니 여아가 이것을 그 어미에게 주니라 요한의 제자들이 듣고 와서 시체를 가져다가 장사하니라 사도들이 예수께 모여 자기들의 행한 것과 가르친 것을 낱낱이 고하니.


‘내게 구하면 내 나라의 절반까지라도 주겠다.’ 자기가 말한 것에 대해 어떻게 책임을 지려고 그럴까? 그리고 왕이 말한 걸 보면 말을 기분 내키는 대로 함부로 하고 있다. 우리가 자기 앞에 있는 상대가 어떤 정신과 소원 목적을 마음에 가지고 있는지 그 상대를 잘 모르면 자기가 크게 당하기 쉽다.


‘내게 구하면 내 나라의 절반까지라도 주겠다’ 하는 이 말을 신앙적으로 생각해 보면 그 말속에 미래적으로 누가 죽어나가는 것이 들어 있느냐? 세례요한. 결국은 마지막 선지자, 생일날에 자기에게 보내온 인간창조의 목적을 가르쳐 줄 선지자를 죽이는 일이 된다.


오늘날 안 믿는 사람들이나 믿는 사람들이 생일잔치를 많이 하는데, 특히 세속화된 목사들은 환갑이니 진갑이니 다 한다. 그런데 잔치를 하던 안 하던 사실은 자기 생일날을 기억할 것 같으면 하나님께서 인간 자기를 왜 이 세상에 태어나게 했는지 분명한 목적이 있는 건데 그 목적을 선지자로부터 들어야 한다.


선지자는 미래를 가르쳐 준다. 그 선지자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인간 자기의 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들어야 하는데 잔치하는 사람들은 그게 없다. 그러니까 믿는 사람 같으면 그냥 일반 세상 잔치처럼 하니까 그 날에 네가 선지자를 죽이고 들어간다. 그게 들어있다.


그런데 그 생일을 못 해 먹어서 부부끼리 ‘사랑하면 내 생일을 기억할 텐데 나를 사랑을 안 하니 생일을 기억도 못하고 선물도 안 준다’고 한다. 그런 정신으로 돌아가는 부부가 어떻게 되겠느냐? 앞으로 살다 보면 오르막길도 있고 내리막길도 있을 텐데 그럴 때도 생일 안 해 주면 헤어지자고 하며 생일을 따지겠느냐?


생일을 애 터지게 찾는 사람은 세상 사람임을 알아라. 세상 사람은 그 분위기에 움직이는 줄로 알아라. 안 그렇다가 아니다. 자기 속에 세상 소원 목적적으로 들어 있으면 그 사람은 그 세상 분위기를 타게 돼 있다. 그러면 자기의 성격 성질도 사람에게 미친 것처럼 나타나게 돼 있다.


‘내게 구하면 내 나라의 절반까지라도 주겠다.’ 아하수에로 왕도 에스더에게 그런 말을 했고, 헤롯 안디바스도 헤로다아에게 같은 그런 말을 했다. 그런데 말은 같은 말이지만 그 말을 한 사람의 중심이 ‘천국적이냐, 세상적이냐’ 하는 거기에 따라서 그 뜻은 전혀 다르다.


에스더에게는 계시적으로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자에게, 주님이 즐거워하는 자에게 신령천국을 다 주고 싶어 하는 소원성이 그 안에 들어 있는 말씀이다. 그러나 헤로디아와 그의 딸에게 한 말은 그들이 하나님의 사자를 죽이는 것을 구했으니 간단히 말하면 지옥의 문이 열리는구나. 그 뜻을 들어준 헤롯 안디바스도 마찬가지다.


개인적이던 가정적이던 어떤 즐거운 분위기는 잔치를 의미할 수도 있다. ‘천국잔치다’ 하면, 또한 ‘하늘에 들림 받아서 공중에서 혼인잔치를 한다’ 하면 그 이상은 없는 최고의 극치의 기쁨을 말한다.


세상에서 잔치는 기쁘다. 결혼잔치는 더 기쁘다. 그러면 환갑잔치가 결혼잔치만큼 기쁠까? 환갑잔치는 나쁘게 말하면 그거 먹고 죽는 거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을 하느냐? 죽음이 가까웠다는 잔치임에도 자녀들이 부모님의 환갑잔치를 해 주려고 하는 게 세상이다. 그런데 우리가 인간창조의 목적관에서 그렇게 하는 것을 볼 때 그건 사지 밥을 먹는 거다. 감옥에서 사형 전날에 맛있는 음식을 많이 준다고 하는데 그게 사지 밥이다. 그 밥 먹고 너는 죽는다.


세상만사는 모두 의미와 뜻이 있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성경을 통해서 왜 그것을 모를까? 성경은 왜 보느냐? 성경을 안 보는 사람은 안 보니 몰라서 망하고, 보는 사람도 그 뜻을 몰라서 망하고. 그러면 보는 의미가 뭐냐? 자기에게 효력도 없이 볼 것 같으면 왜 성경을 보느냐? 왜 예수를 믿느냐?


우리는 여기서 부모가 하는 자녀의 교육을 생각하게 된다. 부모들의 정신을 자녀들이 답습을 한다. 본을 받는다. 안 받는다가 아니다. 예들 들어서 고약한 부모 밑의 자녀들은 늘 부모와 싸운다. 이런 가정의 아버지와 자녀는 극대 극이기 때문에 싸우는 것인데, 그런데 그 극대 극이 선과 악의 극이 아니고 각자의 기준이 극대 극이기 때문에 그렇게 싸우는 거다. 그러면 그 자녀는 커서 또 그 아버지를 닮아가는구나.


그러니까 자녀입장에서는 부모가 하는 것이 나쁘게 보이더라도 부모에게 대들면 안 된다. 대들면 그 싸움이 연습이 돼서 자기 역시 어른이 되면 또 그렇게 한다. 그리고 부모는 자녀가 부모를 답습한다는 것을 뼈아프게 생각을 해서 자신의 허물을 고쳐야 한다. 고치지 않으면 필경은 자녀가 답습을 하게 돼 있다. 이러면 부모의 눈에서 피눈물이 나게 돼 있다.


왕족인 헤롯이 세상공부를 안 해서 그 죄를 지을까? 왕이 되려면 세상공부도 안 하고 왕이 될 수가 있느냐? 인간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인간의 전폭의 삶의 위한 지침서로 성경을 주셨으니 이 성경을 통해 참 사람, 인간의 참 목적을 알게 하고, 바른 삶을 살게 하고 깨닫게 하는 교육이 있는데 이 공부는 마다하고 왜 아무리 공부를 해도 세상을 다 차지할 수 없는 세상공부에 목숨을 바치느냐?


참 목적 참 사람이 되는 성경을 통한 참 교육은 사람에게 들어가는 건데, 늘 말하지만 세상공부는 자기가 이 세상에서 나그네 생활을 할 동안에 생활을 개척하고 물질성적 개념으로 살아가는데 필요한 공부이다. 이 세상공부에는 인격적인 공부는 없다. 인격적인 성장은 없다. 다만 학문적 성장은 있다.


사람의 인격의 성장을 배우는 학문은 세상학문에는 없다. 세상학문은 아무리 공부를 잘 해도, 아무리 학박사라도 인격적인 교육은 없고 인격적인 성장도 없다. 세상학문에도 인격적인 교육이 있다면 성경이 필요가 없는 것이다. 있다고 한다면 또한 예수님이 이 땅에 성육신으로 오실 필요가 없는 것이고, 또한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말씀을 주실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치가 그렇다. 세상에는 인격적인 교육이 없기 때문에 성경을 주신 거다.


그런데 이 세상공부에서 계속 일등을 하다가 이등을 하면 자살하고, 부모는 자식이 이등으로 떨어지면 일등 하라고 닥달을 하고. 이게 뭐냐? 부모들은 생각을 해야 한다. 기독교인 가운데도 그런 부모가 많다. 예배시간에 참석해서도 자녀가 그 예배자리에서 세상공부를 하도록 하고 있다.


극단적인 예이지만 일등을 하던 자식이 이등을 하니 부모가 심한 성화를 해서 그 자식이 뛰어 내려서 죽는다고 하면 부모가 생각하기를 ‘내가 너무했구나’ 하겠지만 성경의 뜻은 ‘온 천하를 다 가졌더라도 네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하고 있는데 ‘내가 너무했구나’ 하고 생각하는 그 부모가 이걸 생각을 하느냐? 참 미련하다.


요즘 자녀들로 인해서 사회문제가 얼마나 시끄러우냐? 그러면 자녀들이 그런 문제가 되는 행동들을 뱃속에서부터 배웠느냐? 자녀가 자라는 동안에 부모가 그걸 가르쳤다. 사회라는 부모가 가르쳤다. 교육계가 가르쳤다. 인간을 모르는 지도자들이 가르쳐 놨다. 세상은 뭐가 첫째고 우선인 줄을 모른다.


오늘날 왜 유독 한국에서 이런 일이 더 많이 벌어지느냐? 그렇다면 어른들이나 부모들이나 교육계는 그 원인을 빨리 깨달아야 한다. 남의 자식이 아니라 다 내 자식이다. 정말 가슴 아픈 일이다.


헤로디아가 본 남편이 로마에 가서 있는 동안에 바람을 피웠다는 설도 있다. 여기서 우리가 알 것은 예수 믿는 부부가 잠깐 기도시간 외에는 절대로 분방을 하지 말라. 특히 교회 목사는 말할 필요가 없다. 부부가 분방을 한다는 것은, 떨어져 있다는 것은 마귀에게 들어오라는 신호와 같다.


부부끼리 심한 말다툼을 한다는 것은 항아리가 금이 가는 소리다. 항아리는 한 번 금이 가놓으면 그걸 때운다고 해도 그 흔적은 남아있게 된다. 부부가 심한 싸움을 하는 것은 저수지 같으면 물이 새는 소리다. 얼마 안 가면 둑이 무너진다. 무너지면 끝난 거다.


방언하고, 안수하고 돌아가고, 철야하고 밤늦게 집에 돌아가고, 특별 안수 별미 축복 받으라고 하고, 사랑으로 인사한다며 남녀가 포옹하는 것은 마귀의 짓이다. 또한 자기가 거룩하다고 하는 것과 신성하다는 것을 나타내려고 장가도 안 가고 시집도 안 간다거나, 결혼을 하고도 부부의 결합도 안 하는 건 이단성이다. 이방종교에서나 볼 수 있는 짓이다. 부부라면 늘 소금을 두고 화목하라고 하신다. 진리이치를 두고 너도 나도 하나님의 말씀에 성품에 맞춰나가야 한다. 그게 정확한 거다. 그 이치를 벗어나면 뭔가 잘못돼 있다. 고쳐야 한다. 타가 안 고치겠다고 도망간다면 할 수 없지만 타가 안 고친다고 해서 내가 도망가면 이건 안 된다. 주격이 누구냐?


하나님께서 부부로 만들어 놓았으니 남자는 남편이라는 권이 있고 여자라는 아내라는 권이 있는 거다. 남자가 하나님의 것을 받아서 의의 통치 선의 통치 사랑의 통치로 내려갈 때 아내 쪽에서는 그걸 받을 권리와 책임이 있다. 이걸 유교에서 말하는 주종관계로 생각을 말라. 동등이다.


보통 보면 유교의 가정이나 유교의 가정이 아니라도 우리나라에서 옛날부터 의례히 내려오는 풍습이나 습관의 성질을 받았으면 남자는 바람을 피워도 되고 아내는 안 된다는 등의 여자를 하시해버리는 게 있는데 그건 가져서는 안 될 정신이다. 말이 안 되는 말이다. 불공평이다.


예수 믿는 사람이 할 수 있는데도 복음에 주력도 아니고, 결혼을 해서 믿음의 가정으로 만드는 것도 아니고, 교회에서 수종 드는 것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일반적으로 국가나 민족이나 이웃을 위한 봉사심도 없다면 이건 인간존재의 의미가 없는 사람이다. 존재는 있으나 있으나마나 한 사람이다.


다른 사람과 똑같이 먹고 마시고 입고 숨 쉬며 많은 사람의 수고와 혜택을 입고 살면서 인간으로서 자기 존재의 의미가 없이 사는 사람도 많다. 이건 인간으로서 참 처절한 거다. 비참한 거다. 인간은 그래서는 안 된다.


생일날 또는 다른 기념일 등에 잔치를 하지 말라는 말은 아니다.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지만 문제는 선지자를 죽이지 말아라. 자기 속의, 자기 가정의 선지자를 죽이지 말아라.


어떤 가정은 잔치를 실컷 하고 왜 술 먹고 싸우느냐? 도깨비 국물을 먹으니 도깨비짓이 나오는 거다. 어린 애들이 문제가 아니라 어른들이 문제다.


29절-30절: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스승의 시체를 가져다가 장사를 치뤘다. 세례요한은 예수님보다 6개월 먼저 보냄을 받아 늘 메시아 되신 예수님을 증거 했다. 세례요한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분이다. 나는 그 분의 신들매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했다.


이 세례요한이 이제는 순교를 당하고 그 활동은 그쳤다. 하지만 세례요한의 뒤로 누구의 역사가 곧 뒤따르는 거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복음사역을 시작하셨으니 이제 세례요한의 시체는 묻어버리고 그가 가르친 지시대로만 가면 예수님을 만나게 돼 있다. 세례요한의 육신은 땅에 묻고 그 가르침으로 나가면 얼마 안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돼 있다.


그러니까 인간을 그리워하지 말아라. 자꾸 인간의 사랑을 그리워하게 되면 마귀의 시험을 탄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누구의 귀신이 들어왔네’ 하면 점쟁이 무당이 된다. 자꾸 점치고 하면 필연적으로 점쟁이가 되고 무당이 된다. 돌아가신 분은 그걸로 끝나는 거다. 그러나 그가 생전에 가르친 옳은 말씀은 늘 가슴에 담고 예수님 쪽으로 향해서 가야 한다.


요즘 자식이 자살해서 죽은 소식이 자주 들리는데 자녀가 죽은 그 자식 하나뿐이라면 부모가 그 소식을 듣고 기절할 만도 하다. 그러나 그 이면을 보면 아무리 자녀가 귀해도 자녀를 우상으로 만들지 말라. 애지중지 하며 불면 날아갈까, 꽉 쥐면 터질까 그런 정도의 우상을 만들지 말아라.


그 자식이 죽고 안 죽고의 문제가 아니라 자식을 우상을 만들어 놓으면 사람이 살다 보면 불행한 일을 당할 때도 있는데 그 때 그 슬픈 상황을 어떻게 이기느냐? 못 이긴다. 그러면 병이 돼 버린다. 그러니 죽은 자는 그걸로 끝내라. 그 다음에 할 일이 또 있는 거다. 너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역사는 또 있는 거다. 없어진 인간을 애 터지게 생각하면 안 된다. 그 자체가 시험이다. 예수 믿는 정신은 그렇게 하면 안 된다.


사람은 마음에 병이 들면 그 다음에 육신의 병은 따라오게 돼 있다. 우리는 마음 가운데 주님을 더 모시고 해야 한다. 늘 말하지만 세상 것은 다 지나간다. 아무리 사랑하는 거라도 언제고 자기 곁을 떠난다. 아니면 자기가 먼저 떠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순서는 자기가 모른다. 다만 있는 동안에 주님을 사랑함으로 그만큼 자타의 구원을 위해서 살면 그게 바람직한 거고 하나님 앞에 옳은 거다.


개인적으로 보면 세례요한의 세례를 받은 사람의 정신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구원을 하나님의 의대로, 옳음대로 내 속에 이루어 나가는 거다. 세례요한의 가르침을, 선지자의 가르침을 받았느냐? 그러면 예수를 만나게 돼 있고, 예수를 만났으면 그 의를 자기 속에서 키워나가는 거다.


교회적으로 개인적으로 보면 아무 곳에서나 세례는 받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못 만난 사람은 이루어지는 구원이 없다. 그러니까 세례요한 즉, 주님이 보내신 종으로부터가 아니면 죽을 때까지 예수를 믿어도 그 사람 속에는 구원이 자라지 못하는구나. 충성봉사는 하는데 구원이 자라지 못하는구나.


그러면 구원이 뭐냐? 예수 믿고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을 덧입는 것인데,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세례요한의 교훈을 만나지 못하면 자기 속에서 이 구원이 자라지를 못한다. 그래서 교훈이 그렇게 중요하고, 옳은 교훈에서 옳은 세례가 들어가야 만이 세례를 받는 자가 하나님의 의를 이뤄가는 일을 하는 거다.


세례요한이 세례를 줄 때 예수님께서 ‘나에게도 세례를 달라’ 하니까 ‘왜 그래야 합니까?’ 하니 예수님께서 ‘하나님 앞에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라고 했다. 즉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심은 당신을 위함이 아니라 우리의 의를 이루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우리는 세례를 받으면 자기의 의를 위해서 하나님 앞에 살아갈 각오를 해야 한다. 그 마음을 가지는 즉시 하늘에서 하늘의 문이 열리면서 성령님이 임재하면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 기뻐하는 자다’ 하는 음성이 내려오는 것이다. 그 사상 정신이 그렇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자기의 구원이라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고, 또한 성경대로 보면 세례도 아무 곳에서나 함부로 받을 것이 아님을 느낄 수 있다. 교회 안에 보면 세례는 어릴 때 받았으나 어른이 되도록 까지 도무지 깨닫는 것도 없고, 성격 성질도 고친 것도 없고, 그러니 사람노릇도 못하는 사람이 많다. 이건 큰일이다.


세례요한의 제자들은 죽은 세례요한의 시체를 땅에 묻고 의인의 부활을 바라보면서 이제는 예수님께로 옮겨야 한다. 당시의 그 장면을 보여주는 것은 ‘이게 돼야 이게 되는구나. 이게 돼야 이것도 되는구나’ 하는 것을 가르쳐 주는 것이다.


30절에 사도들이 모여서 자기들의 행한 것과 가르친 것을 예수님께 낱낱이 보고를 한다. 병 고친 것, 귀신 쫓은 것, 천국복음을 전한 것 등을 보고했다.


그러면 여기서 사도들의 본분이 무엇일까? 천국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이걸 분명히 알아라. 이게 우선적으로 들어가는 거다. 천국복음이 바로 들어가면 그 다음에 귀신은 안 들어온다. 그게 없으면 백 날 귀신을 쫓아내도 소용이 없다.


무당들도 귀신을 쫓는다. 예수이름으로 안 해도 귀신을 쫓는다. 그러면 백이면 백 다 쫓느냐? 그건 아니다. 상대방의 귀신이 더 힘이 있으면 도망을 안 간다. 그런데 설령 무당 점쟁이가 귀신을 쫓아냈다고 해도 귀신이 나간 사람을 하나님의 속성으로 인도를 못한다. 할 수는 없다. 불가능이다. 이렇게 되면 그 사람이 귀신이 나갔어도 어떤 격한 상황이 오면 또 들어간다. 죽을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이치의 말씀으로 사람을 하나님의 속성적으로 성품화 시키니 그 사람에게 어떻게 귀신이 들어가느냐? 못 들어간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의 진리이치의 말씀을 안 따르면서 예수이름으로 병 고치는 자들이 있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그 사람들이 예수님 앞에 전부 부인함을 당한다. 부정이 된다.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냈으니 너는 몇 명을 쫓아냈느냐?’ 하고 상급 주고 그런 건 없다. 그런데 주위에 보면 결국엔 예수님께 부인함을 당할 그런 교회가 많다. 말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이치를 따르지 않는 교회 목사들이 많다. 그러면서 귀신을 쫓는다고 야단법석이다.


각자 행한 것을 모두 낱낱이 아뢸 때 좀 빼놓고 얘기한다거나 더 붙여서 얘기하면 안 될까? 숨김없이 낱낱이 다 보고를 했을까? 더 붙이거나 빼도 예수님은 다 아신다.


우리끼리 얘기하면서 자기에게 불리한 것은 말하지 않고 자기에게 유익한 것만 더 부풀려서 말하는 것도 주님은 다 아신다. 자기에게 불리한 것은 빼놓고 얘기하면 자기 양심에 걸리지 않느냐? 우리는 양심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나 혼자 속으로 남을 미워하고 욕하는 것도 주님은 다 아신다. 남을 깎아내리고 헐뜯고 짓밟는 것도 다 아신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이 교역자 신학생을 대상으로 20여년 동안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을 통해 영원 전에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인간구원을 설정하게 된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깨닫고 하나님의 본질의 신앙으로 나가는 주의 종들이 누룩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참석하실 분은 031-207-5159, 또는 010-8886-5159로 문의해 주세요.(평신도도 참석 가능합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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