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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범사에 감사하며 사는 길

  • 이한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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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사에 감사하며 사는 길

삼상6:1-12


하나님만 바라보며 사십시오

  얼마 전에 한 여성이 차를 온전하고 가다가 앞차 범퍼를 살짝 건드렸습니다. 차에서 내려서 봤는데 아무리 봐도 상처가 없었습니다. 남편이 급히 와서 범퍼 전체를 샅샅이 살펴보는데도 전혀 흠집이 없었고 도색도 벗겨진 곳이 없었습니다. 그래도 상대 차 주인이 한번 서비스센터에 가보자고 해서 분당 정자동의 벤츠 서비스센터에 가보았습니다. 그러자 서비스센터에서 멀쩡한 범퍼를 갈라고 해서 170만 원 견적을 냈습니다.

 그때 그 남편은 조용히 보험처리를 하면서 일부 외제차 회사들의 수리비 폭리 소문을 실제로 확인하고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서비스센터가 저런 식으로 해서 회사 이미지를 망치다니.” 사실상 범퍼는 원래 완충용도로 쓰이는 것이기에 약간 상처가 나면 오히려 운전할 때나 주차할 때 마음이 편해집니다. 그런데 범퍼에 약간의 상처가 났다고 범퍼 전체를 바꾸면 얼마나 안타까운 낭비입니까? 자기 돈으로는 그런 낭비를 하지 않을 것입니다.

 며칠 후, 그 남편이 사무실에 있는데 분식센터 주인이 와서 말했습니다. “선생님! 저희 식자재 배달하는 오토바이가 선생님 차를 박았어요.” 나가보니까 자동차 뒤의 라이트 박스가 크게 깨져 있었고 범퍼도 크게 흠집이 났습니다. 식자재 배달로 하루에 얼마를 벌겠습니까? 긍휼한 마음이 들어 그 남편은 아는 카센터에 가서 라이트 박스만 7만 5천 원 들여 교체한 후 분식집 주인에게 말했습니다. “수리비로 7만 5천 원 들었다고 전해주세요.” 나중에 그 오토바이 주인이 7만 5천 원을 주면서 정말로 고마워했습니다.

 남의 불행과 손해를 이용해 한 몫 잡으려는 모습은 치사한 일로서 그때는 한 몫 잡은 것 같지만 결국은 손해입니다. 반면에 남의 불행과 손해를 볼 때 조금이라도 그의 손해를 경감해주려고 하면 그것이 손해 같지만 결국은 이익입니다. 하나님은 신비한 계산법으로 그런 행위들을 공의로 판단하시고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는 사람답게 살려다가 이 땅에서 손해를 본다면 그것은 손해가 아니라 결국 유익이 될 것입니다.

 작년 초쯤 아내가 아파트 입구 근처에서 한 차를 살짝 받아서 범퍼에 약간의 흠집이 났습니다. 앞차에서 한 청년이 내렸습니다. 아내가 미안하다고 하자 그 청년이 범퍼를 힐끗 보더니 말했습니다. “괜찮아요. 운전하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요.” 그러자 그 청년이 원래의 모습보다 더 잘생기게 보였다고 합니다. 하나님도 그런 성도를 잘생기게 보실 것입니다.

 더 나아가 어떤 성도는 인생의 큰 손해와 상처를 입고도 감사를 잃지 않습니다. 즉 건강을 잃고 자녀가 잘못되고 사업이 망하고 심지어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도 잠깐 슬퍼하기는 하지만 감사하는 삶을 잃지는 않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 사람도 아름답게 보지만 하나님은 더욱 아름답게 보시며 그 감사하는 믿음을 기뻐하실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기쁨은 내일의 축복으로 귀결될 것입니다.

 요새 교육과 정치 문제 등으로 이민 희망자가 늘지만 외국도 특별한 곳은 아닙니다. 외국 삶은 대개 외로움과 상처가 더 많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디에 있든지 천국 소망과 희망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디서든지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행복은 특별한 사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누구에게나 행복의 가능성은 열려 있습니다. 특히 하나님을 바라보고 범사에 감사하며 살면 행복의 가능성은 현저하게 커집니다.

 헬라어로 유토피아는 ‘이 세상에 없는 장소’란 뜻입니다. 공산주의는 공산사상을 강요해 유토피아를 만들려고 했다가 유토피아 대신 지옥을 만들었습니다. 가정이나 교회도 유토피아가 아닙니다. 가정이나 교회를 유토피아로 만들려고 하면 그때부터 기대가 요구로 발전하고 요구가 강요로 발전하면서 실망은 커지고 삶은 더 힘들어집니다. 유토피아 가정, 유토피아 교회, 유토피아 국가는 없습니다. 이 세상의 유토피아를 꿈꾸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감사하며 살면 어떤 환경과 현실에서도 행복을 찾아가며 살 수 있습니다.

< 범사에 감사하며 사는 길 >

 지나간 세월들을 살펴보십시오. 가끔 힘든 순간도 겪기는 했지만 어느 한 순간도 필요 없는 순간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 사실을 깨닫고 범사에 감사하는 믿음을 가지십시오. 사실상 범사에 감사하는 믿음처럼 복된 믿음은 없습니다. 그처럼 범사에 감사하는 믿음을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은혜를 깨달으십시오

 범사에 감사하며 산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사실상 숨겨진 무수한 은혜를 깨달은 사람만이 범사에 감사하며 살 수 있습니다. 결국 범사에 감사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현재 넘치게 받고 있다는 표시이면서 앞으로 넘치게 은혜를 받을 표시입니다. 정상인도 은혜를 깨닫지 못하면 불평이 넘치게 되지만 장애인도 은혜를 깨달으면 감사가 넘치게 됩니다.

 감사는 깨달음에서 생깁니다. 자신을 불행하게만 생각하지 마십시오. 현재의 힘든 환경이 불행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 환경 안에 숨겨두신 하나님의 선한 뜻이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최종 열매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과일나무가 잎은 벌레에게 뜯기고 꿀은 나비에게 빼앗기고 향기는 바람에 날려서 다 잃은 것 같지만 사실상 잃은 것이 없습니다. 때가 되면 과실을 맺기 때문입니다. 성도에게는 잃어버린 현실도 최종 열매를 위해 필요한 현실입니다.

2. 삶 자체를 감사하십시오

 차를 운전하다 보면 무수한 사고의 가능성 속에서도 큰 사고를 만나지 않고 지금까지 살아있는 것에 대해 감사한 마음이 불현 듯 들 때가 있습니다. 차를 운전하다가 때로는 아슬아슬하게 사고를 피하게 된 상황도 얼마나 많았는지 모릅니다. 특히 골목길 같은 곳에서 키가 작아 잘 보이지 않는 어린이를 차로 치지 않고 자전거를 타고 가는 학생을 치지 않은 것 등등을 생각해도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차를 타고 가다 보면 무덤이 있는 곳을 지나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살아있다는 사실 자체에 감사한 마음이 가끔 생기곤 합니다. 살아있으면 힘든 일이 생기는 것은 당연합니다. 결국 힘든 일이 생기는 것은 자신이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그처럼 자신이 지금 살아있다는 사실 자체도 감사하지만 살아있기에 변화의 가능성도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어차피 구원받은 성도의 인생은 덤으로 사는 인생입니다. 그 사실을 깨달으면 삶 자체가 큰 감사의 제목이 됩니다.

3. 감사를 훈련하십시오

 감사는 훈련할수록 커집니다. 불평도 체질화되지만 감사도 체질화됩니다. 그처럼 감사를 체질화시키려면 옆 사람의 도움도 매우 중요합니다. 즉 원망하며 살지 말자고 서로 격려해주십시오. 그리고 이해해주고 인정해주는 마음을 계속 훈련하십시오. 인생을 감사로 사는 사람은 남의 취향을 인정해줍니다. 공동체와 사회에 피해를 주는 것이 아니라면 남의 취향을 가지고 시비를 판단하려는 본능을 버려야 합니다. 남의 취향을 가지고 유머 대상으로 삼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산에는 보통 등산화를 신고 갑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쉬운 산행에서는 구두를 신고 갑니다. 그때 자아가 충만한 사람은 말합니다. “아니! 산에 구두를 신고 오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자기 앞에 있는데 그 앞에서 어디 있느냐고 하니까 얼마나 자기중심적인 언행입니까? 군인에게 군화가 필수품이듯이 어떤 사람에게는 밑바닥이 딱딱한 신발이 더 편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무심결에 자기중심적인 언행을 표출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평소에 배려 훈련과 감사 훈련을 해야 합니다. 남의 취향을 저격하지 마십시오. 배려와 감사는 행복의 중요한 요소입니다.

4. 하나님만 바라보십시오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 없으면 한 시도 살 수 없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자신은 생각만큼 강하지 않습니다. 사람을 바라보면 답답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래도 “저 사람 왜 이렇게 답답해!”라고 하지 마십시오. 자기도 남만큼 답답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하나님 앞에 내세울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자기 공로에 생각이 미치면 하나님의 은혜는 약해지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눈길도 희미해집니다. 만약 자신에게 어떤 일에 대한 공로의식이 있다면 하나님을 위해 일한 것도 결국 자신을 위해 한 것이지 하나님을 위해 한 것이 아닌 셈이 됩니다.

 왜 불평이 생깁니까? 자기 공로를 크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왜 감사가 넘치게 됩니까? 자기 공로를 작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큰 공로가 있어도 그 공로를 잘 잊기 때문입니다. 공로의식이 없는 겸손한 사람들을 보면 놀라운 물질적인 헌신을 하고도 어떻게 말합니까? “이렇게 할 수 있는 마음과 여건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라고 합니다. 그런 말을 들으면 사람도 감동하지만 하나님은 더욱 감동하실 것입니다.

< 범사에 감사하십시오 >

 매년 추수감사절이 되면 감사를 도전하는 말씀을 듣고 여러 감사 행사를 합니다. 그러나 추수감사절에만 감사하지 말고 추수감사절에 감사를 배워 범사에 감사하십시오. 결국 인생의 성패는 고통 중에도 감사할 줄 아느냐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사실상 그 고통이 있기에 잘못된 자아가 조금씩 치유되는 것입니다. 고통이 없다면 사람은 겸손해질 수도 없고 이기심의 두꺼운 벽도 깨기 힘들고 하늘 높은 줄도 모르게 됩니다. 그러면 마음도 불편해지고 불행의 가능성도 커집니다.

 살면서 늘 하늘 높은 줄 알고 자기보다 더 뛰어난 사람이 저 너머에 있다는 사실도 잊지 마십시오. 그리고 잘사는 사람도 너무 미워하지 마십시오. 그들을 모두 악하고 거만한 사람으로 보지 마십시오. 잘사는 것 자체가 죄나 허물은 아닙니다. 잘사는 사람 중에도 물론 잘못 사는 사람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도 그런 위치에 있으면 그 사람보다 더 못한 모습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그 사실을 생각하고 어떤 분야에서든지 앞선 사람을 존중하는 태도를 가지십시오. 그것도 큰 의미에서 범사에 감사하는 삶을 훈련하는 것입니다.

 지금 힘든 현실 중에 있어도 감사를 잃지 마십시오. 인생 전체를 보고 나중에 판단을 내리십시오. 현재의 문제 때문에 깨달음을 얻고 미래의 문제를 막을 때도 많습니다. 현재의 작은 사고가 미래의 큰 사고를 막아주고 현재의 고뇌가 미래의 큰 고뇌를 덜어줄 때도 많습니다. 청소년 때 탈선의 아픔을 겪었던 사람이 회개하면 나중에 각종 탈선에 빠지지 않을 확률이 훨씬 높습니다. 결국 하나님 안에서 범사에 감사하는 심령에게는 과거의 불행과 상처도 합력하는 선을 이루는 재료들이 될 것입니다.

 지난 삶을 회고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실수하지도 않았고 인색하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붙들어 주셨기에 ‘현재의 우리’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앞으로도 우리 삶에 최선의 길을 허락하실 것입니다. 그 사실을 믿고 범사에 감사하십시오. 감사하면 심령에 좋은 것이 늘 넘치게 됩니다. 반면에 감사가 없으면 그 심령을 어떤 좋은 것으로도 채울 수 없습니다. 결국 환경이 감사할 조건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먼저 감사함으로 환경이 좋게 변하는 것입니다. 늘 하나님만 바라보며 범사에 감사함으로 내일의 축복을 예비하는 복된 심령들이 되십시오.
ⓒ 이한규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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