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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유민(流民)의 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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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0월 24일 주일설교

성경말씀 : 마태복음 3장 18절~20절

설교제목 : 유민(流民)의 영성

 

【예수께서, 무리가 자기 옆에 둘러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제자들에게 건너편으로 가자고 이르셨다. 율법학자 한 사람이 다가와서 예수께 말하기를 "선생님, 나는 선생님이 가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가겠습니다" 하였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을 나는 새도 보금자리가 있으나, 인자(人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마태 3:18~20)】

 

  <민중신학 이야기>


  민중신학자(김진호 목사)들이 이야기하는 ‘유민(流民)의 신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유민의 신학’이란 떠돌이의 삶을 사는 이들에게서 발생되는 하느님의 영성이라는 말로 정리될 수 있을 것입니다. 히브리사람이라는 말 자체가 귀속할 곳이 없는 떠돌이의 삶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또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신의 조상이라고 믿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 등이 모두 떠돌이 히브리들이었습니다. 나아가 야훼조차도 ‘고정된 성전에 계신 분’이라기보다는 끊임 없이 떠도는 삶을 의미하는 ‘장막에 거하시는 신’이라는 것을 보면, ‘유랑’이라는 것은 야훼 신앙의 뿌리(맥)이라 해도 될 것입니다.

  민중신학자들은 떠돌이들과 함께 하는 하느님의 신앙을 이야기합니다. IMF 이후 경제적 난민이 되어서 정착할 곳이 없어 유랑하는 노숙자들(homeless), 그리고 안전한 보호그늘 밖으로 밀려난 ‘비정규직 노동자’라는 새로운 약자 계층, 혹은 북한을 탈출해서 중국과 만주, 러시아와 한국 등으로 유랑하는 탈북동포들 … 그렇게 유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하느님, 또 그와 아울러서 그런 유랑의 사람들과 함께 하는 신학, 즉 ‘유민의 신학’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그러하셨던 것처럼, 스스로 떠돌이가 되어서 유랑의 사람들 속에서 하느님의 영성을 꽃피우는 ‘유민의 영성가들’이 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요. 정말 좋은 초점입니다. 우리도 그러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런 정치사회적 맥락의 차원보다는 인간 존재론적 맥락의 차원에서 ‘유민의 신학’을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오늘 그 이야기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불교 이야기>


  불가(佛家)의 경전 『육조단경』 중에 이런 문구가 있다고 합니다. “나의 법문은 예부터 ‘생각 없음’(무념, 無念)을 세워 종(宗)을 삼으며, ‘모양 없음’(무상, 無相)으로 본체(體)를 삼고, ‘머무름 없음’(무주, 無住)으로 근본(本)을 삼느니라.” 즉 ‘무념 무상 무주’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생각이 없다’(無念)고 하는 것은 생각에 있어서 생각하지 않는 것이요, ‘모양이 없다’고 하는 것은 모양에서 모양을 떠난 것이며, ‘머무름이 없다’고 하는 것은 사람의 본래 성품이 생각마다 머무르지 않는 것입니다.


  글쎄요. 제가 불교의 학에 대해서 배움이 깊은 사람은 못됩니다만, 저는 ‘무념 무상 무주’라는 잠언이 좋았고, 그 잠언을 가끔씩 묵상하곤 했습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흐트러지는 내 자신을 바로잡게 됩니다. 자꾸만 어떤 생각에 머물려 하고, 혹은 어떤 고정된 틀에 매이려 하는 욕망을 없애버려서 제 마음 가운데 평안의 영이 깃들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무념 무상 무주’의 잠언이 좋습니다.

 

  <민중신학의 창조적 계승?>


  오늘 이야기의 주제인 ‘유민의 신학’도 그런 맥락에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무념 무상 무주’의 잠언을 통해서 한 차원 더 깊은 ‘유민의 신학’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을 나는 새도 보금자리가 있으나, 인자(人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마태 3:20) 저는 과거에 이 말씀을 외로움의 고백으로만 읽었습니다. 예수의 고독이 그렇게 표출된 것으로 생각했더랬습니다. 그런데 민중신학적 ‘유민의 신학’차원에서 보았을 때, 이 고백은 인간의 평안한 정주(定住)를 박탈하려는 악한 세계 속에서 스스로 유민이 되려하는 예수의 담대한 ‘포기 선언’이었습니다. 그래요. 정말 좋은 초점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와 아울러서 정치사회적 맥락이 아닌, 인간존재론적 차원에서, 우주적 존재론적 차원에서 “인자(人子), 즉 사람은 원래 머리 둘 곳이 없는 존재임”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사람은 원래 머리 둘 곳이 없는 존재이고, 그래야만 하는 존재입니다. 무엇에라도 머리를 두는 순간, 잠깐이라도 머리를 두려는 그 지점에서 그이는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입니다. 인간은 바람 같은 존재입니다. 아니 무릇 생명은 깃털 같은 것입니다. 무념한 것이고, 무상한 것이며, 무주한 것입니다. 무념해야 하고, 무상해야 하며, 무주한 것이 곧 인간생명입니다. 그게 하느님의 창조원리입니다.


  그것을 아는 이만이 자유하게 살 수 있으며, ‘유민의 삶’을 평화롭게 받아들일 수 있으며, 유민들과 더불어서 해방된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설교를 마치면서>

  이제 설교말씀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오늘 설교말씀의 제목을 ‘유민(流民)의 영성’이라고 잡아보았습니다. 오늘 이 설교말씀의 제목을 깊이 묵상하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 축도

이제는 진리의 길을 직접 보여주신 예수님의 놀라운 은혜와, 우리의 생명과 영혼을 언제나 치유해 주시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를 인도해 주시는 성령님의 아름다운 동행이 사랑하는 수도교회 교우들 머리 위에 언제나 충만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김부겸 목사<수도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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