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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정의 상처를 치유하는 길

  • 이한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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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의 상처를 치유하는 길

(사무엘하 13장 20-22절)


< 상처를 치유하는 보금자리 >

 몽골의 임병철 선교사님이 미국에서 목회할 때 바로 앞에 피터(Peter)란 이태리 출신 목사님이 살았습니다. 그분은 교인이 1500명 정도 되는 교회의 담임목사 겸 베스트셀러 작가였고 뉴욕의 떠오르는 별처럼 목회를 잘했습니다. 임병철 목사님의 미국 이름도 피터(Peter)인데 두 피터 목사님이 형제처럼 가깝게 지냈습니다. 1997년 임 목사님이 집에서 바비큐 파티를 열 때 피터 목사님이 방문해서 저도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 피터 목사님의 가족사랑은 대단했습니다. 미국 목사님들은 ‘9 to 5’가 생활화되어 아침 9시에 교회에 출근해서 5시에 퇴근합니다. 새벽기도도 없고 심방도 없어서 우리나라 목사님들이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뛰는 것을 보면 오히려 이상하게 봅니다. 그런데 그 목사님은 드물게 매일 새벽기도를 했습니다. 그처럼 열심히 사역하면서도 한 달에 한번 이상은 두 부부만의 데이트 시간을 갖고 일 년에 두 번은 꼭 두 부부만의 여행을 했습니다.

 그 목사님 친척들은 거의 마피아 출신이었습니다. 한번은 피터 목사님의 친척 장례식이 있어서 임 목사님도 갔는데 참석한 사람들 대부분이 마피아였다고 합니다. 언뜻 생각하기에 마피아들은 인상도 험악할 것 같지만 장례식에 참석한 마피아들을 보니까 하나같이 잘 생겼고 매너도 좋았다고 합니다.

 놀라운 사실은 마피아도 밖에서는 잔인하게 싸워도 가족연대의식이 강하고 자식 사랑도 커서 그 세계에서 가장 잔인한 일은 자식을 해치는 일이라고 합니다. 그처럼 마피아도 가족을 아낀다면 성도는 얼마나 더욱 가족을 아껴야 합니까? 가끔 가족끼리 서로 상처를 입히는 일이 생겨도 서로 용서하고 사랑해서 자기 가정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멋지게 이뤄내야 합니다. 가정은 상처를 치유하는 보금자리이지 상처를 입히는 전쟁터가 아닙니다.

< 아픈 가정사는 덮어주십시오 >

 사무엘하 13장에는 한 콩가루 집안이 나옵니다. 이복남매 사이에 강간도 벌어지고 이복형제 사이에 살인도 벌어집니다. 놀라운 사실은 그 콩가루 집안의 가장이 다윗이란 사실입니다. 그래도 성경은 다윗에 대해 수신제가에 실패한 가장이라고 비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메시야의 조상 및 표상’으로 여기고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성군’으로 여깁니다.

 왜 사람들은 자식 문제로 다윗을 비난하지 않습니까? 부모가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자식은 얼마든지 비뚤어질 수 있음을 이미 부모가 되어본 사람이나 사려 깊은 사람은 잘 알기 때문입니다. 자식 이기는 부모가 없다는 속담처럼 자식의 일탈을 막을 부모는 없습니다. 특히 자식의 일탈 때문에 부모가 깊은 상심의 나날을 보냈다면 비난보다는 오히려 동정을 보내야 한다는 것이 사려 깊은 사람들의 정서입니다.

 서울 강남에 초대형 교회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그분의 아들이 한때 크게 탈선했습니다. 그래서 간혹 어떤 사람들은 비판했습니다. “아들 교육도 제대로 못하면서 무슨 목회야!” 그러나 대부분의 교인들은 그 문제로 목사님을 비판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는 목사님의 반대파들도 다른 문제로는 비판해도 그 문제로는 비판하지 않았습니다. 그 아들의 탈선 문제로 그 목사님이 얼마나 오랫동안 고통과 상심의 나날을 보냈는지를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새 한 유력한 정치인이 마약 전과자 사위를 맞이한 문제로 시끌시끌합니다. 딸과 사위는 미국 유학 때부터 알고 지냈다고 합니다. 그 정치인은 딸이 눈물로 사정해서 사위의 문제를 알고도 결혼을 허락했다고 합니다. 만약 충청 지역의 유력한 경제인 가정인 사위 가정이 권력의 필요성을 느끼고 정략적인 결혼을 의도한 것이거나 혹은 그 정치인이 사위 가정의 경제력을 의식하고 고민도 없이 그 결혼을 허락했다면 비판받을 소지는 있습니다.

 반대로 만약 그 정치인이 딸에게 “얘야! 깊이 생각해봐라! 이번 결정이 네 인생과 아빠의 정치역정에 큰 아픔을 낳을 수 있다는 것도 예상할 수 있지? 그런 상황도 극복할 수 있겠니?”라고 진지하게 권면한 후 그래도 딸이 결혼하겠다고 해서 마음이 아파도 딸바보 아빠로서 그 결혼을 허락했다면 그 문제로는 그 정치인을 비난하지 않는 것이 도리입니다. 그 문제로 그 정치인은 누구보다도 마음이 아팠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결혼은 이뤄졌고 감추려고 했던 사위 문제가 드러났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그 정치인이 여당 내 유력한 대통령 후보지만 심사숙고 끝에 기자회견을 열고 이런 발표를 한다고 해보십시오. “국민 여러분! 저는 딸의 사랑을 존중합니다. 그래서 이번 결혼을 허락했습니다. 대신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고 대통령 선거에 나서지 않겠습니다. 대신 음지에서 자숙하며 당과 국민을 위해 일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러면 국민들은 큰 박수를 쳐줄 것입니다. 언젠가 영화화될 것입니다. ‘딸의 행복을 위해 권력을 포기한 딸바보 아빠’란 소재가 얼마나 좋습니까?

 부모 문제를 자식이 책임지게 하는 것도 가혹하지만 자식 문제를 부모가 책임지게 하는 것도 가혹합니다. 특히 아픈 가정사는 반대파도 어느 정도는 덮어주려고 해야 합니다. 그처럼 남은 비난하지 않아도 자신은 책임감을 느끼고 어떤 반성의 조치를 취한다면 그런 사람이 결국 위대한 인물이 됩니다.

 다윗 자녀들 사이에 일어난 아픈 가정사에 대해 사실상 다윗에게도 더 잘 가르치지 못한 책임은 있습니다. 왜 그런 가르침을 주지 못했습니까? 가장 큰 원인은 사무엘하 11장에 나오는 밧세바와의 간통 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에 다윗은 이미 여러 명의 아내가 있었지만 한 명을 더 원했습니다. 그 ‘하나 더’ 혹은 ‘한 번 더’가 비극을 낳은 것입니다.

 간통 후에 다윗은 자기 죄를 은폐하려고 충신 우리야까지 죽게 만듭니다. 그 다음부터 다윗 가정도 풍비박산이 됩니다. 첫 아들 암논이 이복 여동생인 다말을 강간합니다. 그 사실을 알고 다윗이 크게 분노했지만 어떤 조치도 취할 수 없었습니다. 자기도 유사한 행동을 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아버지의 특별한 조치가 없자 다말의 친오빠인 압살롬이 한을 품고 이년 후에 계략을 꾸며 그의 이복 형 암논을 죽인 것입니다.

 결국 다윗 가정의 비극은 다윗이 자녀들에게 좋은 영향력을 끼치지 못한 원인도 큽니다. 오늘날 왜 많은 가정이 깨집니까? 통제는 너무 많이 하고 영향력은 너무 적게 미치기 때문입니다. 복된 가정을 만들려면 통제는 적게 하고 영향력은 많이 끼쳐야 합니다. 부모는 자녀들을 통제하려고 하지 말고 선한 영향력을 끼치려고 하고 부부도 서로 통제하려고 하지 말고 선한 영향력을 끼치려고 해야 합니다.

< 가정의 상처를 치유하는 길 >

 오늘날 많은 가정들을 살펴보면 가정 내에서 압살롬처럼 다른 가족을 향해 한을 품은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 가정의 상처를 치유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잘못을 인정하십시오

 가정 내의 갈등이 생길 때 한쪽만 일방적으로 잘못한 경우는 별로 없고 자기 잘못도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잘못을 인정할 줄 하는 태도가 바로 용기이고 성숙함입니다. 주님은 베데스다 연못가의 소경에게 물었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주님은 우리에게 동일한 질문을 하십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정말 낫고자 하고 상처가 치유되기를 원하면 먼저 자기 잘못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야 치유의 희망이 커집니다.

 몸에 이상 신호가 와도 괜찮다고 하면 병은 더 커집니다. 병원에 가서 “제가 여기가 아픕니다.”라고 인정해야 그때부터 치료가 시작됩니다. 가정 내의 상처도 치유되려면 자기 잘못을 먼저 인정하고 용서를 빌어야 합니다. 남들은 다 자기 약점을 보고 있는데 자기만 그 약점을 인정하지 않고 문제가 없다고 하면 치료의 길은 멀어집니다. 정직한 자백과 인정은 가정의 상처 치유를 위해 필수적인 것입니다.

2. 부드럽게 대응하십시오

 인간관계의 회복을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변화입니다. 그처럼 가정의 상처를 치유하려면 먼저 자신이 고칠 것부터 고치려고 해야 합니다. 그래야 상대도 서서히 변화됩니다. 어떤 사람은 배우자의 잘못을 꼭 고쳐보겠다고 합니다. 그러면 상대에게 더 상처만 입히게 됩니다. 차라리 가만히 있는 것이 낫습니다.

 어떤 아내는 남편이 교회 출석을 막는다고 “내 맘대로 할 거야! 건드리지 마!”라고 세게 나갑니다. 그러면 서로 상처만 되고 문제는 더 꼬입니다. 반면에 어떤 아내는 말이 없어지다가 어느 날 조용히 한 마디 합니다. “여보! 요새 사는 맛이 안 나요!” 그러면 남편들은 아내의 우울증이 겁나서 말할 것입니다. “여보! 교회 생활이라도 열심히 해봐요!” 그처럼 문제해결 방법을 지혜롭게 찾아야 상처가 없이 문제를 해결할 가능성도 커집니다.

 자녀를 교육할 때도 엄한 아버지의 매보다 한 번도 매를 댄 일이 없는 어머니가 자녀의 손을 붙잡고 “내가 너를 위해 얼마나 기도했는데 그랬어?”고 하면 더 말을 듣게 됩니다. 강하게 힘으로 남을 바꾸려고 하면 상처가 커지고 상황이 악화될 때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가족들은 서로 상처를 주지 않으려고 힘써야 합니다. 특히 사소한 상처를 잘 요리하는 법을 훈련해야 합니다. 사소한 상처로 인해 가정의 행복이 깨질 때도 많기 때문입니다.

3. 서로 용서하십시오

 가정 내의 갈등은 특별한 교훈의 목적이 없으면 속히 털어버리는 것이 좋습니다. 그것을 위해 먼저 화해를 손을 내미는 용기가 있어야 하고 화해를 잘 받아들이는 너그러움도 있어야 합니다. 남이 화해를 요청할 때 마음을 닫고 있으면 화해의 싹이 끊어지고 상대방은 비참해집니다. 아무리 상대가 잘못을 많이 했어도 화해를 거부하는 마음은 더 잘못된 마음입니다. 갈등이 풀어지면 친밀성은 더 깊어집니다. 그러나 갈등을 풀지 않으면 언젠가는 그 갈등이 인생 전체를 태우게 됩니다.

 어느 날, 한 사람이 캐나다의 한 공원 내의 섬을 방문했습니다. 그때 공원 관리인들이 미친 듯이 구멍을 파고 근처 호수의 물을 바가지로 퍼 넣고 있었습니다. 무슨 일이냐고 묻자 불길이 전혀 보이지 않는데 나무뿌리에서 타는 불을 끄는 중이라고 했습니다. 그때 누군가 캠프파이어를 하다가 불이 났는데 그 불이 땅 아래에서 몇몇 나무로 옮겨 붙은 것입니다. 그것이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공원 관리인들은 땅에서 올라오는 열기로 불이 난 것을 느끼는데 만약 그 불을 끄지 않으면 그 불이 섬 전체를 태운다고 합니다.

 가정에서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불이 붙은 상태일 수 있습니다. 잘 감춰도 대개 그 열기가 느껴집니다. 그냥 두면 그 불은 전 가정을 태웁니다. 그 불을 끄려면 서로 용서하고 용서받아야 합니다. 아무리 상대가 틀리고 내가 옳다고 해도 옳고 틀린 것만 생각하며 살 수는 없습니다. 거기에 사랑을 더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정의감도 있어야 하지만 정의감과 함께 사랑으로 덮어줄 줄도 알아야 치유와 회복의 역사가 나타날 것입니다.

4. 성령충만을 구하십시오

 아무리 말씀을 통해 이론 무장을 잘해도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않으면 가정의 치유는 일어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기도가 필요합니다. 가족들에게 잘해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가족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더욱 중요합니다. 기도해서 성령으로 충만해지면 성품도 부드러워집니다. 거기서 문제 해결과 상처 치유가 시작됩니다. 다만 성령 충만을 오해하면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은 쉰 소리가 더 성령 충만한 소리라고 여겨서 목소리를 억지로 망가뜨리기도 합니다. 그것은 영적인 허영심이 충만한 것이지 성령 충만한 것이 아닙니다.

 어떤 분은 청소년 때 성령 충만하다는 사람이 다 이상하게 보였다고 합니다. 지하철에서 “예수 천당! 불신 지옥! 독사의 자식들아! 회개하라!”하고 소리쳐서 사람들을 불쾌하게 하고, 식당에 10명이 와서 5인분만 시키고 큰소리로 기도한 후 계속 밑반찬을 달라고 해서 원가보다 더 먹어치우면서 성령 충만하다고 자랑하는 교인들을 보면서 그분은 청소년 때 이렇게 기도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제게는 성령을 주셔도 충만하게는 주지 마세요.”

 어떤 교인은 입에서 나오는 말마다 “예수! 예수!”가 늘 들어갑니다. 그런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의 말에 상처를 입는지 모릅니다. 그렇게 상처를 입혀 놓고 늘 하는 말이 “나는 믿음이 커서 뒤끝이 없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대개 보면 뒤끝이 없다는 분들이 무섭습니다. 자신은 상처를 입혔으니까 뒤끝이 없지만 상처를 입은 사람은 얼마나 뒤끝이 많겠습니까? 그래서 뒤끝이 없다는 사람들을 보면 친구들도 지겹게 여기고 이웃들도 혀를 차고 심지어는 가족도 외면할 때가 많습니다. 얼마나 불행한 모습입니까?

 성령 충만의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는 평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결국 성령 충만의 최대 증거는 ‘은사가 있는 것’에 있기보다는 ‘관계가 좋은 것’에 있습니다.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나쁜 친구를 멀리하라고 신신당부합니다. 그처럼 나쁜 영향을 미치는 사람은 최대한 멀리하되 하나님이 연결시켜준 사람과는 사랑과 희생과 충성과 순종과 나눔과 양보와 대접과 이해로 최대한 좋은 인간관계를 만들어 가십시오.

< 상처가 치유되는 명절 >

 명절에 가족들이 함께 모이면 누군가 평소에 품었던 한을 터뜨리는 경우도 있고 때로는 비교하는 마음을 극복하지 못해 마음의 평안을 잃는 경우도 생깁니다. 그래서 섭섭 마귀가 가장 많이 틈탈 때가 바로 명절 때입니다. 그때 섭섭한 일을 당하고 섭섭한 마음이 들어도 믿는 사람답게 그 상황을 잘 극복하십시오. 기본적으로 받을 생각보다 줄 생각을 많이 하면 섭섭 마귀가 틈타는 것을 비교적 잘 막아낼 수 있습니다.

 자신이 주목받지 못하고 다른 가족이 주목받으면 더 기쁘게 여기십시오. 그런 사람이 오히려 하나님의 주목을 받습니다. 얼마나 수지맞는 일입니까? 자신은 일이 잘 풀리지 않아도 다른 가족이 일이 잘 풀린다는 말을 들으면 진심으로 기뻐하고 축하해주십시오. 그러면 섭섭 마귀도 잘 틈타지 못하고 하나님의 마음도 얻습니다. 사실 하나님의 마음을 얻는 것처럼 복된 일은 없습니다. 거기서 다른 많은 복들이 흘러들어오기 때문입니다. 그런 마음을 가진다는 것이 쉽지만은 않지만 미리 말씀과 기도로 준비하면 어려운 것도 아닙니다.

 사실 명절은 스트레스가 더 심할 수 있는 날입니다. 여자는 장을 보고 음식을 만들고 상을 차리느라고 스트레스를 받고, 남자는 스트레스 받는 아내의 눈치를 보고 중간 역할도 하면서 스트레스를 받고, 자녀들은 “공부는 잘하냐? 직장은 얻었느냐? 결혼은 언제 하냐?”는 등의 잔소리를 받느라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결국 명절은 행복한 날이 되기보다는 스트레스를 더 받는 날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상처의 가능성도 커질 수 있기에 미리 말씀과 기도로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합니다.

 명절에 가족들과 모이기 전에 먼저 기도하고 마음의 준비를 해서 명절이 ‘상처를 입히는 명절’이 아닌 ‘상처가 치유되는 명절’이 되게 하십시오. 말씀과 기도로 성령 충만하게 되어서 이기주의와 욕심만 잘 버리면 얼마든지 좋은 명절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그처럼 말씀과 기도를 통해 사랑과 헌신을 다짐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삶도 수시로 결단하고 실천함으로 행복한 가정을 만들고 인물의 길을 잘 닦는 복된 심령들이 되십시오.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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