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이런 교회가 있기나 한 걸까요?

  • 허태수 목사
  • 146
  • 0

첨부 1


이런 교회가 있기나 한 걸까요?      
막13:1-8

제자 한 사람이 예루살렘 성을 보고 그 웅장함에 경탄해 마지않았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마뜩치 않은 표정으로 그를 보며 말씀 하셨죠. “저 돌들이 어느 하나도 제자리에 그대로 있지 못하고 다 무너지고 말 것이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이죠?

이 말씀을 사람들은 흔히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성막이나 성소들의 폐허위에, 성전이 세워진 것처럼, 당시의 성전도 얼마 후엔 헐려 나가고 새로운 건물이 지어질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이른바 재개발입니다. ‘재개발’이라는 게 뭡니까? 남루해진 것을 허물어 버리고 그보다 더 웅장하고 화려하며 고급한 것을 짓는 행위 아닙니까? 그래서 이 도시 문명 곳곳에서도 ‘재개발’이라는 게 성행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예수님의 이 말을 당시의 제자들이나 사람들은 ‘성전 재개발’ 정도로 이해하기도 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제자의 말을 받아 예루살렘 성전을 바라보던 그 당시 ‘예루살렘 성전’은 건물의 외형으로는 근사했지만 성전을 바라보는 백성들의 마음은 이미 무너져 있었습니다. 여러 해 동안 진행된 이스라엘 독립운동이 좌절의 깊은 구렁을 지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치 우리나라의 1919년 정도였을 겁니다. 그러니까 제자가 예수를 향해 던진 이 질문, “이 돌들이 어떠하며 이 건물들이 어떻습니까?”라고 묻는 물음 속에는 “우리에게도 독립의 희망이 있을까요? 언제 다시 다윗왕이 구축했던 통일 왕국의 화려한 옛 모습을 회복하게 될까요? 저 성전의 위용이 언제 다시 회복 될까요?”하는 물음이었던 겁니다.

요즘 말로 하면 ‘재개발이 언제 되겠느냐’는 거죠. ‘언제 Rebuilding’하게 되겠느냐고 묻는 겁니다. 언제 정의로운 성전의 위용을 찾겠느냐는 겁니다. 챔피언을 때려눕히듯 언제 새로운 성전으로 대체되게 되느냐는 겁니다. 실제로 역사는 로마의 대성당이, 취리히의 대성당이, 그리고 뷔텐베르그 대성당이 그런 권위와 명예의 재개발이라고 믿기도 했습니다. 중세는 말입니다.

그러면 정말 예수님은 예루살렘과 그 성전을 재개발 하시려는 것일까요? 그러니까 예수라는 존재가 단지 무너진 다윗왕국을 더 엄청난 상징을 지닌 건물과 도시로 재개발 하는 사업자라는 말이냐 말이죠. 그런 뜻으로 ‘돌들 위에 돌이 하나도 남지 않는다’고 말씀하시냐는 거죠. 천만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재개발 사업자의 의지로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실제로 그가 무너뜨릴 것이라던 성전의, 그 권력자들의 가위 자락에 도리어 예수의 몸뚱이가 난도질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반면 가장 최초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의 이 말을 전혀 다르게 이해했습니다. 여러분, 강하고 센 것을 무너뜨리려면 어대야 합니까? 나는 더 강하고 더 세야 합니다. 이게 세상의 이치입니다. 당시 예루살렘 성전은 권력과 부가 집적된 곳이고, 최신예 병기를 구축하고 세상을 심판하는 검열관들의 성이었습니다. 그러면 그런 예루살렘 성전을 무너뜨리려면 그 보다 더 센 힘과 부를 가져야 합니다. 그런데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사람들은 이런 일반적인 세상의 힘의 원칙을 거부했습니다. 힘센 자를 더 큰 힘으로 무너뜨린 게 아니라, 그런 예루살렘 권력의 완력에 의해 제압당한 이의 무력한 시체였다고 해석해 낸 것입니다. 이게 당시 이스라엘 민중이 지닌 세상을 이기는 역설의 힘이었습니다.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역설의 에너지였습니다. 그래서 그걸 뭐라고 규정 했는가 하면, 비천한 것이 고결한 것을 이겼다고 했습니다.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제압했다는 겁니다. 부귀한 걸 빈곤한 게 처형했다는 겁니다.

요컨대 예수를 이해하는 이 말 혹은 예수가 던지는 이 말씀은 권력과 부를 지배하고 세상을 심판하는 그들을 정복하는 것은 더 큰 권력과 부가 아니라 그들 또는 그 권력이나 부가 말살 시키려고 했던 쓰레기 같은 민중들의 역설적 희망, 상식을 거꾸로 뒤집어 해석하는 그 역설의 에너지로 말미암아 정복된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교회는 재개발 사업자 노릇을 톡톡히 했습니다. 낡고 힘 떨어진 걸 교회는 그보다 더 큰 힘을 가진 것으로, 더 위용 있는 것으로, 더 힘센 것으로 바꿔 준다고 선전했습니다. 그게 뭐든지 말입니다. 밥솥을 바꿔 주기도 하고, 아파트 평수를 바꿔 주기도 하고, 자녀들의 신분을 재개발 하여 상승 시켜준다고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이해는 지극히 반 예수적입니다. 이런 건 후평동에서 벌어지고 있는 후평지구 재개발 사업자의 논리와 다르지 않습니다. 오늘 재개발이 필요한 예루살렘을 보며 질문을 던지는 제자의 말에 답했던 예수의 말씀을 분명하게 이해한다면 이렇게 해서는 안 되는 거였습니다. 제자의 물음에 답했던 예수의 말씀이 초기 기독교인들이 지녔던 예수의 역설적 이해에 도달했다는 걸 안다면 그렇게 가르치고 호도해선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교회는 사람들의 되살아난 꿈을 증거 하는 마당입니다. 교회는 꿈의 소생으로 환생한 예수의 이야기를 보존하는 창고입니다. 교회는 예수의 꿈 창조 이야기, 꿈의 생산 이야기, 꿈의 재건 이야기를 선포하고 경험하는 광장입니다. 그러면 그 꿈이라는 게 뭡니까? 그것은 누구나가 하는 재개발 사업자의 꿈이 아닙니다. 권력과 부를 힘의 원천으로 하여 사람과 세상을 통제하고 배제하며 지배하려는 예루살렘성전의 꿈이 아닙니다. 그런 꿈은 뭉개 버리고, 그 역설로 이루어지는 꿈, 살아 있는 권력자가 아니라 무력하게 그 힘에 굴복당하여 죽은 시체가 만들어 내는 꿈, 비천한 것이 고결한 것을 이기는 꿈,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제압하는 꿈, 부귀한 걸 빈곤한 게 처형하는 꿈을 보관, 생산, 선포하는 게 교회이고 교회 사람들이고, 설교이며, 목사이고, 장로입니다.

한 마디로 이걸 직선적으로 보관하는 의식이 ‘예수의 탄생과 그의 십자가 죽음’입니다. 탄생이 주는 의미소는 뭡니까? 세상을 구원할 예수가 화려하게 등장하지 않았다는 거죠. 힘 있게 세상에 나타나지 않았다는 거 아닙니까? 이건 재개발의 논리가 아닙니다. 새로운 창조죠. 그러면 그의 죽음은 뭡니까, 맥없이 죽었다는 거 아닙니까? 조롱받는 시체였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조롱받는 시체가 세상을 뒤집어엎었다는 거 아니겠어요? 이런 세상의 재개발 논리와는 반대가 되는 가치관을 제시한 분을 보관, 증식, 생산, 확대, 실천하는 곳이 교회고 교회 사람들 아닙니까?

그러니까 세상 속에서 세상을 이기려면 세상의 재개발 사업자처럼 굴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그동안 그렇게 교회가 처신했어요. 교인들이 그걸 예수 믿는다고 하며 살았어요. 아닙니다. 교회는 ‘힘에 의한 힘의 정의’라는 재개발 지구에서 유포되는 거짓 논리, 세상의 논리, 그 논리의 실체를 해체하는 곳입니다. 교인들은 그 해체의 주인공들입니다. 그러니까 ‘예수의 오심을 기리는 날’은 바로 이런 새로운 힘에 관한 이야기를 새삼 기억하고 세상을 역류하는 의식을 이식하는 ‘제의’의 날이어야 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교회나 교인들이 이 세상에 있기나 한 걸까요?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삭제

"이런 교회가 있기나 한 걸까요?"

이 게시물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