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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화목하고 화평케 하는 성도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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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목하고 화평케 하는 성도가 되자


 

본문: 마태복음 5: 9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홀어머니를 모신 내외가 있었는데 날마다 고부간에 싸워서 가정의 평화라고는 없었습니다. 어머니 편을 들 수도 없고, 아내 편을 들 수도 없고 중간에 끼어서 고생하는 것은 남편이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좋은 꾀를 내어 밤 한 말을 사가지고 와서 아내에게 "여보, 당신과 어머님과 싸우는 걸 더 이상 볼 수가 없구료, 당신이 죽든지 어머니가 돌아가시든지 해야지 안되겠소. 그러나 젊은 당신이 죽어서야 되겠소? 그래서 오늘 감쪽같이 어머니를 앓지도 않고 돌아가시게 하는 좋은 약을 사왔으니 내 말대로 꼭 해야 하오." 그러면서 밤을 내 주었습니다. "이건 밤이 아니에요?" "음, 이걸 삶아서 매일 잡숫게 하면 어머니는 뚱뚱하게 살이 쪄서 혈압이 높아져 앓지 않고 쉽게 죽는 다오 그러니 돌아가실 분에게 공손히 잘 대하구려." "네, 어디 그럼 당장 내일 아침부터 해보겠어요." 며느리는 좋아 라고 밤을 삶아서 이른 아침에 가지고 들어가서 전에 없이 공손한 말씨로 시어머니에게 말했습니다. "어머님, 안녕히 주무셨어요? 시장하실텐데 이 밤을 잡수세요." 시어머니는 뜻밖의 일이라 아무 말 않고 받아 먹었습니다. 이튿날도 또 그 다음 날도 매일 공손한 인사와 함께 며느리에게 서 밤을 받아먹은 시어머니 마음에 후회하는 생각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저렇게 착한 며느리를 괜히 내가 심히 굴었지! 이렇게 생각하자, 시어머니는 며느리를 아끼고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싸움이 그칠 줄 모르던 이 집안이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아내가 남편에게 말했습니다. "나 인제 저 밤 내다 버릴 테야요." "아니 왜?" "어머님이 돌아가실 까 겁이나요! 그렇게 인자하신 어머니를 죽이려고 한 내가 나쁜 년이었어요!" 그러면서 흑흑 느껴 우는 것이었습니다. 남편은 흐느끼는 아내의 등을 어루만지며, "여보, 어머닌 벌써 돌아 가셨다오!" "네? 거짓말! 조금 전에도 정정하셨는데...." "하하하 여보, 그 밤은 며느리를 미워하는 시어머니를 죽였다오! 그 독약 참 효과 만점인데!" "난 몰라요! 그렇게 감쪽같이 사람을 속이구..." 아내는 눈을 홀겼습니다.

"저희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며 너희끼리 화목하라"(살전5:13)

 

찬송가 508장(통 270장) ‘우리가 지금은 나그네 되어도’

 


어떤 마을에 두 집이 있었습니다. 한 집은 일곱 식구인데도 조용하며 화목하게 지내고 있었고, 다른 한 집은 세 식구밖에 안 되는데 항상 시끄럽고 말썽이 많았습니다. 어느 날 세 식구인 집 가장이 일곱 식구인 집 가장을 찾아가서 묻기를 "댁은 많은 식구인데도 불구하고 언제나 명랑하고 화목 하게 지내고 계시는데 무슨 비결이 있으면 가르쳐주십시오." 그러자 일곱 식구댁의 가장이 대답하기를 "댁은 잘난 사람들만 모여 살기 때문에 그렇고 우리 집은 모두가 못난 사람들만 모여 살고 있으니 조용할 수 밖에요"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을 들은 세 식구의 가장은 무슨 영문인지 몰라 고개를 갸우뚱 했습니다. 그것을 본 일곱 식구의 가장은 빙그레 웃으면서 말을 덧 붙였습니다.

"우리 집에서는 누가 컵을 깨뜨렸을 때 깨뜨린 사람이 제 잘못이라고 사과를 합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이 '아니야 내 잘못이야. 내가 컵을 그곳에 놓지 않았어야 했는데'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또 다른 사람이 저마다 제 잘못이라고 구실을 달아 잘못했다고 용서를 구합니다." 이 말을 듣고 있던 세 식구의 어른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습니다. "거참 진리는 가까운 데 있었군요. 우리 집은 그 반대였습니다. 무슨 일이 생길 때면 저마다 제 잘못은 없고 상대방만 탓했습니다. '왜 조심성이 없느냐', '왜 그런 곳에 두었느냐', '왜 나만 야단치느냐'

하면서 서로 소리를 질렀으니까요"라며 참으로 좋은 교훈을 얻었다면서 돌아갔습니다.

이 이야기는 가족들이 서로 양보하고 이해하면 가정은 저절로 화목해 진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육선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잠17:1)

 

 

가정의 행복을 좌우하는 열쇠도 화목입니다. 가족들이 화목하는 곳에서 우리는 작은 천국을 경험합니다. 종종 이런 가정의 행복은 재산과는 무관합니다. 반면, 재산이 많은 재벌가의 비극은 가진 것이 많음에서 비롯됨을 볼 수 있습니다. 뉴스를 타는 재산 분배를 둘러싼 재벌가의 다툼에서 인생의 행복은 소유에 있지 않음을 확인합니다.

가정의 행복을 위한 첫 걸음은 소유가 아닌 존재의 가치를 공유하는 일입니다. 사랑은 인생을 의미 있게 하는 가장 소중한 가정의 가치입니다. 비록 마른 떡 한 조각을 나누어도 진솔한 사랑을 함께 나누는 가정이라면, 제육을 쌓아두고 다투는 이웃을 부러워 할 이유가 없습니다. 화목이 천국의 그림이라면, 다툼은 지옥의 그림입니다.

'다투는 여인과 함께 큰 집에서 사는 것보다 움막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나으니라‘(잠21:9)

 



 

다툼과 분쟁의 원인은 무엇입니까?


1. 교만에서 생깁니다.

"교만에서는 다툼만 일어날 뿐이라 권면을 듣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잠13:10)

교만이 오면 욕도 오거니와 겸손한 자에게는 지혜가 있느니라’(잠11:2)

 


2. 욕심(탐심)에서 나옵니다.

전에 협동단결하자는 설교할 때에 이야기 했었는데 저는 역사공부를 하면서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시대 때 신라가 통일시키지 않고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하였더라면 지금의 만주땅은 우리 것이 되었을 텐데 하며 아쉬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러분 고구려가 왜 망했는지 아십니까? 그 강성했던 고구려가 망한 이유는 막리지 연개소문에게 3아들이 있었는데 3형제가 화목하지 못하고 아버지의 자리인 막리지 자리를 놓고 서로 싸워 분쟁하는 통에 망한 것입니다. 이 3형제가 힘을 합하였더라면 결코 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인류의 역사는 다툼의 역사이었다고 말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입니다. 다툼은 어디서 비롯되는 것일까요? 사도 야고보는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약4:1)고 말합니다. 인간의 욕심이 다툼의 근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욕심을 버리면 다툼에서도 자유하게 될 것입니다.

인류 역사의 모든 전쟁사를 연구해 보면 예외 없이 정치 지도자 개인의 욕심, 혹은 민족적 집단 이기주의가 인간의 삶의 마당을 미움과 싸움의 마당으로 만들어 온 원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평화의 해답은 정치적인 것이 아니라, 신학적인 것입니다. 참된 평화의 모색은 정치적 협상의 장이 아닌 인생의 마음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탐하는 자는 다툼을 일으키나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풍족하게 되느니라"(잠28:25)

 


3. 다툼의 원인은 남의 일에 참견하기 때문입니다.

"나무가 다하면 불이 꺼지고 말쟁이가 없어지면 다툼이 쉬느니라"(잠26:20)

‘또 그들은 게으름을 익혀 집집으로 돌아 다니고 게으를 뿐 아니라 쓸데없는 말을 하며 일을 만들며 마땅히 아니할 말을 하나니’(딤전5:13)

 


4. 다툼의 원인은 술취함 때문입니다.

"재앙이 뉘게 있느뇨 근심이 뉘게 있느뇨 분쟁이 뉘게 있느뇨 원망이 뉘게 있느뇨... 술에 잠긴 자에게 있고 혼합한 술을 구하러 다니는 자에게 있느니라"(잠23:29,30)

 


5. 정욕으로 인해 생깁니다.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부터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 좇아 난 것이 아니냐’(약4:1)

 


6. 무지와 고집에서 생깁니다.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 이에서 다툼이 나는 줄 앎이라’(딤후2:23)

 


7. 다툼의 원인은 미움 때문입니다.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우느니라"(잠10:12)

 


8. 다툼의 원인은 미련함 때문입니다.

"미련한 자의 입술은 다툼을 일으키고 그 입은 매를 자청하느니라"(잠18:6)

"다툼을 멀리 하는 것이 사람에게 영광이어늘 미련한 자마다 다툼을 일으키느니라"(잠20:3)

 


9. 참을성이 부족하여 생깁니다.

‘분을 쉽게 내는 자는 다툼을 일으켜도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시비를 그치게 하느니라’(잠15:18)

 


사람 사이에 다툼이 없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되도록 다툼 없이 사는 것이 좋습니다. 한 번 다투기 시작하면 다툴 일이 자꾸 많아집니다. 다툼의 원인은 많은 경우 상대방에 있기보다 내 안에 있기 쉽습니다. '나'를 좀 내려놓고 상대방에 귀 기울이며 이해하려 애쓸 때 다툼도 줄어들고 사이도 좋아집니다. 눈, 코, 귀, 입, 손, 발 등 지체는 서로 다르지만 한 몸에 속합니다. 상대방을 이해하고 소중히 여깁시다.

 

성령의 9가지 열매중 하나가 화평입니다.(갈5: 22- 23)

마태복음 5장 14절에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배를 드리라”고 하였습니다. 화목하는 것이 예배에 앞섭니다. 또 8복의 말씀 일곱 번째 복은 ‘화평(평화)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마음에 평화가 없는 사람은 싸움보다 평화를 견디지 못합니다. 마음에 평화를 이루십시오. 그러면 다툼을 그치게 하며 화평케 할 것입니다.

마음의 평화를 이루는 길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화해하십시오. 하나님과 갈등하고 있는 분들은 마음에 평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품에 이르면 진정한 내적 평화가 이루어집니다.

이 평화의 마음으로 화평케 할 궁리를 하십시오. 사자와 송아지가 함께 풀을 뜯고,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고 노는 평화를 위한 창조적 상상력을 기르십시오.(이사야1:6) 그러한 이는 평화를 누릴 뿐 아니라 평화를 만들어나가는 하늘의 일꾼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선 그러한 이가 이 땅위에 나타나기를 고대하고 계십니다. 그가 하나님의 아들 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는 복을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이중적 사랑은 진리의 양극과 음극 같은 것입니다. 두 극이 모두 연결되지 않으면, 우리는 동력을 갖지 못합니다. 한 사람의 믿음은 그것이 사회적으로 적용되지 않는다면 무익한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하고 하나님의 화평을 가진 자라면, 우리는 화평케 하는 자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과 그리고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을 이루며 살아가는 것은 의와 평강과 기쁨이 넘치는 삶입니다. 이런 화평의 삶이 바로 천국의 삶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화목을 청하시는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하나님은 먼저 화목의 손을 내미십니다. 우상숭배로 극도로 악해진 아합에게 엘리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자 "옷을 찢고, 굵은 베를 허리에 동이고 금식하며 그 걸음도 천천히 걷는 겸비한 모습"을 보이자 하나님께서는 크게 기뻐하십니다(왕상 21:27∼29). 죄인 중 죄인이었던 아합의 그 작은 겸비함만을 보시고도 하나님께서는 먼저 화목의 손을 불쑥 내미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누구에게든지 화목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볼 수 있는 말씀인 것입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약3:18)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죄로 인해 고통 받고 망하는 것을 원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떤 죄를 지었을지라도 십자가의 주님으로 오셔서 그 피 묻은 손으로 우리의 손을 꼭 잡아주시며 모든 죄를 용서해주시기를 원하는 분입니다. 그 주님의 손을 꼭 붙잡으시길 바랍니다.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골 1:20)


하나님과 화평의 방법은 예배를 통해서입니다. 성경은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10:17)고 말씀합니다. 예배의 중요성은 여기에 있습니다.

예배 시간에 선포되는 말씀을 통해 성령의 감동과 감화가 이루어지고 말씀이 믿어집니다. 그리고 믿음의 말씀을 붙잡을 때 성령을 받고, 삶에서 성령의 열매가 맺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을 살아가시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을 받습니다.


예배를 잘 드리는 우리 교회 한 아이의 입에서 "십자가, 십자가 내가 처음 볼 때에 나의 맘에 큰 고통 사라져 오늘 믿고서 내 눈 밝았네 참 내 기쁨 영원 하도다"란 찬양이 흘러나왔습니다. 예배 중 어머니의 무릎에서 배운 찬양이었습니다. 그 찬양을 통해 그곳에 함께한 선생님들과 모두에게 하나님의 화평이 임했습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그 아이에게 임했던 복이 믿음으로 함께한 모든 이들에게도 크게 임한 것입니다. 할렐루야!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막9:50)

 


오늘날 정치 지도자들의 다투는 모습은 참으로 보기에 안타깝습니다. 국가와 민족의 이익은 생각지 않고 오직 자기들의 당리 당략으로 분쟁하고 있습니다. 국민들이 그들을 왜 뽑아주었는지를 망각하고 있습니다. 이익을 얻게 하는 것은 경제로 하는 것이지만 화평케 하는 일은 공평하게 나누는 분배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경제가 잘된다고 결코 화평함이 찾아들지는 않습니다. 육선이 가득하다고 곧 행복한 가정이 되지 아니함과 같습니다. 그리고 발전은 경쟁으로 이루는 것이지만 한 마음이 되는 것은 덕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또한 산업화는 자연을 정복함으로 이룩되는 것이지만 선진화는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통하여 새로운 가치와 행복과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 정신문화를 창조함으로 이룩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국민이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지도자만이 책임질 일이 있으니 화평케 하는 일과 한 마음이 되게 하는 것과 시대를 앞서 때를 읽고 방향을 제시하는 것은 지도자에게 주어진 역사적 책무입니다. 우리 정치 지도자들이 반성하고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며 그것을 따르라”(벧전3:11)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좆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히12:14)

 


성도 여러분, 하나님과 이웃과 화평을 이루셔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복을 누리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 기도: 화목 제물로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 우리를 위해 고난과 희생을 당하신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기억합니다. 날마다 주님께 받으신 고난을 생각하면서 감사함으로 주님께 영광돌리게 하옵소서, 우리 모두가 어디서든지 서로 양보하고, 겸손하고, 용서하고, 사랑하여 화목한 가정을 이루고 이웃에게 기쁨을 가져다주고 화평케 하는 자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한태완 목사(은혜교회)



* 은혜교회 홈페이지 http://blog.naver.com/allco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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