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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둠을 이겨내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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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2월 5일 주일설교

성경말씀 : 마태복음 27장 33절~34절

설교제목 : 어둠을 이겨내기 위하여

 

【그들은 골고다 곧 ‘해골곳’이라는 곳에 이르러서, 포도주에 쓸개를 타서, 예수께 드려 마시게 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 맛을 보시고는, 마시려고 하지 않으셨다(마태 27:33~34)】

 

  <어둔 삶 이야기>

  삶의 하루하루를 잘 관찰해보면, 밝고 신나고 깨끗하고 아름다운 순간들은 짧고 대개는 지겹고 슬프고 아프고 괴로운 시간들이 길고 긴 것임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특히 나이를 먹고 나서 살아가는 인생이란 곧 ‘상처 입은 영혼’, 그것 자체임을 실감하게 됩니다. 뭐든 잘 안되는 것이죠. 뭔가 되더라고 힘겨운 나날의 삶이 있을 뿐입니다. 삶은 대개 그렇게 어두운 것입니다. 밝은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를 어찌해야할까요? 오늘 그 어둠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매달 펴내는 <말숨>의 첫 장에 ‘새달을 열며’라는 꼭지가 있는데, 이번 달에는 ‘어둠을 친구 삼으니’라는 제목의 글을 써봤습니다. 그 글의 일부를 옮겨보겠습니다.


 【요 며칠 ‘어두움’에 대해서 이런 저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우리는 흔히 ‘빛’을 동경하고 사랑하지만, ‘어두움’은 미워합니다. 누구라도 가급적 ‘어두움’을 피하려고 합니다. 저 역시 그렇습니다만, 그러나 요즘 ‘어두움’에 대해서 생각을 달리해보니, 예상치도 못한 ‘통찰’을 얻을 수 있더군요. 오늘은 어둠 이야기를 이래저래 해보겠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잘 치지도 못하는 기타를 튕기면서 가끔 불렀던 노래 중에 <밤은 우리의 친구>라는 노래가 있었습니다. 기억나는 대로 노랫말을 더듬어 보면 이렇습니다. 『밤은 우리의 친구 / 그토록 오랜 세월을 조용한 침묵 속에서 / 포근히 나를 감싸네 / 뜨거운 태양의 열기도 식혀주고 / 드높은 빌딩의 현기증도 가려주고 / 언젠가 그녀와 거닐던 밤 바닷가 / 향긋한 추억에 감미로운 말 ….』뭐 대충 그렇습니다. 그때는 가사의 의미를 되새기기보다는 그냥 부족한 기타연주 실력으로 부르기 좋은 곡조라서 불렀는데, 요 며칠 그 노래 생각이 났습니다. 정확히 말씀드리면 ‘밤은 친구다’라는 명언이 생각났습니다.


  밤은 친구죠. 어둠이 친구입니다. 빛만 친구가 아니라, 어둠도 친구인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요즘 어둠의 시간들을 보내고 있습니다. 어둠의 시공간, 어둠의 세월, 어둠의 사건들, 어둠의 사람들, 어둠의 생각들 ………. 거창하거나 심각하거나 대단한 ‘어둠’은 아닙니다만, 이래저래 ‘어둠의 삶들’을 소소하게 겪고 있습니다. 때로 조급한 마음이 들어서, 제게 찾아온 어둠의 세력들을 빨리 물리쳐버리고 빛의 세계로 이동하고 싶기도 하지만, 요즘은 그냥 어둠을 내버려 두려고 합니다. ‘어둠의 삶들’을 응시하고, 성찰하고, 반성도 하고, 아니면 그냥 바라보고, 혹은 어둠의 삶들을 하나하나 곱씹어보면서 ‘어둠의 삶들’을 살아내 보려고 합니다. 어둠을 친구 삼았다고나 할까요!


  그렇게 하니, 오히려 생각이 자유로워지고, 마음이 편해집니다. 빛의 세계로 도망치듯 빠져나가는 것보다 몇 배는 더 여유가 있어 집니다. 어둠을 친구 삼으니, 어둠이 어둠이 아니더군요. 어떤 빛보다 밝고 아름답고 신비로운 세계가 바로 ‘어둠’이었습니다. 말장난 같은 역설이지만, 진실이 오롯이 담겨 있는 아름다운 역설입니다.】

 

  <성경 이야기>

  이제 성경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들은 골고다 곧 ‘해골곳’이라는 곳에 이르러서, 포도주에 쓸개를 타서, 예수께 드려 마시게 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 맛을 보시고는, 마시려고 하지 않으셨다(마태 27:33~34)】


  오늘 성경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서 죽임을 당하기 직전의 상황을 기록한 부분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서 죽음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두 손과 발, 창에 찔린 옆구리, 가시 면류관에 찔린 머리에서는 피가 흐르고, 갈증에 시달리며 죽음의 순간을 고통스럽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때 죽음에 이르는 통증을 잊게하고, 죽음의 시간을 단축시킬 수 있는 ‘쓸개 탄 포도주’를 누군가 예수님에게 권합니다. 로마시대에는 관례적으로 십자가에 달려 죽는 사형수들에게 죽음의 고통을 단축하게 하려는 의도에서 ‘쓸개 탄 포두주’를 마시게 했습니다. ‘쓸개 탄 포도주’는 몰약이나 초가 섞인 술로서 고통의 양을 줄이게 하는 일종의 마약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께서는 이를 거절하셨습니다. 극한 고통의 순간이면 누구나 다 마시는 이 진통제를 먹지 않고, 맨 정신으로 십자가에 달려 있으려 했습니다. 왜 일까요? 그 부분이 오늘 이야기의 초점입니다.

 

  <성경의 해석>

  아주 오래 전, ‘마약과 쓸개 탄 포도주’<영성이면 가능하다>라는 짧은 글을 쓴 적이 있는데, 그때 저는 이렇게 썼었습니다. 【서서히 다가오는 죽음의 통증을 모두 참고 견디는 것이 제사와 순종의 일면이기 때문이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면 죽음을 맞는 순간까지 고통을 받아들이고 참아내는 것도 또한 하느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 가끔 연예계 사람들을 비롯해서 젊은이들이 마약을 복용해서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대체로 마약을 복용하는 이들은 현실에서의 고통스런 삶을 잠시나마 잊기 위해서 도피처로서 마약에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십자가상에서 ‘쓸개 탄 포도주’를 거절한 의미에 대해 마약의 세계로 도피하려는 젊은이들은 귀를 기울여야 한다. 때로는 인고(忍苦)의 삶을 맨정신으로 견디는 것도 인생의 한 부분일 수 있다.】

 

  <설교의 결론>

  우리네 인생의 삶이란 대개 어둠의 삶입니다. 밝고 환하지 않습니다. 어둡고 칙칙합니다. 고통스럽고 괴롭습니다. 그런데 이런 어둠의 삶을 이겨내는 길은 빛에 있지 않고 어둠에 있습니다. 어둠에서 ‘가짜 빛’으로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어둠의 조각들을 잘게잘게 곱씹으며 살아내는 근기(根氣), 그것에서 진정한 구원의 길이 있는 것입니다.


  지금 그대는 어둠의 시간에 갇혀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대를 가두고 있는 이 어둠의 삶들을 하나하나 조각조각 세밀하게 응시하고 관찰하고 성찰하고 되새김하십시오. 그 어둠의 삶들을 하나씩 하나씩 묵묵히 견디면서 살아낼 때, 우리에게 진정한 구원의 빛이 마침내 보일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께서 고통이 극한에 이르는 순간에도 ‘쓸개 탄 포도주’를 마시지 않고, 맨정신으로 십자가에 매달려 있었던 ‘깊은 뜻’이었습니다.

 

 <설교를 마치면서>

  이제 설교말씀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오늘 설교말씀의 제목을 ‘어둠을 이겨내기 위하여’라고 잡아보았습니다. 오늘 이 설교말씀의 제목을 잘 묵상하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 축도

이제는 진리의 세계로 진입한 예수님의 놀라운 은혜와 우리 생명의 근원 되시는 하느님의 신비로운 사랑과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를 아름다운 곳으로 인도해 주시는 성령님의 은총이 우리 수도교회 교우들 머리 위에 영원토록 충만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김부겸 목사<수도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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