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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눈뜬 신앙인이 던지는 [바벨 탑]이야기

  • 허태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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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뜬 신앙인이 던지는 [바벨 탑]이야기
창11:1-9

창세기 2장-11장은 따로따로 떨어진 이야기가 아니라 연속되는 하나의 이야기입니다. 모세오경은 시간대를 달리하는 네 개의 층위들로 기록이 되었는데요, 오늘 우리가 읽는 창2-창11장은 네 개의 문서 중에서 가장 오래된 문서(J)에서 나온 이야기입니다. 시대로 치자면 이스라엘이 남과 북으로 갈라지고 남쪽에 다윗 왕이 강력한 나라를 구축하려던 무렵입니다. 남쪽에 사는 어느 눈 밝은 신앙인이 다윗 왕이 하는 꼴, 나라가 돌아가는 꼴, 거기 사람들이 맥 놓고 사는 꼴을 보면서 ‘권력과 문명에 대한 신학적 사회 비평’을 하는 겁니다. ‘나는 세상을 이렇게 본다. 그리고 우리는 잘 못 살고 있다. 그러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것이다!’뭐 이런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이 남과 북으로 갈라지고, 문명은 점점 발달하고, 권력은 다윗을 중심으로 독점되던 시절이었습니다. 바로 그런 시대의 정치, 문명, 권력을 비평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겁니다. 아마도 여러분은 타락과 바벨론 이야기를 이렇게 듣기는 처음일 것이니 집중하시면 되겠습니다.

2-3장에 나오는 이야기는 ‘창조’이야기가 아니라 ‘타락’이야기입니다. 여기서 중심 소재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죠. 아담은 주업이 뭐였습니까? 땅을 경작하는 농부였습니다. ‘아담-아다마’라는 말이 그대로 ‘땅’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연과 친숙합니다(2:10-14). 소박한 농부이지 큰 저수지의 주인이 아닙니다. 그는 그렇게 농사를 통해 지혜를 얻었는데, 그 지혜는 하나님이 창조한 것들이 조금씩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아는 지혜였습니다. 그래서 아담은 그들 하나하나의 사물들에 이름을 붙였습니다. 이것이 그가 농사를 통해 얻은 만물에 대한 지혜였습니다. 그러니까 농업을 통해서는 ‘차이’혹은 ‘다름’의 지혜를 터득하게 됩니다.

그런데요, 선악과는 ‘차이’를 알게 하는 지혜가 아니라 ‘등급’을 아는 지혜입니다. 인간 보다 못한 피조물, 남성보다 못한 여성, 자유인 보다 못한 노예, 정결과 부정....등과 같이 대상물 하나하나에 등급을 매기는 지혜를 얻는 게 선악과입니다. 모든 사물에 가치를 부여하는 거, 값을 매기는 게 바로 선악과 사건이고, 그걸 에덴동산의 사과를 따먹고 아담이 되었다는 겁니다. 농사를 지으면서 만물의 ‘차이’를 알고 이름을 짓던 사람이, 값을 매기고 등급을 정하는 존재로 변신을 한 겁니다. 이게 선악과 이야기입니다. 이게 에덴동산 타락이야기입니다.

앞에서 제가 이 이야기가 다윗왕국이 번영의 일로에 있을 때 지어진 신학의 사회 비평적인 문서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당연히 남 왕국의 어느 사가가 기록을 한 거죠. 달리 말하면 정신이 바른 어느 신앙인이 세상 돌아가는 꼴을 신앙적으로 본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농부 아담에서 상인 아담으로 바뀐 이야기는 당시 기록자의 눈으로 볼 때 누가 될까요? 다윗 왕입니다. 자연의 이치를 거스르고 인간에게 등급을 매길 수 있는 존재, 그래서 누구는 버리고 누구는 거둘 수 있는 권한의 사람은 다윗 왕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2-3장에 나오는 타락한 아담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다윗 왕]을 말하는 거죠. 다윗이 처음 아담, 농부가 되어서 소박하게 사는 게 아니라 사과를 따 먹고 하나님처럼 되어서 사람을 차별하고 불평등한 사회를 만들고, 소통을 억제하며, 권력에 의해 곡해된 세상을 만들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런 차별, 배제, 등급화 된 사회의 주인공으로 가인과 아벨이 등장합니다. 이들은 그저 이미 구축된 등급 사회의 노예로 등장하는 셈입니다(창4:1-16). 등급화 된 세상에서는 누군가 누구를 밟고 올라서야 새로운 것을 이뤄낼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지는 게 문명입니다. 4:17-26에 보면 이들은 철기와 동기를 사용하고 도시문명을 구축합니다. 쓸모없는 사람은 버리고 잘난 사람을 동원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문명은 귀족들의 문명입니다. 부자들의 문명 말입니다. 오늘 이 시대의 문명도 사실은 가난한 자의 문명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도시문명, 귀족 문명, 잘난 사람들이 일구는 문명은 폭력을 동반합니다. 창4:23-24절에 라멕의 노래가 나옵니다. 폭력이 얼마나 극치에 달했나 하는 걸 보여주는 장면인 것이죠.

그런데요, 이 소통 불능과 폭력, 권력의 도시문명 이야기를 쓰는 남 왕국의 신앙인은 이토록 절망스러운 현실을 그대로 두지 않습니다. 창4:25-26을 기록하면서 전환을 꾀합니다. 느닷없이 셋과 그의 후손이 등장하는 겁니다. 타락한 아담과 가인은 제쳐두고 새로운 사람 셋을 등장시키는 거죠. 이것이 신앙인이 보는, 신앙이 추구하는 희망의 전조입니다. 찬란한 귀족의 문명, 그리고 그 문명이 지어내는 잔혹성이 이 세계를 내리누르며 격동할 때, 전혀 엉뚱한 사람에게서, 엉뚱한 곳에서 희망의 서광이 고개를 내 보이고 있는 거예요. 모름지기 신앙인이란, 신앙지도자란 이래야 하는 겁니다. 세상을 읽고, 세상의 희망을 열어 보이고 그 희망의 주인공이 되어야 하는 거 말입니다.

셋은 가인의 폭력에 희생당한 아벨의 부활체입니다. 폭력으로 난자당해 땅에 아무렇게나 나뒹굴고 있는 그의 시체에서 울려나오는 아우성소리(4:10)의 결정체라는 말이죠. 6:1-4절을 보세요. 셋이 나타난 다음에 드디어 천상적 존재들이 사람의 딸들과 결혼을 합니다. 그 결혼을 통해 거인들이 나온다는 거예요. 이게 무슨 무협지 같은 이야기입니까? 이건 역설이에요. 앞에서 보는 다윗의 그림은 사람의 크기를 지위, 권력, 사회적인 의사독점 능력에서 비롯되죠. 그러나 영계의 존재들과 결합한 사람의 딸들이 낳은 사람들은 어때요? 이들은 더 큰 권력과 지위, 독점적 소통능력을 과시하게 되나요? 아닙니다. 영웅의 씨와 인간의 씨가 섞인 존재들임에도 그냥 보통 사람이라는 거예요(3). 등급화로 병들어가는 폭력의 세상을 이렇게 바꾸는 거예요. 평등하게 말입니다.  

이 이야기는 9장으로 이어지면서 [노아의 홍수]사건으로 연결이 되죠. 이렇게 등급화, 권력화, 차등화, 부자의 독점적 문명화, 권력의 폭력사회라는 그물망에 갇힌 인류의 운명이 홍수를 만난다는 겁니다. 이렇게 권력과 문명의 독점으로 인한 폭력사회에 냉소와 비판을 아끼지 않았던 남왕국의 사가는 긴 이야기 끝에 바벨탑 이야기를 넣습니다(11:1-9).

“온 세상이 한 가지 말을 쓰고”있던 시절입니다. 이 사태도 생각을 많이 해야 하지만, 이런 도시를 만드는 건 누가 하는 겁니까? 도시 건설의 주역은 권력이 하는 겁니다. 그들의 건축술은 농촌의 그런 건축술이 아니죠. 돌로 쌓고 흙으로 채우는 그런 게 아닌 겁니다. 돌을 가공해야 하고, 역청을 발라야 합니다. 이런 건축물은 외양은 외양대로 위엄이 있어야 하고, 의미면에 있어서도 위대함이 나타나야 합니다. 성서는 이런 도시의 이름을 [바벨]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건 안보의 상징이고, 사상, 권력, 신앙, 신념, 정치체제의 총화의 표상입니다.

그런데 이런 건축물이 구현하는 게 모든 백성, 모든 사람들이 고루 원하는 일인가요? 아닙니다. 소수를 위하는 거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기에 동원된 소비재로 전락하게 됩니다. 물론 어떤 이들은 자기가 이런 건축에, 국가적 과업에 동원되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러는 동안에 사고로 다치고, 불구자가 되고, 심지어는 죽기까지 하면서도 소수의 기쁨이 자기의 기쁨인양 했을 수도 있습니다. 저는 아직 63빌딩을 가보지 못했습니다. 롯데가 짓는 100 몇 층짜리도 아마 가 보지 못하고 죽을 겁니다. 그런 겁니다. 성서에 등장하는 가공한 돌, 역청, 도시, 바벨, 등의 용어는 이런 일방적 소통의 권력이 개입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벨탑은 말이 막힌 세상에서 권력을 통한 소통 방식, 의견이 개진되는 암울한 사회를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나요? 이런 소통방식의 일방적이고도 소수를 위한 사회 문명의 상징이 어떻게 되었나요? 해체되어 버린 겁니다. 노아의 홍수처럼 해체된 겁니다. 그러자 이 탑을 위해 동원된 사람들이 각기 제 언어로 말하게 되었습니다. 탑을 쌓는 동안엔 자기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저 누구나 앵무새처럼 같은 말을 지껄여야 했습니다. 오늘날 교회를 가도, 세상을 나가도 그 소리가 그 소리입니다. 다른 말, 자기 말을 내 뱉으며 사는 사람이 없습니다. 모두 바벨탑을 쌓는 일에 동원된 노예로 전락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남 왕국의 신앙인은 그런 세상을 향해 이런 이야기를 창조의 메타포로 던지고 있습니다.
하나의 말, 하나의 생각, 하나의 사고를 조장하는 권력의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바벨탑을 쌓던 그때처럼 말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 에덴동산의 사과 이야기,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 노아 홍수의 이야기 그리고 바벨탑의 이야기는 하나의 축으로 해서 소수를 위한 권력과 소통의 독점으로부터 탈출하라는 신호입니다. 우리는 지금 자본을 통한 권력의 그물망에 쌓여 있습니다. 그래서 서로가 사로를 헐 뜯으며 가해자가 되고 피해자가 되는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이걸 사도마조히즘(Sado-masohism)이라고 합니다. 바로 창세기 2장-9장의 연속적인 이야기들이 이런 시대 속에서 읽히는 신앙인의 통찰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탈출해야 하는 당위성과 그 결과에 대해서 말해주고 있습니다. 바벨탑 이야기는 결국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 이 세상과 세상 사람들이 겪어야 할 마지막 사태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또 세상과 진리에 눈뜬 우리가 맞닥뜨려 무너뜨려야 의무이기도 합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이스라엘이 남과 북으로 갈라지고, 다윗이 새로운 왕국을 세운 후에 집중하여 권력을 독점해 가던 시대보다 수천 배나 더 철저하게, 정교하게 불평등의 그물망을 쳐 놓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각기 다른 생각, 다른 말을 하기 보다는 하나의 말을 같이 지껄이고 있습니다. 그걸 소통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이건 소통의 단절입니다. 말이 통하지 않는 세상인 것입니다. 곧 [바벨]입니다.

이런 위기의 시대에, 바벨을 쌓고 있는, 바벨에 서 있는 그리스도인은 어떤 존재들이어야 합니까? 권력에 의한 일체의 총화에 대해 저항하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동시에 모든 가치의 해체를 지향하는 지구화 시대의 문법에, 타인에 대한 무 배려, 무관심을 바탕으로 하는 신자유주의 시대의 해체성에 몸을 내 맡기지 말아야 합니다. 더 나아가 그것에 눈뜨고 저항하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이게 남 왕국에 살았던 눈뜬 신앙인이 던지는 [바벨 탑]이야기가 주는 이 시대의 가르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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