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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가 예배하고 예수를 믿는 것은

  • 허태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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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예배하고 예수를 믿는 것은
막5:35-43


예수는 회당장의 딸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그 집에 들어갔습니다. 사람들이 울며 통곡하며 떠드는 것을 보고 “어찌하여 떠들며 울고 있느냐? 그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사용된 ‘자고 있다’는 헬라어 동사는 첫째로, 죽음의 상태를 가리키기도 하고, 둘째로 영적인 나태나 무능함의 상태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여기서는 예수께서 직접 ‘죽은 것이 아니다’고 말씀했으니 첫 번째 의미는 해당이 안 되고 두 번째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소녀는 식물인간처럼 겉으로는 살아 있으나 속은 죽어 있었습니다.

왜 그 소녀는 그런 상태가 되었을까요? 정신분석학의 입장에서 이 본문을 해석하는 한 학자는 그것은 아버지의 과도한 사랑 때문이라고 봅니다. 회당장은 자기 딸을 ‘나의 어린 딸’(23절)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 소녀는 열두 살이었는데 당시 이 나이는 결혼 적령기였습니다. 그런 딸을 ‘나의 어린 딸’이라고 부른 것은 그가 딸에게 병적으로 고착되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소녀는 아버지의 집착 때문에 황금으로 된 새장에 갇힌 새의 신세가 되었습니다. 밖으로 나가서 또래 여자들과 경쟁도 하고 자기의 자태도 뽐내고 남자도 사귀고 그랬어야 하는데 경연장에 나가보지도 못하고 무대에 올라보지도 못하고 죽게 된 것입니다.

이상하게 이 이야기의 앞부분에서는 소녀의 아버지만 나오고 어머니가 나오지 않습니다. 나중에 40절에서 예수께서 소녀를 일으키기 직전에 ‘부모’가 등장합니다. 아버지가 본래 짝인 어머니에게로 돌아간 다음에 그 소녀는 일어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소녀는 지난 12 년 동안 주체가 아닌 아버지의 ‘꼬마’로 살았습니다. 자기가 이미 결혼 적령기의 여자라는 것도, 자기 속에 남자와 결혼하고 싶은 욕망이 있다는 것도 알지 못하고 그저 깊은 잠 속에서 꿈만 꿀 뿐이었습니다. 살았으나 죽은 거나 다름없었습니다.

예수께서 ‘달리다굼’하고 소리를 지른 것은 소녀를 잠에서 깨어나게 하였고 아버지와의 병적인 관계를 끊고 일어서게 하였습니다. “소녀야 일어나라!” 이 목소리로 ‘꼬마’는 ‘소녀’로 일어섰습니다.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는 이야기에서도 예수는 관에다 손을 대고 “젊은이야 일어나라”하고 외쳤습니다(눅 7:14). 이 청년은 과부의 외아들이었습니다. 홀어머니와 외아들의 관계도 회당장과 딸의 관계처럼 병적인 관계입니다. 어머니는 다른 남자에게서 받지 못하는 사랑을 아들에게서 채우려 했고 아들은 불쌍한 어머니를 위해 헌신하는 동안에 청년이 되지 못하고 남자로서 욕망을 배출할 출구가 막히게 되어 결국 죽고 말았습니다.

“젊은이야 일어나라”하는 예수의 음성은 그 병적인 관계를 끊어버리는 것입니다. 여기 사용된 “젊은이”라는 단어는 그를 엄마를 위한 ‘마마보이’가 아니라 당당한 어른으로 서게 하였습니다. 아버지가 없는 소년에게 예수는 아버지가 되어 주었습니다. “일어나라”는 헬라어로 에게르테티(egertheti)인데 죽음에서 일어난다는 의미와 비로소 ‘남성이 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를 만나면 이렇게 잠에서 깨어나 일어서게 되고 ‘살아있게’ 됩니다. 그런데 아이건은 인간은 ‘살아있음’을 견디지 못하는 존재라고 말합니다. ‘살아있음’이 좋은 것 같지만 실제로는 매우 성가시고 견디기 힘들다고 합니다. ‘살아 있음’은 내면의 마그마와도 같이 격렬한 것, 광기와도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내면의 광기를 경험하면 그것을 감당할 수 없어서 자신을 사라지게 합니다. 아기는 자기 뜻대로 되지 않으면 울고 또 울다가 그래도 안 되면 지쳐서 잠이 듭니다. 잠시 의식을 잃는 것입니다. 성인이 되어도 이것은 변하지 않습니다. 힘들면 견디지 못해서 술에 취해 잠이 들기도 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힘들어하고 살아남지 못하는 것은 이 세상의 교육과 제도가 인간은 본래 정신적 존재, 이성적 존재, 또는 영적인 존재라고 전제하고 그런 것을 강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교육이나 제도는 광기는 물론이고 ‘살아있음’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빈센트 반 고흐는 그의 광기가 길들여지지 않았기에 괴팍스런 사람으로 취급을 받았고 그의 그림도 정당한 대접을 받지 못했습니다. 지금은 최고의 명작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의 그림을 보면 그가 얼마나 ‘살아있음’을 견디기 힘들어 했는가 느낄 수 있습니다. 그의 색채와 터치는 광기로 가득한데 그것은 예술혼이었고 진정한 ‘살아있음’이었습니다.

정신분석가들은 위대한 작품은 거의 다 이런 광증에서 나온다고 합니다. 그것을 없애려고 노력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냥 놔두고 정신의 과정을 맛보고 느끼는 것이 좋다고 합니다. 교육은 그런 광증을 억제시키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 정신의 맛을 느낄 수 있는 감각과 능력을 개발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무의식중에 파괴는 악이고 건설은 선이라는 사고를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창조하는 분이지만 또한 파괴하는 분입니다. 바벨탑 이야기는 대표적 예입니다. 처음에는 좋은 뜻으로 탑을 쌓아올립니다. 하지만 나중에 그것은 하나님을 향해 도전하는 폭주 기관차가 됩니다. 악한 문명이나 기술로 무장한 체제에 대한 은유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언어를 혼란시키는 방식으로 공사를 중단시키고 결국 그것을 파괴해버립니다. 때론 홍수로 거대한 파괴를 일으키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진정한 ‘살아남음’을 위해서 그것을 통제하는 체제를 무너뜨리고 쓸어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도 그렇습니다. 온순하지도 조용하지도 않습니다. 목소리도 매우 큽니다. 오늘 본문의 ‘달리다굼~!’도 도저히 번역을 할 수 없는 큰 목소리여서 육성을 음역하여 보존했습니다. 그 외에도 ‘에바다~!’,‘엘리 엘리 레마 사박다니~!’이런 비명, 외침도 번역할 수 없어서 그대로 음역해서 실었습니다. 예수의 음성은 귀에 각인될 만큼 컸습니다. 예수의 ‘살아있음’이 워낙 강해서 누구라도 예수를 만나면 여자는 여자다워지고 남자는 남자다워졌습니다. 자기 욕망에 부끄러워하지 않고 주체를 세울 수 있었습니다. 세리도 죄인도 창녀도 예수 앞에서는 당당하게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예수가‘살아 있음’으로 충만한 것은 파괴를 용인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억지로 강요된 순응이나 복종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예수의 말씀입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려고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려고 왔다(마 10:34). 도리어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이제부터 아버지가 아들에게 맞서고, 아들이 아버지에게 맞서고, 어머니가 딸에게 맞서고, 딸이 어머니에게 맞서고,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맞서고,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맞서서, 서로 갈라질 것이다(눅 12:49-53).”

어디에 눈빛이 곱고 순하고 상냥한 며느리, 아들, 딸이 있습니까? 맞서고 대들고 갈라진다고 하지 않습니까. 예수는 이런 방식으로 사람들을 살아남게 하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예수처럼 이렇게 맞서야 하고, 갈라져야 하고, 분열해야 합니다.

우린 너무 총화단결, 일사분란, 멸사봉공 이런 구호에 세뇌되어서 자기를 죽여 왔습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이 살아남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돈이 많아도 지위가 높아도 행복하지 못합니다. 늘 불행하다고 느낍니다. 그런 사람은 자식이든 부하든 동료든 다른 사람에게도 그런 기준을 적용해서 어긋나면 용서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이 사회에는 늘 폭력이 끊이지 않고 아픔이 끊이지 않습니다.

살아남기 위해서 우리는 또한 불구와 익숙해져야 합니다. 결핍, 장애, 부족, 불완전, 존재 없는 것, 이런 용어들과 친해져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네 손이나 발이 너를 걸려 넘어지게 하거든, 그것을 찍어서 내버려라. 네가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 속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차라리 손이나 발 없는 채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또 네 눈이 너를 걸려 넘어지게 하거든, 빼어 버려라. 네가 두 눈을 가지고 불 붙는 지옥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차라리 한 눈으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마 18:8-9).

이보다 더 파괴적인 말이 없을 것입니다. 우린 이 구절을 지옥에 들어가기 않기 위해서 나쁜 습관을 끊어버리라는 말로 은유적으로 해석을 합니다. 물론 그렇게 해석해도 됩니다. 하지만 더 깊은 의미는 파괴를 하든 불구가 되든 어떻게 해서라도 ‘살아남으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이러한 결핍, 불구, 파괴를 용인해야 합니다. 자꾸만 최고, 온전, 완벽 이런 것을 추구하면 사람들은 병들게 되고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2등은 기억하지 않는다’는 광고처럼 사람들을 1등, 최고, 일류를 향해서 몰아갑니다. 이의제기나 독특함, 건방짐, 규칙 어김을 용납하지 않고 낙인찍어서 비정상으로 분류하였습니다. 그 속에서 사람들은 살아남지 못합니다. 온통 깊게 병들어서 지금 이렇게 죽임의 문화가 판을 치게 된 것입니다. 이 죽임의 문화를 이기고 살아남으려면 우린 조금 더 파괴와 익숙해져야 하고, 온전보다는 결핍과, 존재보다는 비존재와 익숙해져야 합니다. 해도 중요하지만 달도 있어야 합니다. 낮이 있어야 하듯 밤도 있어야 합니다. ‘빛의 자녀’가 있으려면 ‘어둠의 자식’도 있어야 합니다. 해와 낮은 선이고 밤과 달은 악이라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해가 있어야 식물이 자라지만 달이 있어야 인력으로 바다를 잡아주어서 파도도 치고 바다가 범람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도 아니면 모’(all or nothing)를 좋아합니다. 그게 기독교라고 생각합니다. 살면 살고 죽으면 죽는 거지 중간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부활을 믿느냐’ 하면 ‘믿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걸 좋아합니다. 하지만 힘들 때 조금씩 살아남는 방법은 모릅니다. 부활은 믿지만 금전적 손해를 입거나 인간관계가 실패하거나 하면 금세 세상이 끝난 것처럼 좌절합니다. 예수는 세상을 그런 식으로 보지 않습니다. 예수님이라고 단 한 번의 명령으로 병을 고치는 건 아닙니다. 눈먼 사람을 고쳐주었는데 한 번으로 되지 않아서 다시 시도한 적도 있습니다(막 8장). 한번 고쳐준 다음에 “무엇이 보이느냐?”고 물으니 “사람들이 보입니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 다니는 것 같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래서 다시 안수한 다음에 그 사람이 똑똑히 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도 단번에 마법처럼 고친 게 아니라 50프로 성공하고 50프로 실패했습니다. 50프로가 아니라 5프로만 성공해도 괜찮습니다. 본래 인생은 성공이 아닙니다. 본래 모든 게 실패이고, 혼돈이고, 건방지고, 말 안 듣고, 선하지 않고, 파괴적이고, 존재하지 않는 것, 이것이 인생입니다. 우리는 백프로 부활을 믿는 것보다는 5프로 ‘살아있음’을 맛볼 수 있을 때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예배하고 예수를 믿는 것은 이 죽음의 세상에서 예수처럼 살아남기 위해서입니다. 예수처럼 여러분도 자녀를 향해서 주위 사람들을 향해서 ‘달리다굼~!’‘청년아, 일어나라~!’이렇게 큰 목소리로 외치기 바랍니다. 그들이 부모와의 병적인 관계에서 해방되어 자유를 누리게 하기 바랍니다. 예수처럼 광기를 용납하고 불구와 부족함과 불완전함, 존재 없음을 용납하기 바랍니다. 예수처럼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모든 관성을 끊어버리고 파괴해버리고 진정한 해방을 누리기 바랍니다. 살아있는 것은 다 성가시고 불편하고 기분 나쁘며 죄가 많습니다. 예수처럼 성가시고 불편하고 기분 나쁘고 죄 많은 것을 용납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는 우리를 이렇게 살아남게 하려고 십자가를 지셨고 부활하셨고 성령을 보내주십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와 함께 살아남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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