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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바리새인과 서기관 중 몇이 예루살렘에서 와서 예수께 모였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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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장 1절-4절: 바리새인들과 또 서기관 중 몇이 예루살렘에서 와서 예수께 모였다가 그의 제자 중 몇 사람의 부정한 손 곧 씻지 아니한 손으로 떡 먹는 것을 보았더라 (바리새인들과 모든 유대인들이 장로들의 유전을 지키어 손을 부지런히 씻지 않으면 먹지 아니하며 또 시장에서 돌아 와서는 물을 뿌리지 않으면 먹지 아니하며 그 외에도 여러 가지를 지키어 오는 것이 있으니 잔과 주발과 놋그릇을 씻음이러라).


사람에게 고약한 냄새가 나면 사람이 가까이 하지 못하듯이, 또한 사람의 심성이 고약하면 사람들이 가까이 하지 못하듯이 신앙인격 면에서 신앙의 질이 이질이면 겉으로는 세상의 것으로 아무리 잘 꾸며도 하나님은 그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은 마귀가 좋아하고 귀신이 좋아하고, 뿐만 아니라 세상 사람들이 좋아한다. 왜 그러냐? 선악과를 먹은 정신 사상 소원 목적 마음이기 때문이다.


예수 믿는 사람이 진리이치를 깨달으면 정신 사상 영 분별이 간다. 그래서 그 사람에게 진리를 전해주면 경계가 되고 하는 건데 예수 믿는 사람이 그런 게 없으면 안 믿는 사람과 자꾸 친해진다. 예수 믿는 사람이 안 믿는 사람과 자꾸 친해진다면 예수 믿는 사람이 내려간 것이냐, 예수 안 믿는 사람이 믿는 사람보다 올라간 것이냐? 예수 믿는 사람이 내려간 것이다. 그걸 알아야 한다.


예수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지혜지식성이나 도덕성이나 능력성 면에서 세상 사람들과는 질적 근본적으로 다른 면으로 위이다. 같은 수준에서 실력이 더 있는 동질성에서의 위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질이 다른 위이다. 하늘의 것과 땅의 것으로 근본적으로 질이 다른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좀 열심히 믿고, 교회 쪽으로 신경을 쓰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노력하는 사람일수록 예수 믿기 전에 술 먹고 담배 피고 하던 친구들이 슬슬 끊어진다.


그러면 내가 그걸 끊어뜨린 거냐? 아니다. 나는 하나님의 진리본질로 바로 가는데 그들이 생명노선에서, 인간의 궁극적 목적에서 먼 것이기 때문에 멀어진 것이다. 믿지 않는 친구들은 예수 믿는 자기에게 ‘너는 그 전에는 우리와 같이 잘 놀더니 왜 너 혼자 우리에게서 떠났느냐’ 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그들을 떠난 게 아니라 내가 옳은 길로 들어서서 가니 그들은 인간창조의 근본목적에서 떠나서 살기 때문에 그들이 떠난 셈이 되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다 사망성에 떨어져 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이 중심이다. 우리는 생명성에 서서 그들을 끄집어 올리는 것이다. 살리는 것이다. 그 살리는 그 방편은 메시지를 전달하고 전도하고 가르치고, 때로는 가까이 했다가 때로는 그들의 태도를 봐서 가만 두었다가, 가만 둘 때는 싫어서 미워서라기보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역사를 하심으로써 하나님께로 가까이 가게 할 목적을 두고 내 쪽에 당겼다 놨다 하는 거다.


우리가 신앙의 진리본질을 하나님의 속성적으로 모르면 예수 믿는 사람이 실수가 참 많다. 다른 사람에게 억압 강압이 많이 나타난다. 그래서 상당히 고통을 겪는 사람도 많다.


그러면 왜 그 고통을 겪을까? 그것은 그 일이 금방 일어난 것이 아니라 그 고통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원인이 이미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 고통을 겪는 자가 그 원인을 알면 그 다음 일은 그만큼 수월해진다. 그러나 사람 일은 그렇게 금방 바로 되는 게 아니다. 시간이 걸리고 진통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 보시기에 어느 정도 시일이 걸려야 하는 진통이 있는 거다. 모든 일이 그렇다. 과일도 그렇다. 하루아침에 심고 하루아침에 먹고 하는 게 아니다.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사람이 자라려면 모든 시련 연단 겪어야 하는 건데 겪는 그 과정에서 남과 나를 원망하고 하나님을 원망하면 더 미궁에 빠진다. 이건 참 한심한 자가 된다. 그래서 끝까지 견디는 자가 구원 얻는다고 한다.


그런데 하나 하나의 사건을 과정으로 통과할 때 몰라서 그 사건에서 얻어맞고 징징 짜고 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걸 거뜬히 이기고 나가는 사람이 있다. 거뜬히 이겨내고 나가는 것은 그 사건에서 수입을 잡고 가는 거다.


예를 들어서 자기가 거지로 산다면 ‘내가 왜 거지로 살지? 세상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 한다거나 부모를 원망하면 되느냐? 아니다. ‘내가 부지런하지 못하고 못 깨달아서 그 열매를 내가 거두는구나. 내가 비록 앞으로 살 날은 얼마 되지 않지만 다른 사람에게 말로써 대화로써 교육적으로 옳은 깨달음으로 깨닫게 해 줘야지’ 하는 사람은 희망이 있는 사람이다. 사람이란 안 넘어질 수는 없으나 너무 많이 넘어지면 상처투성이가 된다. 그러나 한 번 넘어질 적마다 ‘이래서 내가 넘어졌구나’ 하고 깨달음이 돼야 한다.


‘세상에서 먹고 누리자’ 하는 것은 선악과를 먹은 정신 사상 소원 목적이므로 이건 마귀의 수법에 넘어간 것이다. 이 사람은 마귀가 좋아하고 세상이 좋아하는 사람이다. 예수님에게 마귀가 그런 시험을 걸었다. 그리고 ‘교회에서 제일 높은 사람이 돼야지. 장 자리에 올라가야지’ 하는 것도 마귀의 수법이다.


장 자리에 올라가면 더 올라갈 데가 없다. 세상에서는 아무리 올라가도 최고로 올라가면 그 이상은 없다. 그런데 진리의 사람은 진리성장으로써 무한히 올라갈 수 있다. 우리는 올라가다가 스톱되는 게 아니다. 이렇게 진리성장으로 올라가는 사람은 하늘의 것을 가진 사람으로서 고상한 사람이다.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마다 사람들이 다양적인 병에서 온전케 되어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니까 예루살렘에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중에 몇 명이 그 소식을 듣고 예수님께로 모였다. 우리가 여기에서 신앙의 성격 성질 면에서 보면 예루살렘에서 왕이 될 사람이 있고 왕이 되지 말아야 할 사람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베들레헴이나 딴 데서 왔다고 하면 별 것 아니게 보지만 바리새교인들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서 내려왔다고 하면 사람들이 의례히 생각하기를 유명하게 본다. 예를 들면 ‘시골에서 목회하는 목사가 왔으니 와서 말씀을 들으시오’ 하면 사람들 속에서 뭔가가 가볍게 들린다. 그런데 ‘서울에서 학박사가 왔다’ 하면 마음이 확 잡힌다.


일반사람들은 사람을 볼 때 ‘좋은 자리, 유명한 자리에 있는 사람인가?’ 하고 보지만 우리는 누가 어디서 왔던, 학박사가 왔던 사회적 종교적 명예를 갖고 왔던 그 사람이 말하는 진리이치를 찾는 것이므로 그가 하는 말이 진리이치가 아니면 아닌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모이면 많은 말이 나오기 마련인데 서기관들 중에 몇이 와서 예수님께로 모였으니, 어느 종교적인 단체에서 왔다고 하면 어떤 특별한 의제로 토론을 한다거나 아니면 이단설 같은 약점을 잡기 위해서 오는 것이다.


예루살렘에서 예수님께 온 이 유대의 종교인들은 딴 데는 없는 예루살렘에만 있는 세계적인 지도자급들이다. 예수님은 그들의 속 중심을 꿰뚫어 보시는 거다. 이들이 예루살렘에서 온 유대의 종교인들이니 예수님을 책잡으려고 율법에 대해 따질 것이 분명하다. 아니나 다를까? 그들이 예수님의 제자 중 몇 사람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것을 봤다.


그들은 즉, 바리새인들과 모든 유대인들은 장로의 유전을 엄격히 지키는데, 음식을 먹을 때 손을 씻는 거라든지, 또 시장에서 집으로 들어오면 발에 물을 뿌려야 음식을 먹고 안 뿌리면 못 먹고, 또 잔과 주발과 놋그릇을 씻는다.


사실 그런 것은 위생상 청결의 문제이지 ‘죄다, 아니다. 지옥 간다, 천국 간다’ 그런 것은 아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런 것을 기준 삼아서 다른 사람을 죄인처럼 정죄하고 있다. 마음속에 들어있는 죄는 손을 씻고 안 씻고 하는 것과는 상관이 없는 거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보면 자기가 기준이 되어서 되게도 까다롭고 남의 말을 잘하는 사람이 있다. 그냥 넘어갈 것인데도 속에서 꼬장꼬장 돼서 남의 말을 한다. 그렇게 되면 자기 속에 병을 만드는 것이다.


여기서 참고해야 할 것은 위생상 청결문제는 죄는 아니로되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줘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서 몸을 씻지 않아서 다른 사람에게 냄새를 풍긴다든지, 씻기는 씻었는데 독한 향수를 뿌려서 그것 때문에 다른 사람의 머리가 아프다든지, 설교시간에 시끄럽게 한다든지 등등 은혜 받지 못하게 하는 것들은 삼가야 할 일이다.


우리 모두가 보면 어느 분의 설교를 다른 사람들은 좋다고 하는데 자기 혼자만은 은혜를 못 받는 경우가 있다. 이걸 바꿔서 말하면 다 같은 입장에 되겠는데 자기도 어떤 시점에 가서 다른 사람에게 은혜를 못 받게 하는 게 있을 수도 있는 거다. 그런데 이런 거는 자기가 잘 의식을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교회의 모임에서 예배시간이라든지 언제든지 죄는 아니로되 다른 사람에게 은혜를 받지 못하게 하는 게 있다면 참 문제다.


사람한테는 사람의 냄새가 나고 개한테는 개의 냄새가 난다. 그런데 자기의 냄새는 자기가 잘 모를 수도 있다. 그런데 개에게서 개 냄새가 난다고 난리를 치면 자기에게서는 냄새가 안 나느냐? 죄가 아닌 것을 가지고 그러면 안 된다.


다른 사람이 자기 옆에 잘 앉지를 않는다면 자기를 잘 관찰해야 한다. 예를 들면 자기 얼굴은 자기가 잘 못 보는 건데 사람마다 나를 자꾸 쳐다보면 길거리에 있는 창문 앞에 가서 자기를 잘 살펴야 한다. 많은 사람이 있는 데서는 공중도덕을 지켜야 한다.


종교적 외식 신앙자들은 자기들의 종교적 행위를 기준해서 다른 사람을 죄인처럼 취급한다. 우리교회에 처음 오는 사람은 우리교회를 어떤 취급을 할까? ‘궁극교회는 예배순서가 없네. 이거 이단이 아닌가?’ 이단은 순서가 있고 없고로 따지는 게 아니다. 이단자는 예배순서가 있고 없고 와는 상관이 없는 거다. 말씀의 기준에서 말하는 것이다.


요한복음에서 주님이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자와 대화를 했는데, ‘신령과 진정의 예배는 이 때니라’ 라고 했는데 그 때 그 우물가에서 예배순서가 있었느냐? 순서가 하나도 없었다.


예배의 정의가 뭐냐? 예수를 만나는 것이다. 예수를 만나서 사람이 변화되는 것이다. 예배순서를 백 날 거창하게 지켜도 그게 없으면 소용이 없고, 그런 예배는 사람을 힘들게 만들 뿐이다.


기독교는 ‘예배 하는 날을 지켰으면 믿음이 좋은 사람이고, 속 중심은 세상 그대로 있으면서 다른 사람을 도와줬으면 선한 사람이고, 일반적인 옳은 일을 했으면 의인이고’ 이런 식으로 판단을 내리는 것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선한 일을 하는 것은 참 좋은 일이지만 그런 좋은 일을 하는 사람에게 예수를 믿자고 해도 안 믿으면 그 사람은 하나님 앞에 악한 자이다. 그러니까 이런 사람은 자기 기준을 가지고 자기 기준에서 ‘선하다. 의롭다’ 하며 살아가는 사람이다. 이건 하나님 기준이 아닌 선악과 먹고 나온 타락된 기준이다.


이 세상은 자기가 긍정을 하던 부정을 하던 생명과 즉, 하나님의 말씀을 먹는 지식이 있고, 그리고 거기에서 나온 이해타산이 인격화 되는 사람이 있고, 또 생명과는 먹지 않고 선악과를 먹는 일반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은 세상을 기준해서 살고 있다.


그런데 같이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도 생명과 먹는 지식을 기준해서 사는 사람이 있고, 선악과 먹는 지식을 기준으로 사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이 둘이 서로 논쟁이 생기면 대립이 생기게 된다. 더더군다나 이치를 모르면 싸움이 된다. 우리에게는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상대방의 지식의 위치 즉, 상대방의 지식이 어떤 사고방식을 신앙이라고 하는 건지를 꿰뚫어 보고 대화를 해야 한다.


사마리아 여자는 우물물을 길으러 와서 예수님을 만나서 대화를 몇 마디 했는데 예수님께서는 이걸 ‘신령과 진정의 예배는 이 때라’ 라고 했다. 이 때 예배순서는 일절 없었다. 그러면 그렇게 말씀하신 예수님은 오늘날 교인들이 볼 때 어느 교단 어느 교파 소속이냐? 자기를 기준시하고 말을 하는 것은, 유형적인 것 가견적인 것을 기준으로 세워서 말을 하는 것은 100% 옳은 기준이 아니다.


어느 교단에 소속이 안 돼 있다고 해서 이단이라는 말은 있을 수가 없는 거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느 교단 소속이냐? 예수님은 교단도 교파도 없다. 하나님은 어느 교단 교파 소속이냐? 어느 기준을 가지고 말씀을 하는 거냐? 예수님은 구원목적, 인간창조의 원인 동기 목적에 맞춰서 교훈을 하고 있다. 그런데 오늘날 교단 교파가 많은데, 자기를 기준시해서 어느 교단이나 교파에 들어가 있지 않으면 ‘이단이 아닌가’ 하는 것은 몰라도 너무 모르는 거다.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께서는 어떤 예배가 참 예배이고 어떤 예배가 거짓된 예배인지를 훤히 아신다. 예배의식과 행동양식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자 하는 하나의 수단들이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이 교역자 신학생을 대상으로 20여년 동안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을 통해 영원 전에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인간구원을 설정하게 된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깨닫고 하나님의 본질의 신앙으로 나가는 주의 종들이 누룩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참석하실 분은 031-207-5159, 또는 010-8886-5159로 문의해 주세요.(평신도도 참석 가능합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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