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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의 신앙은 어디에 있는가?

  • 허태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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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신앙은 어디에 있는가?
요4:16-26

신약성서는 두 부류의 신앙 집단들에 의해 구성된 하나의 책입니다. 신약성서가 27권이라는 건 여러분이 아시는 거고, 그 중 13권은 예루살렘을 거점으로 삼았던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와 베드로가 중심이 된 제자그룹이 사용하던 문서입니다. 그걸 복음서라고 하고요, 나머지 13권은 요즘으로 치면 서울(예루살렘)로 진입할 수 없었던 바울에 의해 세워진 지중해의 이방인 교회가 회람하던 편지들입니다. 그걸 서신서라고 하죠. 이렇게 복음서와 서신서를 합치면 26권이 되고, 나머지 한 권은 주류와 비주류 겪인 두 집단이 함께 한권을 편집하여 넣음으로 27권이 된 것입니다.

그 중에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을 4개의 복음서라고 하는데, 편리상 그렇게 묶어 놓았지만 사실 요한복음은 앞의 세 복음서들과는 성격과 예수에 대한 이해가 현격하게 다릅니다. 대부분의 예수님의 행적들이 4복음서에 들어가 있는데, 오늘 우리가 읽은 수가성 여인의 이야기는 다른 복음서에는 없고 요한복음에만 있습니다. 왜 그래야 하는지는 시간이 되어 요한복음을 통째로 볼 때 말씀을 드릴 겁니다. 이 수가성 여인의 이야기는 다르게 사마리아여자의 이야기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다른 복음서에는 없고 요한복음서에만 있는 이 이야기가 그래도 많이 알려진 까닭은 줄거리가 흥미진진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흥미진진함이란 이렇습니다.
우선 예수님이 가지 말아야 할 지역을 여행했다는 겁니다. 우리야 이게 무슨 스캔들인가 싶겠지만, 이스라엘 사람들로서는 엄청난 스캔들입니다. 모름지기 유대인다운 유대인이 되려면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사마리아 지역을 통과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건 뭐 어릴 때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배우고 들어온 상식중의 상식입니다. 왜 이런 국가적인 금기가 만들어졌는지는 수요일 강좌에서나 틈나는 대로 수없이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래도 까먹은 분들이 계시니 한 번 더 말씀을 드리면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왜 유대인과 사마리아 사람들은 원수지간으로 500년 이상을 살아야 했을까요?  

주전 6세기, BC 586년에 지중해 전역을 지배했던 국가는 페르시아는 예루살렘을 초토화 한 다음에 엘리트 국민들 수 천 명을 포로로 잡아갑니다. 그리고 50년이 지났을 때 다시 그들을 팔레스타인으로 되돌려 보냅니다. 그들이 돌아오자 남아 있던 국민들, 사마리아를 중심으로 팔레스타인을 지키고 있던 토착민들과 갈등관계가 됩니다. 이때 페르시아에서 느헤미아와 에즈라가 관리로 예루살렘에 파견이 되는데, 이들도 유배지에서 돌아온 엘리트들과 사마리아에 남아있던 토착민들과의 갈등이 이스라엘 복구에 걸림돌이 된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래서 둘 중에 하나를 붙잡고 정치를 해야겠다고 생각을 합니다. 여러분 같으면 누구 편을 들어서 새로운 이스라엘 건설을 도모하시겠습니까? 포로에서 돌아온 구 유대 왕국의 권세자 들일까요, 아니면 무지랭이처럼 바벨론의 압제 밑에서 살아남은 토착세력 사마리아인들이겠습니까? 이걸 ‘분리주의 정책‘혹은 ’배타주의 정책‘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해서 유대와 사마리아의 증오가 시작되고 깊어져서 예수의 시대에까지 이른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강원도와 전라도처럼 따로 떨어져 있으면 증오의 관계라고해도 문제될 건 없는데, 이 사마리아가 경상도와 경기도를 있는 중간인 충청도와 같은 지리적인 정황에 놓여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돌아가기보다는 질러가는 유용성이 있는데다가, 다른 지역과 달리 사마리아는 평야지대가 많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미워해야 하는데 그럴 수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오랜 관습 때문에 더러운데 그렇다고 뱉을 수 없는 그런 지역이 유대에게 사마리아였습니다. 그래서 광적인 유대주의에 의해 탄생한 하스몬 왕가(주전 134-105)는 주전 109년에 사마리아를 유대와 통합을 해 버립니다. 경제와 지리적인 이점을 필요로 통합을 했지만 이념상 더러운 건 더러운 거였습니다. 그러니까 유대(예루살렘)과 사마리아는 서로를 필요로 하면서도 서로 작대해야 하는 사이였습니다. 사회의 이중구조였던 거죠.

이럴 때 예수님이 사마리아 지역을 여행했다는 사실은 유대사회에서 예수의 위상을 깎아내리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 겁니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요한복음서를 제외한 다른 복음서는 이 사건을 다루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으로서는 자존심이 상하는 짓을 예수가 했는데, 그걸 대중에게 알리면 메시지의 설득력이 감소되지 않겠어요? 그래서 다른 복음서는 예수의 사마리아 여행을 소개하지 않은 거예요. 그러나 요한복음은 침묵하지 않습니다. 가리지 않습니다. 그것은 요한공동체가 유대사회를 향해 증언하는 공동체가 아니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죠. 뿐만 아니라 배타적인 이념으로 사마리아를 경멸하는 유대주의를 공공연하게 비판하고 있음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요8:44절을 보아 주세요. 예수님은 이런 유대인들을 ‘악마의 자식들’이라고 합니다. 8장 도처에서 ‘저들의 법’과 ‘새 계명’을 대조시킵니다. 이게 무슨 의민가 하면, 요한공동체의 반유대주의를 말하는 겁니다. 복음서에는 71번 ‘유대인’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모두 강한 증오심에서 등장하는 단어입니다. 다른 복음서는 말 꺼내지 않으려는 이 사건을 요한복음은 과감하게 드러냅니다. 그것도 그냥 사마리아를 여행한 게 아니라 사마리아에서 어떤 여자하고 그렇고 그런 시간을 가졌다고 전함으로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사마리인에 대한 경멸을 정면 도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500년이나 넘게 작동되어 오던 사회적인 편견을 가로지를 뿐만 아니라, 그런 편견으로 체제를 작동하는 권력들에 대해서 위협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해체와 경고의 메시지를 구동하고 있는 매개가 ‘물’입니다. 여행자는 그저 목이 마르고, 그에게 물을 주는 여인은 욕망의 목이 마른 겁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물’은 깊은 편견과 갈등의 장벽을 뛰어 넘어 양자를 엮는 고리와 같은 것입니다.

500년 동안의 증오와 배제, 열등과 분노의 개인 심리적이고 의식적이며 사회적인 사슬을 붕괴시키는 매개물이 바로 ‘물’이라는 겁니다. 사마리아 여자와 예수의 만남에 대한 이야기는 이제 시작입니다. 말씀의 끝에서 저는 여러분에게 묻게 됩니다. ‘지금 우리의 신앙은 어디에 있는가?’라고 말입니다. 똑바로 믿고 사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거지반 잘못 믿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제목이기도 합니다.

다음 시간에 이어서 하겠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요4:16-26

우리는 이제 ‘남편이 다섯씩이나 되는 여자’에 몰켰던 생각을 조금 걷어냈다고 생각합니다. 요한복음에만 있는 예수님의 이 사건은, 여자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수 백 년이나 고정되었던 편견을 예수님이 깨려고 했다는 겁니다. 뿐만 아니라 사마리아 사람, 그것도 여자를 만나 대화를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게 요한복음이 말하려고 하는 주제였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겹겹으로 둘러싼 사회심리적이고 윤리, 종교적인 편견을 가로질렀다는 겁니다. 바로 이런 편견을 해체하는 과정에서 양자, 유대와 사마리아, 유대인과 사마리아 사람, 남자와 여자를 이어주는 매개가 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사건에 있어서 물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물’은 그저 깊은 편견과 갈등, 오래된 무의식을 장벽을 뛰어넘어 양자를 엮는 고리와도 같은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여섯 명이나 남편을 갈아치운 사람이라고 묘사됩니다. 우리는 이 묘사를 보면서 그것이 가능하기나 한 건지, 가능하다면 왜 그렇게까지 해야 했는지를 묻지 않고 댓바람에 그녀를 비난하려듭니다. 심지어는 이런 해석을 확장해서 ‘오늘을 사는 우리도 여기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윽박지름을 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이 정보를 통해 그녀를 욕하고 정죄하려고 하는데 목적이 있지 않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이렇게 ‘여섯씩이나 남자를 갈아 치우는 여자’로 묘사를 하는 것은 그 우물가의 여자를 지칭하는 게 아니라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갈망하나 결코 충족되지 않는 욕망을 가진 사람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여인의 욕구로 대변되는 이 갈망은 비단 여인만의 욕구가 아니라 사마리아에 사는 모든 사람들의 갈망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여인의 욕구는 남과 다르지 않습니다. 특별히 그 여자의 행실이나 삶의 방식이 나쁘지 않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사마리아 사람들만 이렇게 욕망에 목이 마르냐? 아닙니다. 유대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이 사마리아로 가서 만난 여자와의 대화에서 단지 눈앞에 보이는 여자, 조금 더 나아가서 사마리아 사람들만 볼 게 아니라 예수의 시야 안에 포섭되어 있는 모든 구원의 대상인 유대인과, 사마리아 사람들 모두가 보아야 합니다. 아니 적어도 이게 요한복음 공동체의 시각입니다. 이 여자도, 그 이웃인 사마리아 사람들도, 그리고 이들 사마리아 사람들과 대립하고 있는 유대인들도, 나아가 인간 존재 모두가 행복을 염원해서 뭔가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두에게 그것은 산을 오르는 나그네처럼 목마릅니다. 채워지지 않습니다. 갈망으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도, 불교도, 이슬람도, 그리고 그 밖의 모든 집단들이 집단의 이념적인 메커니즘으로 행복을 준다고 광고를 해대도 누구하나 그 행복에 취하여 생이 남아도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예를 들면, 교회를 다녀서 행복하다고 합시다. 그럼 그 행복한 사람은 더 이상의 갈망 즉 목마름이 없는 걸까요? 오히려 더 큰 목마름으로 발버둥을 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은 이런 겁니다. 잘났다는 유대인이나, 인간 같지도 않다고 여기는 사마리아사람이나 뭘 먹을지, 뭘 입을지에 껄떡 거리는 것은 똑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좀 더 시야를 좁혀서 이들 두 집단을 예시하는 인간군, 유대인이나 사마리아 사람들이 뭘 바탕으로 욕망의 갈증을 증대시키며 사는지 보십시다. 그걸 알기 위해 예수님과 여자가 만난 그 지역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마리아 지방의 수가라고 하는 세겜 인근의 마을이었다고 합니다. 이게 우리가 찾고자하는 예수의 가르침이 놓인 지리적인 배경입니다. 세겜은 어떤 곳입니까? 이 세겜은 이스라엘이 남과북으로 갈라져서 서로 다른 왕국을 유지보존하려고 할 때 남왕국의 예루살렘 성전에 대적하는 북쪽의 성전이 세워진 곳입니다. 세겜은  그리심산이 있는 곳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어디로 가서 뭘 합니까? 그런데 당시의 사람들은 인간 개개인의 희망이나 욕구를 채워줄 마땅한 곳이 없었습니다. 오로지 예배당에 나가서 신에게 비는 길 외에는 없었던 시절입니다. 성소에 나가서 성소의 규칙이 정한대로 고분고분 순종함으로 신이 감복하여 자신이 바라는 그 모든 것이 충족된다는 것 외에는 다른 믿음도 기대도 없던 시절입니다. 그러니 유대인이나 사마리아 사람들이나 그들의 성소 즉 예루살렘성전이나 사마리아 성전에 나가서 빌고 또 비는 길 외에는 없었던 겁니다. 그걸 성소측에서는 예배라고 했던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생활 터전 곳곳에는 인간의 목마름을 충족시켜줄 수 있을 것 같은 성소를 세웠고, 성소는 이런 인간의 근원적인 욕망의 토대위에 세워진 것입니다. 적어도 예수가 판단했던 당시대의 남과북에 세워진 성소는 그랬습니다.

이제 세월이 흐릅니다. 그렇게 사람들의 바람을 토대로 세워진 성소를 독점하는 사람이 생깁니다. 예배를 독점하는 제사장이 생겨나고, 제사장에게 먹을 걸 대주는 권력자가 나타나고, 누구는 신상과 성소를 지을 터를 대여해주고, 그곳에 기물을 대주고, 그곳에서 드릴 번제의 제물들을 대주고, 번제물을 독점으로 길러 제공하는 업자가 생기고, 또 누구는 그런 것들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존재들이 생겨납니다. 이렇게 성소는 단순히 대중들이 소박하게 드나들며 자신의 바람을 신에게 청탁하는 구별된 장소의 의미를 벗어나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을 주관하는 제사장은 점점 그 하부 세력과 결탁을 하게 되겠죠. 그러면 야훼의 축복도 점점 이런 권력의 메카니즘과 결탁한 이들에게 독점되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야훼 즉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어주고 응답해서 축복을 내리는 게 아니라 그 중간업자들이 그들의 손익과 결부되어 가능과 불가능의 영역으로 전락하데 된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야훼, 하나님의 축복은 지상의 지존인 통치자에게 전가 귀속이 되는 겁니다. 마치 오늘날 교회의 목사가 하나님과 대중들 사이에 가로막고 앉아 저주와 축복을 중계하듯이 말이죠. 이렇게 되면 다시 어느 성소가 축복에 유용한지 어느 성소가 별 볼 일 없는지를 구별하게 되고, 다른 지존이나 다른 주장이 나올 법한 장소는 폐지되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성소들 간에 정통성 문제, 오늘날로 치면 ‘어떤 교회가 더 은혜롭냐’ 소위, ‘어떤 교회가 더 복을 잘 받냐’와 같은 식으로 갈라지고, 혹 새롭게 은혜(?)를 제공한다는 집단이 생기면 가차 없이 잘라내려는 논쟁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계셨던 이때 일들이 남과 북에서 생겨 오랫동안 이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북쪽 이스라엘은 북쪽에서 예배를 해야 효험이 있다고 하고, 남쪽 예루살렘은 무슨 소리냐 예루살렘 성전이 진짜지, 그랬다는 것입니다.

이거 뭡니까? 진리를 독점하려는 것이죠. 그리고 그 진리를 어느 인물이 있는 장소에 고정하는 짓이죠. 서울의 아무개 목사가 목회하는 교회에 성령이 계시지, 시골 허 아무개 목사가 목회하는 거기에 무슨 성령의 임재가, 그것도 왕성하고 즉각적으로 임하겠느냐 그렇게 주장하고, 그걸 대중들이 믿었다는 말입니다. 이곳이 아니면 신의 응답도 축복도 없다고, 이 성전 안에만 진리가, 행복을 내리는 축복이 주어질 수 있다고 주장했던 겁니다.

이제 무정형의 신앙은 ‘장소와 특정된 인물’이라는 정형으로 굳어진 것입니다. 자, 지난 시간과 오늘 드린 요한복음의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 사건에 설치된 내막을 여러분이 듣고 있습니다. 이제 조금 그 흐름, 예수-사마리아-우물가-여인과의 대화-남편이야기-예배할 때가 따로 있다-메시아를 만났다는 것으로 결론지어지는 진행도를 이해하시겠습니까?

그래서 오늘은 지난주와 같은 제목인 듯하지만 [지금]이라는 현재형을 넣어 여러분의 신앙자리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지난주 제목은 [우리의 신앙은 어디에 있는가?]였죠? 오늘은 [우리의 신앙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라고 묻고 있습니다. 이건 제가 여러분에게 묻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이 요한복음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자를 앞세워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유대인들에게 물었던 물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러면 우리더러 어떻게, 어디서, 어떤 방식으로 다시 믿어야 한단 말입니까?” 라는 의문을 갖게 되는 현재 시점을 일으키듯이, 나도 여러분이 ‘지금 우리는 뭘 어떻게 믿어야 합니까?’을 물어주길 바라는 것이고, 그 흔들림 속에 예수님이 여인에게 내린 답을 다시 리바이블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면 혹 여러분 중에서도 이 여자처럼 세상으로 뛰어가면서 “내가 메시아를 이제 알았다, 만났다”할 이가 있을까 싶어서입니다.

목사로서의 내 바람은 오직 그 하나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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