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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다양성과 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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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성과 조화


본문 : 고전12: 12- 31


수요 예배를 마치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갑자기 승윤이가 물었습니다. 『목사님! 왜 나만 검어요?』

아이 네 명 중 세 아이 피부는 하얀데, 승윤이만은 날 때부터 유난스레 검었습니다. 이제 만 3년 10개월이 되는 승윤이는, 형제들과 다른 피부 색깔을 의식하는 나이가 되었나 봅니다. 『누가 뭐라고 그랬니?』

『네, 형들이 놀려요.』 그다음 할 말이 갑자기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내가 머뭇거리자, 마침 함께 있던 김집사님이 승윤이에게 말했습니다.

『승윤아! 그건 나쁜 색깔이 아니라 튼튼한 색깔이야. 집사님을 봐! 이렇게 온몸이 하야니까 매일 병만 들잖니. 하나님이 승윤이를 특별히 사랑하셔서 너한테만 튼튼한 색깔을 주신 거야.』

집사님의 설명에 승윤이는 흡족해했습니다. 그러나 피부색이 하얀 나머지 아이들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 아이들이 하나님은 자신을 사랑하지 않으셔서 『약한 색깔을 주셨다』라고 잘못 오해할 수도 있을 것 같아서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얀색은 하얀색대로 튼튼한 색이고, 검은색은 검은색대로 튼튼한 색이야. 하나님은 우리에게 꼭 맞는 튼튼한 색깔을 주시는 거야.』

내 마음을 읽은 친구가 이렇게 거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모두 다르게 지으셨어.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모두 최고가 될 수 있는 거란다. 피부색이 검은 사람이든 하얀 사람이든, 키가 크든 작든, 남자든 여자든 모두가 다 그렇단다.』

나무가 10만 그루나 있는 숲에도 똑같은 모양의 잎사귀는 한 쌍도 없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같은 길을 가더라도 두 사람의 여행이 똑같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맡은 직분과 은사도 다 다릅니다.

쇠고기 요리가 단 한 가지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요리마다 사용하는 고기의 부위가 다릅니다. 미역국에는 양지머리나 사태가 적합합니다. 불고기감으로는 부드러운 육질의 우둔살이나 목살이 좋습니다. 잡채에는 씹히는 맛이 좋은 다용도의 홍두깨살이 그만입니다. 물론 등심, 안심, 갈비살 등 상급 고기를 사용하는 것도 좋지만 역시 제대로 된 맛을 원한다면 적합한 고기를 사용하는 것이 좋습니다.

은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은사를 내가 받는다면 얼마나 좋으랴. 그러나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다양한 은사를 주셨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5달란트를, 또 어떤 사람에게는 2달란트를, 그리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1달란트를 맡기셨습니다. 자기가 맡은 분량대로 충성하면 됩니다. 내가 받은 한두 가지 은사가 가장 소중한 것입니다. 남의 은사를 부러워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내가 받은 은사로 남을 위해 봉사하면 그만입니다. 고기의 부위별 용도가 다르듯 나의 달란트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사를 주신 이유입니다.

『이같이 세상에 소리의 종류가 많으나 뜻 없는 소리는 없나니』(고전14:10)

찬송가 597장 (통 378장) 이전에 주님을 내가 몰라


요즈음 사람들과 말을 나누다 보면 놀랄 때가 많습니다. 사람이 다르니까 생각이 다를 수 있지만 생각이 달라도 너무 다르기 때문입니다. 세대차가 심합니다. 가정에서는 남편과 아내의 생각이 다르고 부모와 자식의 생각이 다릅니다. 교회에서는 교역자와 평신도의 생각이 다르고 장로와 집사의 생각이 다릅니다. 정치적으로는 야당과 여당의 생각이 다르고 구파와 신파의 생각이 다릅니다. 노사 문제에서는 노사정(勞使政)의 생각이 다 다릅니다.

생각이 다르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물론 옳고 그름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과 인간을 다스리시는 절대기준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구원의 유일한 길입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예수 그리스도 외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4:12)


종교다원주의는 결코 용납될 수 없고 구원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은 절대 포기될 수 없습니다. 구원의 진리에서는 옳고 그름이 분명히 가려져야 합니다. 윤리 문제에 있어서도 분명한 기준이 있고 옳고 그름은 가려져야 합니다.

구원과 윤리에 있어서 옳은 것을 옳다고 하고 그른 것을 그르다고 할 때 사랑으로 해야 합니다. 사랑으로 진리를 말할 때에(엡4:15) 그 말이 빡빡하지 않습니다. 말하는 사람도 풍요롭고 듣는 사람도 풍요롭습니다. 윤리 문제를 포함하여 옳고 그름의 절대적인 선을 그을 수 없는 사안도 많습니다. 보는 시각과 입장에 따라 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생각이 다를 때 강압적인 방식으로 획일성을 기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특별히 집단과 집단이 생각이 다를 경우 법 테두리 안에서 대화와 타협을 통해 조율할 때 서로에게 풍요로운 결과를 산출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모습이 다른 것처럼 사람의 생각도 다 다를 수 있습니다. 다른 것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다른 것은 풍요로운 것입니다. 다르기 때문에 싸울 것이 아니라 다르기 때문에 조정해야 합니다. 다양성이 평등을 위배할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정(正)과 반(反)이 풍요로운 합(合)에 이를 수 있습니다. 획일성은 폐쇄와 고집으로 인해 빈곤성을 낳지만 다양성은 포용과 조율을 통해 풍요성을 낳습니다. 서로 다른 많은 지체들이 연합하여 하나의 온전한 몸을 이루는 것입니다(고전12:20).


숲에 앉아 귀 기울이면 새들 중에도 음치가 있습니다. 헤엄이 서툰 물고기, 키가 자라지 않은 나무 덜 예쁜 꽃, 빠른 거북이와 느린 토끼... 세상 어디에나 다름과 차이가 존재합니다. 서로 돕고 사랑해야 합니다. 숲길을 자주 걷노라면 때때로 정말 『음치 새』를 만나게 됩니다. 『새소리 맞아?』하며 가는 웃음이 피어납니다. 그러나 그 음치 새 소리 때문에 숲속의 음악은 더 다채롭고 화려해집니다. 크고 작은 나무, 그 나무들을 스치는 바람 소리와 어울려 살아있는 생명의 음악소리로 가득차 오릅니다.


세상의 모든 꽃들은 저마다의 형상이 있고 향기가 있습니다. 화단의 꽃들은 각각의 개성을 가지고 있을 뿐 우리가 생각하듯 본래 좋고 나쁨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며, 그저 저마다의 꽃일 뿐입니다. 화단의 장미는 장미대로, 채송화는 채송화대로, 해바라기는 해바라기대로, 고유의 빛깔과 향기가 있습니다. 다른 그 어느 꽃과도 견줄 수 없는 자기만의 타고난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매우 소중하고 특별한 개성입니다. 그러나 자기 개성, 자기 생각도 잘 갈고 닦을 때, 그리고 그것이 남과 조화를 이룰 때, 진정한 아름다움의 진가를 발휘할 수 있습니다.


생물 다양성은 지구 생태계 안정의 기반을 이루기에 인류 생존의 필수 불가결한 요소이며, 인간의 문화적·정신적 가치 이외에도 생물자원으로서 막대한 경제적 가치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인류가 처해있는 식량 및 에너지 부족, 난치병 등의 주요 난제를 생물자원으로부터 해결할 수 있으며, 인류의 지속가능한 생존을 가능하게 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습니다.

아프리카 남단지역은 풍요한 바다를 가지고 있습니다. 해초가 많고 수시로 고래가 나타나는 것은 먹이가 많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아프리카의 최남단은 희망봉이 아니라 실제로는 아굴라스곶입니다. 최남단을 중심으로 동쪽은 인도양, 서쪽은 대서양으로 나뉩니다. 대서양에서는 한류가, 인도양에서는 난류가 흘러 이 지역에서 만납니다.


아프리카 남단지역은 이런 해류의 영향으로 해초들과 고기들이 풍성하다고 합니다. 찬 물과 따뜻한 물이 만나기 때문입니다. 찬 물과 따뜻한 물이 적절히 만나면 풍성해지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도 조화를 이루면 풍성합니다. 하나님은 찬 것과 따뜻한 것이 탁월한 조화를 이루고 계시기에 풍성하신 분이십니다.


미국의 각 교회의 교파를 표현하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0 감리교인에게서는 진실한 생활 태도를 배우라.

0 침례교인에게서는 신앙간증을 들으라.

0 루터교인에게서는 충성된 교인임을 배우라.

0 성공회교인에게서는 교인의 긍지를 배우라.

0 퀘거교인에게서는 청결한 믿음을 배우라

0 유대교인에게서는 종교의 고결함을 배우라.

0 장로교인에게서는 기도의 생활을 배우라.

0 구세군에게서는 봉사의 생활을 배우라.

0 천주교인에게서는 교인의 보편성을 배우라.

0 그리고 흑인들에게서는 그 열성을 배우라.

이상의 열 가지를 다 배우면 얼마나 좋을까요?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8)


하나님의 부르심은 눈송이와 같습니다. 똑같은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주신 사명과 그분의 메시지를 전하시는 방법도 다양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의식 속에 「다양성」을 인정하지 못하는 의식구조, 즉, 내 편이 아니면 적이라는 「흑백논리」가 지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의식구조 하에서는 나와 '다른 것'은 바로 '틀린 것'이 되어 버립니다. 봄과 여름과 가을과 겨울이 분명 다릅니다. 그러므로 봄과 가을이 옳고 여름과 겨울은 옳지 않다고 말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기성세대와 신세대, 남자와 여자, 남편과 아내, 고용주와 고용인, 야당과 여당,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에 오해와 편견이 생기고 대화의 통로가 막히는 것입니다.


인류역사의 흐름을 보면 지난날은 「상극의 시대」로 '다른 것'은 곧 '틀린 것'으로 통하였습니다. 그래서 끝없이 싸우고 짓밟고 투쟁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진리 안에서 서로가 살 수 있는 「상생의 시대」를 살아가야 합니다. 더불어 나도 살고 너도 사는 Win-Win의 시대를 만들어야 합니다.

'다르다'와 '틀리다'는 전혀 다릅니다. '다른 것'은 결코 '틀린 것'이 아닌 것이지요. 부부는 서로 '다른' 사람이지 '틀린'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나 두 사람이 바라보는 방향은 늘 같아야 합니다. 서로 '다른' 사람이 만나 같은 방향을 바라보면 '다르다'가 어느새 '닮았다'로 바뀝니다. 부부는 서로 닮아가는 것입니다.

더불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비결은 "다름을 인정하고, 서로 사랑할 때"' 가능 한 것입니다. 우리말에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말이 있습니다. 또 다른 처지에서 생각해 보라는 뜻입니다. 영어에 'Understand' 라는 말은 상대방을 이해하려면 상대방 아래에(Under) 서서 볼 때(Stand)만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요13:34)


소련을 방문하는 관광객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선물은 무우 모양을 한 나무 조각이라고 합니다. 이 조각에는 할머니 할아버지 소녀 개 고양이 쥐의 여섯 모양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것은 소련의 옛 민화를 소개한 것입니다.

레브 할아버지와 올가 할머니에게 손녀 카티야가 있었습니다. 카티야는 순간마다 말썽을 일으키는 장난꾸러기여서 어느 주말 소녀의 부모는 둘만의 아늑한 시간을 가지려 여행을 떠납니다. 할머니가 점심을 지으려고 할아버지에게 무우를 한 개 밭에서 뽑아오라고 부탁합니다. 할아버지는 무우밭에서 엄청나게 큰 무를 발견하고 뽑으려 했으나 꿈쩍도 안 했습니다. 할머니에게 원조를 청했지만 둘의 힘으로도 뽑히지 않습니다. 손녀 카티야가 개와 고양이까지 데리고 왔습니다. 모두가 허리를 잡고 한 줄로 서서 힘을 모읍니다. 그러나 역시 실패였습니다. 이때 고양이가 제안합니다. 『천정에 사는 쥐 놈은 못생기고 나뿐 짓만 하지만 약삭빠르니 그 동안의 원한 관계나 체면은 잠깐 덮어두고 그 놈의 도움 빌리면 어떻겠습니까?』 이렇게 해서 평소 몹시 차별 받던 깜둥이 쥐가 등장합니다. 쥐는 무우의 크기를 보더니 곧 땅굴을 파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땅 속에 들어가 무우에 붙은 잔뿌리들을 모두 갉아 끊어버렸습니다. 그래서 거대한 무우도 쉽게 뽑을 수 있었습니다. 한편 잔소리 많은 노인들과 말썽꾸러기 딸을 피하여 며칠만이라도 행복해지려고 여행을 떠난 카티야의 부모는 싸움만 하다가 돌아왔습니다. 싸움하는 도중에 그들은 두 늙은이와 카티야와 개와 고양이가 얼마나 자기들에게 필요했는지를 새삼스럽게 깨닫고 돌아옵니다. 또한 그들은 집에서 무우 뽑은 이야기를 듣고 깜둥이 쥐까지 그 집에 사는 동물은 누구나 다 서로 필요하다는 것을 배운다는 이야기입니다.

누구나 서로 필요하다는 것, 남을 외모나 행동으로 판단하여 얕보거나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것, 각자의 차이점을 인정해주고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 행복이란 남과 떨어져 존재하지 않고 하나의 조화를 위하여 자기도 공헌할 때 얻어진다는 교훈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성도간에 분쟁과 다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본문에 몸에 여러 지체가 있는데 몸의 지체간에 서로 분쟁이 있을 수 없는 것처럼 여러 성도가 서로 같이하여 돌아볼 것과 성도의 은사가 각기 다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똑같아야 한다는 생각은 창조 원리에 어긋납니다. 모든 사람이 똑같아야 좋은 것은 하나뿐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일과 그 예수님을 끝까지 따르는 일입니다. 모든 사람은 서로 달라야 합니다. 다르기 때문에 천하에 하나뿐인 나의 존재가 귀하고 남도 귀합니다. 모든 사람이 나와 똑같은 사람이 되기를 바라지 마십시오. 그것은 하나님의 원하는 바가 아닙니다. 나와 다름을 칭찬하십시오. 서로 다름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아름다운 조화입니다.

교회사에서 가장 모범적 교회로 안디옥 교회를 꼽을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 최초로 선교사를 파송, 세계 선교에 큰 공헌을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같은 평을 들을 만합니다. 하지만 안디옥 교회가 우리에게 감명을 주는 것은 갈등과 분쟁의 요소가 가장 많은 교회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같은 역사를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안디오 교회에는 『빈(貧)』『부(富)』『귀(貴)』『천(賤)』의 사람들이 모두 있었습니다. 또 선민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유대인과 당시 사람 취급을 받기 어려운 이방인이 함께 있었습니다. 선지자들이나 바나바 같은 사람이 있었는가 하면 기독인은 물론 유대인들도 배교자라고 치리의 대상이었던 사울(바울) 등 신앙의 수준도 각양각색이었습니다. 하지만 왜 이 교회가 교회사상 가장 모범적이고 다양성이 조화를 이뤄 칭찬 받는 교회가 될 수 있었을까요?


첫째, 기도했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과 역할을 내 것으로 이끌어내는 통로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초신자에다 과거 기독인을 박해했던 사울을 선교사로 파송한 것은 정당하다고 설명하거나 납득하기 어려운 것이었지만 그들은 기도로 이 모든 것을 극복하고 최초로 선교사를 파송하는 쾌거를 이뤄냈습니다.


둘째, 다양성 속의 조화를 이루시는 하나님의 창조섭리를 올바로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흑인이나 극빈자, 이방인은 당시 사회에서 어떤 직위도 주어지지 않았지만 안디옥 교회는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올바로 이해했기 때문에 각자의 개성을 최대한 존중해주는 수준 높은 사고를 갖고 있었습니다. 내 편이 아니면 적으로 보는 것은 매우 옳지 않은 사고방식입니다. 내 편이 아닌 사람도 얼마든지 건전한 생각을 가질 수 있고 나보다 월등히 좋은 생각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는 각자에게 하나님이 주신 독특한 달란트가 있기 때문입니다(마25:14~30).


셋째, 한 가지 목적을 바로 세워 추진했기 때문입니다.

안디옥 교회는 어떤 경우라도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야겠다는 확고한 선교적 사명과 목적이 있었습니다. 이를 위해 전 성도들이 금식하면서 기도할 정도였으니 누가 이를 반대할 수 있었겠습니까. 목적이 선하고 과정이 투명하며 그래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일이라면 어떤 어려움도 합력하여 열매를 맺도록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넷째, 한 사람의 훌륭한 리더십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안디옥 교회에서 바나바는 당시 직분상 교사에 불과했지만 그는 실질적인 목회자인 선지자들 못지 않게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본래 본명이 시몬이었으나 바나바 즉, 위로자라는 별명으로 더 잘 알려진, 교회에서는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인물이었습니다. 당시 모든 갈등 요소를 극복할 위로자, 격려자, 중보자로서의 그의 역할은 매우 중요했습니다.


다섯째,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중재 때문입니다. 주님은 선지자 제사장 왕의 직분을 동시에 가지신 분입니다. 그는 수직적 관계에 있어서는 하나님과 인간관계를, 수평적 관계에서는 인간과 인간 사이를 연결해주시는 다리 역할을 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나보다 우리를, 우리보다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삽시다. 또 자신과 가정과 교회가 영적 안디옥 교회가 될 수 있도록 기도하십니다. 그럴 때만이 후손들에게 참된 교회를 물려줄 수 있습니다.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롬12:10)


훌륭한 그림들은 대개 여러 가지 색들을 잘 조화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음악으로 말하면 하모니입니다. 성가대가 준비한 것은 하모니를 하려고 준비하는 거예요. 좋은 하모니, 하모니는 음악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만물에 다 있습니다. 어떤 예술에도 하모니가 조화가 이루어지지 아니하면 그 작품은 헛것이 됩니다. 우리 인격도 어떻게 보면 조화를 이루어야 하고 국가도, 삶도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만물은 밤과 낮의 조화입니다. 계절의 조화입니다. 산에 있는 짐승들과 물고기들과 모든 자연의 조화입니다. 하늘과 땅과 바다의 조화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만물은 너무 아름답습니다. 아름다움이 어디에서 오느냐? 조화에서 오는 것입니다. 이 조화는 특별히 네 가지로 요약이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을 살아가는 인간에게 네 가지 조화를 주셨습니다.

첫째는 자기 자신과의 조화입니다. 이 조화는 자기 분수를 알고 내 삶에 만족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기쁨과 감사와 행복이 넘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솝우화에 보면 어느 가을날 노새는 귀뚜라미의 노래를 듣자 매우 부러운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귀뚜라미에게 무엇을 먹기에 그런 아름다운 목소리를 내느냐고 물었습니다. 풀잎 위의 이슬을 먹어서 그렇다는 말을 들은 노새는 자기도 이슬만 먹고살아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결국 이슬이 내리기를 기다리며 아무것도 먹지 않다가 노새는 굶어 죽었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롬12:6-11)


그런데 우리는 자기 옆구리를 찌르는 모습을 보게됩니다. 이것은 자기 자신과의 부조화를 의미합니다. 고통스러운, 삶이 자기를 찌르는 것입니다. 내가 벌어 놓은 돈이 자기를 찌릅니다. 내가 사랑한다고 결혼한 사람이 내 허리를 찌릅니다. 모든 인간관계가 파멸이 되고 자기 삶에 고통과 아픔이 시작되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삶이 귀찮고 싫고 고통스럽고 외롭고 괴롭고 원망 불평스러운 삶이 바로 하나님을 떠난, 하나님 앞에 범죄한 인간의 모습인 것입니다.


두 번째는 이웃과의 조화입니다. 우리나라가 이 세계의 문화 중심국가가 되려면 대륙문화와 해양문화, 서양 문화와 동양문화, 전통문화와 현대문화의 조화를 이루고, 유형문화와 무형문화를 창조적으로 발전시켜야 합니다. 우리나라도 한때 축복 받았던 나라인데, 하나님의 주신 은혜를 저버리고 88년 올림픽 이후부터 너무 교만해졌습니다. 교만이라는 히브리말이 『가온』이라는 말입니다. 장점을 뽐낸다는 뜻입니다. 내가 잘났다는 것입니다. 자기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만입니다. 교만이라고 하는 것은 내 주장이 옳다는 것입니다. 내 말 들으라는 것입니다. 내가 최고라는 것입니다. 내 마음대로 살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교만이고 이 교만이 조화를 깨뜨리는 것입니다. 아담 이브가 바로 그래서 범죄하게 되고 하나님을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하나님을 떠난 우리 인간을 다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주셔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한 가정 한 가정을 조화로 인도하는 줄로 믿습니다. 오늘 이 사회는 정말 내 잘났다 라는 것 때문에 가정이 파괴되고 부모와 자녀 자녀와 자녀 형제간에 부부간에 가정이 무너집니다. 우리가 좀 잘 살면 최고입니까? 사람의 본분을 다 해야지요. 하나님을 믿어야 우리의 책임을 다 할 수 있습니다. 가정만이 아닙니다. 학교도 부조화입니다. 선생과 학생들 전 세계 학교 가운데 이렇게 학교가 무너지는, 교실이 무너지는 나라가 어디 있어요? 조금 잘 산다고 이럴 수 있습니까? 사회가 부조화입니다. 노사가 부조화입니다. 우리나라는 너무 많은, 계층 간에 어른과 아이들 세대가 부조화입니다. 대화가 안됩니다. 애가 커서 소년이 되고 소년이 커서 청년이 되고 청년이 커서 장년이 되고 노년이 되는데 저들이 다 오르는 코스에 지나지 않은데 왜 대화가 안 되는 것입니까? 내일이면 내가 바로 위로 올라가는데 내가 내년이면 바로 위로 올라가는데 왜 우리가 세대간에 대화가 안 되는 것입니까? 이것은 부조화입니다. 대화가 안됩니다. 지역간에 대화가 안됩니다. 내 주장만 옳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가온이라는 겁니다. 노사도 그렇습니다. 내 말만 들으라고 하는 것은 안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느 편을 드느냐? 어느 편을 들 필요 없어요. 다 모두 겸손해야 합니다. 노조는 회사를 보고 인정해 주고 회사는 노조를 인정해 주어야 하고 우리도 어느 편만 들어서 응원하면 안 됩니다. 노조도 수고한다고 그러고 기업주도 회사를 운영하며 수고한다고 서로가 가정의 하모니를 이루는 조화의 가정은 서로를 인정해 주어야 합니다. 당신이 우리 집에서 제일 수고한다고, 우리 집이 사는 건 당신 덕분이라고 말해야 합니다. 나라의 대통령도 언론을 향해 수고한다고 하고 늘 취재하느라 고생한다고 하고, 언론은 대통령보고 수고한다고 하고 칭찬해 주고 잘 하신다고 격려도 해 주어야 합니다. 조화는 어디서 오느냐? 서로를 인정하는 데서 옵니다. 여, 야도 서로 인정하고 우리는 야당만 필요하다 그러면 안됩니다. 여당도 필요하고 야당도 필요하고 노조도 필요하고 기업도 필요하고 보수적인 것도 필요하고 진보적인 것도 필요하고 다 우리가 인정하며 살아야지 나만 옳다 가온만 되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어린아이만 인정하고 어른은 인정 안하고 그것도 안돼요. 다 인정해야 돼요. 집안에 어른은 어른대로 귀하고 아이는 아이대로 귀합니다. 목사님은 장로님 너무나 수고한다고 그래야 하고 장로님은 목사님이 너무나 수고한다고 그래야 그 교회가 잘됩니다. 너는 필요 없다 나 혼자 하겠다 내가 잘났다 그러면 안 된다는 겁니다. 이게 교만입니다.


이웃과의 부조화란 이해와 관용과 사랑과 용서하면서 더불어 살아가야 할 사람들이 서로가 다 등을 지고 불편한 모습으로 사는 것입니다.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은 이후에 인간은 나와 너와의 관계가 부조화로 나아갔습니다. 아담 이브가 범죄하고 난 다음에 저들은 하나님이 두려워서 숨고 부부간에는 원망불평하고 서로 책임전가하고, 『너 때문이다』 하고 아담은 『아내 때문이다』 하고 아내는 『뱀 때문이다』하고 전부다 책임을 전가하는 이런 불행한 가정이 되었습니다. 부조화의 가정입니다. 형제간에 살인합니다. 미워합니다. 시기하는 이런 에덴동산이 무너지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국가가 어떻게 되느냐?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가정이 어떻게 되느냐? 인간은 물질로 만들어져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로부터 왔습니다. 물질이 필요하지만 하나님 위에 세워 놓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우리 인간은 허무함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 인간을 향해 하나님께서는 영영 버리지 아니하시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화해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이 천지만물의 창조자요 여호와가 나의 힘이심을 믿고 우리는 그를 섬겨야 할 줄로 믿습니다.


세 번째는 자연과의 조화입니다. 자연과 인간이 아름답게 서로서로 사랑하며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독일의 담스타트라는 곳에 슐링크라는 분이 개설한 신교 수도원이 있습니다. 그는 철학박사이며 심리학 박사로서 이 수도원을 운영하는데 직접 농사를 지어가며 약 200명의 식구들을 자급자족하게 했습니다. 처음에는 농약을 많이 쓰며 지었는데, 어느 날 하나님께서 계시하시기를 『너희들만 먹고살려고 하느냐, 새도 먹고 벌레도 먹어야 되지 않겠느냐?』는 말씀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 이후로는 아무리 어려워도 농약을 전혀 쓰지 않고 그대로 농사를 지었습니다. 벌레가 많이 끼어도 내버려두니 자연히 새들이 모여들고 새들이 모이니 농사가 잘되고 공기는 맑아지며 결과적으로는 공해 없는 좋은 농사가 되어 200명이 건강하게 잘 사는 수도원이 된 것입니다. 여기에다 하나님은 보너스까지 주셨습니다. 그 땅은 원래 메마른 곳으로 버려 둔 땅인데 농장 한가운데서 샘이 솟아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샘을 기적의 샘이라 하여, 많은 사람들이 구경을 갈 정도입니다. 사람들의 근시안적인 식견으로 자연의 질서를 깨뜨리면 오히려 더 크게 어려움을 당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셨음을 믿는다면 먹을 것도 겸하여 주셨음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자연과의 부조화란 자연이 파괴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과 자연을 떠난 우리 인간은 이 세상에 있는 물질적으로도 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세상으로부터 자연으로부터도 재난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너희가 나를 떠나면 들에서도 저주를 받고 집에서도 저주를 받으리라』(신28:16) 하나님과 자연을 떠난 우리 인간은 내일이 없습니다.


네 번째는 하나님과의 조화입니다. 모든 조화는 인간이 조화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와야만 이 하나님이 주시는 그 은혜에 의해서만이 인간은 다른 조화가 만들어지게 되고 발전하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과 이브가 하나님을 잘 경외한 이 조화를 깨뜨립니다. 이것을 부조화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모니가 밸런스가 맞지 아니하는 것을 말합니다. 파멸을 말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을 떠나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할 때 인간을 이렇게 비참한 모습으로 부조화가 오게 되는 것입니다. 불신앙은 세상이 사용하는 언어로 표현을 한다면 부조화입니다. 하나님과의 부조화란 하나님을 등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하던 사람이 하나님을 등지면서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 불평이 가득합니다. 의심합니다. 믿지 않습니다. 하나님에게 책임을 전가합니다. 오늘 우리의 문제는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을 떠난 인간, 다른데서 우리가 행복과 기쁨을 얻으려는 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잘 사는 나라는 땅이 넓고 지하자원이 많아서 잘 살지 않습니다. 스위스 덴마크 노르웨이는 지하자원이 없습니다. 그래도 세계에 제일 잘 사는 나라요 행복한 나라가 된 것은 하나님과 조화가 있으니까 그 나라 정치 경제 이웃과의 조화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네덜란드는 우리나라 땅의 1/3밖에 안됩니다. 그래도 경제적으로 농사도 많이 지어서 부족함이 없이 살고 있습니다. 세계 GNP가 3만 불의 국가로 이렇게 오래오래 번영과 평화를 누리고 있는 것은 하나님과의 조화를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조화는 다른 조화를 탄생시키는 것입니다. 이 조화는 다른 조화를 이끌고 가는 것입니다. 이 조화가 있으므로 다른 조화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이 조화가 모든 조화를 발전시켜 나가는 것입니다. 이 조화가 끊어지면 다른 조화가 끊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과 조화를 끊어버리고 평화를 누리려는 모든 나라가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조화를 이룬 미국이 얼마나 잘 삽니까? 복을 받습니다. 하나님과 조화를 벗어나려고 할 때 인간에게는 고통이 오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조화를 끊어버리게 되는 배경은 사탄입니다. 하나님을 떠나라 아담 이브도 네 힘으로 살아라 네가 잘났지 않았냐 네가 최고다 하나님을 떠나서 즐겨라 먹어라 놀아라 이것이 바로 교만인 것입니다. 타락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우리 인간은 갈 곳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 속에서 정신적인 조화를 가정의 조화를 삶의 조화가 주어지는 줄로 믿습니다.


로마서 5장 1- 11절에 보면 하나님을 떠나 원수된 우리를, 하나님을 떠나서 이 부조화의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우리 인류를 위하여 그 독생자를 보내어 주셔서 화목제물이 되시고 그가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다리를 엮어주시고 길을 열어주시고 화해케 하시고 하나님의 손이 가까이 찾아오게 하시고 우리 얼굴에 기쁨을 주시고 소망을 주신 줄로 믿습니다. 이 지구 이 세상에 제일 좋은 조건 제일 좋은 환경은 하나님과 조화를 이루는 환경입니다. 어디에 이사를 하시렵니까? 하나님과 조화가 되는 곳에 가서 살아야 복되게 살아갈 줄로 믿습니다. 며느리를 볼 때 결혼 대상자를 선택할 때 우리는 외모만 보아서는 안됩니다. 육적인 조건만 보아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과 조화가 안되면 인간은 안되게 되어 있습니다. 북한이 과거 한국의 예루살렘이었습니다. 평양이 주일이 되면 장사가 안돼서 다 문을 닫았습니다. 평안 남, 북도에 있는 교회가 남한 전체에 있는 교회보다도 더 많았다고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조화를 잘 이루어서 잘 살던 땅이 하나님을 저버리니까 북한 땅은 황무지 같은 땅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북한을 회복할 수 있는 것은 밀가루가 아닙니다. 돈도 아닙니다. 돈을 주니까 엉뚱한데 쓰고 쓸 줄 모릅니다. 돈이 우선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조화가 이루어진 다음에 돈이 필요하지 하나님 없는 사람은 술집으로 먼저 갑니다. 하나님을 떠난 우리 인간의 발길은 엉뚱한 길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사야서 1장에 보면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에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 너희가 거절하여 배반하면 칼에 삼키우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즐겨 순종하면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라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고 주를 떠나면 하나님의 칼에 삼키우리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잘난 것 없습니다. 아무것도 잘 하는 것 없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그 조화 속에서 위로부터 하늘 문이 열려지는 한 우리를 대적할 자가 없는 줄로 믿습니다. 신앙생활을 잘 해 보십시오. 가정파멸이 있겠습니까?

우리 성도들 신앙생활을 적당하게 하시지 말고 회개할 때도 철저하게 회개하십시오. 평생 헛되게 살아가면서도 하나님을 향해 영적인 새 출발하는데는 너무 인색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다른 조화를 위해서는 어마어마한 노력을 다 하면서 하나님과 조화는 적당하게 하는 성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기도원 같은 곳에 가서 기도하고 하나님과 조화를 이루고 회개하고 돌아오면 능력 있는 삶이 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과 조화가 이루어진 백성을 누가 삼킬 수 있어요? 이 세상에 환난이 시험이 재난이 누가 우리를 넘어뜨릴 자가 있어요? 주님이 우리를 지켜 주실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영적으로 끊어지니까 무슨 일을 만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고 당황하고 불안하고 걱정되고 염려되고 두렵고 그래서 엉뚱한 일을 하게 되고 낙심하고 술 취하고 방탕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일생동안 『주여 나를 다스려 주시옵소서』


교회에 왜 나옵니까? 하나님 나를 다스려 주십시오 인도해 주십시오. 여호와께서 나의 가는 길을 책임져 주시옵소서 주님은 우리의 통치자이십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은 우리의 생명이시오 구원이시오 능력이십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며 하나님과 조화가 이루어지는 사람은 이 세상에 많고 많은 재난 환난 시험에서 넘어질 리가 없습니다. 어떤 것도 우리를 넘어뜨릴 자가 없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 민족이 이제 교만한 마음에서 돌아서서 마음을 낮추어야 합니다. 가온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나만 잘났다 그러면 안됩니다. 다 잘났습니다. 한 사람도 못난 사람 없이 이렇게 살아가면 끊임없이 부조화만 이어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제 우리 모두 여호와를 인정하고 여호와의 능력을 믿으면서 하나님을 향해 찬송하며 감사하는 믿음의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기도: 만물을 다양하고 조화롭게 창조하신 하나님 아버지, 거룩하심과 영원하심과 존귀하심을 찬양하옵나이다. 주의 귀한 전에 모인 주의 백성들이 많은 죄와 허물을 가지고 나왔사오니 십자가의 흘리신 보혈의 피로 오늘도 우리를 정결하게 눈보다 양털보다 더 희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이 주신 놀라우신 은혜가 우리 심령에 충만하게 하옵소서. 우리는 주의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달라도 우리가 어떤 형편에 있는지 우리가 누구라도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우리는 주의 것입니다. 우리가 무었을 가졌어도 우리가 무슨 일을 하더라도 우리는 주의 것입니다. 우리가 주 안에서 하나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한태완 목사(은혜교회)

* 은혜교회 홈페이지 http://blog.naver.com/allco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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